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난번에 이어 일본 내 강제징용의 현장을 찾아 떠난 여행, 그 두 번째 이야기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야마구치현(山口県) 우베시(宇部市)로
이번 여행의 출발지로 잡았던 기타큐슈를 잠시 벗어나 저는 야마구치현(山口県)의 우베(宇部)라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에 한인 강제징용과 관련한 해저 탄광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 탄광의 이름은 '조세이 탄광(長生炭鉱)'입니다.
탄광의 흔적을 확인하기에 앞서 저는 일본의 시민단체인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의 공동대표인 '이노우에 요우코' 씨를 만나 함께 탄광 흔적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현장을 둘러보는데 이노우에 씨의 설명과 안내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니시키와(西岐波) 해변
한가롭고 평화로운 바다처럼 보이는 우베시 니시키와(西岐波) 해변 .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이곳에는 악명 높은 탄광이 있었습니다.
바다 위에 우뚝 서 있는 두 개의 기둥. 저 콘크리트 기둥이 바로 악명 높은 '조세이 탄광'의 흔적입니다.
‘피아(Pier)’라고 불리는 저 기둥들은 해변에서 1,000m까지 이어진 해저 탄광의 환기구이자 배수구입니다.
이 바다 밑 해저 탄광은 규슈 지역의 다른 탄광보다 훨씬 위험한 탄광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대동아(大東亜)’전쟁은 많은 물자를 필요로 했고, 채탄량이 많은 조세이 탄광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탄광이었습니다.
해변에는 이렇게 석탄 덩어리들이 아직도 굴러다닙니다.
당시 이 탄광에는 이미 여러 차례 해수 유입 사고가 있었던지라 이 지역 사람들조차 근무를 기피하는 탄광이었습니다.
이런 위험한 탄광에 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1939년부터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이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고 , 총 1,256명의 조선인이 근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야마구치현 탄광의 조선인 비율은 9.3%였으나 이 위험한 탄광은 조선인의 비율이 80%가 넘었습니다. 근무자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는 말이죠.
때문에 이 탄광은 '조세이' 탄광이 아닌 '죠센징' 탄광이란 차별용어로 불려질 정도였습니다.
사건은 1942년 2월 3일에 일어납니다.
해변에서 1,000m 떨어진 곳에서 갱도 내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당연히 갱도 안에 있던 근무자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갱도 밖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게다가 탄광 회사는 2차 피해를 막는다는 이유로 나무 판자로 탄광 입구를 막아버렸습니다.
이 사고로 183명이 갱도 내에서 수장당했고, 그중 136명이 강제로 징용되었던 조선인이었습니다.
일본과 탄광 회사는 이후 이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였고, 2000년대에 들어서야 추모비가 건립되고 진상규명을 위한 단체가 조직되는 등 뒤늦게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됩니다.
두 개의 추모비
해변을 마주하고 있는 주택가 사이에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작은 추모공원이 있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지 70년이 지난 2013년 2월에야 이 추모비가 건립되었습니다.
당시 사망한 조선인 136명과 일본인 47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집들 사이에 있어서 이곳에 추모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추모비가 건립된 것에 위안을 삼을 뿐입니다.
강제연행이라는 글자를 추모비에 포함하는 것도 우베시와의 7년간의 교섭 끝에 겨우 성사되었다고 합니다.
종종 한국에서 유족이나 관련 단체들이 방문하는 것 같습니다만 평소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근방에 사는 사람들도 이 추모비의 존재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추모비와 관련해 또 다른 비밀이 있었습니다.
이노우에 씨가 다른 추모비가 있다며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으로 안내합니다.
네? 또 다른 추모비라고요?
10여분 정도 숲을 헤치고 가니 숲속 공터에 오래되고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듯한 돌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비석이 서 있었습니다.
'조세이 탄광 순난자(殉難者)의 비'라고 쓰여진 이 추모비는 사고로부터 40년 후에 세워졌는데 정말 놀랍게도 일본인 희생자만을 기리는 내용이 적힌 추모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비석에는 강제 연행된 조선인이 어떤 사고로 왜 희생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있었던 것이죠. 게다가 순난자(殉難者)란 국가와 사회를 위해 고귀하게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희생된 사람이 모두 ‘황국신민(明治時代)’으로 오해하기 쉬운 비석이었습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유족들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이후에 저는 이노우에 씨와 탄광의 입구를 찾아보았습니다.
탄광의 입구는 이미 폐쇄되어 더이상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고 갱도로 진입하기 전 신변의 안전을 기원하던 신단(神壇)만이 남아있습니다.
억지로 끌려왔던 조선인들. 이 신단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녹슬고 부서진 삽이 기괴하게 보일 뿐입니다.
신단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바다와 바다 위의 낡은 콘크리트 탄광 기둥이 보입니다.
조선사람들이 갱도로 들어갈 때 이 말 없는 바다를 보며 들어갔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 동안 짧게나마 조세이 탄광에 관한 취재를 해 보았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저 바닷속에는 수장된 시신이 그대로 묻혀 있다는 것입니다.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거죠.
하루빨리 유골이 발굴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고향 땅에서 잠들어야 하는데 유전자 검사를 위한 유족들이 모두 고령이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사건을 2014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혼자서라도 이곳을 방문하고 취재하여 알려야겠다고 다짐을 했었습니다. 이미 종교단체 등 몇몇이 발굴과 유골 반환 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바다 속 유골 발굴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게다가 일본 정부는 이 사건에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2015년 일본의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산업시설들이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강제징용 현장과 흔적은 은폐되고 숨겨지고 있습니다. 이 취재가 작게나마 역사를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고 여건이 허락된다면 이런 내용들을 엮어서 짧게나마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세상에 알려 보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다만 생업과 병행하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래도 곧 역사 속에 묻혀 버릴지도 모를 사건을 딴지일보 지면을 통해 소개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는 오다야마로 찾아가 보겠습니다.
아래는 제가 기록한 조세이탄광에 관한 영상입니다. 제가 만들어서가 아니라.. 꼭 한 번쯤 이 영상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https://youtu.be/l7kwRbnBCnc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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