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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9.월요일
임종금


 


0. 들어가면서


 


필자는 지금까지 딴지일보에 ‘청년 김대중에 대하여, 이완용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20세기 다시보기 1편’을 썼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공통된 반응은 ‘딴지일보 기산데, 웃기지 않고, 재미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졸라 고민했었다. 그러던 차에 헌법재판소의 신기에 가까운 판결이 나왔다. 필자 외에도 우리를 웃겨줄 사람은 참으로 많다. 헌법재판소, 청와대, 한나라당, 조중동, 뉴라이트를 잘 살펴보면 곳곳에 코믹한 이들이 널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들처럼 결코 웃길 자신이 없다. 양해 바란다.


 


1. 불안한 평화의 해체


 




지난 시간을 정리해 보자. 대한제국을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으로 일시적으로 힘의 균형 상태에 놓인 한반도. 고종 황제는 이 틈을 타고 근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근대적 사상이나 체제의 도입이 아닌, 돈 처발라서 물건 사오는 것으로 근대화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쨌든 난생 처음으로 칼자루를 휘두르는 고종 황제는 1900년을 신나게 보냈다. 그러나 고종 황제가 설칠 수 있는 전제는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균형이다. 이것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날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민중이나 개화파 세력, 위정척사파 세력 중 어느 세력도 절대적으로 고종 황제를 지지해 주는 세력은 없었다. 그리고 고종 황제가 두려워 하는 일들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러시아가 먼저 움직였다. 러시아는 중국의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만주를 사실상 점령하였다.(1900년) 그러자 일본은 영국과 함께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심각하게 전쟁을 고려하였다. 껄끄러워진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군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쫀 것이다. 러시아가 쫄다니? 이해가 안 되실 독자제위들이 많을 것이다.



러시아가 쫀 근거는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는 일본군을 보고 쫀 것이다. 러시아는 스무스하게 만주와 한반도를 먹을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일본의 국력은 만만치 않았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일본 애들 한테 질까봐”라고 큰 소리는 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아, 씨바 이러다가 개쪽 당하는 거 아냐?’ 한 줌의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철군 선언은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하지만 러시아가 순순히 만주와 한반도를 포기하리라 생각하는 바보는 없었다.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과 영국은 1902년에 영일동맹을 맺었다. 영일동맹을 맺자, 러시아도 그에 필적하는 동맹을 맺어야 했다. 그래야 외형적으로 균형이 맞춰지니까. 당시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영국, 일본은 암묵적인 한 편이었고, 러시아와 독일·프랑스도 암묵적인 연대 관계에 놓여 있었다. 문제는 영미일 동맹은 매우 튼튼하고 견고한 동맹이었고, 러시아와 독일·프랑스는 그다지 튼튼한 동맹이 아니었다. 러시아 혼자만 사활을 걸고 있었을 뿐, 독일과 프랑스는 동아시아 정책에 시큰둥 하였다.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그것은 유럽에서의 영국 견제용으로 맺은 한정된 동맹이었다. 러시아가 하도 다그치자 영일동맹에 대응하여 프랑스·러시아 선언을 했지만, 별 관심은 없었다.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고, 미국의 후원도 얻어내게 된다. 한데, 러시아는 동맹군을 찾지 못했다. 이미 힘의 균형은 깨어지기 시작했고, 만주와 한반도에는 서서히 전쟁의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러시아는 1902년 한 해 동안 졸라 고민을 하다가 결단을 내리게 된다. 바로 ‘전진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한반도와 만주를 대놓고 먹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국력이 생각보다 만만찮고,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밀어주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설마 그래도 일본에게 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2. 한반도 분할론


 


얘기를 좀 딴 곳으로 돌려보자. 여러분은 우리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시는가? 중요하다고 들었지만, 얼마나 중요한 지 그리 감이 잘 오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본인도 국제외교나 국제정치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따로 설명할 방법은 없고, 역사적으로 그 중요성을 한 번 설명해 보고 싶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가장 신경을 쓴 곳이 한반도이다. 그러다보니 양측은 사력을 다하기 나름이고, 그러면 엄청난 희생과 소모가 일어난다. 그래서 부담을 느낀 세력은 한반도를 절반이라도 가지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한반도 분할론이다. 잠시 한반도 분할론의 역사를 정리하도록 하겠다.



