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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9.월요일
파토






지난 10월 8일 성공회대에서 펼쳐진 노무현 재단 출범 기념 공연. 관람기를 썼으니 읽은 분들은 알겠지만 이제 ‘지켜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로 대변되는 눈물과 회한의 감정은 떨쳐 버리고 밝음과 희망으로 뜻을 이어나가자는 분위기가 충만했었다.


 


맞는 이야기다. 언제까지나 울고 있을 수도 없고 분노에 떨고만 있을 수도 없다. 그 상태로는 자칫 마음과 몸에 병이 들게 된다. 병든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설사 간다 하더라도 건강한 사람보다 훨씬 더 힘들고 지치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밝음을 되찾고 에너지를 충전해서, 노무현을 통해 우리가 실현하고자 했던 꿈을 향해 다시 나가야 할 때다. 그 방향이 어디인지, 만약 최종적인 목표 지점을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사람 사는 세상’이 되겠지만, 현실 속에서 조금씩 실현해 나가기 위한 방편이자 무기로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아래의 한 문장일 거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


 


여기서 ‘최후의 보루’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시민의 각성과 그 각성된 의식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 민주주의 정신의 가장 깊은 뿌리라는 원론적인 뜻이고, 또 하나는 말 그대로 민주주의가 위기나 한계에 부딪혔을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최후의 실천 방법이 바로 조직된 시민의 힘이라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다. 4.19나 6.10 같은 역사의 고비에서 우리는 그 힘을 아주 직접적으로 경험했었고, 상황은 좀 다를 망정 촛불을 통해 분명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다들 느끼다시피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이 두 번째 의미가 더 실감나게 와 닿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의 가장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모습이라면 ‘혁명’을 통해 세상을 뒤집는 것이겠지만, 이게 왜 해서는 안되고 할 수도 없는 건지에 대해서는 다들 아실 거다. 그런 무리한 접근은 과정과 결말이 항상 좋지 않았다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 모두 배워 왔다고 할까.


 


그래서 결국 시민의 힘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방법은 선거로 귀착된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은 지금의 세상 돌아가는 꼴을 참기 힘든 니들이라면, 다음 선거에서는 반드시 민주주의의 이상과 꿈을 다시 이어갈 수 있는 정당과 정치인에 투표함으로써 정권 교체를 도모해야 하며, 그런 노력이 가장 일차적인 실천 과제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그런 노력만으로 세상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믿는다면 그건 순진한 환상에 불과하다.


 






일단 지금의 정국을 냉정히 직시해 보자. 저쪽에는,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 여부와 무관하게 결국은 대통령의 기회를 얻을 거라고 국민 모두가 생각하는 박근혜가 버티고 있다. 아무리 주판알을 굴려봐도 정권 교체가 실제 가능하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다.


 


우리에게도 마냥 인물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향후 3년 동안 박근혜에 대한 대항마로 성장할 수 있을 정도의 대중적 지명도와 지지도를 동시에 가진 사람이 있을지, 회의적인 것은 나만이 아닐 거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지난 10년 세월이 무위로 돌아가고 노무현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 참혹한 경험으로 미뤄 볼 때, 다시 정권을 잡는다 한들 또다시 그런 식의 결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는 거다. 그렇게 믿기에는 저들의 힘이 너무 세다.


 



우리는 2004년 탄핵 시점에서 저들이 이 사회의 저변에 뿌리박아 둔
힘의 관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 뼈저리게 깨달았어야 했다. 그리고 단지
탄핵을 저지한 승리감에 기뻐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할 뻔 했던
 저들의 힘의 뿌리와 본질에 대해 더 숙고하고 대비했어야 했다.


 


그래서 바로 이 지점에서 ‘깨어있는 시민’과 ‘조직된 힘’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를 활용해서 과거 노사모와는 또 다른 차원의 실제적이고도 영속적이고 범국민적인 힘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다. 그렇지 못한다면 정권 교체는 고사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떠들기만 하다가 말 것이고, ‘사람 사는 세상’은 그저 티셔츠에 쓰는 슬로건으로나 남게 된다. 우리 또한 피로와 환멸 속에서 그저 좀 나은 땅으로 이민이나 가려 들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노무현 추모 행렬에서 봤듯 깨어있는 시민들의 수가 이 사회에 마냥 적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직된 힘이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그저 막막한 게 현실이다. 결국, 분명 존재하고 또 드러났던 시민들의 바램과 감정을 어떻게 진정한 힘으로 풀어 내느냐는 거다. 그래서 다시금 노무현 당선 시점의 열정과 실천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다.


