이 연재는 반 세기를 역사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필자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뜻을 지닌 민초들이 지난 반 세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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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 운동을 하는 동안 나는 여러 건의 장례를 치렀다. 고아원의 원생, 무연고 노숙자, 철거민, 노동자 등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허술하게 죽은 사람들이었다. 이 사회의 경쟁에서 뒤떨어져 처진 사람들, 길을 걷다가 낙오가 되어 죽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뒤처리해줄 사람도 변변히 없어서 대충 끌어다 묻을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었다. 죽었으나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흔적도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사람 아닌가. 죽으면 형식이 갖출 필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태어나는 것에는 형식이 필요 없지만 죽는 일에는 반드시 형식이 필요한 법이다.
장례식을 해보면 수백 개의 화환이 도열해 있는 명사의 장례에서부터 달랑 촛불 한 자루 켜있는 무연고행려자의 장례까지 당사자의 주변 환경 즉 신분, 재산, 가족 관계 등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가리려고 해야 더이상 가릴 수가 없는 것들이 나타난다.
부천주거연합의 살림꾼 고미애
내가 일생동안 치른 장례식 중에 가장 비통한 장례식 이야기이다.
숙대 약대를 졸업하고 부천의 공단지역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40kg 가냘픈 몸매의 고미애라는 처녀가 있었다. 미애는 내가 책임을 진 부천 주거연합의 회계와 서기를 함께 맡은 살림꾼이었다. 미애는 약국을 운영하면서 한 달에 20만 원만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는 모두 빈민과 노동자를 위해서 썼다.
경제적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서 한 번도 어려운 생활을 해보지 않았던 미애는 나를 도와 수도 없이 철거민들의 텐트를 찾았다. 미애는 한창 멋을 부릴 나이에 늘 유행과 상관이 없는 옷을 입고 다니면서 그 작은 몸에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항상 빈틈없이 정확하게 자기가 맡은 일을 해냈다. 나에게 그녀는 성깔 있는 성녀였다.
그런 미애가 1992년 2월 설 연휴 기간에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연휴에 부산 집에 가지 않고 혼자 약국을 열고 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범인은 평소에 박카스를 사러 자주 왔던 필리핀 노동자였다.
연휴가 되어도 갈 곳이 없던 필리핀인이 그날도 약국에 왔다가 가지 않고 치근덕거리는 것을 미애가 평소에는 친절하게 대했지만 그 날은 냉정하게 대하는 것에 격분해서 인적이 뜸한 연휴를 틈타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비보를 듣고 성가병원으로 달려가 시신을 확인한 순간 정말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구약성경 욥기에 나오는 것처럼 기가 막힌 사람들에게는 원망할 하나님이 있다는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당장 나에게 닥친 문제는 비보를 듣고 부산에서 달려온 미애의 부모님들이나 친척들이 나를 보면 가만두지 않을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그분들에게는 내가 순진한 딸을 꼬드겨서 비극을 초래하게 하도록 만든 원인 제공자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유족들에게 당하는 수모는 두려울 것이 없었지만 장례를 어지럽히기 싫어서 나는 고인의 영정 앞에서 조문도 할 수 없고 영안실 밖에 쳐 있는 텐트에서 밤샘을 해야만 했다.
숙명여대 민주동문회, 건강사회 실현을 위한 약사회, 부천민주시민협회에서는 '고 고미애 동지 민주약사장'으로 치르기로 했지만 흥분한 유족들이 우리들의 접근을 하락하지 않아 우리는 길에서 화장터로 떠나는 미애의 시신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부천 성가병원 건물 뒤쪽에 있는 영안실에서 병원 앞 도로까지 전국에서 모인 300여 명의 동지들이 도열했다.
한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모두가 말을 잃어버리고 눈물로 미애를 전송하고 있을 때 대열 속에서 심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힘찬 노랫소리가 찬 공기를 뚫고 울려 퍼졌다. 미애의 절친한 친구 민중 가수 최도은이 거구에서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로 눈물 대신 온몸으로, 아니, 영혼으로 부르는 노래로 사랑하는 친구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가수 최도은
아마도 나는 설날의 추위 속에서 성가병원 영안실 마당에 낮게 울려 퍼졌던, 내 생애 가장 감동적인 그 노래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눈물이 어린다.