처음 한반도 분할론이 나온 것은 임진왜란(필자는 동북아 전쟁, 혹은 조일전쟁이라 부르고 싶다. 북한에서는 임진전쟁이라고 한다고 들었다.)이었다. 일본이 파죽지세로 조선을 점령해 나가고, 명나라 지원군이 첫 전투에서 패배하자, 깜짝 놀란 심유경(명나라 대표)은 ‘대동강 분할론’을 협상카드로 들고 나온다. 대동강 이남은 일본꺼, 대동강 이북은 명나라에 합병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는 명나라 체면도 안 서는 일이고, 조선의 극렬한 반대로 폐기되었다.



임진왜란 다음해(1593년), 이젠 일본군이 명나라와 조선, 의병들의 공격에 밀려 쫓기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본이 한반도 분할론을 제시하였다. 충청도와 전라도·경상도 플러스 경기도 혹은 강원도 중 하나를 일본이 가지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국력이 쇠약해지던 명나라로서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역시 명나라의 체면과 조선의 극렬한 반발로 간발의 차이로 분할론은 채택되지 못했다. 우리로서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근대로 오면서 청일전쟁 직전에 영국이 한반도 분할론을 제기하였다. 영국은 ‘충청도 아산 이남은 일본 영토로 하고, 아산부터 한반도 중북부지역까지는 중립지대, 한반도 북부지역은 청나라 영토로 하면 어때?’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이 이를 거부했다. 일본은 청나라와 붙어볼 만 했으며, 결정적으로 한반도를 완전히 차지하지 못한다면 일본의 급속한 산업화로 일어나는 각종 부작용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하지 못했다면, 경제공황으로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 컸다. 개항이 몇 년 만 늦었더라면 적어도 일본에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 번째(너무 많아서 카운터를 해야 겠다.) 분할론은 1896년에 일본이 제시한 것이다.(분할론을 잘 살펴보면 '힘의 열세'인 쪽이 '그나마 반이라도 가지고 싶다'는 욕망에서 먼저 제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본은 1896년 당시에는 아무래도 러시아와 붙어서 이길 자신이 없었고, 이미 아관파천으로 친일개화파정권이 무너지면서 조선 내부에 개입할 끈도 떨어졌으므로 북위 39도선 이남을 일본이 차지하고, 나머지는 러시아가 차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이 협상은 애매하게 타협되었다. 러시아가 거절하기는 했는데, ‘직접 점령은 그렇고, 세력권 정도로는 괜찮다.’는 정도로 합의를 봤다. 그러니까 북위 39도선 이남에서는 일본이 경제적 이권을 챙기고, 북위 39도선 이북에서는 러시아가 경제적 이권을 챙긴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분할론은 이제 영일동맹으로 외교적으로 쪽수가 딸리게 된 러시아가 제안한다. 북위 39도선 이남은 일본이 가지고, 그 이북은 중립지대로 두고, 러시아는 만주까지 먹겠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그냥 적당히 만주까지 먹고 싶었고, 그렇다고 일본이 한반도를 다 먹게 두면 곧 만주까지도 노릴 테니 중립지대를 주어서 시간을 벌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깔끔하게 거절하였다. 왜냐?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고, 특히 러시아가 먼저 분할론을 제의하는 것은 러시아가 쫄았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여섯 번째 분할론은 1945년에 있었던 분할론이다. 일본은 패망하더라도 대만과 한반도는 여전히 일본의 영토로 두고 싶었다. 그러나 연합국은 이를 거절했다. 다급해진 일본은 패망하더라도 서울 이남은 일본이 가지고, 서울 이북은 연합국이 점령하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연합국이 거절한다.


일곱 번째 분할론이 바로 38도선 분할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로 실현되었다. 이것을 먼저 제안한 측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의 마음이 급했다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먼저 제안하는 쪽이 늘 불안하거나 열세인 상황이다. 미국은 일본을 조지느라 한반도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고, 소련은 파죽지세로 한반도로 남하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반도를 내 주면 동아시아에서 주도권을 놓칠 수 있으므로 미국은 38도선 분할을 제안하였고, 천만 뜻밖에도 소련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한반도 분할은 7차례에 걸쳐 논의되었고, 최종적으로 현재 분할된 상태에 놓여 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관계는 임진왜란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 지정학적 관계를 극복하려면 한반도의 힘이 강해지는 방법 밖에는 없다. 설령 어찌저찌해서 우리가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다시금 우리의 힘이 약해지면 한반도 분할론은 어김없이 튀어나올 것이고, 또 불행한 역사는 반복해야 한다.


 


불행한 사람 하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고종 황제이다. 앞선 1900년에는 신바람을 좀 날렸는데, 1901년부터는 그렇지 못하다. 이제 전쟁을 막기 위한 고종 황제의 발버둥을 살펴보자.