 


하지만 이제는 당시 그 모든 것의 구심점이었던 노무현이 없다. 노무현의 후계자로서 다양한 인물이 물망에 오르지만 그들 모두를 합쳐도 당시 노무현만큼의 무게가 실리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목표를 행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민의 힘을 조직하고 끌어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모든 접근을 초월한, 철저한 발상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겪고 또 좌절해 온 수많은 한계와 장벽을 극복하고 다시금 세상의 흐름을 제자리로 돌려 놓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 더욱 살기 좋고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사회를 건설해 가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아래의 한 단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만 한다.


 


바로,


 


직 접 민 주 주 의


 






이 문제에 대해서 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현재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체제는, 제대로 작동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모두 ‘선거권 = 민주주의’ 라는 등식을 기반으로 한 간접/대의민주제를 표방하고 있다(스위스 등 일부 국가의 일부 시스템은 예외). 그리고 이것이 민주주의의 궁극이자 완성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오랜 세월 지속되어 왔다.


 


허나 이렇게 대의민주제가 민주주의 그 자체와 동의어가 되어 버린 것은 민주주의의 이상과 목표가 거기에 있어서가 아니라, 18,9세기 근대적 민주제 성립시의 한계 때문이다.


 


일단 당시에는 직접민주제의 운영이 물리적으로 아예 불가능했다. 직접민주제가 실제 시행된 바 있었던 2천여 년 전 아테네는 인구가 고작 8만 명 정도에 불과했고, 여기에서 남자 성인들, 즉 ‘시민(Polites)’의 수는 훨씬 더 적었다. 그러나 사회의 덩치가 이보다 조금만 더 커져도 금방 기술적, 현실적인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


 


또 옛날에는 귀족이나 성직자, 정치인, 돈 많은 상인 계급 등이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고 있었고 대다수 시민들은 고등 교육의 혜택은커녕 글조차 읽지 못하는 상태로 평생을 살았다. 이런 상황이 경제와 산업, 정치 모든 면에서 빠른 발전을 이룩했던 구미에서도 20세기 초,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 시대라면 고등 교육의 혜택을 받은 소수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위임 받고 나머지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물론 이런 여건은 지식인과 부자, 위정자들에 의해 권력유지를 위한 방편으로도 적극 이용되어 왔다).


 



루이스 하인 작 ‘Breaker Boys’(1910)
하층계급에서 태어나 글자보다 망치질을 먼저 배워야 했던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책도 참정권도 시민주권도 아닌
당장의 빵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다들 기억하듯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을 사실상 인터넷으로 뽑았고 촛불 집회를 인터넷으로 주도했으며 개인들이 생중계도 했다. 굳이 그런 부분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을 조금만 둘러 보면 정보와 의견의 실시간 교환 및 분석, 집계 등 인터넷을 활용한 직접민주제운영을 위한 물리적, 기술적인 인프라가 진작에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지금 우리들은 더 이상 문맹이나 준 노예의 무지몽매한 상태에 빠져 있지 않을뿐더러, 사실 지난 세기의 상류층 자제들보다도 더 질 높은 교육을 일상적으로 받고 있다. 그리고 시민의 정치적 책임 의식과 주인 의식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고, 촛불은 바로 그 증거다.


 


반면 우리가 주권을 위임한 위정자들은 긴 세월 동안 사리사욕을 앞세우며 국민들에게 실망을 넘어 절망과 환멸만을 안겨주고 있지 않았던가?


 


물론 직접민주제 도입에 위험성이나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위 말하는 ‘중우정치’, 포퓰리즘의 문제도 있다. 그러나 최근의 경험들과 지금의 상황은 그런 부담을 두려워하기에는 너무나 부정적이고 또 심각하다. 일반 시민들이 과연 충분한 주권의식과 판별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비판이 있을 것이나, 거기 대해서는 책임과 권한이 주어질 때 사람은 그만큼 성장한다는 직접민주제의 바탕에 깔린 기본 원리로 답하고 싶다. 물론 시행착오는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대의민주제하에서는 우리가 뽑은 사람들이 실제로 우리의 의사와 이익을 대변한다는 보장이 없다. 열분들 중 국회의원들을 ‘국민의 대표’ 라고 실제로 느끼는 분은 몇 명이나 되는가? 개인의 인격 문제를 떠나, 기득권층의 전횡이나 일부 권력에 눈이 먼 위정자의 탐욕에 쉽게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대의민주제는 태생적으로 갖고 있다.


