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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써놓은 글을 일주일이나 들여다보고 있다. 몇 번이나 다시 고쳐 쓰며 망설인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래도 되는 걸까.


안산에서 본 것들과 느낀 것들을 어떻게 옮겨야 할까. 안산의 엄마들이 아무렇지 않게하는 말 한마디와 표정들을, 마치 예쁜 조개라도 주운 아이 마냥 요리조리 살펴보며 발견하고 알아낸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수렁 같은 슬픔을 넘은 엄마들이 가진 치유의 능력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그냥 본 걸 이야기 하면 되지 않을까.


그게 너무 힘들다는 게 문제였다. ‘세월호 엄마들을 매주 만난다’는 말을 할 때, 나도 활동하다 만난 유가족이 있는데 누구누구 엄마를 아느냐, 누구누구 아빠를 아느냐고 물어보던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 사람들을 바라보던 내 섬뜩했던 시선처럼, 나 역시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비춰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내가 아는 누구’라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삐삐와 처음 안산으로 향하던 날 약속했었다. 엄마들의 이름을 외우지 말자고. 그냥 매일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처럼 옆을 지키자고 했었다. 엄마들의 이름을 외우지 않았던 것은 행여 누가 ‘누구누구 엄마 아느냐’라고 물어볼 때 ‘안다’라고 대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의식중에라도 엄마들을 훈장처럼 여기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어떻게 설명하던 그렇게 보일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안산 세월호 엄마들에게 자원봉사를 다니는 사람’이니까. 그게 늘 내 발목을 잡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고민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매우 부담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삐삐에게 늘 ‘나를 패대기쳐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고 해 왔는데, 작정하고 오늘 나를 패대기치려 한다.


나를 내던지지 않으면. 엄마들이 누군가의 위안이 되고 있음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설명하기 전에, 매우 지루하도록 긴 이야기라는 것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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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전에, 일단 눈 호강 한번 하시라고 작년 이맘때의 사진을 올린다.

공방에서 자수를 배우기 시작한 엄마들이 수 놓아준 가방이다.

아래의 배지(badge)도 물론이다. 세월호 엄마들은 자수 정도는 패시브 스킬로 장착하고 계신다.



2015년 12월 4일, 오늘은 금요일이다.


매주 금요일은 전날부터 바쁘다. 어제도 새벽까지 다음날 있을 안산으로의 여행을 준비했다. 안산 본오복지관에서 강의 요청까지 들어와 하루 3군데를 들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서고, 안산에 도착하면 9시 남짓이다. 아침도 거른 채 본오동의 엄마들과 천연화장품을 만들었다.


엄마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게다가 아이를 안고 오는 엄마들은 언제나 내 눈길을 끈다. 자원봉사를 하고 뜨개질을 한다는 본오동의 엄마들은 생각 외로 젊었다. 덕분에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둘이나 수업에 함께 했다. 한 엄마가 아이를 위한 목욕제를 천연제품으로 만들 수 있는지 물어봤다. 나는 지난주에 집에서 만든 물비누 페이스트 생각이 났다. 오늘 집에 가는 대로 페이스트의 상태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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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오일로 만든 물비누 페이스트다.

세 시간 동안 저어야 만들 수 있는 희귀 아이템으로, 두 달 숙성 후 다시 일주일을 물에 녹인다.

샴푸, 바디 클렌져 등을 만들 때 쓰는 재료인데,

고질적인 탈모에 시달리는 세월호 부모님들에게 '내가 만들 수 있소'라고 큰소리를 떵떵해놔서 생고생중이다.


부랴부랴 분향소로 달려가면 엄마들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최상급 난이도의 비누를 만들기로 했었는데, 내심 ‘엄마들이 포기하겠지’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포기하지 않아주셔서 엄마들이 피켓을 들러 나가시는 5시까지 비누와 씨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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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희귀 아이템. 뒤쪽의 원피스는 엄마들이 만든 수세미고(어딜 봐서 수세미??), 앞쪽은 내가 만든 비누다.

