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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은 척 매뉴얼 취지


 


본 기사는 각종 매체에서 이루어졌던 광고 아닌 척 책 소개하기식의 서적 광고도 아니고 필자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그 평가가 천차만별인 니맘대로 서적 리뷰도 아니다.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챌 수 있듯 본 기사는 한 해 평균 독서량이 짐승만도 못한 독자라 할지라도 각종 서적에 대해 누구 앞에서건 아무 거리낌 없이 읽은 척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시키는 데 그 총체적 목적이 있는 공리주의적 텍스트라 할 수 있으며, 일종의 인문학적 데자뷰 현상을 도모하는 학구적 심령기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생업에 지친 나머지 읽고 싶어도 책 읽을 기력과 의욕을 상실한 독자들에게, 설령 의욕이 있다 하더라도 직장 내 오랜 눈칫밥 습관으로 한 곳에 1분 이상 눈동자를 모으기 힘든 독자들에게, 그리고 어디 가서 모르는 책 얘기만 나오면 자아 한 곳에 치명상을 입는 가녀린 영혼을 소유한 독자들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 도서의 선정 이유


 



 


당 도서를 선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일 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는 점. 그리고 그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가장 알려진 소설이 <죄와 벌>이라는 점. 고로 읽은 척에 대한 우선 순위로 보자면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위치한다는 점.


 


둘째, 설령 당 서적을 만져본 적도 없다 할지라도 주인공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후 그 죄값을 치른다고 하는 대략의 내용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 사랑하다 죽었대요 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는 바, 자칫 한 줌의 줄거리만 믿고 호기롭게 읽은 척을 했다가 오히려 적들에게 정신적 관장을 당할 위험성이 매우 크다는 점.


 


셋째. 이명박 정부의 출범을 비롯하여 전직 유명 야구선수의 일가족 살해니, 초등학생 납치 살해니 하는 흉악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인간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라고 하는 대화가 빈번해지면서 당 서적에 대한 인용과 언급이 크게 잦아질 수 있다는 점 등이 그 선정이유 되겠다.



 읽은 척 매뉴얼


 


1)내용 요약


 


800페이지를 상회하는 살인적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대략적 사건, 사고를 요약하라고 한다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무지 간단하다.


 


한 청년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후 결국 자수한다.


 


조금 구체화 시키면 다음과 같다.


 


지적인데다가 타인에 대한 동정심도 풍부하지만 오직 돈이 없는 관계로 학업도 중단한 채 폐인생활을 하며 깊은 좌절에 빠진 주인공이 가진 거라고는 돈밖에 없는 전당포의 여주인을 살해한 후, 자수를 할 것인가, 자살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법망을 피해 살 것인가를 두고 박터지게 고민하는 와중에 자신의 가족과 친구, 연인의 도움(?)으로 일단은 자수를 했다가 결국 수형생활 중 깨달음을 얻고 영적 부활을 하게 된다. 


 


조금만 더 구체화 시키면 다음과 같다.


 


딱히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며 살인이 크나큰 범죄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23살의 가난한 법대 휴학생 라스꼴리니코프는 자신의 살인계획을 실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극단적 번뇌를 겪다가 결국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히고 설키면서 준비해간 도끼로 악덕 사채업자인 노파를 살해하고 뒤늦게 현장을 목격한 노파의 배다른 여동생이자 언니와는 달리 선량하고 인간적인 리자베따 이바노브나도 살해한 후, 극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는다.


 


자수를 하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자살을 하자니 또 그게 맘처럼 쉽게 안 되고, 자기 대신 살인 누명을 쓴 사람도 있겠다 낯짝에 공구리 치고 그냥 살자니 그것도 여의치 않고. 그야말로 뭘 선택해도 지랄 같을 수밖에 없는, 아니 지랄 같은 것 밖에는 선택의 보기가 없는 상황에서 우연히 알게 된 순결한 창녀 소냐에게 자신의 범죄사실을 고백한다. 물론 고백했다고 해서 주인공의 심경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기위안을 받고자 고백을 한 것에 대한 후회까지 엄습하며 더욱 극심한 자기혐오를 겪다가 결국 자포자기적 심정으로 자수를 한다.


 


그 후 여러 정황에 의거 징역 8년형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고 수형생활을 하던 중, 시베리아 감옥까지 따라온 소냐의 지극 정성을 통해 개과천선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2)읽은 척 스킬 구사하기


 


과거,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 대한 읽은 척 매뉴얼에서도 얘기한 바 있듯 소위 대문호의 작품을 읽은 척 함에 있어 가장 먼저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은 바로 오두방정이다. 밀란 쿤데라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전 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므로 더욱 그러하다.


