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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0.금요일


호빵


 


벌써 세 번째 쓰는 알바 경험담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 많이 쓸 줄 몰랐다. 마치 룰라 시절의 추억을 팔며 방송을 하는 고영욱이 된 것 같지만, 그래도 신나고 기쁘다. 이게 다 나의 부족한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독자분들 덕분이다. 거듭 감사를 드리며, 오늘은 내가 고등학생 때 했던 알바에 대해 추억해보고자 한다.


 




1. 어머니의 재택 알바


 


내가 처음 ‘아르바이트’를 했던 시기를 굳이 따진다면 초등학교 5학년 때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당연히 혼자 했던 것은 아니고, 어머니가 집안에서 한 일을 도와드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가정주부셨는데 소소하게나마 집안 살림에 푼돈이라도 보태고자 재택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애들이 아직 어려 바깥에서 하는 일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첫 번째로 시도하신 재택 알바는 옷 마감질이었다. 공장에서 완성된 옷을 받아다가 옷 곳곳에 나 있는 실밥을 따는 일이었다. 아마 옷 하나당 10원인가 20원인가를 받은 것 같다. 나는 어머니가 가져온 옷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나름대로 도와드린답시고 옆에 앉아서 같이 실밥을 땄다. 어린 애가 실밥을 따 봤자니까, 별 도움은 되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불행히도 우리 어머니의 느린 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 마감질 알바를 일주일 만에 그만두셨다.


 


다음으로 어머니가 시도하신 재택 알바는 낚시용품 만들기였다. 낚싯줄에 작은 구슬과 바늘을 달고 납으로 된 추를 매달아 완성하는 거였는데, 이건 그래도 돈이 좀 되셨는지 한 2,3년 만드셨다. 어머니는 이 낚시용품을 만들 때 일종의 ‘공정’을 도입하셨는데, 나는 낚싯줄에 구슬을 하나씩 꿰고 내 동생은 포장하는 자그마한 비닐에 제품이름과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끼워넣고 바늘과 납은 어머니가 다는 그런 식이었다. 이 ‘공정’은 우리 가족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다. 의외로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퇴근하고 오신 아버지도 TV로 야구를 보며 일명 ‘종이 끼우기’ 공정에 참가했고 갓 유치원을 다니던 막내도 나와 함께 ‘구슬꿰기’를 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우리 가족들은 항상 저녁을 먹고 TV 앞에 앉아서 저마다 맡은 과정을 수행했었다. 비록 집 사정이 좋지 않았을 때의 일이나, 내게는 이 시절이 소박하지만 단란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2. 나의 첫 번째 알바


 


이렇게 어머니를 도와드린 것 말고, 진짜 내가 처음으로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알바는 고등학교 때 시작되었다. 고등학생이 알바를 하는 이유는 다른 게 없다. 오로지 유흥비다. 유흥비라고 쓰니까 굉장히 은밀한 느낌이 드는데(실제로도 ‘유흥’을 포털싸이트에 쳐보니 19금 단어라고 인증을 하란다) 자기가 사고픈 옷 사고, 친구들이랑 놀러 가는 그 정도다. 집이 가난한 아이들은 집안에 보탬이 되려 알바를 하기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고등학생은 자기 용돈 벌려고 알바를 한다. 예외가 있다면 수능 끝난 고3들이다. 그들은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알바를 해서 대학 등록금을 보태야 한다.


 


나 역시 용돈이 필요했다. 우리 부모님은 삼 남매를 키우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라서 내게 용돈을 거의 주지 않았다. 사실 나도 용돈이 필요한 일이 잘 없었다. 학교 안의 매점이야 친구들 따라가서 과자 하나씩 얻어먹으면 되는 것이고, 혹시라도 문제집을 살 일이 있으면 어머니께 말해 그때그때 돈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머리가 좀 굵어지다 보니 어쩐지 용돈이 있었으면 했다. 거기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만난 친구들과 함께 남포동 책방골목을 들락대다 보니 책도 좀 사보고 싶어졌다. 멀쩡한 책이면 어머니께 돈을 달라고 했을 텐데 하필 만화책과 판타지소설이라 말 꺼내기가 좀 그랬다.


