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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도 더 전에 고만고만한 프로그램한답시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만나고 다닐 때 한 밤무대 가수와 조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름이 난 사람은 아니고, 저보다 열 살 위였으니 이미 환갑을 바라보고 있겠군요. 이름은 ‘태리 강’이라고 기억합니다. 그렇게 불러 달라고 했으니까요. 예명인지 실명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는 흑인 혼혈이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혼혈도 아닌 그냥 흑인인 줄 알았습니다. 외탁은 거의 안했고 머리카락이나 피부색이나 의심할 바 없는 ‘블랙’이었으니까요. 그 입에서 나오는 토종 한국어와 토종 욕설성 감탄사 (X발, X같네 등)들이 생경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그런 얘기를 하니까 그도 공감을 합니다. “나도 그거 때문에 스트레스 받았어요. 입 닫고 있으면 그냥 아메리칸 줄 알아. 언젠가 미군들이 나를 붙잡고 뭐라고 하길래 나는 우리말로 소리 지르고 걔들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악쓰고 그랬지. 뭣 때문인지 날 잡아가려고 하데? 그래서 지랄지랄하는데 그걸 지나가다 보던 한국인 미군 군속이 구해 줬지. 저 사람 한국 사람 같다고. 한국말 완벽하게 한다고.”

 

무대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한국 노래를 부르면 징그럽다(?)고 병이 날아왔다고 합니다. “깜둥이 새끼야. 미국 노래 불러.” 누구인지도 모를 아버지로부터 음악적 기질을 물려받아서 그런지 ‘미국 노래’에 자신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병이 날아온 뒤 악착같이 한국 노래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뽕짝부터 발라드까지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완벽하게 소화했다지요. 그래 가장 자신 있는 노래가 뭐냐고 물었더니 뜻밖에도 조용필의 <한오백년>을 꼽더군요. 인터뷰하다 말고 눈 감고 무릎 치면서 <한오백년>을 불러 제끼는데 좀 거짓말 보태서 조용필 뺨치는 목소리였습니다. 휘파람을 동원한 기립박수를 보내기에 충분했죠.

 

노래의 감흥이 가시지 않은 듯 기타를 뚱당거리던 그에게 살면서 가장 기억이 남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기타 줄이 끊기듯 손가락을 멈췄습니다. 동네 살던 누나라고 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라 어디 팔려가듯 시집 갔다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도망 나와서 다시 고향 동네 부근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구멍가게 운영하던 여자라고 했지요. 그의 나이 스물 다섯 때 그 구멍가게 누나는 서른쯤이었고 둘은 누나 동생 하면서 술잔도 나누고 서로 가슴 속 이야기도 털어놓는 사이가 됐답니다.

 

“하루는 동네에서 싸움이 났는데 내가 깡패같은 애들한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어요. 그런데 그 누나가 몽둥이를 들고 깡패들한테 덤벼든 거야. 왜 우리 태리 때리냐. 두들겨 맞아서 정신이 없는데 그 모습 보니까 정신이 다 번쩍 났어요. 나 때리던 애들도 여자가 하도 드세게 나와서 그런가 슬금슬금 물러나더라고. 그때 희한하게 그런 생각이 나데. 내가 누나 좋아하는구나.......누나가 나 좋아하는 건 모르겠고. 그 모습이 너무 고마워서 반한 거 아니냐고? 아니야 깨달음 같은 거였어요. 나 저 누나 좋아한다 뭐 그런”

 

둘은 요즘 말로 ‘썸을 타는’ 사이가 되긴 했습니다만 ‘누나’는 좀체 결정적인 ‘슈팅 찬스’는 주지 않았답니다. 그런 거죠. 좋아하는 거 같긴 한데 뭔가 이때다 싶을 때 절벽을 들이민다든가, 어떻게 말을 해 보려고 하면 귀신같이 말을 돌린다거나,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면 앞장서서 와장창 깨 버린다거나. 그래도 답답해서 한 번은 내지르듯이 사랑한다 결혼하자 내질렀는데 그 답은 쓸쓸한 웃음이었다고 합니다. 나도 널 좋아하는데 너랑 결혼할 수 없다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네 피부색 닮은 아이를 감당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아이 없이 살자고 얘기도 해 봤지만 태리 자신도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게 사랑이야 ,X발?"

 

둘은 끝내 헤어졌고 (아니 썸을 끝냈고) 제 갈 길로들 갔습니다. 하지만 태리는 자신이 깡패들한테 두들겨 맞을 때 몽둥이를 들고 뛰어든 누나를 못내 그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때 참 멋있었다는 얘길 열 두번도 더 한 듯 싶군요. 그러면서 다시 기타를 잡았습니다. <내게도 사랑이>였죠. 태리는 노래의 후렴구를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 뿐이라오."

 

열 댓번 후렴을 반복하는 걸 찍다 지쳐서 앉았는데 노래를 맺더군요. 그래서 정말 사랑하셨나 봐요 했더니 태리가 웃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PD하겠나." 네? 영문을 모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제게 태리가 말을 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부른 노래 가사는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었어. '내게도 사람이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 뿐이라오' 내 인생에서 사랑은 사치고.... 사람같은 사람도 드물었는데 그 누나는 사람이었어. 사랑같은 말 붙이기 전에 참 따뜻하고 말 통하는 사람."

 

그러면서 흥얼거리는 그를 따라 입술을 놀려 봤던 기억이 납니다. 내게도 사람이 사람이 있었다면... 아주 많았을까 몇명 안될까 헤아려 보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함중아씨가 세상을 떴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20년도 더 전의 무명의 혼혈 가수의 노래가 귓전에서 함중아의 노래 소리와 물들듯 오버랩이 됩니다. 태리 강은 사랑을 찾았을까요. 그 인생에 한번쯤은 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알콩달콩 살고 있기를 바라 봅니다. 그래도 어쩌다 한 번쯤은 내게도 '사람이 사람이 있었다면'을 부르며 깡패 앞에서 몽둥이 휘두르던 누나의 모습을 흘낏흘낏 마음 속에서 재생시키고 있겠죠.

 

고 함중아 가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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