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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이저 속의 마이너리거 

2. 종합직과 일반직 그리고 화초에서 잡초로

3. 직장의 일그러진 엘리트들

4. 크게 나쁜 일은 혼자서 못한다, 크게 좋은 일처럼

5. 상처뿐인 승리

6. 리더의 자세와 사내 불륜이 미치는 영향

7. 20년 다닌 직장을 관뒀다

8. 퇴사 후 느끼는 것들

9. 나쁘기만 하거나, 좋기만 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10. 퇴사 후, 트라우마 - 불행을 나누면 약점이 되고 행복을 나누면 질투가 되네

외전. 소문 공화국과 검찰 공화국 사이에서

외전. 잘못된 일을 열심히 하는 부류

11. 비정규직 2년, 정규직 18년 이후에 떠오르는 풍경들

 

 

 

1.

나는 회사에 정규직으로 입사해 2 정규직이 되어 18년을 다니다 퇴사했다. 흔히 대기업이라 불리는 곳에서 도합 20년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순간도 정규직이 아니었. 통상적인 루트로 들어온 사람에 비해 언제나 실력을 증명하며 살아야 했으니까. 항상 시험당했으니까. 

 

대개 사람들은 나를 "전에 커피 타고 복사하던 아니야? 얘가 무슨 일을 ?" 하는 시선으로 봤다. 호의적인 대우도 제법 있었으나 몇몇은 내게 깊은 내상을 입혔다. 오늘은 얘기를 할까 한다.

 

딴지는 기업에서 광고도 받지 않고 퇴사해서 좋은 점은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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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사에 다니던 때다. 나는 사장님 지시로 제법 프로젝트를 수행했. 년째 쓰고 있는 올드 이미지의 사내 로고 디자인을 교체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프로젝트를 단독으로 수행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야말로 사원부터 칸, 따박따박 올라가 과장이  후의 일이다.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야 그때까지 나를 발탁하고 승진시켜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 있을 거라 믿었다

 

보통의 경우, 이런 업무를 하면 관련 업체 군데 만나 미팅해서 비교견적을 받는다.  나은 견적을 제시한 업체를 골라 계약을 하고 진행하는 관행이다. 나는 중간 업체를 빼고 모든 일을 직접 핸들링했다. 디자이너도 따로 만나 직접 계약하고, 상표권 확보도 스스로 하는 등, 모든 업무를 쪼개 별도로 오더를 넣었다. 인정받고 싶었고 그만큼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보니 해당 업체가 제시한 견적의 1/10 되는 가격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할 있었다. 가성비 좋은 신규 브랜드를 만들자 관계자 사이에서 반응이 좋았고, 그걸 계기로 사내 방송에도 출연하게 됐다일에 대해 홍보를 하고 사용 가이드 배포만 하면 됐다.

 

해서 해당 업무의 협조를 구해야 하는 경영지원 본부장을 찾아가 해당 프로젝트에 대해 보고했다.

 

3.

보고 당일, 본부장은 내게 눈길 건네지 않았다. 불철주야 달려 일을 만들었는데 그는 나를 투명인간처럼 여겼고 우리 팀장만 보며 말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 팀장 역시 당황해, 그가 질문을 때마다 보고서 번, 번갈아 보며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보고가 끝나자 그는 귀찮다는 손을 들어 올려 손목을 까딱거리더니 사무실에서 나가라고 사인 했다. 우리는 진작에 돌아선 그의 등에 대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왔.

 

그날 팀장이 내게 무슨 말로 위로를 주었는지 자세한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팀장도 당황해 쩔쩔맸던 것 만큼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후로 일이 진행되는 동안 본부장은 틈만나면 나를 갈궜다. 예를 들어 사람들 많은 데서 나의 지적 능력(그걸 지적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을 공공연하게 테스트했다한국말로 해도 되는 말들을 굳이 영어로 표현하며 "알아들었어?" 하는 식이다(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다 알아들었다, 이 색기야). 

 

퇴사할 줄 알았으면 회의 도중 바로 테이블 위로 걸어 올라가 그의 넥타이를 틀어쥐고 싸대기를 일곱 번 정도 날린 후에 숫자를 섞은 욕이라도 실컷 할 걸, 당시엔 체중도 적게 나가는 데다, 퇴사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던 때다(아 싸대기는 줄이 그일 수 있으니 취소). 그가 하는 대로 끌려다녔다.

 

어쨌든 일이 어찌어찌 마무리되자 그가 내게 말했다

 

"조직에선 말이야, 한 발 늦게 걸어도 되고, 빨리 걸어도 되는 거야, 반 발만 앞서 걷는 거야"

 

당시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김대중 대통령의 명언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건 알겠는데 그 사람이 그런 삶을 살아온 건 전혀 아니니 뭐, 그러려니 했다. 오래 경험한 후에야 알게 됐다. 그 말의 뜻은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였다.

 

후로도 그는 오가다 마주쳐도, 내가 퇴사할 때까지, 인사를 제대로 받아준 적이 없다. 아랫사람의 인사를 제대로 받지 않는 사람은 대개 윗사람이나 자기가 잘 보여야 할 사람에겐 세상 좋게 싹싹한 사람이다. 그 꼴을 다 보면서 나는 왜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그에게 예의를 지켰을까.