 




그래서 나는 알바를 해서 내가 직접 용돈을 벌기로 했다. 나처럼 부모님께 용돈을 받지 않던 친구 하나도 내 생각에 동조했다. 마침 여름방학이고 해서, 우리는 맥도날드에 모여 콜라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벼룩시장 신문을 뒤졌다. 각종 구직 정보가 있는 벼룩시장이지만, 고1 짜리 여자애 둘을 써줄 만한 곳은 찾기가 어려웠다.


 


몇 군데 전화해서 퇴짜를 맞고 의기소침하던 나에게, 친구가 호들갑을 떨며 신문 한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엔 당당하게 ‘중고등학생 가능’이라는 글자가 써져 있었다. 바로 이거다 싶어 우리는 당장 거기 쓰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무슨 무슨 금융이라면서 친절한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머뭇머뭇 아르바이트 광고 보고 전화 드렸다고 하니까 나이를 묻더니 지금 바로 면접을 보자는 것이다. 그것도 직접 이쪽으로 면접을 보러 오겠단다.


기쁜 마음으로 우리는 지역을 이야기하고 맥도날드 앞으로 나갔다. 한 20분쯤 기다렸더니 매끈한 검은색 자가용이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설레는 마음으로 차에 대고 꾸벅 인사를 한 우리를 보고, 차에 탄 사람이 앞좌석 유리를 슬슬 내렸다. 나는 차 안에 앉아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보던 전형적인 조폭처럼 생긴 아저씨였다. 심지어 옷도 요란스런 무늬에 호랑이가 그려진 그런 옷을 입었다. 바짝 굳은 우리 둘을 보며 그 아저씨는 일단 뒷좌석에 타라고 했다. 우리는 쭈뼛거리며 뒷좌석에 탔다.


 


아저씨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아마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였을 듯한 그 남자가 앞좌석에 붙은 거울로 우리를 번갈아가며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남자가 내 얼굴을 한 번씩 볼 때마다 나는 위축되었고, 내 친구도 그리 표정이 좋지 못했다. 우리는 둘 다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거다. 남자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면서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반씩 들어간 이상한 억양으로 말을 했다.


 


 “니들 일 해 본적은 있냐?”
 “없어요...”
 “요령 안 피우고 잘할 자신 있재?”
 “네...”
 “그럼 한 번만 설명해줄텐께 잘 들으라이.”


 


남자는 우리에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설명했다. 하루에 네 시간씩 총 10일간 일을 하는데, 자기가 이 차로 우리를 태워다 다니면서 일을 시킬 거라고 했다. 일이라는 것은 무척 간단한 것으로, 주차장에 가서 주차된 차 앞에다가 명함을 한 장씩 끼우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일이 얼마나 쉽게 돈을 벌 수 있는지를 강조했고, 또 만약에 명함을 하나씩 안 끼우고 두 장 세 장씩 끼울 경우 발생할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서도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말했다. 나는 벌써부터 내가 그 일을 할 경우 받을 압박감과 공포가 상상이 되어 겁이 났다. 겁이 난 것은 친구도 마찬가지인 듯, 안 그래도 하얀 친구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나는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차마 못하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마침 남자는 경비복 차림의 할아버지가 차를 빼라며 손짓을 하자 거기다 대고 실컷 욕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욕의 향연이었다. 남자는 유 모 장관님이 즐겨 하시는 욕부터 시작해서 듣도 보도 못한 욕까지 다 쏟아붓고 나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우리를 보면서 제대로 알아 들었냐고 물었다. 당연히 우리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잘 알아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남자는 바로 오늘부터 일하자고 했다.


 


우리는 남자가 내려준 데서 내려, 그 근처 유료주차장과 골목을 돌면서 부지런히 명함을 배포했다. 누군가 차에 먼저 끼워둔 명함까지 빼내고 열심히 명함을 꽂았다. 정말 열심히 했다. 우리가 동네 안쪽까지 들어가자 뒤에서 남자가 탄 자가용도 스르르 우리를 따라왔다. 우리가 명함을 한 장씩 똑바로 꽂는지 감시하는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워서 명함을 꽂는 손 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쉴 틈도 없이 한 시간 동안 명함을 돌리고 나니까, 남자는 다시 앞좌석 유리를 내리고 차에 타라는 손짓을 했다. 다른 동네에 가서도 명함 돌리기는 계속 되었다. 4시간이 아니라 한 6시간은 한 것 같았다. 해가 저물 때쯤 되니까 남자가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내일은 시청 앞에 나와있으라고 했다.


