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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는 고려 중기 이전에는 한반도에 세워진 왕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던 땅이었습니다. 이곳 출신이었던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열었지만 그 이후로도 대접은커녕 차별을 받던 지역이었지요. 6진을 개척하고 두만강까지 국경을 올려붙이기는 했어도 함흥 이북, 특히 마천령 산맥 이북은 적어도 남도 사람들에게는 유배지나 군사기지 이상의 의미는 적었고 그곳으로 귀양 가면 거의 인생 쫑나는 느낌의 형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사민정책을 시행할 때에도 평안도 쪽은 그나마 나았지만 함경도 쪽의 사민정책에는 반발이 극심했다고 합니다. 춥고 농사도 안되고 여진족 말발굽 소리가 툭하면 귀를 찢는 고장에 누가 가려고 했겠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터를 잡았고 두만강 이남에서 못살겠으면 두만강 넘어 북간도에서 땅을 일구고 논을 만들어 (세상에 그 위도에서 쌀농사라니) 먹고 살았고 일제 강점기 때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만주 침략의 후방기지로 흥남 비료공장 등 공업지대가 형성됐고 오히려 남쪽보다 더 개화되고 진취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들의 터전이 됐습니다.

 

그렇게 기구하고 박복한 역사를 지닌 곳이기에 함경도 사람들은 생활력 강하고 기질이 굳세기로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도 함경도 여성들은 한 수를 더 떴습니다. 남쪽 지역 여성들이 장터에 나서지 못하고 야시장에 구경꾼으로나 기웃거리던 시절에도 함경도 시장은 거의 여성들로만 북적거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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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여성은 함지를 잘 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함지에는 콩, 팥, 귀리, 강냉이, 좁쌀 같은 곡물은 물론이고 계란, 생닭, 어물, 각종 채소나 과일 등 별의별 것을 다 담았다. 돼지 새끼까지 끼고 다니면서 파는 여자도 있었다. 물건을 “산더미 같이 인 중에도 아이를 또 업고 안고서 맨발로 큰 산과 물을 건너 30, 40리 혹은 50, 60리를 어렵지 않게 다니는 것”이 함경도 여성이었다."

 

- 우리역사넷 시장 잘 보는 함경도 여성,허영란

 

조선 시대에 전해지는 함경도 여성 두 명을 떠올려 봅니다. 한 명은 임진왜란 개전 당시 동래성을 지키던 동래부사 송상현의 소실 김섬입니다. 그녀는 함흥 기생으로 송상현을 따라 동래까지 와 있었습니다. 성이 함락될 즈음 송상현은 관복을 가져오라고 하여 의관정제한 후 조선의 지방관으로서 당당히 칼을 받는데 김섬은 그를 직감하고 송상현 곁으로 달려왔다가 포로가 됩니다. 그로부터 3일 동안 온갖 오욕을 겪으면서도 그녀는 목이 찢어져라 일본군에게 욕설을 퍼붓고 고함을 치며 항거하다가 숨을 거둡니다. 질려 버리기도 하고 감동도 받았을 일본군들은 그녀를 송상현 곁에 묻어 주지요.

 

교과서에서 배운 이 시조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묏버들 골라꺾어 보내노라 님의손대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이 시의 지은이는 함경도 홍원 출신 기생 홍랑입니다. 홍랑은 지방 관직을 얻어 함경도에 온 전라도 출신 최경창과 사랑에 빠집니다.

 

원래 관기들은 위수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는 데다가 함경도는 특수지역이어서 함경도 출신 기생이 타지로 나올 수 없었는데 최경창과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는 대담한 행보를 보이죠. 최경창은 이 때문에 불이익을 받지만 둘 사이는 굳건했습니다. 최경창이 객사하자 한달음에 달려가 그 묘 앞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죠. 혹여 뭇 사내들이 자신을 기웃거릴까 저어한 그녀는 얼굴을 스스로 망가뜨리고 3년을 보냈고 이후 임진왜란이 터지자 최경창의 시와 글들을 오로록 챙겨 떠납니다. 전란 내내 그 글뭉치들을 끝끝내 지켜낸 홍랑은 최경창의 자취를 최경창의 본가에 전하고 그 무덤 앞에서 삶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함경도 여성들은 조선 팔도 어디에 견주어도 험난하고 힘겨웠던 땅에서 억척스럽게 살았고 오히려 남자들을 무색하게 하는 용기와 생활력을 보여 줬습니다. 새터민들에게 들은 얘기지만 함경도 여성들은 지금도 타지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다지요. 어떤 역경이 닥쳐도 "일없소" 한마디로 퉁겨 버리는 그 강인함 때문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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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월남민 가운데 함경도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일단 지리적으로 머니까요. 하지만 거의 10만이 넘는 함경도 사람들이 일시에 남쪽을 택하게 된 사건이 흥남 철수였습니다. 흥남은 일종의 덩케르크였습니다. 반격을 개시한 중공군과 인민군은 흥남 외곽을 순식간에 장악했고 육로가 막힌 상태에서 유엔군과 국군 그리고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탈출했으니까요. 이들은 거제도와 제주도에 흩뿌려졌고 외국처럼 낯선 남쪽 나라에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하지만 함경도 여성들의 생활력은 거기서도 빛을 발하죠.

 

한때 부산 자갈치 시장의 상권을 장악했던 건 함경도 아주머니들이었다고 합니다. 70년대만 해도 부산 사투리와 함경도 사투리가 비슷하게 들렸다고 할 정도죠. 그런 배경에서 나온 우스개가 있습니다. 함경도 아주머니와 부산 아주머니가 싸움이 붙었습니다. 부산 아주머니가 삿대질을 하며 "니가 머꼬"라고 호령하자 함경도 아주머니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았습니다. "머꼬가 무시기?" 부산 아주머니는 어리둥절 하지만 소리를 지릅니다. "무시기가 머꼬" 그러자 함경도 아주머니는 또 악을 씁니다. "머꼬가 무시기". 그렇게 밤새 싸우다가 그 뜻을 알고 배를 쥐고 웃으며 화해했다고 전합니다.

 

자갈치 상권을 쥐었던 함경도 아주머니들은 거의 전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실 겁니다. 한국 현대사의 아스라한 비탈길을 몸으로 구르고 기어올랐던, 북도의 생활력을 남쪽에서 아낌없이 과시하며 '삼팔 따라지'의 설움을 "일없다" 한 마디로 넘겨 버렸을 예전의 북도 여인들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의 각주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역사의 증인 한 분이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에 다시 한번 그 추억을 들추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 가족을 포함한 10만여 흥남발 피난민 가운데 하나셨을 문재인 대통령의 어머님 강한옥 여사의 별세 소식이 그것입니다. 참으로 모진 세월 훌륭하게 버텨 주셨습니다. 전쟁 겪고 피난 거치고 자식들 길러내고 먼저 간 남편 대신해서 집안의 기둥이 되시고 우리 역사의 한 장을 쓸 재목을 배출하셨음에 경의를 표합니다.

 

고단하고 사무침 많았던 한국 현대사. 그 역사를 관통한 함경도 여성 한분에게 함경도가 원적인 사람으로서 인사를 전합니다. 이제 정말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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