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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성맨 양준혁, 해태와 엘지를 오가다.


 


2000년대가 시작되자마자 엘지와 해태는 또 한번의 메가톤급 트레이드로 야구판을 훌러덩 뒤집어 놓는다. 바로 양준혁과 손혁의 트레이드였다.


 


역시 양팀의 트레이드는 화끈했다. 그리고 또 끈끈했다.


 


해태 입장에서는 악연으로 점철된 엘지와의 트레이드였지만 참 끈덕지게도 엘지와의 연을 놓지 않았다.


 


사실 양준혁 - 손혁 트레이드를 살펴보기 이전에 그 이전 98년 해태와 삼성간의 트레이드를 기억해야 한다.


 


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박찬호를 앞세운 한국이 우승을 하고난 이후 흐뭇한 마음으로 편한 잠자리를 들던 야구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양준혁 - 임창용 트레이드라는 거대한 트레이드에 멍해지는 경험을 한다.


 


이 트레이드의 중심에는 선수협 사태가 있었다.


 


당시 선수협의 중추적 역할을 하던 양준혁이 소속된 구단은 다름 아닌 삼성!! 이었다.


 


무노조 원칙을 야구단에서도 그대로 적용하려는 삼성의 입장에서 양준혁의 활발한 선수협 활동이 곱게 보일리 없었다.


 


자신의 몸에 파란피가 흐른다며 삼성에 대한 애착을 나타내던 양준혁의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삼성에 입단하려고 프로데뷔를 늦출 정도로 열혈 삼성맨이던 양준혁은 그 배신감에 트레이드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미국 진출, 은퇴까지 불사하며 강한 반발을 하던 양준혁은 어쩔 수 없이 어울리지 않는 빨간색 해태 유니폼을 받아들여야 했다.


 


반면 해태입장은 조금 달랐다.


 


선동렬을 일본에 보내고, 마땅한 클로저가 없어 고생하던 와중에 튀어나온 선수가 임창용이었다. 사이드암 투구에서 150키로의 뱀직구를 던지는 젊은 클로저.... 아무리 양준혁이라도 쉽게 바꿀 수 없는 상황이다.


(요즘으로 비교하자면 류현진과 김동주를 바꾸는 격이다. 김동주가 아무리 뛰어난 타자라 하더라도 류현진과 바꾸는 것은 손해보는 트레이드라 할만하다)


 


해태는 왜 이런 말도 안되는 트레이드를 했을까...


IMF 시기였던 당시 해태의 자금난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모기업이 문을 닫을판에 야구단을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해태는 더 이상 해태만의 야구팀이 아니었다. 그들이 총 9번을 우승하면서 쌓아놓은 대한민국 최고 명문구단이라는 이미지속에는 최대한 자구노력을 하며 유지해 나가야할 의무감 같은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양준혁이라는 거물을 내보내고 고질적 문제였던 클로저의 영입을 한방에 해결하고자 했던 삼성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현금 10억(훨씬 이상이라는 썰도 있다)과 곽채진, 황두성을 같이 받으며 임창용을 삼성에 내주고 만다.


 


양팀 팬들의 충격도 남달랐다.


 


2년 연속 40세이브를 거두며 최고 소방수로 성장하고 있는 임창용을 돈에 뺏겼다는 해태팬들의 아픔, 영원한 삼성맨 양준혁을 잃은 삼성팬들의 아픔은 타팀팬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준혁은 열심히 했다.


 


해태시절 양준혁은 타율 0.323에 홈런 32개 105개를 기록하며 특급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해태팬들은 일본으로 떠난 이종범을 그리워할지언정 양준혁에게 속 깊은 마음까지 주진 못했다.


 


그건 양준혁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1번타자 기용등으로 인해 김응용 감독과의 불화설이 솔찮게 퍼질 정도로 팀에 좀처럼 마음을 두지 못했고, 개인적인 선입견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당시 양준혁은 삼성에서처럼 활기찬 모습은 아니었던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성적을 거뒀다는 건... 참.... 뭐라 할말이 없다)


 




 


하이바에 새겨진 맛동산보고 한참 웃다가


이호성보고 쫄았다.


 


양준혁의 해태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금난을 해결하지 못한 해태는 팀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있는 양준혁을 트레이드카드로 꺼냈고 그것을 엘지가 덥썩 물었다.


