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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영원히 천하를 가질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친구일 거야

자네가 자신의 전설과 작별을 결심했다면

나는 자네의 마지막 여정을 자네와 함께 지켜보겠네

 

이세돌의 라이벌인 중국의 구리 9단이 한돌과의 첫 대결에서 쓴 글이다. 이세돌의 심정은 무엇일까? 자신이 속한 곳보다 자신을 잘 이해하는 적이라. 수없이 대결을 하며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느꼈으리라.

 

그대를 배웅하려 천리를 함께 해도

끝내 이별은 피할 수가 없구려

고개 돌아보니 바람은 쓸쓸하고

오랜 벗과는 긴 이별을 해야 하네

 

이세돌과 한돌 3국 이후 구리의 코멘트다. 차가운 역수를 건너는 형가를 배웅하는 쓸쓸함이 느껴진다. 이세돌이 어떤 심정과 어떤 이유로 은퇴하는지 아는 구리이기에 더욱 씁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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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결에서 최대관심사는 이세돌의 3점 바둑이었다. 하지만 어이없게 한돌이 첫판을 지면서 흥행에 실패했다. 오죽하면 이세돌도 한돌에게 ‘준비를 더 해야 할 것 같다’고 했겠는가.

 

여러 언론에서 신의 한 수 78수, 신의 한 수 42수를 이야기 했으니 필자까지 반복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필자는 바둑계를 떠나는 이세돌의 바둑 여정을 한 번 되짚어보려고 한다.

 

 

1. 비금도의 천재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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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은 1983년 3월 2일 비금도에서 태어났다. 바둑을 배우기 가장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부친인 이수오 씨는 10년 정도 초등학교에서 근무했고, 이런 부친에게 5살 때부터 바둑을 배웠다. 국내 바둑교육 환경을 봤을 때 교육학을 이수한 부친에게 바둑을 배운 것이 첫 번째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바둑 외엔 할 게 없는 주변환경도 좋았다. 아버지가 농사하러 가기 전 내준 문제를 푸는 게 하루일과였다. 문제를 빨리 풀어도 할 일이 없어서 검토를 하고 또 했다. 문제는 빨리 푸는 것보다 ‘정확하게’ 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과정은 훗날 그의 바둑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거기에 조훈현이 응씨배 우승하고 카퍼레이드 하는 장면은 마음에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아버지라는 좋은 스승, 좋은 상대가 되어주는 누나와 형, 조훈현이라는 동기부여. 이세돌은 바둑을 두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2. 서울 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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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이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권갑룡 도장에서 수업하였다. 해태배에서 이세돌은 4년 선배인 6학년 한종진을 이기고 우승한다. 어린 시절에는 한 살도 큰 차이가 난다. 그런데 4년 선배들을 이기고 우승이라니. 다들 이세돌의 기재에 탄복했다.

 

하지만 같은 해 다른 대회에서 하호정에게 패배했다. 스승인 권갑룡 사범은 당장 짐싸서 내려가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방심해서 바둑을 그르치는 ‘경적필패(輕敵必敗, 적을 얕보면 반드시 패한다)’의 교훈을 알려주려 했던 것이다.

 

12살에 입단하지만, 어린 이세돌에게 승부의 스트레스와 타향살이는 견디기 힘들었다. 기관지염과 실어증에 걸렸고, 제대로 돌봐줄 사람이 없어 악화되었다. 의지할 곳이었던 큰형은 이미 군대에 간 후였다. 입단하기 전이라면 사람들이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프로였다. 아무도 그를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후유증으로 독특한 목소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변한 목소리 때문에 주눅이 들었으나,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자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고 한다.

 

 

3. 아버지와의 이별

 

15세 생일날이었다. 아버지가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당시 이세돌은 ‘또래보다 성적은 좋았지만 어린 시절 천재로 주목받던’ 것에 비해 큰 성적을 거두진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이별 이후로 이세돌은 달라졌다. 타고난 천재성과 ‘독기’가 합쳐지며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후 이세돌은 바둑공부에 몰입한다. 무엇을 하든 머릿속에 바둑이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4. 낭중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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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2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최우수기사상을 탔다. ‘불패소년’이라는 별명도 갖게 됐다. 2002년에는 후지쯔배와 LG배에서 우승하며 세계무대에 깃발을 꼽았다.

 

이세돌은 3단이었다. 그동안 승단을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했다. 예전부터 승단대회엔 말이 많았다. 이창호가 1년에 100국 넘게 대국을 하는데 승단대회까지 둬야 하니 혹사가 심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계대회 우승자가 3단이니 보기가 좋지 않았던 것일까? 한국기원은 2003년부터 기존의 승단제도를 바꿨다. 승단규칙에 ‘세계대회 우승 시 3단 승단, 준우승 시 1단 승단’을 추가한다. 현재는 프로기전 시합으로 승점을 쌓아, 승점에 따라 자동으로 승단되는 구조로 바뀌었다. 그래서 9단이 기형적으로 많은 구조로 변했으며 단위에 큰 의미가 없어졌다.

 

이세돌은 이런 시대착오적인 관행에서 개인으로는 최초로 이의를 제기했다. 기존 관습에 대한 첫 저항이었다.

 

 

 

이세돌의 탄생과 입단 그리고 막 세계무대에 나선 데까지 알아봤다. 2편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중국 팬이 작사 작곡한 이세돌 은퇴기념 영상 ‘끝내기’를 보며 글을 마치겠다. 이세돌의 은퇴를 이렇게 표현하다니 새삼 아련해진다. 우리는 너무 아쉽게 그를 떠나보낸다. 너무나 아쉽다. 이세돌을 담기엔 한국바둑계가 너무나 좁고 얕은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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