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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한 노가다판은 잠들었던 욕망을 흔들고

  

다른 글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내가 노가다판에 온 이유는 현실도피였다. 여러 고민과 어려움이 있었고, 난 그걸 해결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숨었다. 비겁하게. 그 당시 나는, 다시는 글을 쓰지 않을 각오였다(그래 봐야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언젠가는 다시 쓰겠거니 했지만). 어쨌든, 그때는 정말로 글을 쓸 수도 없었고,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노가다꾼으로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근데 노가다 일이 생각보다 너무 흥미로웠다. 상식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너무 쉽게 어긋나는가 하면, 30년 넘게 살고도 미처 몰랐던 삶의 진리 같은 걸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마디로 다이내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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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황당하고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 상황과 마주할 때, 혹은 어떻게 이런 말을, 이런 생각을,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지 하고 감탄할 때, 또 혹은 “이야~ 내가 이 시점에서 또 하나 배워가는구나.” 하고 두 손 공손히 모으게 될 때, 그 밖에 기타 등등의 이유로 기막힌 글감을 만날 때 나는 본능적으로 핸드폰 메모장을 열었다.

 

그건 기자였던 시절부터 갖게 된 오랜 습관이기도 했다. 애인과 데이트 하든, 친구와 나들이 하러 가든, 어쩌다가 길을 잘못 들어 골목을 헤매든, 그 과정에서 괜찮은 공간이나 사람을 마주하게 될 때, 난 핸드폰 메모장을 열곤 했다. 언젠간 취재해야지, 하면서.

 

노가다판에서 핸드폰 메모장을 열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지금 당장은 내가 글을 쓰고 싶지 않지만, 또 쓸 수도 없지만, 언젠간 이 에피소드를 글로 옮겨야지, 했다.

 

내가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놓는 건 주로 토막글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어의 나열 정도. 그 상황을 나중에 더듬어줄 수 있는 인물 묘사, 숫자, 기억에 남는 대사나 단어 같은 걸 두서없이 적었다. 길어야 다섯 줄 안팎으로.

 

그런 토막글이 쌓이고 쌓여 10개가 되고 20개가 되어갈 무렵, 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새로운 에피소드는 자꾸만 쌓이는데 그 모든 걸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글로 옮길 자신이, 우선 없었다. 토막글과 기억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몸이 근질근질했다. 글쟁이라면 공감할 거다. 일정한 기간에 최소한의 글을 쓰지 않으면 몸살(?)이 날 것 같은 기분을. 한동안 글을 안 썼더니, 슬슬 몸살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해서, 다시 펜을 들었다.

 

 

첩보영화 방불케 하는 비밀 취재

 

그렇게 글을 쓰려고 보니 역시 한계가 있었다.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놓은 토막글과 기억만으로는 한 편의 글을 완성할 수 없었다. 어떤 글이든 완성하려면 추가적인 정보와 이야기가 필요했다. 꾸준히 연재하려다 보니 새로운 에피소드도 필요했다. 그때부터 나에겐 일거리가 하나 늘었다. 취.재.

 

말하자면 이 글은 취재 뒷이야기다. 혹시라도 궁금한 사람이 있을까 봐서. 노가다 초짜라는 놈이 어쩜 그렇게 다양하고 많은 얘길 알고 있는지, 궁금할 수 있잖아? 난 글쟁이여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책을 읽거나 영화 볼 때 늘 그런 게 궁금했다. “이야~ 이런 소재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취재는 비밀스럽게 이뤄졌다. 노가다판 왔을 때부터 누가 물어보든 “아 그냥 회사 다녔어요.” 하고 말았다. 기자였다거나 글 썼다는 얘긴 일절 안 했다. 구체적인 직업을 말해버리면 어떤 기자였었냐, 어떤 글을 썼냐, 왜 그만뒀냐, 노가다판엔 왜 왔냐 등등 더 구체적인 걸 물어볼 테고, 그러자면 대답이 궁해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갑자기 “실은 제가 글쟁이인데요. 노가다 이야기를 좀 쓰고 있어서요. 취재 요청 좀 드릴게요.” 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비밀 취재라고 해서 별 건 아니다. 첩보 영화처럼 건설사 기밀 자료를 빼낸다거나, 누군가를 노골적으로 속여 정보를 얻어낸다거나 하진 않았다. 난 그냥 노가다꾼들과 꾸준히 대화를 나눴고, 나와 대화 나눈 상대방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가 나중에 글로 옮겨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해서, 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가명이다. 내가 종종 “지금부터 이 사람을 최 반장이라고 칭하겠다.”라고 했던 이유도 모두 그 때문이다.

 

실은 그런 방식의 취재가 내 전문(?)이기도 하다. 기자할 때, 시골 마을 취재하러 갈 일이 왕왕 있었다. 그럴 때면 절대 수첩과 카메라 먼저 꺼내지 않았다. 반공 시대를 살아온 어르신들은, 기본적으로 기자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그런 이에게 “어디 어디에서 나온 기자입니다.” 하며 명함 먼저 내미는 건 진짜 초짜나 하는 행동이다. 그러면 절대 입 안 연다. 안 쫓겨나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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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오랜만에 놀러 온 손자처럼 이런저런 얘길 나누는 거다. “근데, 여긴 왜 왔어?” 묻거든 “그냥~ 마을 놀러 왔다가 할머니 보니까 우리 할머니 생각나서 들어와 봤지. 이따가 밥 줄 거죠? 나 밥도 안 먹고 왔는데. 헤헤."

 

그렇게 한참 대화 나누다가, 할머니 마음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싶을 때, “할머니, 실은 내가 어디 어디 기자인데. 여기 마을, 취재 좀 하러 왔어요. 별건 아니고~ 저기 마을 입구에 있는 나무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할머니 태어나기 전부터?”          