몇 달의 연구 끝에 리본모양을 비누 안에 장착 시키는데 성공하여,

이날 엄마들에게 기술을 전수했으나 난관이 예상된다.


3시경 온마음센터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공수해다 준 핫도그로 첫 끼니를 해결했다. 5시에 부랴부랴 ‘우리함께’로 달려갔다. 모든 기자재들이 그곳에 있어서 6시 수업의 진행은 조금 편하다. 직장을 다니는 엄마들이 ‘우리함께’로 모인다. 다음주에는 ‘우리함께’의 일정으로 수업이 없어서 엄마들은 비누를 두 배로 챙겨갔다.


11시가 다 되어야 집에 도착했다. 하루 종일 엄마들과 함께 있었다. 몸은 피곤하고 배는 고프지만, 이렇게 한주를 마무리했다.


일전에도 밝혔지만, 나는 전직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오늘 6시의 엄마들 수업에서 엄마들에게 몇 년 전 만들었던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비누가 굳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기도 했고, 엄마들이 궁금해 하기도 했다. 몇 년 전 내가 설계한 결과물이 안산에 있어서 자랑하고 싶기도 했고.


하지만 현실은 조금 암울하다. 동영상을 본 뒤 ‘그런 재주를 두고 왜 그러느냐’라고 물어본 엄마의 말처럼, 지금은 십년지기 친구의 가게에서 파트타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작년 이맘때, 친구에게 ‘어느 것에도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고, 친구는 자신의 가게에서 일해보길 권했다. 무언가를 찾을 때까지 있어보라고. 최소한 친구는 금요일에 시간을 빼주기로 했으므로, 흔쾌히 새로운 상황에 부딪히기로 했다.


말 그대로 나는 ‘의미’를 찾고 있다. 언제나 내가 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매일을 컴컴한 길을 걷는 듯, 무거운 돌덩이를 가슴에 안고 살았다. 하지만 ‘엄마’들을 만났을 때 그 돌덩이를 그곳에 내려놓았다.


사실 이런 삶에 대해 알지 얼마 안 된 친구들은 ‘안산 유가족에게 큰 의미를 두지 말라’라며 훈수를 둔다. 하지만 오랜 방황을 지켜 본 친구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의미’가 어떤 무게인지 지난 수십 년을 내 삶으로 증명해 보였으므로.


‘세월호’가 아닌 ‘내 이야기’를 하는 건, 지난번에 딴지 마빡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 시작이었다. <세월호의 엄마들을 지키고 있다>라는 제목이 무거웠다. 사람들에게 ‘엄마’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매번 처음 만나는 사람과 마주 앉았을 때마다 그랬듯이 내 뒤통수를 간질거리는 걱정이 또 시작되었다.


그 제목이 너무 무거웠던 나머지 분향소 엄마공방의 공방장 엄마에게 ‘제 의도는 아니었다’고 납작 엎드리고 말았다. 하지만 공방장 엄마는 ‘제목대로 잊지 않고 와주는 게 지켜주는 거다’라며 앞으로를 걱정하셨다. 세월호가 인양되고, 원하는 대로든 원하는 방향이 아니든 하나씩 해결될 때마다 엄마들은 더 불안할 것이다. 언제나 이런 거대한 참사도 세월 앞에서 장사가 없었다. 사람들은 하나씩 잊어갈 것이다. 뭘 더 어떻게 해주느냐며 화를 낼 수도 있다.


그 때쯤 되면 아마도 엄마들은 내가 친구에게 했던 말과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어느 것에도 살아야 되는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그리고 무거운 돌덩이 같은 짐을 지고 제자리에 멈추어 버릴 것이다. 무거운 돌덩이를 나는 ‘징검다리’라고 말한다. 눈앞에서 사라진 징검다리. 남들은 잘도 건너가는 그 길을,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는 자신을.


현실적인 충고를 하는 친구들처럼 아마 당신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사람을 돕는답시고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꽤 많지 않은가. 어쩌면 당신 역시, 내 친구들 마냥 ‘공명심에 네 미래를 망칠 셈인가’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야기 한다. 애초부터 나는 미래가 없었다.