 



노무현 탄핵 책동은 수구기득권층이 국민을 상대로
벌인 쿠데타나 다름 없다. 비록 그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 중 아무도 국민을 기만한 죄로
벌을 받지 않았고 결국은 얼마 안가 이 나라를 접수하고 만다.


 


이런 현상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계속 벌어지고 있으며, 대의제가 지배하는 한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결국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의제의 허울과 한계를 조금씩 벗어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국회를 해산하고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전면적인 직접민주제를 시행하자는 건 아니다. 그것은 누가 봐도 가능하지 않고, 또 바람직한 접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공들여온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그 꿈이 최악의 좌절로 귀결된 지금, 비민주적 정치 세력과 탐욕에 눈이 먼 기득권층의 전횡을 견제하고 민의를 실제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직접민주제적 발상과 장치가 꼭 필요하다는 말이다. 바로 그걸 지금부터 모두 대놓고 이야기하고, 함께 궁리하고 또 준비하자는 거다.


 


사실 이를 위한 시스템이나 장치는 현 단계에 맞게, 정체(政體)나 헌법, 현행법 등에 저촉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고안하고 도입할 수 있다.


그 중 직접민주제의 기치를 내걸고 벌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사업은 온라인 상에서 수십,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거대 민간 상설 투표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중요한 국가적 현안에 대해 찬반 투표를 실시하는, 일종의 온라인 상설 국민투표장을 설립하는 거다.


 


이건 기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다소의 자본과 인력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준비할 수 있다. 잘 만들기 위해서는 보안시스템 등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지만 그런 건 노력으로 해결이 가능한 것들이다.


 


물론 민간 투표니 법적 구속력은 없다. 그러나 충분히 많은 인원을 통해 민의의 향방을 직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를 통한 정치적 영향력과 압력의 행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것은 불과 1,2천 명의 표본을 통한 기존의 여론조사나 포탈 사이트의 찬반 투표 따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사실 이것은 필자가 ‘국민 폴’ 이라는 이름으로 6,7년 가까이 구상해 왔고 이명박 집권 이후 고비 때 마다 제안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오랜 생각 끝의 결론은 한 사람이 개별적으로 계획을 세워 제시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너무도 큰 일이며, 너무도 중요한 일이며, 너무도 민주적인 일이다. 보다 큰 틀 안에서 다양한 논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4대강이나 미디어법, 세종시, 용산참사 처리 문제, 민영 의료보험 같은 주요 이슈를 이 시스템을 통해 투표한다면 말 그대로 진짜 국민의 뜻을, 큰 무게를 실어서 보여 줄 수 있다. 이것이 성공적인 형태로 범국민적으로 운용될 수 있다면 우리나라 정치 권력의 의미와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 버릴 지도 모른다.


 



고대 아테네를 연상케 하는 스위스의 투표 광경.
그러나 사실 스위스의 국민 투표는 이런 모습 보다는
3개월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지고 우편투표도 가능하다.
자세한 정보와 생각할 시간을 갖고 편리하게 참여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세계최고의 인터넷망이 이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이보다는 좀 간접적인 형태지만, 과거 노무현이 취한 방식(개혁당, 노사모 등)을 발전시켜 일반 당원들의 의견이 의사 결정 과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개념의 정치 단체를 설립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노력은 기존의 보스 중심 정당의 구태를 극복하는, 민주적이고도 혁신적인 정당의 창설이라는 열매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현재 유사한 움직임이 다소 있지만 직접민주제의 기치를 걸고 있지는 않다).