 


용필이 형님이 ‘기도하는’을 선창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꺄~’가 터져 나오듯 누군가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마치 10대조 할아버지의 존함이라도 들은 것처럼 파르르 떨어 주는 것이 수고롭게 줄거리를 외고 주인공의 이름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읽은 척 묻어갈 수 있는 가장 무난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물론 몇몇 평론가 중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한 구시대적 작가라는 표면적 이유와 빠른 레벨 업을 위해서는 보스 몬스터를 잡아야 하는 내면적 이유로 일단은 까대기로 읽은 척을 과시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이즈 마케팅적 읽은 척은 많은 질문과 반박을 수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읽은 척 초심자에게는 매우 위험한 방법이라 하겠다. 게다가 그 정도 수준의 공격적 읽은 척을 시전하기 위해 섭렵해야 할 각종 자료의 양을 따져보면 차라리 진짜로 읽느니만 못할 수 있으므로 효율성 측면에서도 득이 없다 할 것이다.


 


다만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러시아 작가나 마르케스와 같은 남미 작가의 경우 그들 작품의 내용과 형식, 사상과는 상관없이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갖는 그 아스트랄함을 근거로 까대기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겠다.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꼴리니코프, 이브도찌야 로마노브나 라스꼴리니꼬바, 소피야 세묘노브나 마르멜라도바.... <죄와 벌>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고작 세 사람의 이름이 이러하니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람 이름이고, 이런 사람 열댓 명이 만나서 서로 출석이라도 부르면 어쩌란 말이냐며 난독증을 호소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은 척함에 있어, 유년 시절에 틀림없이 읽었으나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은 당시의 번역수준이 워낙 후져서 읽기는 다 읽었는데 남는 게 없었다는 식의 막무가내 우기기 스킬도 매우 유용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바이다. 예를 들어보자.


 







영희 : 철수야 너 혹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읽어 봤니?
철수 : 꺄~


영희 : 도스토예프스키의 심리 묘사는 정말이지 너무 섬세하다 못해 악마적이지 않니?
철수 : 물론이지. 하지만 난 어렸을 때 문고판으로 읽었어서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이것이 바로 오래 전부터 전해지는 고전이 현대인에게 주는 또 하나의 수혜라 할 것이다.


 


이상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은 척 함에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스킬이라 하겠다. 다음은 심화학습이다.



주인공은 왜 살인을 저질렀는가


 


<죄와 벌>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당 작품은 주인공이 왜 죄를 짓고 어떻게 벌을 받는가가 가장 핵심적인 테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당 작품을 진짜로 읽어낸 진상이 끼어 있는 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읽은 척 해야 할 상황이 장기고착화 될 경우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가 대체 왜 살인을 저질렀는가에 대해서는 십중팔구 대화의 떡밥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반드시 숙지해야 할 사항 되겠다.


 


게다가 줄거리 상으로는 몰락한 귀족 비스므레한 집안의 장남인 주인공이 돈이 없어서 학업도 중단한 채 폐인생활을 해왔다고 하니 당연히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너무 쉽게 추측함으로써 읽은 척의 출발선상에서 바로 지뢰를 밟는 허무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의 찢어지는 가난이 살인의 동기에 전혀 상관이 없었다고 얘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작품 밖에서 주인공을 범죄심리학적으로 분석할 때 문제제기를 할 수 있을 뿐이고 작품 내에서의 주인공은 자신의 살인이 돈과는 전혀 상관없음을 주장한다.


 


다음은 주인공이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한 대목이다.


 


“...중요한 것은, 죽였을 때 내게 필요한 건 돈도 아니었다는 거야. 소냐. 돈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 필요했어. 이제 이 모든 것을 알겠어. 나를 이해해 줘 소냐. 아마 같은 길을 가더라도, 다시는 절대로 살인을 하지는 않을 거야. 나는 다른 것을 알고 싶었어. 그것이 나를 충동질했어. 나는 그때 알고 싶었던 거야. 어서 알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이 : 벌레 이를 말함>인가, 아니면 인간인가를 말이야. 내가 선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아니면 넘지 못하는가! 나는 벌벌 떠는 피조물인가, 아니면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


 


여기서 권리란 주인공이 잡지에 기고했던 논문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라스꼴리니코프는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 즉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비범인은 역사상 위대한 공적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역사적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인명을 살상해도 되는 권리를 지닌 자들이라 주장한다. 이를테면 나폴레옹이나 마호메트 같은 인물들. 반면에 범인은 현존하는 질서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사람들로서 이들에게는 법과 질서, 도덕률을 초월할 능력이 없고, 이들이 하는 일은 오직 세계를 보존하고 종족을 번식시키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자신이 평소 생각했던 초인적 인간관을 기반으로 자기 자신도 나폴레옹처럼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인지, 즉 비범인에 속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얘기 되겠다.


