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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 우리 학교 교수님이 총선에 나가려고 준비한 적이 있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스타 의사 선생님이다. TV에도 많이 나온 사람이라 출마만 하면 당선은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선거사무실을 차린 지 며칠 만에 출마를 포기했다.

 

이유는, 각종 이익 단체에서 찾아와 돈을 요구했다는 거다. 그 교수님은 정치가 타락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솔직히 참 한심했다.

 

정치가 그런 줄 몰랐다고?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이 됐으면 더 큰 문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후보 선거운동을 1주일만 해봤어도, 아니 3일만 옆에서 지켜봤어도 그런 말은 안 나왔을 거다. 평생 고고하게 살아오기만 했지, 현실 정치는 하나도 몰랐던 것이다.

 

정치는 이전투구다. 공수처법만 봐도 그렇다. 공수처는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고, 여당에서도 힘을 실어주고 있다. 여론도 압도적 지지다. 하지만 진행은 지지부진 그 자체다. 검찰 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명분도 있고, 실리도 있는데 공회전만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치가 이처럼 엉망진창이고, 개혁이 더딘 이유가 뭘까? 당연하게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것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여러 번 권력을 쥔 '나쁜 놈'이 세상의 변화를 틀어막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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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 (1580~1658)

 

조선 시대에 김육이라는 사람이 있었다율곡이나 퇴계처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론에 머물던 대동법을 추진해 공납을 개혁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대동법은 16세기 율곡 이이에서 시작해 유성룡, 정철, 이원익, 한백겸, 윤선도, 조익 등의 지지를 받았다. 조선시대의 최고 천재라고 불리는 혹은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쟁쟁한 인물들이 주장했고 조선의 왕들도 여러 이유로 대동법을 시도하였으나  100년 이상 논쟁만 벌이고 시행이 되지 않다가 17-18세기에야 겨우 시행되었다.

 

엄청난 혁명 입법도 아니고, 집집마다 부과되는 세금을 토지마다 부과하는 것으로 바꾸고 현물 대신 쌀로 세금을 걷겠다는 단순하고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법이 입법되기까지 무려 150년이 걸렸다. 많은 명망가들이 주장했고, 왜란과 호란으로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르러 쌀이 필요하기도 했고, 공납의 폐단이 엄청나 국민들이 압도적 지지를 보냈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왜 그랬을까?

 

많은 역사가들은 대동법을 시행하게 되면 토지가 많은 양반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므로 대동법을 악착같이 반대했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대동법을 실시하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양반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대동법이 야기할 크고 작은 문제들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경우다. 지리산 어느 고을에서는 호랑이 가죽 하나를 특산품으로 올렸고, 완도 어느 고을에서는 전복 5개를 올렸다고 치자. 이게 대동법으로 바뀌면 호랑이 가죽 하나에 해당하는 쌀 2가마니, 전복 5개에 해당하는 쌀 0.1 가마니로 배정된다. 차이가 눈에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게다가 호랑이 가죽은 가격 변화가 심하기까지 하다.

 

한양으로 쌀을 가져가는 것도 문제다. 한양에 100가마니의 쌀을 가져가야 한다고 했을 때, 산꼭대기 고을과 강 옆 고을의 운송비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무사히 한양에 가져가는 것도 어렵지만, 어떤 기준으로 세금을 매겨야 공정하느냐는 문제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불평등과 불합리만큼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요인은 없다군현마다 대동법으로 공물 배정이 불공정하다고 아우성이 나면 수령과 현감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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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당시 대동법 시행의 담당자였던 김육이 활약한다.

 

김육은 대동법의 진정한 의미와 그 배경에 있는 공물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했고, 당시 사회가 농본사회에서 상업사회로 넘어가야 한다는 이론적 근거를 잘 이해했다대동법이 단지 공납 제도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변화하게 될 유통 경제상업 발달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끝없이 상소를 올리고반대파와도 싸웠다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선비들의 비난을 각오하고서라도 교묘하게 관직에서 반대파들을 퇴출 시키면서 대동법을 밀어부쳤다.

 

그는 감사와 수령젊은 관료들을 만나 끊임없이 그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내고책임지기 싫어하는 관료들이 대동법이라는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도록 용기를 복돋았다그의 노력이 빛을 보았는지전에는 주민들이 대동법을 지지해도 반대부터 하고 보던 수령들이 김육의 표현을 따르면 무언가 시도해 보고 싶어 하는 적극적인 젊은 수령들’ 로 바뀌었다.

 

김육은 진정으로 집요하고 끈질긴 행정가였다임종의 순간까지 대동법을 위해 노력했고마침내 그 해에 대동법이 충청도와 호남에서 시행되었다.

 

오랜 시간 대동법이 논의됐지만, 시행되지 않았던 데는 양반들의 반대뿐 아니라 정책 집행자들의 추진력 부족도 있었다. 그 문턱을 김육이라는 집요한 정치인의 노력으로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3.

 

개혁은 여러 이유로 실패하곤 한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이 눈에 보이는 현상만 해결하려고 '덤비는' 경우다. 그럼에도 이 방법은 선동적인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에 남용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벽이 갈라지면 갈라진 벽을 본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지반이나 땅 밑의 물줄기 같은 문제의 근원, 건물의 역학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는 파악하지 못한다. 인간은 개개인의 뇌 구조만 해도 웬만한 건물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체제로 되어 있다.

 

그런 인간이 수백, 수천만이 모이고, 서로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곳이 사회이자 국가다. 지식인이라고 해도 이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자신이 아는 지식은 이 구조의 극히 일부라고 자인할 만큼 겸손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논쟁을 하면 단순명쾌한 현상론자들을 이기기 힘들고, 한번 포퓰리즘이 득세하면 포퓰리즘 스스로 모순에 빠져 문제를 일으키고 파멸하기 전까지는 그 환각에서 헤어 나오기 쉽지 않다.

 

우리는 역사 속의 인물을 볼 때 그가 주장한 정책, 주의에만 과도하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짜 존귀한 인물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자신의 일처럼 절박하게 추진하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김육은 더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런 추진력을 보인 인물은 흔치 않았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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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표창원, 이철희 의원이 총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의정 활동도 잘 했고, 시민들에게 친숙하게 어필할 줄도 아는 의원들의 사퇴라 안타까웠다.

 

정치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다짐당리당략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정의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겠다는 초심이 흔들리고 위배된 것은 아닌가 고심하고 갈등하고 아파하며 보낸 불면의 밤이 많았다

 

표창원 의원의 이 불출마 선언을 읽고 김육이 떠올랐다.

 

정치는 올바름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쇼맨쉽도 필요하고, 협상도 때로는 협박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김육이 그랬던 것처럼, 진짜 중요한 일은 '절박하게' 추진해야 한다.

 

이 소중한 사람들에게서, 그 절박함을 찾을 수 없어 아쉽다.

 

나는 이 시대의 정치인들이, 행정가들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집요했으면 싶다.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신의 올바름을 언젠가는 세상에 관철시키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