내 형제
그리운 내 얼굴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의 가사 일부
눈물이 얼어붙어 뺨이 따가웠지만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슬픔 대신 오히려 대상을 모를 전의가 불타올랐다. 허망한 마음보다는 미애가 그토록 사랑하고 목숨을 바쳤던 이 땅의 민중들을 위하여 미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야 하겠다는 오기(?)가 오히려 심장을 뜨겁게 했었다.
우리는 따로 만든 영정만 들고 미애가 혼과 몸을 바쳐 일하던 아람 약국으로 와서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노제를 지냈다
미애의 49재 때는 공교롭게도 부활절에 미애와 6년간 교제 끝에 결혼을 약속했던 정 군이 제대를 하고 참석을 해서 슬픔을 삼키며 조사를 했다. 그들은 6월 항쟁의 한가운데서 만나서 각기 치열한 삶을 살다가 그해 정 군이 제대를 하면 결혼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미애야! 요즘 심령학 서적에 탐닉하고 있어. 이승에서 인연이 있으면 꼭 다시 만나게 된대.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니? 그래서 결심했어. 그리움도 참고 서러워도 참고 미치게 보고 싶어도 눈물 흘리지 않기로 했어. 참고 또 참았다가 눈부시게 다시 만나는 날 기쁨에 겨워 한꺼번에 울기로 했어."
연대 신학과 출신 정 군은 그 당시 철저한 무신론자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정 군이 처절하게 혼이 되어버린 미애를 다시 만날 수단을 찾기 위해서 심령술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뒤에서 어금니를 깨물며 눈물을 참던 내게 그의 조사는 한 줄기 광명이었다.
주사파로 몰린 청년회장
94년 9월경 어느 날 저녁 TV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대표로 되어 있는 '부천민주운동단체협의회'의 회원 단체인 '한누리 청년회'의 회원들이 주사파 조직을 결성하였다는 혐의로 구속과 수배가 되었다는 보도를 접했기 때문이다. 어리둥절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사방으로 전화를 걸어 수소문을 해보고 나서야 사건의 윤곽을 대강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 그 단체는 노조가 없는 영세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공장과 집으로 출퇴근만 반복하는 단조로운 생활에서 벗어나서 취미 생활도 함께하고 직장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다같이 힘을 모아 살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청년회였다. 물론 그들이 당시의 진보적 청년들답게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사회의 참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하여 고민하고 실천하는 활동을 중요시하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주사파라니? 어이가 없었다.
한누리 청년회는 20여 명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어려운 생활 가운데도 1,500만 원(20년 전 화폐가치로는 지금보다 훨씬 큰돈이었다)이라는 거금을 자기들의 힘으로 마련해서 보금자리를 만드는 등 함께 살아가자는 단체의 목적에 맞게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회원 단체 가운데 가장 단결이 잘 되기로도 유명했다. 회원들끼리의 뜨거운 동지애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모두가 가난한 노동자였던 형편에도 돈과 정성을 모아서 라면, 쌀, 김치 등을 가지고 파업이나 공장폐쇄 등으로 고생하는 다른 사업장을 격려방문을 하는 등 앞장서서 활동을 해 다른 단체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덕분이었다.
회원들은 개인을 회생하면서도 단체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노동자로서의 순수한 이런 모든 활동들에 노사분규를 배후 조종한 혐의가 씌워진 것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어도 보통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닌 것이었다.
수배 중인 회장 강두희는 내가 결혼 주례를 섰던, 가장 신뢰를 하고 있는 신학대학 후배였다. 며칠이 지난 후 두희로부터 전화가 와서 사실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강 군은 회장으로서 사무실을 지키며 상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직장을 나갈 수가 없었기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승용차, 택시, 오토바이 등을 타고 우유 배달차를 미행하고 사무실 앞의 공원에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있다가 회원들이 사무실을 나갈 때마다 미행을 했다는 것이다. 청년회 회원들은 불안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들을 미행할 만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이 되어 떳떳하게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7시, 3명의 회원들이 자장면을 먹고 있는데 형사들이 긴급구속 영장을 가지고 들이닥쳐 모두 연행해 갔다는 것이다.