 




결국, 주인공의 살인 행각은 돈때문도 아니고, 홧김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것도 아니며, 그의 무신론적 세계관이 투영된 치밀한 기획 살인인 것이다.


뭐, 그런 세계관이 태동된 이유 자체가 주인공이 헐벗고 굶주렸기 때문이라 우길 여지도 있는 것이므로 이왕 주인공의 살인 이유를 가난이라고 잘못 짚어 읽은 척이 초입부터 비상국면에 봉착했다면 근성을 갖고 끝까지 우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주인공은 결국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가


 


앞서 내용 요약에서도 밝혔듯 주인공은 결국 자수한다. 완전범죄로 법망을 피하는 것도 아니고, 자살도 아닌 자수를 하게 된다는 팩트도 물론 중요하지만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자수를 하는 순간의 심경이다.


 


고전은 왠지 바람직하다 못해 닭살스러운 결말로 끝날 것만 같은 지레짐작에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자수를 했다고 읽은 척을 할 경우 이는 다 된 밥에 정액을 방생하는 패착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예상과는 달리 주인공은 자수의 그 순간에도 자신이 저지른 죄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 유니크한 면모를 보인다. 물론 작품의 에필로그에서는 라스꼴리니코프가 소냐의 희생적, 기독교적 사랑에 힘입어 수감생활 중 마침내 대오각성을 하는 듯 보이는 장면이 연출되나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자신이 범인임을 자백하는 그 순간까지, 그리고 재판에서 형량을 선고 받은 후 1년여까지 주인공은 살해된 이들에 대한 죄의식이나 가족에 대한 미안함은 개뿔도 없다. 오직 자신이 살인을 감당할 그릇이 되지 못했다는 것, 즉 비범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열패감에 의한 자포자기적 심정만이 가득할 뿐인 것이다.


 


이는 마치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놀음꾼이 다시는 도박을 하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그때 밑천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심리와 유사하다(아닌 게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는 광적인 도박꾼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묘사하는 이명박?


 


19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명박을 알았을 리야 만무하지만 <죄와 벌>에는 마치 이사장님의 분신을 보는듯한 한 인물이 나온다. 물론 대문호의 작품을 읽은 척 하기 위해 굳이 이사장님까지 들먹이는 것은 외람스럽다 하겠으나 가끔은 작품 전체의 조망보다는 오히려 사소한 담소 거리가 상대에게 더욱 리얼한 읽은 척 포스를 심어준다는 점에서 활용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뾰뜨르 뻬뜨로비치 루쥔은 어려운 여건에서 권모술수와 아첨으로 자수성가를 이룬 탐욕적이고 거만한 인물로 마침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주인공의 집안과 연을 맺게 되어 라스꼴리니코프의 여동생인 두냐와 약혼하게 된다. 그러나 전해들은 얘기로 그의 인간됨을 혐오하고 있던 주인공은 실제 만난 자리에서 그의 언행을 통해 저렴한 인격을 직접 확인한 후 결코 결혼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라스꼴리니코프가 루쥔에게 발끈하는 대목이다.


 


“당신은 자기 약혼녀에게... 그 애한테서 결혼 동의를 얻는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이 무엇보다 기쁜 것은... 그녀가 비렁뱅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왜냐하면 아내를 가난뱅이 중에서 택하면, 이 다음에 그녀 위에 군림할 수 있고, 너는 내게서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냐고 나무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오?”


 


아내를 맛사지걸로, 비렁뱅이를 못생긴 여자로 교체할 경우 루쥔의 여성관과 이사장님의 여성관은 거의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겠다.


 


이사장님.. 아니 루쥔은 또 이런 얘기도 한다.


 


“...대성공. 요즘 말로 해서 진보는 이뤄졌습니다. 과학과 경제적인 진리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제가 지금까지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을 듣고, 이웃을 사랑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러면 저는 웃옷을 반으로 잘라서 이웃과 나눠 가졌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둘 다 반은 벗은 몸이 되었을 겁니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는 러시아 속담도 있지요.