 


남자가 내려준 낯선 동네에서 버스정거장을 찾아가면서 나와 친구는 의기투합해서 내일 무조건 시청 앞에는 얼씬도 하지 않기로 했다. 돈도 돈이지만 나는 내 목숨이 더 중요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겁낼만한 일도 아니지만, 그때 나는 정말로 생명을 위협받는 기분이었다. 나의 첫 알바는 그렇게 돈도 못 받으며 허무하게 끝이 났다.


 




3. 두 번째 알바


 


첫 알바의 무서운 추억으로 나는 당분간 알바는 꿈도 꾸지 않았다. 대신 필요한 돈은 급식비를 빼돌려서 해결했다. 당시 급식비가 한 달에 약 4만 원이었는데, 급식 신청을 하지 않고 어머니께 그 돈을 받아 용돈 대신 썼다. 그리고 돈을 아끼려 점심을 걸렀다. 다행히 나와 같이 급식비를 빼돌리는 친구들이 있어 나는 점심때마다 그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놀았다. 지금 내 키가 작은 이유가 고등학교 3년 내내 점심을 안 먹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튼 급식비는 참 유용했으나, 돈이 돈이다 보니 책 이상의 무언가를 사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그 당시 전국적인 디지털카메라 열풍이 불었는데, 학교에 디카를 들고 오는 부잣집 딸내미들을 보다 보니 나도 디카가 가지고 싶었다. 결국 알바 말곤 디카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또 알바를 찾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벼룩시장 신문을 뒤지던 과거와 달리 직접 시내에 나가 가게를 돌며 알바를 찾았다. 나는 ‘아르바이트 구함’이라고 써 붙여진 가게마다 다 들어가 봤는데, 나이도 나이지만 아무래도 학기중이다 보니 시간대가 맞지 않아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안 되겠다 싶어 그냥 떡볶이나 먹고 가려고 먹자 골목 쪽에 갔는데 마침 골목 안의 음식점에 알바 구한다고 써 놓은 것을 발견했다. 바로 그 음식점에 들어갔다. 카운터에는 인자해 보이는 50대의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는데, 내가 알바 때문에 왔다고 하니 학교와 이름을 묻고는 내일부터 나오라고 그랬다. 무척 기뻤다. 하지만, 그때 나는 한가지 잊은 게 있었다. 가장 중요한 시급을 물어보지 않은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찾다 보면 유난히 고등학생을 선호하는 가게가 있다. 가장 큰 이유가 시급이다. 고등학생은 최저임금제도에 맞춰 시급을 주지 않아도 군소리를 못한다. 그때만 해도 고등학생을 쓰는 가게가 별로 없어 일할 곳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저 고등학생을 써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내가 일한 음식점도 그랬다. 최저시급보다 삼백 원이나 작은 돈을 줬다. 하루 5시간씩 한 달이면 최저시급보다 무려 4만 5천 원이나 작다. 한 달을 고생고생하며 일해도 월급이 30만 원이 될랑말랑 했다.


 


게다가 이상한 규칙도 있었다. 그 규칙은 옷 갈아입으러 가는 작은 방 벽에 커다랗게 붙어 있었는데, 거의 무슨 노예계약 수준의 조항들이 쓰여 있었다. 알바생은 한 달에 딱 한 번만 쉴 수 있고, 일은 반드시 3개월 이상 해야 하며, 월급은 두 달이 지나야 비로소 한 달치 월급을 받을 수 있으며 한 달씩 밀리는 월급은 그만둘 때 준다는 것이다. 만약 무단으로 일을 하루 빠지면 그때는 알바도 잘리며 얼마를 일했건 간에 무조건 돈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일 시작 30분 전에는 꼭 가게에 나와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정작 30분 전에 나와서 일하는 그 30분은 돈을 안 쳐주면서, 만약 지각을 하면 10분에 천원씩 월급을 깎겠단다. 참고로 이 지각이란 일 시작하기 30분 전에 오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 무시무시한 규칙들을 나는 매일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봐야만 했다.