 

퇴사할 줄 알았으면 나도 끝까지 인사하지 말걸. 흥. #세상의미없고 #소심한 #가정법과거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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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지사, 조직에서 일하다보면 이런 일은 수도 없이 많고 매우 속상하다. 슬픈 자주 당하면 이런 종류의 감정에 대해 어느 정도 둔감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부당함도 익숙해지면 그마저도 당연하게 생각되어 자연적으로 노예가 되어버린다. 부당하게 만드는 쪽도 그게 거기에 익숙해져 원래 그런 권리가 자기한테 있는 줄 알고. 나라는 사람의 특성 또한 그렇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근무경력 20년이라는 숫자는 내가 생각보다 체제 순응 인간이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런저런 이유로 참고 넘어간 다반사다. 대개 논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 참았고, 튀고 싶지 않아 참으며 살았다(결국 실패해서 퇴사까지 이어지지만).

 

4.

그나마 나는 세기말에 비정규직을 보냈기에, 제도권으로 향하는 마지막 열차에 탑승했덕분에 이건 달고 저건 쓰네 하며 말을 해도, 여태 남들보다 덜 억울하고  돈걱정하고 살았

 

어쨌거나 눈치를 보고, 매번 실력을 증명해야 하고, 매번 시험받아야 했으나, 직장 생활의 8 이상을 정규직으로 보내 따박따박 월급 받는 생활은 비정규직의 삶과 불안에 비교할 수 없다. 그냥, 시기가 좋았다. 내가 몇 년만 늦게 태어났거나 몇 년만 늦게 입사했어도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게다. 요즘은 후배들에게 이마저도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 현행 노동법상 정규직 2 고용 재고용이 어렵다고. 

 

제도가 시행된 배경에는 기업체에 정규직 채용을 늘리기 위함이겠지만, 내가 경험한 대한민국 기업들은 그 제도를 순수히 받지 않는다. 계산기 두드려서 숫자 나오면 취급을 한다. 막말로 이들에게 노동자는 인간이라기 보다 그냥 인력이. 자본가의 가치 창출을 해주는 인력, Horse Power 말고, Man Power.

 

그렇게 잘나가는 기업들이 왜 노동자들을 협력업체 통해 쓰는가? 도랑치고 가재 잡고 동전 줍고의 쓰리콤보 이익 페스티벌이기 때문이다. 일단 인건비나 노무관리비 등의 비용 직접적 절감이 그렇고, 노조 문제에서 자유로울 있으며 무엇보다 안전사고가 나도 최소한의 책임으로 방어할 있다.

 

지금 당장 가까운 기업의 사업장에 보시라. 공장 입구에 걸려있는 무재해 ㅁㅁㅁ 행진 같은 있다.  숫자는 회처럼 날로 얻어지는 아니다. 정규직은 무재해지만 비정규직은 무재해가 아니다. 위험한 일은 주고 외주화 해서 얻은 숫자.

 

최근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을 통해 우리 사회에 던져진 문장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은 그래서 의미가 있는 거다.

 

5.

시인이자 사회학자로 유명한 심보선 시인의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라는 산문집을 읽다가 '정규직은 축구를 하고 비정규직은 족구를 하는 사회' 라는 문장을 보았다.  페이지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난 시절의 회사 생활을 떠올렸고, 그간 나와 함께 일하던 수많은 비정규직들이 떠올랐다. 나 또한 오래 전에 비정규직이었는데, 사람이 서는 위치에 따라 풍경이 달라진다고, 퇴사 후에야 그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체육대회를 하네, 그룹 페스티벌에 가네 하며 정규직들이 우르르 몰려갈 공조와 에어컨이 꺼진 건물에 남겨지던 비정규직들이 떠올랐다. 시무식이네 종무식이네 하며 강당으로 몰려갈 자리에 남겨지던 비정규직들이 떠올랐다.  

 

내가 근무하던 곳에서는 화학약품 등의 위험물을 취급했기, AEO라는 국가 위험물 관리 준수 규정에 입각해 같은 작업장 안에서도 협력업체 사람과, 원청 직원의 네임텍 색깔이 빨강, 파랑으로 달랐다. 물론 색이 다른 네임텍을 하게 연유야 있다. 위험물 취급 어떤 문제가 생겼을 신속하게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별 거 아닌 색깔 때문에 같은 작업장, 같은 노동자 사이에 얼마나 선명한 선이 그어지는지는 경험한 사람만이 안다.  

 

원가 절감이익 실현하고 싶으면, 현장의 마른 걸레 짜고 짜지 말고, 연말이면 서로 자리싸움과 승진에 목숨 거는 먹물들 관리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물론 모두가 알면서도 모두가 못하는 일이지만.   

 

이 또한 이제 와 하는 말이다. 결국 이 글을 읽는 사람도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도, 너도 노동자, 나도 노동자인데, 을끼리 싸우게 만드는 사회 속에서, 퇴사 한 이후에야 이런 풍경이 절절이 떠오르는 나는, 역시나 좋은 사람은 못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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