 


3. 고종 황제의 발버둥



고종 황제는 개인적인 역량이 뛰어나질 않았지만, 대한제국 건국과 황제 즉위로 모든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당연히 외교권도 자신의 것이었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실행하였다. 자, 고종 황제의 원맨쇼를 감상하자.


 




고종 황제는 그리 똑똑하질 않았지만, 왕 노릇만 30년 이상이다. 눈치 코치는 제법 있었다. 이미 돌아가는 것이 심상찮다고 느낀 고종 황제는 방법은 하나 뿐이라고 판단하였다. 바로 ‘중립화’이다. 중립화를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종 황제의 생각은 ‘열강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고종 황제가 가장 신경을 쓴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 공사가 올 때마다 친히 수많은 부탁을 했다. 그럼 왜 미국인가? 고종 황제가 생각하기에 미국은 영토가 충분히 크기 때문에 타국을 침략할 이유가 없었고, 따라서 제국주의적인 성격이 없으면서도 충분한 국력을 갖춘 나라였다. 미국이 제국주의적 성격이 없다는 것은 당시 개화파들의 생각이었고, 고종 황제는 이 생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그럼 신미양요는 뭘까? 미 아시아 함대의 렙업 작전인가? 당시 개화파들에게 참으로 묻고 싶은 것이다.


미국은 당연히 제국주의 국가였고, 아시아에서 세력 확대를 위하여 일본·영국과 친한 관계였다. 고종이 아무리 미국 공사를 불러서 어르고 달래도, 콧방귀 하나 뀌지 않았다. 미국의 반응이 없자, 고종 황제는 독일과 러시아, 일본 등에게 중립화를 해 달라고 빌다 시피 하였다.



한 예를 들면 1899년 6월에 독일 황제의 동생이 우리나라에 온 적이 있었다. 독일이 대한제국 정부에게서 얻은 당현금광을 시찰하기 위해서 온 것에 불과했다. 어쨌든 고종 황제는 독일 황제의 동생을 위해서 서울에서 당현금광까지 도로를 깔고, 전화선을 놓고, 훈장을 주는 등 극진하게 보살폈다.


이렇게 빌다시피 하면서 애걸하던 중, 고종 황제에게 우군이 나타났다. 바로 프랑스이다. 프랑스는 동아시아의 현상 유지를 바랬고, 그것은 고종 황제의 중립화론과도 일정 부분 통하는 것이 있었다. 고종 황제는 프랑스 사람들을 주요 기관에 고문으로 초빙하는 등 프랑스를 잡아 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프랑스는 1900년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거의 꺼버렸다.



이후 러시아 군대가 만주를 점령하는 등 불안한 평화가 깨질 상황에 놓이자, 고종 황제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온 유럽에 ‘특명전권공사’를 파견하였다. 보통 개항을 하고 국교를 수립하면, 상호 간에 공사를 파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공사를 파견하지 않았다.(고종 황제가 공사를 파견하지 않은 것은 비용 문제도 만만찮았고, 미국을 매우 신뢰했기 때문에 미국만 잘 다독이면 외교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늘 외국 공사가 우리나라에 부임할 따름이었다. 고종 황제는 그제서야 공사를 파견하고, 엄청난 뒷돈을 챙겨 주었다. ‘특명전권공사’는 “외교가 안 되면 아가리를 찢어서라도 돈을 멕여라”는 고종 황제의 밀명(+로비자금)을 받고 유럽으로 떠났다.


고종 황제의 발버둥은 눈물겨웠다. 이러는 와중에 적십자회의, 만국평화회의 등 국제회의에도 사절단을 파견하려 애썼고, 중립국이 된 벨기에와 수교를 하면서 중립국이 되는 비결을 캐물으려 애썼다. 물론 캐묻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또한 각 국 정상들에게 편지를 수없이 쓰고, 훈장과 관작을 보내고, 온갖 국제기구에는 싸그리 다 가입하는 등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1899년에서 1902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고종 황제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은 하였다.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고종 황제가 기댄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위에서 말한 대로 영국과 일본의 위세로 살짝 쫄아 있었다. 러시아는 만주만 먹어도 상관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1903년에 고종 황제의 중립화를 지지했으며, 이를 협의하기 위하여 위베르라는 외교관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중립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고종 황제는 당시 ‘이만하면 중립화가 가능하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단순한 중립화가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를 제어할 뭔가가 있어야 했지만, 고종 황제는 거기까지 생각은 미치질 못했다.