연행된 사람 중에는 신지애라는 강원도 산골에서 어제 저녁에 올라온 것 같은 순진무구한 여자 청년이 있었다. 신 양은 내가 사무직으로 취직을 시켜준다고 해도 노동을 하며 열심히 남을 도우면서 책도 많이 보던, 조용하고 차분한 여성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에게는 긴급구속 영장에 나와 있지도 않았었다. 회원들을 무작정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 간 뒤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경찰은 신지애에게 청년회에는 있지도 않는 부회장이라는 감투를 씌우는 조작을 했고 노량진경찰서를 통하여 따로 긴급구속 영장을 발부받으며 잘못을 덮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란 어떤 곳인가? 박종철 군이 물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곳으로 악명을 떨친 곳이 아닌가? 물론 그곳으로 끌려갔다고 해서 모두 고문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남자 청년이 매를 좀 맞은 것 외에는 물리적 억압이 가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공포와 심리적 압박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해볼 수 있겠다. 경찰은 그들에게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한국민족민주전선' 명의의 유인물과 북한방송 녹음청취록을 내보이며 주체사상을 학습하지 않았느냐고 추궁을 했다. 그런가 하면 회원 내부용 소식지를 이적표현물로 간주하고 이적표현물, 제작, 소지, 배포 혐의로 조사를 하기도 했다. 회원들끼리 30여 부를 복사하여 나누어 보는 소식지가 기관지로 둔갑하여 노동자 230여 명에게 매주 1회씩 김일성 주체사상을 학습시켜 왔다는 혐의가 씌워졌으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여름 내내 '주사파가 여기도 있다, 저기도 있다' 하고 대포를 쏘아대던 당국이 실제로 아무것도 나타난 것이 없으니까 역사가 짧고 회원도 적어서 다루기 만만한 청년단체를 택해서 주사파의 올가미를 씌운 것이다. 그 후 수배 중인 강 군이 내게 전화를 했을 때 녹음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길게 이야기하면서 상황을 설명하도록 했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법정에서 변호용 증거자료로 제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희는 그 후에 나와 연락이 끊긴 채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은 뒤 얼마간 형을 살고 나왔다.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가열 차게 살던 강두희가 2012년 건설 현장에서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웃과 사회를 생각하며 살던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을 넘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깊은 울림을 남겼다.
다음은 고 강두희가 2009년 10월 16일 다음 카페 '시드니 사랑방'에 남긴 글이다.
모처럼 책상머리에 앉아 글을 써 봅니다. 내 인생을 돌아보는 일이랄까. 바쁘게 살다보니 45살이란 시간과 아내와 두 아이들이 제 옆에 있군요.
학생 때 민주화 운동한다고 시간 보내고 결국 목사가 되겠다던 꿈도 버리고 노동운동의 삶을 10여 년 살다가 생활고에 밀려 돈 버는 삶을 살아가기 또 10년.
지난 대선이 지나고 이명박이 대통령이 돼는 과정을 보면서 내가 속해 있는 조직(민주노동당). 내가 지지하는 노동조직(민주노총)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만들고자 했던 현장 조직 민주적인 노동자 조직. 이런 것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추석 후 예전의 운동조직에 있던 사람들이 한번 모이자고 연락하고 문자 보내고들 해서 모임을 갖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참 나갈 엄두가 안 납니다. 부끄러워서 말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대선 때 활동도 못하고 어렵다는 핑계로 빵에 있는 후배 면회도 한번 못가고 힘들다는 핑계로 후배들 운동하는 것 한번 챙겨 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잠수하면서 오랜 동안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삶에 찌들면 이렇게 되나 봐요. 말없이 잠수타면서 사는 삶으로 전락할 줄 몰랐습니다.