철들기 전부터 단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아 손끝으로 더듬거리는 세월을 보내왔다. 서른 중반 어느 즈음에 그 징검다리가 끊겼음을 알았을 때, 그때부터 나는 줄곧 그 돌덩이를 손에 든 채 살았다.


아마도 나는 삼십 중반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내 삶의 징검다리는 30대 중반에 끊겨 있었다. 그 끊긴 다리를 바라보며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한폭탄처럼 줄어드는 시간. 누구도 내게 ‘거기가 끝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의 삶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마도 나는, 그 이후 내 ‘엄마’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1학년,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 생긴 병이었다. 내가 닮고 싶거나 닮고 싶지 않아야 할 사람의 삶이, 내 지표가 되어 나이든 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 사람이, 서른 중반 이후로는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는 유서 한 장 남겨놓지 않아 죽음의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나 역시 고질병처럼 우울증을 달고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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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살고 싶었지만, 현실은 참혹하기만 했다. 가족도, 형제도 마음의 위안이 되어 주지 않았다. ‘엄마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며 스스로 삶을 개척하기 위해 전문 기술도 익혔지만 현실은 언제나 급여 체불과 이직의 반복이었다.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내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늘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일을 했고, 가정을 만들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30대 중반 즈음,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살고 싶은데. 세상은 나한테 죽으라고 하네.”


친구는 잠시 ‘어어…’하고 말을 흐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라고 해야 되는데. 그 말이 나오지 않아.”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정말로 괜찮았다. 내게는 ‘살고 싶은 세상’은 없었으므로.


30대 중반이 되어 살던 집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직장을 알아보았다. 길어야 1~2년인데 되도록이면 낯선 곳에서 삶을 정리하고 싶었다. 엄마처럼 가족이 나를 발견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몇 개월 동안 알아보았지만 연락이 오는 직장은 죄다 서울이었다. 그나마 가장 멀었던 곳이 4호선 중앙역이었다. ‘그래, 그 정도도 나쁘진 않아’라고 생각하며 면접을 보았다.


안산 고잔동. 면접을 보던 날 지하철 창가로 보이던 그 작은 도시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도시였고, 작은 산도 보였다. 이런 작은 도시라면 조용히 처박혀 있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산 시청 근처에서 작은 고시원을 얻었다. 내가 돌아본 중에 가장 작고 허름한 곳으로. 이미 피폐해진 마음이었던지라 침대 하나 달랑 있는 상자 같은 방도 훌륭해보였다.


