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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와 나

2009-11-19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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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9.목요일


필리온


 



 


모기는 배가 고팠다.


모기는 날았다. 날고 또 날았다. 날다 지쳐 창문에 앉았다. 창문 너머로 음식이 보였다. 침을 꿀꺽 삼켰다. 방충망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었다. 창문 틈새로 유유히 날아들었다. 발바닥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손바닥이 머리 위를 덮쳤다. 엄청난 공포감이 모기를 엄습했다. 모기는 미친 듯이 날아서 도망쳤다. 하지만 음식도 미친 듯이 모기를 쫓았다.


 


10분간의 곡예 비행 후 지친 모기는 잠깐 벽에 걸터앉았다. 벼락같이 날아온 무언가가 1센치 떨어진 벽을 때렸다. 혼비백산한 모기는 방구석으로 숨었다. 아니, 숨으려고 했다.


무언가 끈적한 것이 발을 잡아당겼다. 모기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거미줄이었다.


모기는 잠깐 좌절했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황급히 날갯짓을 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피빨던 힘까지 내서 날개를 펄럭였다. 하지만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모기는 분개했다.


"거미야."


거미가 대답했다.


"응?"


"넌 왜 이따위로 집을 짓는 거니?"


거미는 실을 뽑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너같은 애들을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거야."


"왜?"


"왜라니? 안 먹으면 죽잖아."


 


모기는 발끈해서 '이런 파리 같은 놈' 이라고 욕할 뻔했다. 하지만 거미줄에 묶인 자신의 입장을 되새기며 꾹꾹 눌러 참았다.


"그걸 대답이라고 해? 물론 나도 안 먹으면 죽지. 하지만 난 치사하게 비슷한 애들의 피를 빨지는 않아. 절지동물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니?"


거미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어쩌라구?"


"나처럼 인간한테 도전해봐."


"싫어. 집짓기도 힘든 이 삭막한 세상에서 뭘 더 어쩌라구. 난 오래 살고 싶어. 너나 인간한테 열심히 도전하며 자존심을 지켜봐. 심심하면 우리 집에 놀러와도 돼."


모기는 분노했다.


 


"바로 그게 문제야! 가시 돋힌 식탁이라고 들어봤어? 난 매일 목숨을 걸고 식사한다고. 얼마나 스트레스 쌓이는지 알아?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서 니네 집까지 피해다녀야 한다고.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니? 물론 자기 방에 니가 집을 짓게 놔둔 이 인간도 문제야.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같은 절지동물의 생존권마저 위협하는 니놈의 이 미친 집이야!"


 


마침 옆에서 기어가던 바퀴벌레가 동의했다.


 


"맞는 말이야. 나도 모기의 말에 동감해. 거미, 우린 공존해야 한다고. 날 봐. 이놈의 집에는 먹을 게 없어서 요즘 비누만 먹고 살아. 그나마 매일 줄어들어. 이렇게 힘든 세상에서 왜 우리는 서로 싸워야 하는 거지?"


거미는 대답이 없었고 모기가 더듬이를 흔들며 소리쳤다.


 


"그래. 바퀴! 네 말이 맞아. 우린 지금 서로 싸울 때가 아냐. 우린 힘을 합쳐야 한다고! 우리는 절대악에 대항해야 해. 생각해 봐. 저 인간만 제거하면 우리는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어."


 


모기는 간절한 표정으로 거미를 바라보았다. 덩달아 바퀴벌레도 간절한 표정으로 거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거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 생각해 보니 너희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군."


 




"잠든 사이 네가 저놈의 입으로 들어가고 내가 입에 거미줄을 친 후 모기가 잠을 깨워서 널 삼키게 하는 매복 작전은 어떨까?"


"싫은데."


"그럼 저놈의 변기에 내가 집을 짓고 모기가 눈을 찌르는 사이에 네가 항문을 급습하는 양동 작전은 어때?"


"…그건 더 싫은데?"


결국 거미는 벌컥 화를 냈다.


"어이, 이것 봐! 바퀴!"


"왜?"


"우리가 지금 얼마나 대단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줄이나 알아? 우리는 지금 인간을 죽이려 한다고! 절지동물 최초의 호모-사피엔스 슬레이어가 되려고 한다는 말야! 역사적인 거미-바퀴-모기 세 종족 최초의 연합, 그 현장에 우리가 있는 거야.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고나 할까? 아무튼, 지금 우리는 이렇게 사소한 일로 서로 다툴 때가 아니라고! 서로를 조금씩 희생하는 미덕을 보일 때란 말이다!"


 


바퀴도 결국 참지 못하고 더듬이를 붉혔다.


 


"그럼 네가 해! 네가 저놈의 항문을 급습하든지 뱃속에 들어가든지 하라고! 난 도저히 그런 식의 '희생' 은 못하겠어! 내가 무슨 파린 줄 알아? 난 바퀴벌레라고! 대체 그건 알고 말하는 거야? 저런 놈 따위, 근처에 가기도 싫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라고!"


거미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어쩌란 말야? 네가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밖에 없잖아. 네가 거미줄을 칠 수 있어? 아니면 피를 빨 수 있어? 아니면 하늘을 날 수 있어? 너도 생각이 있다면 분수라는 것을 알아야 해. 대체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뭘 어쩌란 말야?"