 


4. 용암포 사건


 


고종 황제가 중립화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사이, 1903년 5월. 러시아는 전진정책의 일환으로 해군을 동원하여 용암포(용암포는 의주 바로 아래쪽에 있다. 이미 의주는 러시아가 벌목권을 획득하면서 러시아의 세력으로 넘어가 있었다.)를 점령하였다. 무력이고 불법적인 강점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용암포를 조차해 달라’는 것이었다. 과정은 불법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되었으니 이를 합법적으로 허용해 달라는 것이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다.



이에 일본과 영국은 크게 반발한다. 겉으로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해한 불법점령’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속으로는 ‘씨바, 아직 전쟁 준비 덜 됐단 말이야!’라는 것이다. 러시아가 먼저 이렇게 치고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일본은 일단 러시아와 협상을 하기로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대한제국 정부에 2가지 압력을 행사한다. 하나는 ‘설사 니네들이 조차협정을 맺더라도 불법적인 과정으로 맺어진 것이므로 나는 인정 안한다. 그리고 러시아와 협상을 할 테니 조차 협정 맺지 말고 입 닥치고 있어라.’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은 당시 조차협정을 책임지던 조성협이라는 이를 조사하고, 그의 약점을 캐내어 그의 직위해제를 요구하였다. 일본으로서는 어떻게든 용암포 조차를 막아야만 했다. 그것은 일본은 의주와 용암포가 러시아의 군사거점으로 되는 것을 막는 것이며, 예전부터 일본이 노리던 경의철도부설권 획득 시도에 용암포 점령은 큰 장애물이었다. 일본은 경의철도를 만주철도와 연결하여 만주진출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일본은 고종 황제를 압박하여 경의철도부설권을 따 내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의주와 용암포를 개항하라고 하였다. 의주와 용암포를 개항하여 무역항이 되면 사실상 러시아의 것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러시아가 불법적인 행동을 했으니, 우리 일본도 상응하는 자유행동을 할 수 있다.’고 고종 황제를 압박하였다.



결국 고종 황제는 용암포를 러시아에게 조차하지 않았다. 물론 이미 러시아는 용암포를 러시아 영토로 간주하고 이름도 ‘니코라이 항’이라고 지어놓았다. 하지만 일본은 러시아의 기습 행동에 적절히 대응하여 일본이 원하던 철도부설권도 따내고, 시간도 충분히 끌었으며, 조차가 아니라 러시아의 불법점령으로 하여 러시아의 모양새를 나쁘게 만들었다. 아마 러시아 뜻대로 순조롭게 되었다면, 러시아는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견고한 요새를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1903년 11월이 되면 러시아 동양함대가 인천에 입항하였다. 일본도 함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러일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5. 다른 사건들


 


이렇게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 국면으로 들어서는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럼 이 기간(1901년~1903년) 동안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고종 황제의 근대화 정책이 약화되고 있었다. 고종 황제는 외교력에 힘을 쏟고 있었고, 서구에서 도입한 시설도 계속 들어서고 있었지만, 이미 지출액은 크게 감소한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가장 큰 문제는 제일은행권의 유통이었다. 일본은 용암포 사건을 빌미로 제일은행권을 불법적으로 유통시켰다. 당시 대한제국의 백동화는 고종 황제가 재정확보를 위하여 남발되어 화폐의 신뢰성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일본의 제일은행권이 유통되자 백동화의 가치는 대폭락 하였다. 사실상 이 시기부터 대한제국의 경제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러시아는 앞서 살펴본 대로, 머뭇거리는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은 일본의 만만찮은 국력과 영일동맹의 탓도 있겠지만, 러시아 내부의 문제도 심각하였다. 1901년에는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등에서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학생 폭동도 일어났다. 이 시기 러시아 혁명을 이끌 사회혁명당과 입헌민주당도 결성되어 반정부 세력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텍사스에서 유전이 발견되었고, US스틸이 설립되고, 포드 자동차 회사가 설립되었다. 1903년에는 파나마 운하를 영구 조차하여 파나마 운하를 점령하였으며, 비행기가 발명되고,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다. 미국은 20세기 최강국으로 이미 떠오르고 있었다.


 


6. 예고


 


드디어 시작된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 그러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준비가 ‘잘 된’ 일본과 준비가 ‘잘 안 된’ 러시아의 차이는 글자 한 자의 차이를 넘어서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고종 황제는 1897년부터 휘두르던 칼자루를 결국 빼앗기게 되었고, 일본은 차곡차곡 한반도 식민지화를 시작한다.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드디어 우리 민족 안에서도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임종금(lim149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