 


손혁이라는 3선발 급의 나름 준수한 투수를 내어주고, 현금 5억을 얹혀서 양준혁을 영입하는데 성공한다. (역시 이때도 5억 + @가 있다는 썰이 있었다)


 


사실 이 트레이드 역시 깜도 되지 않게 엘지의 완승이었다.


 


양준혁은 2년간 엘지에 몸담으면서 타격왕을 차지할 정도로 변함없는 활약을 펼쳤고, 손혁은 1년전 양준혁이 그랬던 것처럼 트레이드에 대해 강한 반발을 하며 실제로 은퇴까지 해버렸다. 결국 해태는 양준혁을 중심으로 한 삼각트레이드에서 임창용만 잃은 셈이다.


 


그러나 이는 모기업의 극심한 자금난으로 인하여 현금이 우선이었던 당시 해태의 급박한 사정을 감안하면 양팀 스카우터가 온갖 머리를 굴리며 맞대결한 진검승부가 아니기에 큰 의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해태팬들이 스러져가는 해태왕조를 보며 느꼈던 그 처참한 심정이 묻어나는 트레이드였기에 안타까워 했을 뿐이다.


 


트레이드는 아니지만 사실 그해 양팀간의 선수 교류는 또 한번 있었다. 98년부터 전격적으로 도입된 FA제도가 이 교류를 만들어 냈다. 다름 아닌 홍현우였다.


 


팀의 존폐조차 장담하지 못할 상황에서 당연히 해태는 20대의 젊은 내야수이자 거포인 홍현우를 잡을 여력조차 되지 못했고, 로망중 로망이었던 우타 거포에 목말라하던 엘지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금액인 4년간 18억이라는 큰 계약을 하며 낼름 데려간 것이다.


 


사실 포털사이트에서 홍현우를 검색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먹튀”이다.


 


먹튀의 시발점이자 대명사, 엘지의 FA잔혹사를 열어제낀 그 장본인 홍현우는 그간 해태표 선수들에게 짭짤한 재미를 보던 엘지가 처음으로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케이스였다.


 


(사실 그 이전에도 김동수, 이강철 등을 영입한 삼성의 실패사례도 있었으나 그 데미지가 홍현우만 못했기에 그를 먹튀의 시발점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간 성공만 했던 해태 선수의 영입이 이리 쪽박을 차게 되면서 2000년대 엘지의 암운한 기운이 드리워진다. 엘지는 이후에도 진필중 쪽박 사태등을 겪으며 FA계의 삽질대왕으로 전락하고 만다. FA 영입의 실패는 사실 단순한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 팀에 크나큰 데미지를 주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엘지의 암흑기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 시발점이 꾸준히 조공 트레이드를 해가며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었던 해태에게서 얻은 홍현우였으니.. 참으로 역사는 장난꾸러기 아닌가...


 


 


2. 사기트레이드의 중심 김상현의 첫 이적


 


해태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기아가 타이거즈를 인수한 이후에도 엘지와의 교류는 꾸준히 벌어졌다.


 


2001년 기아로 옷을 바꿔 입은 이후 새로운 분위기에서 97년 끊어진 타이거즈의 위용을 되찾고자 하던 차에 드디어 02년에 기아는 그 기회를 잡는다.


 


올해 구톰슨과 로페즈를 연상케하는 용병 선발 듀오 리오스-키퍼와 특급신인 김진우를 앞세운 막강한 선발투수 라인업으로 기아는 페넌트레이스 2위를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킨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약한 불펜 투수, 그중에서도 상대팀의 강한 왼손타자들을 처리해줄 좌완 투수가 부족해서 골치를 앓던 무렵 엘지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


 


엘지가 공을 들여 키우고 있는 젊은 왼손투수 방동민을 내어줄테니, 어차피 정성훈에 밀려 써먹지도 않을 김상현을 달라는 제안이었다.


 


방동민은 워낙 잘 알려지지 않은 투수였지만, 영점만 잡히면 분명 일을 낼만한 포텐셜이 있다는 평가였다. 엘지 2군에서도 150키로를 뿌린적이 있어서 2군 야구까지 챙겨보는 골수팬들에게도 눈여겨 보는 대상중 하나였다. 지옥에서도 데리고 와야 한다는 왼손 퐈이아볼러를 선뜻 내준다는 얘기였다.


 


또한 정성훈의 수비실력과 타격 솜씨를 감안했을 때 파워만 있는 김상현을 굳이 데리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하에 엘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사실 김상현을 눈여겨 본 것은 당시 김성근 엘지 감독이었다.