 


모기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나 말이지, 아직 거미줄에…"


'묶여 있는데 먼저 이 거미줄부터 좀 풀어주고 나서 토론을 계속하는 게 어떨까' 하는 모기의 제안은 바퀴의 고함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런 거미줄 따위! 우습지도 않아! 그런 허약한 실 따위로 대체 저 인간의 발가락이라도 묶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거미줄로는 나조차도 포박할 수 없을걸!"


 


"넌 산입에 거미줄 친다는 저놈들의 속담도 몰라? 그 속담이 바로 우리의 능력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의 심리를 반영한 거라고! 저놈도 사실 우리 셋 중에서 날 제일 두려워하고 있을 거야. 자기 방에 뻔히 내가 집을 짓는 것을 보면서도 찍소리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몰라? 아, 혹시, 네놈? 날 질투하는 거냐? 스스로를 낮출 줄은 모르고 상대를 깎아내릴 줄만 아는 멍청이!"


바퀴벌레는 격분했고 결국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욕을 하고 말았다.


"이런 파리 같은 놈!"




바퀴벌레는 말한 직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거미 역시 대로해 버렸기 때문이다.


"뭐라고! 이 파리 새끼보다 못한 놈이!"


파리 새끼 = 구더기.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침묵이 끊어진 순간, 이미 바퀴벌레는 무시무시한 기를 내뿜으며 거미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안 돼!"


 


관심에서 소외된 모기가 필사적으로 연합의 붕괴를 막으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다리는 거미줄에 걸려 있었다. 모기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달려드는 바퀴벌레의 공포스러운 모습과 그에 맞서 거미줄을 내뿜는 거미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모기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아니, 감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벼락같이 날아온 무언가가 거미를 강타했다.


 


거미는 즉사했다. 마치 파리채에 맞은 파리처럼 온몸이 납작하게 눌려버린 채로. 꼼짝달싹도 못하고 거미와 동반사할 뻔한 모기는 미처 감지도 못한 눈으로 멍하니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다. 간발의 차이로 죽음을 모면한 바퀴는 패닉 상태가 되어 굉장한 속도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 빠른 걸음이 화근이었다. 거미를 즉사시킨 '그것'은, 절묘한 각도로 벽에서 튕겨나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확하게 바퀴벌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결국 '그것'에 깔린 바퀴벌레 역시 거미와 비슷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역시 생명력이 강한 종족답게 바퀴벌레는 즉사하는 대신 꿈틀거렸다.


 


그 모든 모습을 보고 있던 모기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릿해져만 가는 시야 사이로 바퀴벌레의 꿈틀거림이 점점 잦아드는 것을 바라보며 모기는 절규했다. '이제 내 거미줄은 누가 풀어준단 말인가!' 영원히 거미줄에서 헤어날 수 없는 신세가 된 자신을 바라보며 모기는 통곡했다. '이토록 가소로운 세상, 거미줄에 담긴 천년…'


 


한참 통곡하던 모기는 문득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상한 기분은 조금씩조금씩, 환희로 바뀌어갔다. '설마, 설마 그런?' 반신반의하며, 모기는 천천히 날개를 휘저었다.


그리고, 모기는 날아올랐다.


"이야호!"


모기는 눈물을 뿌리며 공중에서 한바퀴 선회했다.


 


간단한 결과였다. 조금 전 날아온 '그것' 덕택에 거미집이 부서진 것이다.


모기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마음껏 자유의 기쁨을 누렸다. 조금 전 결성하자마자 붕괴한 역사 최초의 삼종족 연합 따위는 어느새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절지동물 최초의 호모-사피엔스 슬레이어의 꿈도 이미 잊은지 오래였다. 단지 죽음, 혹은 죽음보다 더한 위기에서 빠져나왔다는 것, 그래서 살아 있다는 그 단순하고도 원초적인 느낌만이 뇌리를 채웠다. 그리고 그 생존의 증거는 잠시 후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모기에게 다가왔다.


모기는 배가 고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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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미줄을 부수지 않는다. 귀찮기도 하거니와, 가끔씩 모기가 거미줄에 걸려 죽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기는 정말 싫다. 오늘도 모기 한 마리가 발바닥을 물려고 했다. 잽싸게 손으로 쳤으나 피해서 날아갔다. 발광하며 10분 동안 모기를 잡으려고 애썼으나 잡지 못했다. 결국 포기하고 침대에 눕자 모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벽에 붙었다.  열받아서 만화책을 집어던졌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갔고 모기는 구석으로 날아갔는데 마침 거기에 있던 거미줄에 걸렸다.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 마침 그 앞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었다. 바퀴벌레는 세상에서 제일 싫다. 큼직하게 생긴 녀석이라 붙잡기도 겁이 나서 다시 만화책을 집어던졌다. 그런데 바퀴벌레에 안 맞고 거미에 맞았다. 그런데 만화책이 벽을 맞고 튕겨서 바퀴벌레 위로 떨어졌다. 결국 두 마리 다 죽었다.


정말 기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난 곧바로 입에 거품을 물며 짜증을 냈다.


"웬 미친 모기야!"


 



필리온(phylli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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