안타깝게도. 그 회사 역시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폐업했다. 하지만 그 6개월 동안 내 삶에 아주 작은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우연찮게 안산에 거주하는 친구가 하나 생겼고, 그 친구의 설득으로 수십 년 간 연락을 하지 않았던 외가집과 연락을 했다. 이미 감정이 사라져 무미건조한 나 대신 친구가 동사무소 여직원을 붙들고 엉엉 울며 ‘내 친구 외할머니를 찾아달라’라고 떼를 썼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 매정하게 자식을 버린 거라 믿었던 엄마가 사실은 ‘외로움’ 속에 죽어갔음을. ‘네 엄마는 사람 같지도 않을 만큼 이기적이었다’거나, ‘살림도 못하는 여자였다’라고 내게 말했던 어른들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엄마의 죽음에 대한 모든 원인은 그 말을 했던 사람들에게 있었고,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 자신을 합리화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엄마의 죽음 이후 산산조각난 모든 기억을 퍼즐 맞추듯 맞춘 게 안산에서의 일이었다. 내 머릿속의 엄마는 내게 밥공기로 도너츠의 구멍을 뚫게 하던 엄마였다. 도너츠는 잘 튀겨 찬장에 넣어두었고, 내가 착한 일을 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주던 엄마였다. 아침마다 식구를 위해 주스를 만들었고, 치과에 갈 때마다 동화책을 한권씩 사주던 엄마였다. 어른들의 말과 기억 속의 엄마는 달랐지만, 모두 잊은 척 말하는 어른들과 함께 살기 위해 지워간 엄마의 기억이었다. 그렇게 착각이라 믿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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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몇 개월 동안 고생해서 찾아낸 ‘내 마지막 안식처’ 안산에서 엄마가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 누군가 ‘고사상의 북어가 무슨 의미인지’를 우스개 소리처럼 이야기해줬다. 고사상의 북어는 ‘시체’를 의미한다고 했다. 귀신에게 노여움을 풀라는 의미로 ‘자기 자신을 바친다’라는 의미라고. 그래서 액운을 쫓기 위해 북어를 땅에 묻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회사가 폐업하던 날. 나는 북어 한 마리를 사들고 지금의 ‘우리함께’가 있는 작은 빌라의 옆 산으로 올라갔다. (이 이야기는 삐삐 말고는 여기서 처음 한다) 그래, 여기서 죽은 거라 생각하자. 나는 내 이름을 쓴 작은 종이와 함께 야산 어디엔가 나를 묻었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다. 마흔이 되면 쓸 이름으로. 엄마가 닿지 못했던 마흔이 되면 이름을 바꾸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왜 살아야하는가’였다. 한 번 더 살아보자고 마음은 먹었지만 여전히 힘겨운 삶이었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왔을 때 많은 일이 있었다. FTA반대 집회, 용산 참사. 그 수많은 집회 어느 즈음에, 한 엄마를 만났다.


낡은 하얀 소복을 입고 광화문 거리에 서있던 한 엄마. 한눈에도 소복이 너무 낡아보였다. ‘무슨 일로 소복이 저리 닳았을까’ 의아해하며 옆에 있던 사람에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이한열 열사의 엄마다’라고 대답했다. 배은심 여사였다.


몇 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앉아 삼십분 정도를 배은심 여사를 바라보았다. 자식을 잃은 슬픔은 오랜 시간을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걸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저 엄마는 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걸까. 엄마는 자신의 죽음을 자식에게 보여줄 만큼 잔인한 존재인데, 자식보다 자신의 외로움이 더 무겁고 괴로운 거라 믿는 존재인데,. 광화문의 그 엄마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자식을 잃은 엄마의 옷을 입고 힘겹게 서있는 걸까.


‘엄마’라는 존재를 거부하고 부정하며 살았던 수십 년은 좀처럼 극복하기 힘들었다. 엄마가 되기를 거부하고, 가족을 만들기도 거부하며 살아왔지만,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유일하게 거부하지 않은 한 가지, 나는 여전히 ‘엄마의 딸’로 남아 있다는 것을. 비록 ‘사랑’이 아닌 ‘증오’의 시간이 더 길었어도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한 가족의 엄마가 되기를 거부해 왔었다. 잘 해낼 자신이 없었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하지만 ‘엄마의 딸’로 살아간다면 잘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 해야 했던 것들. 삶의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문득 문득 떠오르던 그 일들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세상의 엄마들은 ‘엄마이기 때문에’ 슬퍼서는 안되는 거라고. ‘엄마’라는 이름으로 슬퍼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투사가 되어서도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안 된다’가 아니라,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삼십대 중반 이후의 내 삶을 결정했다. 처음으로 내 가슴에 움켜쥐고 있던 징검다리를 내려놓았다. 슬퍼하는 엄마들을 위로해주자.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픽보다도, 난 이걸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산으로 갔다.


그 사이에 있던 몇 년의 빈 공간에 대해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 계획 했던 것은 ‘미혼모 보호시설에 가자’였다. 그래픽을 했고, 강사도 몇 년 했으니. 살길이 막막한 엄마들에게 ‘살아보라’라고 연필을 쥐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언젠간 당신의 아이가 당신의 위안이 될 거다’라며 살아보라고 이야기 할 참이었다. 절대 안 딸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운전면허도 땄다. 그리고 마흔이 되자마자 이름도 바꾸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사이 건강이 나빠졌고 몇 차례 수술을 받았다. 한약도 양약도 안 맞는 상황이라 차선책으로 아로마테라피를 공부했고 이것도 언젠가 엄마들을 찾아다닐 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TV에서 세월호의 아이들을 봤다.


