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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전 참가 후 다음 미션은 전화 돌리기였다. 일면식도 없는 수많은 사람에게 전화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일하지 않는 상황에서 설립 초기에 유대감을 늘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전화를 하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꼭 해야 하는 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드리기', '노조에 대한 의견이나 제보받기', '조합비 납부 방법과 사용처 안내하기' 였다.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고, 모르는 부분을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긴장됐다. 그래서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FAQ를 만들어 놓고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를 시작했다. 

 

나 : (쭈뼛쭈뼛)아..안녕하세요. OO노조 나야나입니다.

조합원 : 네? 어디라고요?

나 : 아~ OO 노동조합 부지회장 나야나입니다.

조합원 : 아~~ 안녕하세요!! 어머 직접 전화 다 하시는 거에요? 고생 많으시네요~

 

첫 전화를 시작으로 한 분 한 분 전화를 걸어 나갔다. 처음에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대부분 격려를 많이 해주셨다.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좀 쑥스러웠다. 예상과 달리 조합비의 사용처보다는 납부 방법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낸 돈이 어떻게 쓰일지가 가장 민감한 문제일 것 같았는데, 이제 막 걸음을 뗀 노조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그냥 믿어준 것 같다. 

 

말 나온 김에 잠시 ‘조합비’라는 것에 대해 알아보자. 노동조합도 하나의 조직이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 홍보물 인쇄, 피켓 제작에도 돈이 들어가고, 간담회 같은 오프라인 행사에는 대관비나 식사비가 필요하다(밥은 꼭 준다는 게 모토다. 밥은 소중하니까!). 이렇듯 조합의 일상활동에도 생각보다 큰돈이 들어가는데 이걸 매번 사비로 낼 수는 없다. 그래서 지속 가능한 노조를 위해 일정 수준의 조합비를 받는다. 조합비는 회사와 합의를 통해 월급에서 공제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 조합은 너무 신생아라 당장 그 방법을 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자동이체나 카드 납부가 되는 시스템을 썼는데,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를 테니 일일이 설명을 해야 했던 것이다. 

 

며칠에 걸쳐 모두와 통화했고, 그때 들었던 말들은 모두 기록해 두었다. 결국 사람의 일이라 지금도 힘들면 가끔 그때 들었던 말을 꺼내 보는데, 많은 위로가 된다.  

 

 

민주노총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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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로 며칠을 보내고 나니 민주노총과의 첫 회의 날이었다. 이날은 노조 설립을 도와준 민주노총 분들을 만나 향후 일정과 전략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등산복 차림에 검은 조끼. 내가 그렸던 비주얼과 비슷한 차림의 아저씨들을 보니 좀 떨리고 왠 무섭기까지 했다. 노조하면 늘 싸우는 이미지뿐이라 나도 그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회의방식이나 내용이 정말 합리적이었다.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는 모습은 웬만한 회사의 회의보다 훨씬 건설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첫 회의를 통한 결론은 2가지였다.

 

1. 교섭력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모을 것

2. 첫 단체협약을 맺기 위해 모두의 의견을 모은 요구안을 작성할 것

 

요구안은 유사 업종의 선례가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되, 게임 업계 특성과 조합원들의 의견을 잘 녹여 준비하면 된다고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설문 조사라고 조언해 주셨다. 

 

 

낯선 단어가 나왔다. 단체협약은 뭐 하는 거냐?

 

혹시 노동 삼권을 아는가? 부끄러워하지 마라. 거의 모른다. 우리나라도 대부분의 나라처럼 헌법을 통해 노동자에게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고 있다. (헌법 제33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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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JT 뉴스(링크)

 

단체 협약은 노조가 ‘단체교섭권’을 행사하여 노동환경, 복지 향상 같은 요구사항을 회사와 단체교섭을 통해 합의한 결과를 말하는데, 요구사항에는 임금제도, 근무시간 단축과 같은 큰 내용부터 통근버스 확대, 밥맛 개선과 같은 회사 생활과 밀접한 복지까지 다양한 것을 담을 수 있다. 물론 모든 요구가 수용될 리 없고, 수용되더라도 지난한 협상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중요도를 고려하여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단체협약의 유효기간은 최대 2년이다. 즉 다시 협상하려면 2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우리의 주요 요구사항은 “포괄임금제 폐지”, “고용안정 보장” 였다.

 

포괄임금제는 IT 산업 전반에 걸쳐 공짜 야근을 만드는 주요 원인으로 꼽히던 것이라 노조가 생긴 이상 반드시 폐지해야 했다. 이 제도의 폐지는 “야근=돈” 의 의미를 넘어 업계 전반의 문화를 바꾸는 첫 단추이기도 했다. 그동안은 야근을 시켜도 추가 인건비가 안 드니 장시간 사람을 갈아 넣는 개발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게 불가능해지면 비용 증가를 막기 위해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하므로, 그간의 주먹구구식 프로세스를 개선할 수 밖에 없다. 업무 효율의 증가는 워라벨의 확대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창의적 사고를 가능하게 해 좋은 게임 탄생의 토대가 될 것이다. 좋은 게임은 다시 매출의 증대로 이어지니 이것이 진정한 노사상생 아닐까? 

 

게임 회사의 고용 불안 문제는 다른 산업과는 다른 분위기에서 시작된다. 게임 업계의 트렌드는 빨리 바뀌기 때문에 게임 10개 중 8~9개는 출시 전에 드롭 되거나 오픈 후 얼마 안 가 서비스를 종료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드롭이 잦기 때문에 회사는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한다. 그래서 드롭된 프로젝트의 인력을 다른 프로젝트에 투입하지 못한다. 그럼 프로젝트가 드롭된 개발자가 겪는 테크트리를 살펴보자.

 

1. 드롭 후 1~2주의 위로 휴가 → 이때 절반쯤 알아서 퇴사

2. 휴가 후 포트폴리오/이력서 들고 다른 프로젝트 면접을 봄

3. 합격 : 그 프로젝트 합류, 불합격 : 2번 반복

4. 일정 기간 불합격 → 몇 개월 치 위로금을 받고 권고사직 → 타 게임 회사 취직

 

심지어 회사는 다른 프로젝트 인력 충원을 위해 신규 채용을 하는 와중에도 사람(위 4의 사람)을 돈까지 쥐여주며 내보낸다. 그냥 이분을 사람 필요한 프로젝트로 보내면 사람도 채우고 돈도 굳는 해피한 상황이 될 것 같은데 그게 좀처럼 되지 않는다.

 

내 생각엔 게임이 망하면 회사가 망하니 회사를 나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업계 초창기의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에 아직 박혀 있고, 회사는 회사대로 새 게임은 고인물 빼고 새 사람들로 시작한다는 고집이 있기 때문에 생긴 문화가 아닌가 싶다. 웃긴 건 경력 개발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 들어오는 사람은 다른 회사 나온 고인물일 게 뻔하다. 오죽하면 한두 다리 건너면 모두 다 안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쓸데없는 소모전이다. 대부분의 회사가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 역시 개인이 아닌 노조가 해결해야 할 구조적인 문제로 판단했다. 

 

그래서 우리는 앞선 2가지를 중심으로 요구안을 만들기로 했고, 상세한 부분은 설문조사를 통해 모인 의견으로 채우기로 했다. 문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알리고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극소수였고 알려야 할 대상은 너무 다수였다. 오프라인 간담회를 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어디서 해야 할지, 몇 명이 온다고 예상하면 될지 너도 나도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제 막 생긴 노조에는 모든 게 물음표였다. 머리가 하얘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