 


듣보잡 선수였던 김상현이 잠실에서 이상훈을 상대로 잠실구장 상단에 꽂히는 어마어마한 홈런을 날린 것을 목격한 것이다.


 


훗날 김성근은 여러 자리에서 이날 김상현의 홈런에 큰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놈 물건이네” 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김상현 짝사랑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기아가 왼손투수를 구한다는 낭보를 받고 잽싸게 방동민 카드로 김상현을 요구했고 결국 득템하고 말았다.


 


결국은 이 트레이드가 기아가 엘지에게 마지막으로 조공한 트레이드가 됬다.


이때 기아팬들의 부글거림은 극에 달했다.


 


해태시절 그렇게도 당해오던 엘지와의 트레이드에서 또 두눈 멀쩡히 뜨고 당한 셈이었다.


 


사실 김상현이 엘지에서 뚜렷한 족적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02년 엘지가 4강에 진출했을 때에도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으며 상무에 입대하기 전까지 2년동안 한시즌 홈런을 10개도 넘기지 못하는... 성적만 보면 그저 그런 선수였다.


 


그러나 원체 똘똘한 3루수가 없었던 엘지 사정에 따라 김성근이 떠난 2003 이후에도 김상현은 주전 3루수 자리를 보장받으며 출장 기회를 늘렸고, 간간히 보여주는 무지막지한 장타에 팬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게 했다.


 


특히 2004년 정민태의 공을 받아쳐 배트가 부러지면서도 왼쪽 담장을 넘긴 괴물같은 홈런은 엘지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올해도 이 믿기지 않는 쇼를 한차례 선보이기도 한 김상현)


 


그러나 문제는 기아가 득템한 방동민이었다.


 


방동민은 이미 엘지에서도 팔꿈치쪽에 심각한 부상이 있었다 한다..


의도적으로 숨겼던 숨기지 않았던 간에 어쨌든 엘지는 불량품을 제공한 악덕 업주가 된 셈이다. 방동민을 영입함으로써 왼손릴리프에 대한 걱정을 덜으려 했던 기아는 그가 기아에 몸담고 있던 3년동안 총 10이닝도 던지지 못하는... 이건 부진한 것도 아니고 아예 나오지 못하는 선수를 데려간 것이다.


 


그것도 엘지에서는 주전 3루수로 뛰며 차세대 거포로 인정받고 있는 김상현을 내어주고 말이다.


 


 



얘가 바로 방동민


1군 경기 등판 사진을 구하고 싶었으나 결국 못구했다.


필자의 검색능력을 탓하시기 전에, 이 친구의 신비주의를 먼저 생각하시라.


 


이쯤 되면 기아팬들이 엘지와의 트레이드 악연에 치를 떨만했고, 심지어 기아홈페이지에서는 트레이드 금지 운동까지 벌어지는 해프닝이 생긴다.


사실 이 트레이드는 조공트레이드라기 보다는 사기트레이드에 가까웠다 볼 수 있다.


 


이 사기성 짙은 트레이드를 감행했던 당시 김성한 감독이 얼마나 기아팬들에게 까였는지 짐작하실 것이다.


 


사실 이시기에 기아팬들의 트레이드 알레르기는 김상현건만이 아니었다.


현대에서 특급 활약을 펼친 정성훈이 그 알레르기의 주 원인이었다.


 


광주일고 출신의 프랜차이즈, 그것도 예전에 기아가 신인 시절 트레이드로 현대에 보냈던 박재홍을 다시 받아들이고, 전도유망한 3루수 정성훈을 보낸 것이다. (정성훈 역시 광주일고 출신 성골)


 


정성훈을 보내게 된 배경에는 특급신인 이현곤의 존재가 있었다. 하향세였지만 그래도 박재홍이라는 거물급 타자를 얻음과 동시에 특급 신인 이현곤의 자리까지 마련해준다는 생각이었지만 박재홍과 이현곤은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활약으로 기아의 속을 태웠다.


 


더불어 정성훈은 퀸란의 퇴출 이후 무주공산이 되버린 현대의 3루자리를 빠르게 꿰차며, 리그 최고의 수비실력과 날카로운 방망이를 돌림으로써 박재홍의 부진으로 인하여 타버린 재와도 같은 기아팬들의 마음에 오줌까지 싸주시는 잔인함을 선보인다.


