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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극에서 등장하는 우에스기 겐신은 ‘바른생활 사나이’의 전형 같은 모습이지만, 실제 그에겐 다혈질적인 모습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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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우에스기 겐신 성급하다

 

‘관동관령(関東管領)’이란 직함은 우에스기 겐신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다. 세상은 이미 막부(무로마치 막부)에 대한 신뢰를 져버렸는데, 우에스기 겐신은 이 껍데기뿐인 이름에 집착했다. 시대착오적인 복고주의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사정을 살펴보면 ‘권위’가 필요했던 것이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쇼군과 덴노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보여준 겐신에게 ‘관동관령(関東管領)’은 자신의 정체성과 특유의 정신세계(자신이 정의라는)를 증명하는 최고의 이름이었다.

 

32살이 되던 1562년 3월 16일, 우에스기 겐신은 관동관령에 취임한다. 당연히 취임식을 거행하는데, 이 순간 꿈에 그리던 ‘정당성’과 ‘권위’를 획득한다(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취임식을 구경 온 수많은 백성과 취임식에 참여하러 온 관동의 수많은 무장 앞에서 겐신은 자신의 정당성을 뽐낼 수 있게 됐다.

 

가마와 자루를 붉은색으로 도색한 우산(朱柄傘)에 비색 양털로 만든 말안장까지. 자신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소품을 잔뜩 벌여놓은 채 우에스기 겐신은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제가 터졌다. 나리타 나가야스(成田長泰)가 말에서 내리지 않고 인사를 한 것이다. 다른 무장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하는데 말이다. 화가 난 겐신은 들고 있던 부채로 나가야스의 얼굴을 때렸고, 나가야스는 분노해서(이게 무슨 개망신인가?) 그대로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간다.

 

나가야스는 왜 말 위에서 겐신을 내려다봤을까?

 

나가야스 가문은 일본 고대 귀족 명문가인 후지와라 가문의 후예로,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나온다. 후지와라 미치나가는 쇼군 앞에서도 마상에서 인사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나름 뼈대있는 집안이었다. 쇼군 앞에서도 말 위에서 인사했던 가문인데, 한낱 관동관령에게 인사하기 위해 말에서 내린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나가야스가 빠져나가자 몇몇 무장도 그를 쫓아 빠져나갔다. 문제는 애초 우에스기 겐신이 기대했던 효과는 다 사라졌다는 거다.

 

“나가야스를 무시할 정도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가뜩이나 자유분방한(?) 관동의 무사들이다. 우에스기 겐신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이후 우에스기의 발목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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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의 성급함과 돌발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556년에는 출가소동을 벌였다.

 

전국시대 영주들이 불가(佛家)에 귀의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재가출가(在家出家.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출가한 승려처럼 세속을 떠나는 일)하여 불도를 닦았다. 이들이 불교를 숭상하고, 불교의 교리를 따르는 건 정말 불도를 믿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불교 세력과 손을 잡기 위해서도 있었다. ‘생존’을 위해 든든한 파트너를 찾았던 거다.

 

우에스기 겐신의 출가는 차원이 달랐다. 진짜 중이 되겠다며, 고야산(高野山. 진언종의 총본산)에 들어가겠다고 나선 거다(일설에는 ‘히에이산(比叡山)’이라고도 한다). 재가출가 따위(?!)의 어정쩡한 출가가 아니라. 속세의 모든 걸 버리고 중이 되겠다고 한 것이다.

 

한 마디로,

 

“나 다이묘 안 할래!”

 

라는 선언이다. 이때가 1556년 6월이다. 왜 그랬던 걸까? 학자들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다케다 신겐과의 거듭된 전투로 속세에 환멸을 느꼈다.

그 ‘다케다 신겐’과의 전쟁이 아닌가? 일진일퇴를 반복하며, 아무런 소득 없이 하염없이 병력만 소모하고 있었으니 모든 게 귀찮아졌을 수 있다.

 

둘째, 거듭된 가신들의 반란. 믿었던 가신들이 계속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 이후에도 혼조 시게나가가 모반을 일으키고, 잇코 잇키, 간단히 말해서 일향종 신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일국의 영주로서는(그것도 ‘전투의 신’이라 불리는 대영주가!)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우에스기 겐신은 실제로 그 일을 해냈다. 정치적 쇼인지, 진짜 속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에스기 겐신 정도되는 인물을 했던 일이라고 보기엔 너무 없어 보인다.

 

출가소동은 가신들의 노력(?)으로 무마된다.

 

“이후에는 삼가 신하로서 불충한 마음을 품지 않겠음.”

 

‘충성맹세문’을 적어서 우에스기 겐신에게 올렸다. 가신들의 글을 받아 든 우에스기 겐신은 그제야 출가소동을 접고, 영주로 복귀한다.

 

그의 성격이 어떠했는지 느낌이 오지 않는가?

 

 

셋, 로맨티스트

 

성급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을 가진 우에스기 겐신이지만, 사생활에 있어서는 지극히 섬세했다.

 

와카(和歌. 일본의 전통적인 정형시)에 능통했는데, 애정 노래를 좋아했다. ‘겐지모노카타리(源氏物語)’를 비롯한 연애물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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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모노카타리’는 일본에서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고 자랑하는 작품으로, 귀공자(덴노 아들임) ‘히카루 겐지’가 이 사람 저 사람을 꼬시는 내용이다. 숙모, 사촌누나, 친구 애인 등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와 사랑을 나눈다. 이와 함께 당시 생활상(궁중생활 같은 고급문화)과 전통예능, 의식주를 포함한 생활문화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믿기지 않겠지만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우에스기 겐신은 연애물을 좋아했다. 이 때문에 우에스기 겐신의 성별에 대한 의문이 나온 거다.

 

“연애물을 좋아하고, 필체 또한 섬세하다.”

“와카를 지을 때의 섬세한 감수성은 남자의 것이 아니다.”

 

‘생애불범(生涯不犯)’이라며, 평생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인물이 연애물을 좋아했다니, 모태솔로가 책으로 연애를 공부한 셈이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의외의 모습을 가진 게 바로 우에스기 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