 


그런데 과학은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개인적인 이익을 기초로 하고 있으니까요. 자기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자기 일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고, 또 웃옷도 온전한 채로 남게 되지요. 경제적인 진리는 사회에서 자리를 잘 잡은 개인 사업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즉 입을 만한 웃옷이 많으면 많을수록 공공의 사업도 자리를 잘 잡아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유일하게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챙김으로써 저는 그런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게 되고, 또 가까운 사람도 반으로 조각난 웃옷보다는 나은 것을 많이 얻게 됩니다...”  


 


만약 도스토예프스키가 루쥔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는 내용의 작품을 썼더라면 우리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미리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결국 루쥔은 라스꼴리니코프에 의해 결혼이 좌절된 것에 대한 복수를 그의 연인격인 소냐에게 비열한 방법(소냐의 주머니에 몰래 돈을 넣은 후 훔쳤다고 지랄)으로 시도하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탄로가 나는 바람에 개망신을 당한 후 사라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톨스토이의 <부활>


 


앞서 언급한 바 있듯,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임과 동시에 비슷한 시기를 살며 상호간의 교류도 있었고 작품 간의 미묘한 접점도 보여주고 있어, <죄와 벌>에 대한 읽은 척 대장정의 말미에 살짝 톨스토이의 <부활>을 언급한다면 그야말로 적들의 의심어린 눈길에 쐐기를 박는 화룡점정, 성동격서의 완벽한 마무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작품의 시대적 배경(농노제가 폐지될 즈음, 혹은 폐지된 직후)이야 말할 나위도 없고, 당시 하층민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접사촬영적 묘사, 남자 주인공의 추악한 행위(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남자 주인공 네홀류도프는 살인은 아니지만 고모네 집 하녀인 카튜샤를 강간해 아이를 임신시킴으로써 그녀를 파멸시킨다)에서 비롯된 내적 갈등과 기독교를 통한 회개, 각 주인공의 영적 부활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여인들의 등장(소냐와 카튜샤, 둘은 하층민의 삶을 대변하는 여인으로 둘 다 몸을 파는 창녀다), 러시아 정교회의 분리파에 대한 언급과 지지 등을 유사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눈치 빠른 독자라면 갑작스레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은 척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칠 경우에는 역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인용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본지에서 톨스토이의 <부활>에 대한 읽은 척 매뉴얼이 작성된 바가 없는 만큼 하나의 작품에 대한 읽은 척 매뉴얼로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임을 경고하는 바이다. 톨스토이의 <부활> 또한 그 분량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나, 사상의 깊이 면에서나 그리 만만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밖에


 


이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관계로 조금은 적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시전해야 할 스킬로, 고전문학이라고 하면 언뜻 연상되는 지루함과 촌스러움, 닭살스러움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요컨대 <죄와 벌>을 읽은 척 함에 있어 괜히 오바해서 그 두꺼운 책을 차력하는 심정으로 겨우 읽어냈다는 둥, 지겨워서 졸려 죽는 줄 알았다는 둥의 과도한 설레발은 오히려 읽은 척의 대장정을 한방에 무너뜨리는 악수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 되겠다. 왜냐면 당 작품은 마치 최근 히트를 치고 있는 스릴러 영화 <추격자>를 보듯, 혹은 인간 내면의 쓰레기스러움을 면도날로 묘사하는 것 같은 만화 <카이지>를 보듯 충분히 재미있기 때문이다.


 


물론 <죄와 벌>의 에필로그에는 주인공과 소냐가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맺고 종교적 구원을 얻는 등 마치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가 갑자기 로또에 맞아버리는 것만 같은 허망한 해피엔딩이 사족처럼 느껴지는 바도 있으나 총 6부에 걸쳐 전쟁씬을 방불케 하는 주인공의 내면심리변화와 서커스를 보는 듯 아슬아슬한 주변 인물간의 대립과 갈등은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하겠다. 마치 서스펜스 스릴러 소설을 보는듯한 느낌마저 든다 할 정도다.


 


고로 고전을 읽은 척 함에 있어 일반적으로 취하게 되는 행동양식인 감동 먹은 척 퍼포먼스나 심드렁한 척 표정관리 보다는 눈망울을 반짝이며 재밌었던 척 하는 것이 당 서적을 읽은 척 하는 데는 오히려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할 것이다.






       


이상이다.


 


누누이 강조했듯 본 읽은 척 매뉴얼은 누군가에게 잘 알지 못하는 책 얘기로 불의의 일격을 당했을 때 자신의 자아를 방어하기 위한 호신용 매뉴얼일 뿐이다. 결코 자신보다 더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한 나쁜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끝으로 본 매뉴얼이 독자들의 마음의 안식을 얻는데 한 줌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종격투기에만 표도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전문학계에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