 


결국 기아는(해태시절) 리틀쿠바로 불리며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박재홍을 현대에 내주었고, 단물 쪽쪽 빨린 박재홍을 받아오며 리그 최강 3루수 정성훈을 다시 현대에 내준... 현대에 몸뺏기고 뺨까지 맞은 격이 되었다.


 


이처럼 포텐셜 빵빵한 젊은 3루수를 두명이나 뺏기고, 팀은 팀대로 옛 해태의 위용을 찾지 못하며 감독 교체가 난무하는 2000년대 암흑기를 겪게 된다.


 


이런 사기 트레이드의 중심... 엘지... 그리고 당시 현대 감독 김재박....


기아팬들 좀만 기둘리시라... 그 속터졌던 과거사를 만들어준 장본인 엘지와 김재박을 한방에 날려버린 행복한 요즘 얘기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3. 기아 대반격의 시작


 


엘지도 2002년 준우승 이후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안되는 팀은 뭘해도 안된다는 속설에 엘지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팀 성적은 성적대로 곤두박질치고, 야심차게 영입한 FA 선수들과 외국인 선수들은 매번 쪽박을 면치 못했고, 이런 엿같은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리빌딩한답시고 고참 선수들 죄다 내쫓는 우를 범하고 만다.


 


트레이드도 잘될리 없었다. 내쫓듯이 트레이드한 이상훈을 대신해 들어온 SK출신 오승준과 양현석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게다가 항상 승자의 자리를 차지했던 기아와의 트레이드에서 첫 쓰디쓴 실패를 경험한다.


 


사실 이 트레이드는 엘지가 FA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무조건 어디론가 보내고 싶었던 홍현우가 중심이 된 트레이드였다.


 


아무리 고향팀이라지만 홍현우 하나만 달랑 보내긴 좀 거시기하니 유망주 하나 껴서 보내고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투수 두명을 받아오는데 그 끼워서 보낸 유망주가 일을 내고 말았다.


 


바로 이용규다.


 


베이징 올림픽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을 통해 국민 1번타자로 그 위상이 격상된 이용규 말이다. (야구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이젠 이용규는 잘 알더라...)


 


마땅한 리드오프가 없어 큰 골치를 앓던 기아 입장에서는 이용규의 가세가 천군만마였다.


 


사실 이용규는 덕수정보고를 졸업하고 04년 엘지에 2차 2라운드, 비교적 상위픽이있던 유망주였다.


 


이용규가 트레이드된 것이 04년 11월 즈음이었는데 이런 유망주를 고작 1년도 채 지켜보지 않고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 한다는 것이 사실 상식적이지 않다.


 


그러나 당시 엘지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수긍이 가는 면도 없지 않다.


엘지는 당시 이용규와 너무도 비슷한 유형의 선수를 두 명이나 더 보유하고 있었다.


 


바로 이대형과 오태근이었다.


 


왼손타자, 외야수, 빠른발, 단타형... 거기에 나이도 비슷한 (오태근이 좀 많긴 하다만) 고만고만한 타자 세명을 한꺼번에 데리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비효율적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점은 당시 스카우터에게 책임을 지워야 한다. 비슷한 유형의 유망주를 세명이나 데리고 있으면서 결국 한 선수를 1년도 안되어 트레이드까지 하게 된 상황이라면 분명 스카우터가 잘못한 것이다)


 


당시 엘지감독 이순철은 이 오십보백보 애들을 어떻게 활용해야할까 고민했을 것이다. 결국 트레이드로 가닥을 잡았고 이용규가 그 대상이 된 것이다.


 


문제는 왜 하필이면 이용규였냐는 것이다.


 


어차피 세명 중 누구 하나 약간이라도 더 두각을 낸 적이 없던 상황에서 이용규를 트레이드 카드로 지목한 그 기준을 잡기가 너무도 애매했을 것이다. 까나리액젓 잔뜩 담아놓고 복불복을 한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들리는 얘기로는 빠따실력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웠고 셋중에 가장 발이 느렸던 이용규를 선택했다는 썰도 있는데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어쨌든 이용규를 기아에 보낸 것은 엘지의 명백한 실패작이었다.


 


이때 홍현우와 이용규를 보내면서 받았던 이원식과 소소경은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사라져갔다.