그래서 안산으로 갔다.


‘엄마’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엄마’라는 이름으로 슬픈 엄마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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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린 @zwarin)


그런 이유로 나는 ‘자원봉사자’라는 호칭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매주 금요일, ‘엄마를 잃은 딸’이 되어 안산으로 간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엄마들에게 어쩌면 조금 늦게 그 의미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엄마들에게 ‘내가 뒤늦게 찾은 삶의 의미가 맞게 해달라’라고 말하기 위해 간다. 그 의미를 찾기 전까지 옆에서 기다려 주겠다고, 그러니 살아달라고. 당신의 잃어버린 아이만큼은 아니겠지만, ‘내가 위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말하기 위해. 화면을 쭉 올려 내가 오늘 한 일을 다시 한 번 읽어봐 달라. 내가 오늘 한 일 중에, ‘엄마를 위해 하지 않은 일’이 있는지.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같은 방향에 징검다리를 놓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내 엄마가 행복한 시절을 보낸 안산에서, 내가 ‘나를 묻은’ 안산에서.


이 이야기는 현재 진행 중인지라 그럴싸한 결말을 내지는 못한다. 이왕이면 이런 이야기는 좀 그럴싸한 결말이 나온 뒤에 하면 좋으련만.


사실 위의 내 이야기는 이렇게 짧은 글로 적어내기엔 아쉬움이 많다. 얼마나 축약해서 적었는지는 지난 1년간 내 이야기를 들어온 삐삐가 증명해 줄 수 있다. 가끔 깐죽대며 잔인해지기도 하는 내게 ‘곱게 살아서 세상을 모른다’고 말하는 불나방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나는 위의 이야기를 꺼내며 그 사람의 영혼까지 불살라버리곤 했다. 이렇게 축약해서 적어버리는 것으로 내 삶의 소소한 재미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안산의 ‘엄마공방’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자원봉사 이야기가 아닌, ‘엄마를 잃은 딸’이 ‘아이를 잃은 엄마’를 만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전자로 이야기를 한다면 ‘안산에 가는 자비로운 사람’의 이야기가 될 것이고, 후자로 이야기를 한다면 ‘안산의 엄마들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가 안산의 엄마들에게 어떤 위안을 얻고 있는지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자비로움은 내가 아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가져야 하는 덕목이다. 내가 전하는 이야기 사이사이에 당신이 지닌 자비로움이 당신을 움직이기를 원한다. 당신의 생각과, 당신의 시각과, 당신의 발걸음이 움직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안산의 엄마들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다. 이렇게 글로 적어놓으면 자꾸 묻지 않으실 듯하다.


"엄마. 내년에도 계속 올 거냐고 묻지 마세요. 갈 때 마다 한분씩 돌아가서 물어보시면 매일 같은 얘기를 해야 하잖아요. 항상 ‘엄마가 보내서 왔습니다’라거나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어서요’라고 얼버무리듯 말했지만, 그동안은 엄마들이 제 이야기를 들을 상황이 아니라서 못했어요. 이제 이야기했으니 돌림노래 하듯이 돌아가며 물어보지 마세요. (자꾸 그러심 삐뚤어집니다)"




추가


공방장 엄마께서 <나쁜나라>라는 영화를 추천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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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증샷을 찍어주면 선물을 주자고 이야기해볼까 생각 중이다.


한 달에 한 차례씩 엄마들과 비누를 만드는데, 같이 만든 비누로 뭘 하시는지 매번 ‘비누 다 썼다’라고들 하신다. 이렇게라도 일을 벌려야 비누를 좀 아껴 쓰실까. 문제는 배송비인데, 분향소에 직접 와서 받아가시겠다고 하면 엄마들께 진지한 제안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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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