사업하다 말아먹고 나서 아내와 대화를 진지하게 해본 적 있습니다. 다시 예전처럼 운동하는 삶을 살아 갈까하고 솔직히 터놓고 얘기를 했는데. 이젠 놓여 진 조건이 돈을 안 벌면 이 세상을 살아 갈수 없는 현실이 있더군요. 아이들 양육비며, 빚도 갚으면서 살아야하고 그래서 조용히 잠수하면서 살기로 스스로 다그치면서 살고 있는데 요즘은 답답하고 뉴스만 보면 속에서 열이 나고 이명박 정부의 행태를 보면 다 때려 치고 다시 나가 투쟁의 대열에 합류해 살고 싶고 인터넷이나 두드리면서 댓글이나 달면서 이명박 정부가 잘못됐다고 하는 내 자신이 참 답답합니다.
예수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한마디 했을 때 다 버리고 쫒아가는 제자가 있듯이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답답해서 한마디 푸념 늘어놓았습니다.
가장 신성한 일
60년대 초반 중학생 때 아버지가 친구인 나상진이라는 분과 을지로에서 함께 건축사무실을 하셨다. 광화문 정부종합 청사를 지으면서 우리나라가 최초로 설계도를 공모했을 때 최우수작품으로 당선된 바 있는 분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독일 기술자들의 설계를 받아서 청사를 지었다. 후에 나 선생은 이 사건에 실망하기도 하고 월북한 형이 이북에서 한자리하기도 한 까닭에 남한 사회에 살기가 불편해졌고 결국 남미로 이민을 가버리셨다.) 그 시절 아버지 사무실에 가면 가끔 체격이 엄청나게 좋은 젊은이가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가 바로 황해도 고향 선배인 나상진 선생을 찾아와 이야기도 하고 가끔은 용돈을 얻어 쓰기도 하던 청년 백기완이었다. 그런 그를 동업자인 아버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백 선생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넉살이 좋은 분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와서 흥사단 강당에서 한일회담 반대 집회가 열려서 참석을 했더니 함석헌, 김재준 선생 같은 저명한 분들이 연설을 했다. 마지막 순서로 뚱뚱하다고 해야 할 것 같은 거구의 청년 백기완이-당시는 한국 사람들 중에 그런 체격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다-단상에 올라오더니 팔을 걷어붙이고 무엇인가 열변을 토했다. 다른 분들의 강연 모습은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는데 백 선생의 강연 인상이 특별히 남는 것은 그의 안하무인의 배짱있는 태도 때문이었다. 더욱이 나에게 매우 이상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아버지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 있던 실업자 같은 청년이 만장한 청중들을 향하여 기고만장한 열변을 토하는 모습이었다. 어쩐지 현실에 맞지 않는, 매우 코믹한 느낌이 들었다.
그 후 백 선생을 까맣게 잊고 살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은 87년도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빚어진 정국에서였다. 연세대에서 열린 집회에서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골이 장대했던 백 선생의 모습이 너무도 초췌한 모습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걸쭉한 입담은 여전했지만 그의 외모는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고문과 탄압이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 그분의 정치적 생각과 관점이 나와 달랐던 탓에 자주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건만, 이런저런 자리에서 백 선생을 몇 번 더 만날 수 있었다. 언젠가 사적인 자리에서 옛날이야기를 말씀드렸더니 백 선생은 "그랬지.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룸펜이지. 룸펜"하면서 너털웃음을 웃으셨다. 그러면서 나직한 음성으로 혼자 말을 하듯이 했다.
"나는 한 번도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어......"
한 편으로는 서글프게도 들렸던 백 선생의 자기 고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백 선생을 좋아는 하지만 그리 크게 존경하기는 어려운 이유이다. 그분은 평생을 곤궁하게 살면서도 일신의 안녕을 돌보지 않고 민주화 통일 등 큰 문제에 매달려 나름대로 가치 있는 투쟁을 해오신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나는 자기 손으로 자기 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물론 역사 속에 혁명이나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자기 밥은커녕 가족의 생계도 돌보지 못하고 투쟁을 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생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대의를 추구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는 법이다. 내가 내세우는 이상은 앞모습이고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은 뒷모습일 수 있다. 앞모습과 뒷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과 현실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생계, 즉 뒷모습까지 신경 쓰기 위해 했던 일 중 하나는 빈민운동을 하면서 (여자인 집사람에게까지는 강요할 수 없었지만 집사람이 남자였다면 동참시켰을 거다.) 옷을 한 벌만 입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십 년 동안 하복 점퍼를 입고 추워서 못 입을 때까지 입다가 추워지면 동복 점퍼로 갈아입고 더워서 못 입으면 하복 점퍼로 갈아입고 하는 식으로 살았다. 일단 옷에서 자유로워지니까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신경을 쓸 일이 없고 참 편하더라.