 


그와 동시에 직접민주적 권력분산을 지향점으로 하는 시민단체나 다양한 모임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고, 이런 여러 집단과 움직임이 직접민주제라는 보다 큰 기치하에 한데 모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하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시민 개개인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방법은 수십 가지라도 찾아내고 또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우리가 가는 길은 ‘정권 교체’에만 목을 매는 지금까지 정치의 틀을 초월해 버린다.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더 이상 마음대로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탄탄한 민의의 결집된 힘이 거기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간 이 땅을 지배해 왔던 기득권층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진실된 힘이요, 또 진정한 권력 분산과 시민 주권의 실현이라는 원대한 방향으로 이 나라를 끌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실 대통령 노무현의 가장 큰 한계는 기득권층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체제와 시스템, 게임의 룰 속에서도 그 자신과 정부의 도덕성만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가 대통령이 되는 역사적이고도 상징적인 사건(분명 그러했지만)을 통해 ‘내일부터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거라고 믿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노무현은 너무나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사람이었기에 혁명이나 숙청을 통해서나 가능할 거대한 변화가 반대의 행위, 즉 ‘권력을 내려놓음’을 통해 이루어질 거라고 꿈꿨다. 그리고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실패는 결국 우리에게 바른 길을 보여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런 이유 때문에 인간 노무현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러나 다시 그런 오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고, 그가 겪은 좌절과 비극이 이 땅에서 반복 되게 해서도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발상을 통해 판을 새로 짜는 방법밖에 없다. 숨죽이고 물러나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정치 실험보다도 더 크고 더 근본적인 도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노무현 사후 지난 몇 개월 간 우리 사회의 전반적 흐름은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일련의 충격적 사건들의 여파는 결국 내면의 비분과 슬픔만으로 침잠했을 뿐, 진정한 시민의 힘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한나라당과 이명박은 다시 돌아온 지지도를 믿고 4대강의 추진은 물론 용산참사에 대해서도 무시와 함구로 일관하고 있고, 한때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덜 떨어진 인물을 총리에 앉히는 등 갖은 여유를 부리고 있다.


 



어떤 사람이 여든살 너머까지 살았다고 해서 다 ‘호상’인 것은 아니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자신이 평생 몸바친 민주주의가 상처받고 후퇴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슬픔과 분노 속에서 숨을 거뒀다. 무엇이 호상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토록 진하고도 강렬하던 비분과 슬픔이 힘으로 승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그 에너지를 행사할 구체적인 실천 방향이 제시되지 못했고, 건강한 출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4.19 때나 6.10 때와는 다른 세상이다. 벌어진 일들도 그때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따라서 그때처럼 시위하고 정권 퇴진 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다들 무의식 중에라도 느끼고 있다.


 


또 설사 정권을 퇴진시킨다 한들 어쩔 것인가? 4.19 이후에는 5.16이 왔고, 6.10 이후에는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었다. 모두가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믿은 ‘잃어버린 10년’ 다음에는 이명박을 간판으로 그 동안 이를 부득부득 갈며 내공을 쌓아온 수구 기득권층이 돌아왔다.


 



놀라울 정도로 지적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이명박은 실은 얼굴 마담에 불과하다. 그의 모든 행위가 권력을 쥐어준 채권자들인 수구기득권층에게 귀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개인이 실용이던 뭐던 나름 추구하던 것이 있다 한들 퇴임 후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사회의 숨은 지배자들에 굴복하지 않은 노무현의 전철을 결코 답습하지 않는다. 이 정권 하에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런 경험들의 반복은 우리를 일종의 정치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한다. 그러다 보니 그 거대했던 분노와 슬픔조차도 모여서 힘이 되지 못하고 결국 개인의 내면적 아픔과 상처로만 삭아 버리고 마는 거다.


 


직접민주제의 논의와 도입은 바로 이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해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접근법이다. 또 헌법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을 진짜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하고도 당연한 길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한 두 사람의 주장을 통해 정리되고 또 실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큰 틀 안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논의, 참여, 점진적인 확산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이런 발상이 가능하다는 것부터 시민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일은 직접민주제의 대의와도 어울리게, 이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각자의 오만 가지 생각을 마음껏 떠들고 나누기 시작하는 거다. 그럼으로 해서 활로가 보이지 않던 어둠 속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의 빛과 열정이 휘돌기 시작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일단 성공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실천 방안은 그런 공유들 속에서 하나 둘씩 쏟아져 나오게 될 거다.


 


그렇게 한 걸음씩, 진짜로 시민이 권력을 가진 세상으로 이노무 나라를 바닥부터 바꿔 나가는 거다. 쉬운 일은 아니고 당장 되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지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던 그 곳을 향해 가는 새롭고도 큰 길이다.


우리 손으로 이걸 할 수 있다면, 세상이 이렇게 멋진 일이 또 어디 있냐.


 


시작해 보고 싶지 않냐, 열분들아.


 


파토 (patoworl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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