 


사실 팀이 막장트리를 타게 되면 이런 말도 안되는 트레이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아직 검증도 채 해보지 못한 스무살의 어린 유망주를 보낸다는 것이 여간해서는 쉬운일이 아닌데 팀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용규를 기아에 보내면서 기아와의 트레이드 첫 실패를 겪은 엘지는 이미 막장화 과정이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용규는 트레이드된 이듬해인 05년부터 기아의 주전으로 활약하다가 06년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며 타율 0.318 득점 78개 도루 38개를 기록하며 기아 타선 첨병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고 , 그런 덕에 팀은 간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다.


 


이때 기아팬들이 처음으로 “땡큐 엘지”를 외치며 그간 트레이드 실패의 한을 어느 정도 해소한다.


 


 


 



“용규는 안타를 좋아해~”


개인적으로 가장 손발 오그라드는 응원중 하나다.


“야~호 나는 김원섭이 좋아”와 쌍벽을 이룬다.


기아 김주일 응원단장님... 제발 쫌 ~~~


 


혹자들은 이용규를 기아에 보낸 것이 윈윈이었다는 얘기를 한다.


 


어차피 엘지의 쌕쌕이 삼인방이 모두 기회를 얻긴 어려웠을 것이고, 이용규는 이용규 나름대로 기아에서 기량을 만개했고, 엘지에서는 이대형이 자리를 잡으며 최근 3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하는 등의 효과를 봤다는 것이다.


 


이대형이 극강의 도루 능력을 보이며 크게 성장한 것은 맞지만, 아직 종합적인 1번타자 능력에 있어 이용규를 넘어섰다고 보긴 어려운 측면이 있어 엘지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견해는 타당한 측면이 있다.


 


어차피 이용규가 남았던 이대형이 남았던 그 어느 누가 더 좋은 타자가 됬을지 모를 일이고 젊디 젊은 두 1번타자의 대결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4. 엘지... 해태표 선수들에게 연타석 삼진 먹다.


 


기아와 엘지는 05년에도 역시 메가톤급 트레이드를 성사시켜며 야구판의 주목을 받는다.


 


기아가 첫 번째로 FA시장에서 야심차게 건져 올린 마해영을 엘지에 내주고 엘지 주축 투수였던 장문석을 받는 대형 트레이드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름값만 보면 마해영과 장문석은 아무래도 중량감에서 큰 차이가 있었지만 마해영의 노쇠화 수준이 심상치 않았었고, FA계약으로 인해 지불해야할 금액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기에 가능한 트레이드였다.


 


이 또한 엘지의 우타 빅뱃 콤플렉스가 작용한 듯 보이는데 당시 엘지는 여러모로 전력에 누수가 심한 상황이었다 (요즘이라고 다를쏘냐만...)


이런 상황에서 타자 외국인 선수를 2명이나 뽑아 큰 실패를 봤던 이순철은 마해영을 영입하며 타선을 강화하고 06년에는 외국인 투수 2명을 뽑아 전력을 메꿔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투수 한명이 아쉬웠던 상황에서 기아로부터 노장투수 최상덕을 더 받고, 고교시절 4대 유격수로 이름을 날렸던 서동욱까지 영입하며 당시로써는 나름 알찬 트레이드를 한 것이 아니냐는 평가를 받았었다.


 


기아 입장에서도 아쉬울 것이 없는 트레이드였다.


 


마해영이 거물급 타자이긴 하지만, 팀에 큰 보탬이 되지 않았고 거액의 연봉만 축내는 돈먹는 하마의 면면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더구나 05년에 팀이 창단 첫 꼴찌를 먹은 가장 큰 원인은 마무리투수 부재였다. 비록 장문석이 특급 클로저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당시 기아로써는 내부에서 장문석만한 클로저감도 찾기 어려웠기 때문에, 골칫거리 마해영을 내보내는 효과와 뒷문 단속을 맡길만한 주전 투수를 얻는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두 팀은 Lose-Lose를 이루고 말았다.


 


마해영은 눈에 띄게 느려진 뱃스피드를 극복하지 못하고,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기 위해 눈물나는 노력을 했지만 결국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한 채 방출되었고, 이는 최상덕도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서동욱이 군대에 다녀온 이후 08년 시즌말에 사상 최초 좌우타석에 번갈아 들어서며 연타석 홈런을 쳐 주목을 받은 적이 있으나 아직까지 기회를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장문석도 역시 기아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패전처리를 전전하다가 올해 한국시리즈가 끝나자마자 방출되었고, 같이 기아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던 유망주 손상정은 소식마저 들리지 않는다.