 


가게는 숨도 못 쉴 정도로 바빴다. 지역도 지역이지만 이 가게가 돈까스나 우동, 정식이나 초밥 같은 온갖 음식을 적당한 가격에 파는 큰 가게라 손님이 워낙 많았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가게에 가서 1, 2층을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일을 하고 나면 집에 갈 때는 파김치가 되어 흐느적대곤 했다.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디카에 대한 갈망이 수그러들었다. 디카고 뭐고 간에 그냥 빨리 그만두고 싶었지만, 3개월을 채우지 않고 그만두면 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억지로 일을 했다.


 


홀 서빙을 하는 알바생이 두 명을 제외하고 죄다 고등학생이다 보니 손님들도 알바생을 무시했다. 음식이 조금만 늦게 나와도 불러서 따졌으며, 알바생 주제에 대답이 공손하지 못하다고 욕을 하기도 했다. 특히 무서운 손님이 여대생들이었다. 나이로 따지면 우리와 고작 한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면서도 우리를 애 취급하며 무섭게 야단을 쳤다. 알바생더러 무릎 꿇고 빌라는 여대생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손에 전공책을 들고 가게로 들어오는 여대생 손님들을 볼 때마다 긴장했다. 남자라도 끼워서 오는 여대생은 안 그랬다. 오로지 여자들끼리 오는 대학생들이 유독 그랬다.


 


가게는 텃세도 심했다. 고만고만한 또래들끼리 일하는데도 알바생 사이에는 텃세가 있었다. 새 알바생이 오면 며칠 두고 봤다가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이야기하며 새 알바생을 평가했다. 영 일을 못한다 싶으면 따돌려서 결국 그만두게 하는 것이다. 따돌림에 지쳐 그만두는 애는 달을 못 채웠기에 돈도 못 받는다. 일을 잘하면 인정해주고 같이 어울려주긴 하지만, 대신 신고식을 시켰다. 새로 온 알바생이 첫 월급을 받으면 한턱 쏘랍시고 분식집에 데려가는 것이다. 나도 첫 월급을 받고 분식집으로 끌려갔는데, 거의 열 명이나 되는 알바생들이 와구와구 먹어대서 내 피 같은 돈 5만 원을 써야 했다.


 




월급 30만 원 받아서 5만 원이면 엄청난 돈이다. 더 분한 것은 내가 이 신고식의 마지막 주자였다는 것이다. 내가 얻어먹을 때가 되면 아주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주겠다고 다짐을 했으나, 하필 다음 새 알바생이 첫 월급을 받는 날 사건이 터져 그 뒤로는 신고식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신고식 날 터진 사건에 대해 설명을 하려면 먼저 가게의 파벌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정말 우습게도 이 가게는 알바생들끼리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대학생이었던 언니를 중심으로 한 파벌 1과 당시 주방보조를 하던 애를 중심으로 한 파벌 2가 있었다. 1에 비해 2는 쪽수가 딸렸다. 나는 1,2와 사이좋게 지내긴 했으나 마음 한구석으로는 2를 좀 더 좋아했다. 이 2의 중심인 주방보조를 하고 있던 애는 나와 동갑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이 가게에서 온종일 일하던 애였다. 처음 봤을 때는 머리 염색도 그렇고 눈매도 좀 날카롭게 생겨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그 애를 겪어보며 사람은 겉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 아이는 참 착했다. 처음 온 알바생들이 온갖 실수를 해도 금방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해주고, 특히나 많이 덤벙대던 나에게 몇 번이고 친절하게 일을 가르쳐주었다. 자기가 저녁 대신 먹으려고 가져온 빵을 나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주방 삼촌이 그 애 먹으라고 만들어놓은 초밥을 남겨놨다가 내가 서빙할 음식을 받으러 오면 내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입고 다니는 옷이나 화장은 소위 말하는 날나리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자기는 디자인을 배우고 싶고, 그래서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도 갈 생각이라고 했다. 나에게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 애는 기뻐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아이와 파벌 1의 대학생 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내가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두 사람은 사이가 안 좋았다. 언니는 첫날부터 나에게 그 애는 싸가지가 없으니 조심하라고 그랬다. 언니는 그런 식으로 홀 서빙 하는 알바생들에게 자주 그 애의 험담을 했다. 그 애는 언니가 자기 욕을 하고 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일만 했다. 그러다 새 알바가 신고식을 하는 날 사건이 터졌다. 언니와 그 애가 2층에서 크게 싸운 것이다. 나는 1층 담당이라 직접 보진 못했지만 싸우면서 아마 모르긴 몰라도 손도 올라가고 머리도 좀 뜯었을 거다.


