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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3 월요일


필독


 


필자는 찬바람 부는 겨울을 맞아 독자들에게 공룡 이야기를 하기로 결심했다. 왜 공룡인가.



 


짧아지는 수은주만큼이나 밤이 길어지는 겨울, 가정에 서식하는 아동들은 집에서 뒹굴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아동들이 백과를 뒤적이며 표유류와 파충류의 차이를 깨닫고, 나비의 변태과정을 연구하며, 일개미의 노예노동을 안타까워할 계절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공룡에 환장할 계절이다.


 



본지 독자들의 평균 연령층을 고려해 보았을 때, 대부분 아들, 딸, 조카로 불리는 아동이 지근거리에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다. 이제 곧 겨울방학이다. 부담스러운 연말연시가 티라노사우루스의 발걸음처럼 쿵 쿵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이른바 아동 접대를 준비해야할 시간이다.


 



아동이란 생물은 생각보다 영특해서 책에 모든 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이 모두 옳다고 믿지도 않는다. 아동이란 생물은 생각보다 멍청해서 어른들은 모르는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동은 불시에 어른을 덮치고 순진한 눈망울로 기선을 제압한 후 그 무정한 이빨을 드러내고야 마는 것이다.


 



“수각류와 용각류의 차이가 뭐에요?”


 



둘리 넌 용각류야...


 



아동이란 생물은 생각보다 집요해서 관심분야의 개념은 그 활자의 뜻을 알든 모르든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반면 어른이란 생물은 먹고 살기 바쁘고 때로는 아동을 먹여 살리기 바빠 학창시절 날밤을 세워가며 암기한 국·영·수·사·과의 백분지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일 오후에 있을 프리젠테이션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며, 상사의 꼬장이 시지프스의 바위이거늘 어찌 “수각류”와 “용각류” 따위의 상것들과 상종한단 말인가.


 



본 공룡 연재물은 접대와 아부 및 기타 심신을 피로케 하는 사회생활에 지쳐 미처 아동의 호기심 공격에 대비할 틈이 없는 엄마아빠 이모 삼촌들을 위한 일종의 <아동 접대 매뉴얼>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글은 너부리 편집장의 <읽은척 매뉴얼>의 오마주적 번외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읽은척 매뉴얼과 마찬가지로 어른의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배려한 심적, 정신적 생존지침서이기도 하다.


 



왜 아동 접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몰라” 라는 한 마디로 아동의 공격을 모면할 수는 있으나 이는 더 흉포한 공격, 즉 “그것도 몰라?”라는 치명적 질문에 자신을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하수의 방법론이다. “모를 수도 있지”라는 2차 방어가 찰나의 현실도피를 가능케 할 수도 있으나 즉시 “왜 몰라?”라는 확인사살로 되돌아오고야 마는 것이다.


 



여기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라 하겠다. 그것도 모르는 어른으로 낙인찍힌 이들은 지속적으로 ‘쓰러진 시체 밟기’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질문의 꼬리가 살짝 바뀐다.


 



“수각류와 용각류의 차이가 뭔지 알아요?”


 



이제 피해 어른은 당신보다 똑똑하다는 확신에 찬 아동의 우월감 가득한 눈빛을 목도하며 이 상것들의 차이를 가르침당하는 비극의 희생자가 된다. 한 번으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라 하겠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피해 어른은 티라노사우루스의 몸무게가 몇 톤인지, 벨로키랍토르의 발톱 수가 몇 개인지, 파키케팔로사우루스가 뭐하는 공룡인지, 마이아사우라라는 공룡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 공룡들이 트라이아스기와 쥐라기와 백악기 중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잔혹한 시체 밟기는 반영구적으로 지속된다.


 



이는 어쩌면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읽어보지 않아서 겪는 “지적 부도”, “정신적 관장”의 상태보다 훨씬 심각한 굴욕일 수 있다. 아동이란 생물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자기가 아는 걸 모르는 어른’의 지적 수준을 확고하게 불신하며 이 불신은 최소한 아동이 청소년이란 생물로의 진화를 시작할 때까지 계속된다. 피해 어른은 길게는 수 년 동안 지적 주변인으로 소외되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한 번 무식한 어른으로 찍어놓은 기억은 피부 밑으로 체득되어 잠재적으로 남을 수 있다. 근거는 없지만 어쩐지 단세포적인 어른으로 기억되어 여러분의 무덤가에서 “무식한 분이었지만 사람은 좋았지”라는 추모 아닌 추모로 저승에서까지 가공할 테러를 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충격적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공룡을 알 필요가 있다. 어른이 단순히 지식의 양과 정확도를 가지고 아동과 싸운다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며, 지면 그냥 지는 거다. 적어도 어른이라면 공룡의 세계를 ‘탐험’하기보다는 ‘조망’해야 하며, 공룡이라는 생물군(群)이 어떻게 지상에 출현하고 어떻게 진화했으며 어떻게 사라졌는지의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한 순간 아동의 공격은 귀여운 재롱으로 변할 것이다.


 



필자가 공룡 얘기를 하려는 이유가 꼭 접대의 필요성 때문은 아니다. 공룡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주제다. 공룡은 먼 옛날에 사라진 고생물이지만, 생물학과 진화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결국 우리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도 공룡은 아주 좋은 주제다. 이 글은 매뉴얼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주제에 심취해보고자 하는 교양놀이이기도 하다.


 



실제로 존재했던 판타지로서 공룡은 어른들에게도 일종의 동화가 된다. 지난 주말 명동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며 상상해보았다. 백악기 한반도는 공룡의 땅이었다. 지금 밟고 있는 보도블록 위에도 공룡이 뛰어다녔을 것이다. 술김에 시공간을 잠깐 초월해, 지금 수십 톤의 뼈와 근육이 괴성을 지르며 지나가면 포장마차는 단숨에 무너지겠지. 테이블이 와락 쓰러지며 꼼장어와 오뎅이 엎어지고, 나는 소주잔을 든 채 멍하니 숨을 죽일 것이다. 이 땅은 실제로 일억 년 이상 그랬다. 오래전에, 그런 일상이 정말 존재했다.



 


타르보사우루스의 상상도. 백악기 한반도에는 티라노사우루스 대신 타르보사우루스가 있었다. 두 종은 가까운 친척으로, 타르보사우루스는 아시아의 티라노사우루스라 생각하면 된다.


 



물론 삼십 년 전에는 같은 한반도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군부의 총검에 맞서 피를 흘린 사실이 있다. 그러나 일억 년 전에 공룡이 살아 숨 쉬고 생존과 번식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서설이 길었다.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할 것이니 힘 빼고 읽어주시기 바란다. 무릇 교양은 즐거워야 하는 법이다.


 


가자, 빙하 타고 일억년 전으로.


 


 


 


딴지 고생물학과장


필독


the.dog.on.the.fiel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