 


결국 소리만 요란했던 이 트레이드는 두 팀 모두 쓰디쓴 실패를 맛봐야했고, 결국 팬들 뇌리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이 트레이드는 사실 뒷이야기가 있다.


 


애시당초 투수를 찾았던 이순철은 당시 기아에서 다소 부진을 겪고 있던 리오스를 원했다고 한다. 사실 상당한 수준까지 진척을 보이다가 막판에 협상이 어그러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철의 트레이드 의지는 강했고, 그 결과 리오스가 빠진 트레이드가 성사된 것이다.


 


이순철은 트레이드가 성사된 이후 마해영보다는 최상덕을 염두에 둔 트레이드였다고 밝혔다. 그만큼 투수를 간절히 원했다는 얘기인데, 자신의 이 발언을 입증하기 위해서 였는지 06년 시즌 개막전 선발을 최상덕으로 내세우며 강하게 중용의지를 천명했었다.


 


물론 쪽박을 찼지만 말이다.


 


 



2006년도 당당히 엘지트윈스의 개막전 선발로


등판한 최상덕, 역시 당당하게 최상덕을 에이스라 지목한


이순철 전 엘지감독의 기대에 부응하진 못했다.


 


그러나 이순철은 기아로부터 제대로 뒷통수를 맞는다.


 


그렇게 달라고 해도 안주던 리오스는 바로 얼마 이후 두산으로 트레이드 된다.


 


물론 두산이 전병두라는 빅카드를 제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순철 입장에서는 허탈했을 것이다. 더구나 리오스는 기아를 떠나 두산옷으로 갈아입자마자 외계인 모드로 탈바꿈하며 두산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잡는 기염을 토한다.


 


어쨌든 엘지는 그간 성공만 해오던 기아와의 트레이드에서 두 번 연속 실패를 겪는다.


 


그러나 이 실패는 서곡에 불과했다.


 


트레이드의 귀재라 불리던 김재박이 엘지에 부임하고 대형 참사를 겪게 될 줄은 그 아무도 몰랐다. 이제 드디어 김상현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5. 실패의 역사를 한방에 역전시킨 김상현의 친정 복귀


 


우선 김상현이 엘지에 있어 어떤 존재였는지를 먼저 디벼보기로 하자.


02년에 엘지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김상현은 03년부터 주전 3루수 자리를 차지한다. 파워만큼은 국내 최고라는 평가가 속출하면서 다소 투박한 플레이로 일관하며 기대를 충족시켜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김상현으로 가야한다”라는 내외부의 견해가 주를 이뤘다.


 


게다가 상무에 입대한 이후 2년간 2군의 배리본즈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강력한 포스를 뿜어댔기에 3루 공백으로 몸살을 앓던 엘지 입장에서는 오매불망 김상현의 복귀를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당시 2군에서 김상현에 필적할만한 라이벌은 박정권 정도였다. 둘다 올해 활짝 만개한 기량으로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올려놓고 맞대결을 했으니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팬들도 김상현에 대한 기대와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구단에서는 유서깊은 백넘버 7을 김상현에게 선사했으며 (현역시절 김재박의 백넘버이자 엘지팬들의 아픈 손가락 김재현의 백넘버이기도 했다), 팬들은 김재현의 엘지시절 응원가를 고스란히 김상현에게 물려줄 정도로 강한 애정을 과시했다.


 


그러나 김상현에게 이런 부담은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김상현에게 쏠린 이런 기대는 엘지에 부임한 코칭스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도자 입장에서는 누가 봐도 너무나 훌륭한 원석이었던 김상현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욕이 있을 수 밖에 없었고, 투박함을 다듬고자 수차례 타격폼을 교정하는 등의 작업을 진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엘지의 팀사정상 일관된 지도를 하기가 어려워 그런 지도들이 김상현의 재능에 녹아들지 못했다.


 


실제로 선수들과 얘기해본 결과 김상현은 2군에서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강력한 타격 솜씨를 선보이다가도 1군에만 올라가면 삽을 드는 것이 이해가 잘 안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심각한 1군 울렁증, 또 김상현을 만들어보고자 했던 1군 지도자들의 지나친 관심으로 인해 김상현은 자신이 가진 기량을 전혀 선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기아로 이적한 이후 그를 지켜보던 황병일 타격코치는 김상현에게 기술적인 지도보다는, 마음껏 쳐보고 싶은대로 쳐보라며 본인 스스로에게 맡기는 지도방법을 선택했다 한다.