 


두 사람의 싸움을 사장도 알게 되었고 사장은 어째서인지 그 애를 잘랐다. 그 애는 싸운 당일 바로 일을 그만두면서 눈물을 보이고 나갔다. 나는 그 애가 좋았기에 그 애가 잘리는 것을 보고 나도 그만둬야지 했으나 아직 3개월을 채우지 못해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다. 기억력이 나쁜 내가 아직도 그 애의 이름을 기억할 만큼, 그 애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부디 지금쯤 자기 꿈을 이루어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란다.


 


안 그래도 이 가게에서는 딱 3개월만 일할 생각이었는데 그 애마저 잘리자 나는 아주 마음을 굳혔다. 나는 규칙대로 3개월이 되기 일주일 전, 사장에게 그만둘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사장은 못마땅해하면서, 그렇게 딱 딱 3개월씩 일하는 애들은 버릇이 없는 거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사장은 앞으로 다신 이 가게에 와서 일할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 그렇다면 일주일 후에 그만두라고 했다. 시급도 적게 주는데다가 이상한 인사도 시키는 가게에서 다시 일할 생각은 없어 나는 오히려 기뻐하면서 감사하다고 대답을 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가게 사장은 뭔가 생각이 나면 즉흥적으로 우리에게 시켜보는 사람이었다. 특히 저 이상한 인사가 그랬다. 우리는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오면 다 같이 입을 모아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는데, 어느 날 사장이 우리더러 앞으로는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라고 시켰다. 시킨 대로 인사를 하긴 했는데 영 입에 안 붙었다. 사장은 심지어 손님이 주문을 하려고 부르면 ‘사랑합니다. 손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하고 물으라고 시켰다.


 


설마 농담이겠지 했는데 진짜로 그렇게 부르게 했다. 앞 인사는 그렇다 치는데 사랑합니다는 차마 쪽 팔려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알바생들은 사장이 카운터에 있을 때만 그렇게 하고 없을 때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나 역시 하지 않았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손님이 고마워도 그렇지 손님에게 사랑한다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손님도 내가 그런 말을 하면 몹시 거북해했을 것이다. 마치 모 피자집에서 피자를 시켜먹으려다 냉큼 와서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직원들을 보며 내가 거북해하는 것처럼.


 


가게 사장은 내가 알바를 그만두는 날까지 나를 괴롭혔다. 당연히 그만두는 날 줘야 하는 월급을 주지 않으면서, 나더러 정산을 못 했으니 내일 받으러 오라고 했다. 나는 약이 올랐으나 어쩔 수 없이 고분고분 알겠다고 했다. 다음 날 가게에 월급을 받으러 갔더니 사장이 없었다. 카운터 보는 언니가 나더러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또 갔다. 또 없다. 알바도 그만뒀는데 나는 매일 버스를 타고 가게에 가야 했다. 5일째 찾아간 날 마침내 드디어 월급을 받았다. 월급을 받고 돌아서서 버스를 타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막 이 더러운 세상아 하고 소리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날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족발 대(大)자를 쐈다. 어머니는 딸 덕에 족발을 다 얻어먹는다며 웃었다.


 


4. 마치며


 


나는 남들보다 특별한 알바를 해본 편도 아니고, 남들보다 알바를 많이 해본 편도 아니다. 하다못해 도시전설로 불리는 시체닦이 알바라도 해보았다면 모를까, 모두가 다 겪어본 평범한 이야기를 이렇게 떠벌리고 있으니 부끄럽기도 하다. 부디 이 글이 알바를 했었던 모든 독자분들에게 그땐 그랬지, 하고 지난 알바시절을 추억할 수 있게끔 하는 글이 되었으면 한다. 당연히 재미도 있다면 더 좋고. 그럼 이만 감사를 드리며, 이미 시리즈가 되어버린 다음 알바편에서 다시 뵙기를 바란다.


 



호빵(hohohop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