한 번은 복잡한 종로 3가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승용차가 서더니 누가 차 안에서 "지 목사님! 지 목사님!"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국회의원 안동선 의원이었다. 네가 "아니? 이 많은 인파 속에서 어떻게 저를 보셨어요?" 하니까 "지 목사님 옷이 지나가데?"라고 했을 정도였다.
안동선 의원과 점퍼 차림의 나
그러다 보니 빈민운동을 하는 동안 가장 곤란한 일은 관혼상제에 참여하는 일이었다. 조직 사회에서는 비록 경조비를 면제(?)받고 빈손으로라도 가야 할 때가 있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10여 년 동안 남의 경조사에 한 번도 부조를 하지 않는 웃픈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부조를 하지 않으면서도 경조사에 참석한 것은 잘 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굳어지게 한 경험이 하나 있어 소개드리고 싶다.
당시 부천에는 40이 넘은 나이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고교 동창생이 있었다. 직업은 의사였다. 당시는 아직 의료 보험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은 병원에 가기가 힘들 때였다. 한 번은 친구가 이끄는 의료 봉사팀이 왔는데 의료진 가운데 간호사 두 명이 화장실을 찾다가 그만 어느 집 문을 열었더니 사람이 살고있는 방이어서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호들갑스럽게 했다. 그들 눈에는 화장실로 밖에 보이지 않는 집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작은 해프닝들을 겪으면서도 친구는 종종 내가 일하고 있는 현장에 와서 무료진료를 해주었다.
그런데 의사 친구와 가끔 가는 레스토랑에서 30대 후반의 품위 있고 고상한 화술을 구사하는 여사장이 있었다. 최 사장은 어느 누구와도, 심지어는 당시로는 흔하지 않았던 나 같은 반체제적 인물과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해나갈 줄 알았다. 그 후부터 민주화 투쟁을 하는 운동권 목사인 나와 요식업을 경영하는 최 사장은 전혀 다른 부류임에도 좋은 대화 상대가 되었다. 나는 기회가 있으면 최 사장이 운영하는 레스토랑과 한정식집으로 모임을 유치하고는 했었다. 최 사장과 내가 가까이 지낸다는 것을 알고 내 주변에서는 빈민운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고급음식점을 하는 여사장과 친할 수 있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항상 나를 관찰하는 경찰정보과 형사들로서도 이상하게 여겨서 탐문을 할 정도였다.
내가 호주로 온 다음에 한국을 일시 방문했을 때이었다. 오랜만에 부천에서 옛 동지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최 사장의 한정식집 이야기 나왔다. 내가 놀라서 아직도 최 사장이 영업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즉시 최 사장에게 전화를 해서 나를 바꾸어 주었다. 최 사장은 반가워하면서 전화를 끝내자마자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물론 거의 20년 만에 뜻하지 않게 만났으니 나로서도 반갑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놀란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시민사회 분야에는 나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던 최 사장이 지금은 과거의 내 주위에 있었던 분들과 모두 친하게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시대가 변해서 한때 민주화 세력들이 사회의 중심이 되기도 했고 영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시류와 주변의 분위기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었다. 사회 분위기상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최 사장이 친해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최 사장과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렇게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최 사장은 나로 인해 어떤 창문이 열렸고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최 사장의 의식이 변하며 내 주변 사람들과 친해졌다는 얘기였다. 아마도 (내가 돈을 낼 일은 한 번도 없었지만) 한정식 집에 드나들며 최 사장과 나누었던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짧은 대화들이 최 사장의 의식 속에 조금의 변화를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행스럽게 이 날의 대화 속에서 한정식집 사장과 운동권 목사와의 만남이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일단 사람은 만나야 되고 만나서 대화를 해보아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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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dney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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