 


사실 엘지 시절 김상현과 현재의 김상현이 기술적인 측면에서 발전한 구석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대부분의 오른손 슬러거들이 바깥쪽 변화구에 약점을 보이는데 김상현도 같은 약점을 아직도 갖고 있으며 여전히 헛스윙도 많은 그런 유형의 타자다.


 


취약 코스가 아직도 뚜렷한 타자라는 얘기다.


 


그러나 김상현과 황병일 코치는 억지로 약점을 만회하려고 강점을 약화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취약코스가 있으면 있는 대로 내버려뒀다. 그러나 한번 걸리면 어떤 코스의 공이라도 넘겨버릴 수 있는 강력한 파워를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훌륭한 투수라도 100% 김상현의 취약코스에 공을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오히려 강한 코스를 놓치지 않고 쳐낼 수 있는 집중력을 향상시킨 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번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자 이젠 취약코스의 볼도 제법 공략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정교한 타자의 상징인 3할 타율까지 기록하게 됐다.


 



황병일 타코는 사실 03년도 엘지 코치 시절에도


김상현을 지도한 적이 있다. 엘지시절에는 김상현이라는


이름 석자를 알리는데 일조하더니 기아에서 다시 만나 리그 최고의


슬러거로 대성시켰으니 김상현 입장에서는


황코치가 은인중 은인일 것이다.


 


여하튼 김상현은 결국 엘지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김상현이 시즌 중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동갑내기 정성훈과의 묘한 인연으로 인해 두 번 이나 팀을 옮기는 불운을 겪는데 어찌보면 정성훈은 김상현이라는 선수가 업그레이드된 계기를 제공한 은인인 셈이다.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본 김성근의 눈에 들어 엘지로 입단해 유망주로 대우받으며 이름 석자를 알리게 된 것도 정성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친정팀이자 고향팀으로 옮겨 대성하게 된 것도 정성훈의 엘지 이적 때문 아닌가?


 


쩝... 미안타 비약이 좀 심했다.


 


어쨌든 이번 김상현, 박기남 - 강철민 트레이드는 기아에겐 신이내린 축복이었고, 엘지로써는 재앙이었다. 적어도 올해만큼은 말이다.


 


김상현이 기아에 가져다준 선물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최희섭말고는 거포형 타자가 없던 전형적인 똑딱이 타선, 거기에 최희섭은 아직 뭔가를 보여주지 못한 상황에서의 김상현의 대활약은 기아의 공격력을 전반적으로 확 이끌어 올렸다.


 


한마디로 본인이 기록한 35홈런과 127타점 이외에도 시너지를 통해 발생시킨 무형의 효과도 엄청나다는 것이다.


 


김상현이외에 특별히 영입한 타자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아는 작년 김태균의 홈런보다 약간 더 많은 팀홈런을 기록할 정도로 허약한 타선에서 올해 단 한번에 거포군단으로 거듭났다.


(물론 최희섭의 각성으로 인해 상호 시너지를 낸 부분도 있지만 말이다)


 


거기에 시즌초만 해도 골칫거리중 하나였던 내야수비도 김상현으로 인해 단 한방에 해결되었다. 조범현 감독이 이종범을 내야수로 재전향시키려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시급한 상황이었고, 노골적으로 내야수를 트레이드 해오겠다는 천명까지 있을 정도였다.


(알려진 바로는 올해 초 기아가 내야수를 구하고자 두산에게 얼마전 한화로 이적한 유격수 이대수를 요구했었다 한다. 그러나 이 트레이드는 실패하고 말았다. 두산 김경문 감독이 양현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대수 - 양현종의 트레이드라... 조범현이 단호하게 거절해서 그렇지 또 한번 천추의 한이 될 트레이드를 할 뻔한 기아였다)


 


이런 상황에서 투수가 시급한 엘지에게서 잉여전력이 되어버린 김상현을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은 스카우터의 안목이외에도 천운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반면 엘지는 어떤가.


 


물론 기아팬들에게 기대를 많이 받던 강철민이었다고는 하지만 커리어하이를 찍었던 시즌에도 큰 족적을 남긴 투수가 아니었고, 4년간의 재활과정을 겪은 위험천만한 선수가 강철민이었던 것이다. 물론 강철민이 극적으로 재활에 성공하여 예전에 보여줬던 강속구를 뿌려댈 날이 오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만 기대치를 높게 가질만한 상황은 아니다.