 

 

소재가 다 떨어졌다는 건 당신과 나만 아는 비밀

 

노가다판에서의 취재도 그런 식이다. 간혹 다른 공정팀 인부와 말 섞을 기회가 생긴다.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게 될 때, 우연히 담배를 같이 피우게 될 때, 또 우연히 참을 같이 먹게 될 때 등등. 일부러 다른 공정팀 인부와 말 섞을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궁금했던 걸 툭툭 물었다. 마치, 노가다판에 온 지 얼마 안 된 초짜 노가다꾼으로서 아무 뜻 없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듯한 제스처로. 저쪽에 전기팀 반장이 일하고 있다. 슥 다가가 이렇게 묻는 거다.    

 

“반장님 근데, 전기공 하려면 자격증 있어야 되죠?”

 

“아~ 옛날에는 자격증 있으면 좋긴 했는데, 요즘은 뭐~ 자격증 없어도 할 수 있어. 왜? 전기 배워보고 싶어서?”

 

“아뇨. 뭐 그냥 궁금해서. 하하.”

 

“전기 배워~ 별것도 아녀. 대신 왼손잡이는 안 돼.”

 

“아 그래요? 저 왼손잡이인데. 왼손잡이는 왜 안 돼요?”

 

“이게 과학적인 얘기인지는 모르겠는데, 심장이 왼쪽에 있잖아. 혹시라도 감전사고를 당하면 왼손잡이가 빨리 죽는다는 얘기가 있어. 그래서 전기공 중에는 왼손잡이가 없어.”

 

“그렇구나~ 재밌네요.”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상황 묘사를 위해 다른 공정 작업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으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왜? 정리 배워보고 싶어서?”

 

“배우면 좋죠~ 정리꾼들은 얼마나 받아요?”

 

“정리는 13만 원밖에 안 줘~ 잡부랑 만 원 차이밖에 안 나. 근데 일은 엄~청 힘들어. 자네는 젊으니까 정리 같은 거 배우지 말고, 기술 배워. 철근이나 형틀 목수 같은 거. 그런 게 몸 편하고 돈 많이 벌지.”

 

“그렇구나. 정리는 왜 힘들어요?”

 

“왜 힘들긴? 이 무거운 걸 일일이 날라서 쌓을래봐. 유로폼 600짜리가 한 장에 19kg이야. 한두 장이야 별거 아니지만, 하루에 수십 수백 장씩 날라서 쌓다 보면 손목, 허리, 어깨 안 아픈 데가 없어.”          

 

직영 일 할 때는 인력사무소에서 오는 용역 아저씨들과 일할 기회가 많았다. 그들도 좋은 취재원이었다. 나도 인력소 다녀와서 잘 안다. 기공만큼 기술은 없지만, 매일 새로운 현장, 새로운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경험도 다양해지고, 아는 것도 많아진다. 그런 용역 아저씨들과 일할 때마다 툭툭 묻는 거다.

 

“아저씨. 저도 기술을 하나 배우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배우는 게 좋을까요?”

 

“무조건 철근이지. 요즘은 철근이 제일 좋아~ 돈 많이 주겠다. 상대적으로 일 편하겠다.”

 

“근데 철근은 일하는 게 단순한 반복 작업 같아서 재미가 없을 것 같은데.”

 

“하하하. 젊은 사람이라 다르구만. 아니, 일을 재미로 하는 사람도 있어? 돈 많이 주고 몸 편한 게 최고지.”

 

“목수는 별로예요?”

 

“옛날에야 목수도 괜찮았지. 근데 요즘은 목수들 일거리도 많지 않고, 돈도 철근보다 조금 주잖어. 일은 철근보다 훨씬 힘들걸?”

 

“그렇구나~ 근데 아저씨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하하. 노가다 하루 이틀 해? 이 바닥에서 보낸 세월이 얼만데. 직접 해보진 않았어도 맨날 보고 듣는 게 있는데. 척 하면 척이지. 원래, 아는 걸로 따지면 용역 잡부들이 젤 많이 아는 법이여~”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나면 슬쩍 핸드폰 메모장을 열었다. 거기에 이렇게 적는 거다. 전기공, 심장, 왼손잡이. 또 다른 토막글에는 정리꾼 13만 원, 손목, 허리, 어깨가 주로 아픔. 그렇게 해놓고 집에 와서 핸드폰 메모장을 훑어가며 주제를 정했다. “오늘은 뭘 쓰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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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가 너무 부족해 추가 취재가 필요한 건 묵혀두고, 인터넷이나 관련 서적, 뉴스를 좀 더 참고하면 되겠다 싶은 것들은 곶감 따먹듯 하나씩 하나씩 빼서 글로 옮겼다. 그렇게 완성해왔다.

 

근데 갑자기 웬 취재 뒷이야기냐고. 실은 그렇게 곶감 따먹듯 하나씩 하나씩 글로 옮기다 보니 소재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앞으로도 노가다는 계속 할 거고, 취재도 계속 할 계획이니 소재야 무궁무진할 테지만, 당장 그렇단 얘기다.

 

어쨌든 주말을 맞아 글이나 한 편 써볼까 하고 메모장 열어봤더니 마땅하게 먹을 만한 곶감이 안 보였다. 말하자면 이 글은, 궁여지책으로 쥐어 짜낸 글이다. 하하. 황금 같은 주말에, 데이트는커녕 할 거라고는 글 쓰는 것밖에 없는 안쓰러운 독거(?) 노가다꾼의 알찬 주말 보내기 프로젝트였다고나 할까. 위로는 사양하겠다. 난 이 글이라도 쓸 수 있어 즐거웠고, 덕분에 그럭저럭 주말을 보냈으니 말이다. 주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