 


이쯤되면 02년 방동민을 주고 김상현을 데려왔던 양팀의 사기트레이드가 연상된다. 그것도 훨씬 강력한 포스를 발산하며 대성한 김상현이 이 두 번의 사기트레이드의 주인공인 것이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던 옛 속담이 정확하게 적용되는 상황이다.


 


이로써 그간 엘지에게 조공을 바쳐왔던 기아는 그간 바쳤던 조공보다 훨씬 더 값진 선물을 엘지에게서 얻어냈다.


 


기아팬들이 “기아 없이는 못살아” 대신 “엘지 없이는 못살아”를 부르게 된 기막힌 반전인 것이다.


 


 


6. 야구 보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 두 팀


 


양팀은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부터 활발한 교류를 벌여오며 때론 웃고 때론 땅을 치는 역사들을 연출해왔다.


 


83년 유승안을 시작으로 09년 김상현까지 많은 선수들이 줄무늬 유니폼과 붉은색 유니폼을 번갈아 입으며 팬들의 애간장을 녹여냈다.


 


교류의 양도 많았으나 유독 역사에 길이 남을 큼직한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며 경기 외적인 재미도 많이 선사했다.


 


사실 트레이드의 성공과 실패는 아무도 에측할 수 없는 영역이다.


 


노쇠한 한대화가 엘지 우승의 주춧돌이 될지 아무도 몰랐고, 잉여전력으로 분류되었던 김상현이 괴물타자로 거듭날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트레이드에 실패한 팀의 스카우터와 감독은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고, 반면 성공한 감독은 탁월한 안목의 소유자라며 칭송받는다.


 


그러나 양팀이 유독 이런 트레이드 성공 사례와 실패 사례가 빈번했던 이유는 양팀이 가진 독특한 팀 문화에 기인하지 않나 싶다.


 


지난번 글에서 90년대 양팀의 라이벌 관계 형성은 그들이 갖고 있던 야구 스타일의 충돌이었으며 그 야구 스타일을 이끌어낸 그들만의 상반된 팀 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다. 자유분방함속에서 개개인의 책임 야구를 강조했던 엘지의 팀 문화와 엄격한 규율과 기강을 바탕으로 최대한의 조직력을 발산했던 해태의 팀 문화가 그것이다.


 


때로는 자율적 책임 야구속에서 이적 선수가 자신의 역할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엘지의 실패 사례도 있었고, 새로 맞은 식구에게 남도 특유의 따뜻한 정서로 팀에 쉽게 녹아들 수 있도록 한 기아의 성공 사례도 있었다.


 


엄격한 규율과 기강속에서 피지 못한 최향남은 엘지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한껏 만끽하며 머리에 샛노란 물도 들이며 팀에 빠르게 적응하고 새가슴의 오명을 떨어내며 에이스의 자리까지 차지했었고, 반대로 김상훈은 해태 특유의 팀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며 은퇴하고 만다.


 


엘리트 중심의 자율적 책임 야구속에서 기회를 얻지 못하던 이용규와 김상현은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충분한 기회를 주었던 기아에서 최고 타자로 거듭나기도 했으며, 반대로 홍현우는 오랫동안 몸에 배어온 타이거즈 문화와의 이질감을 느끼며 엘지에서의 연착륙을 실패한 경우도 있다.


 


양팀의 이런 전통적인 팀 문화가 최근 들어 상당히 옅어지고는 있다. 하지만 면면히 흐르는 전통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이런 상반된 팀 문화에 모두 적응하며 성공한 선수는 어디서나 강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자기 몫을 해낸 한대화와 괴물 양준혁 뿐이다.


 


이렇듯 양 팀은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겪으며 끊임없이 교류해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라이벌팀간의 선수교류로 인해 생기는 수많은 이야기꺼리들은 팬들을 울리고 웃기면서 또다른 야구의 매력을 선사한다.


 


이제 벌써 서른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 한국프로야구에서 양팀의 이런 트레이드 희노애락은 한국야구를 보다 풍성하게 하는 일종의 외전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양팀은 또 어떤 기가 막힌 얘깃거리들을 쏟아낼지 몹시도 궁금할 따름이다.


 



기아팬 횽아들아~ 김민기나 경헌호 줄테니까 얘좀 주라....


하악~하악~


어허~ 웃자고 한 얘기에 돌팔매는 무슨~~


 


 


에버프리(ahj20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