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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예측 못하는 거 참석인원을 때려 맞추자고. 가입자의 10% 정도 온다 치고 30명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알아보기로 했다. 회사 근처를 먼저 알아봤지만, 멀고, 비싸고, 시간이 애매했다.

 

고민 중에 누가 "회사 밖에서 안되면 안에서 하자!"고 했다. 명쾌한 의식의 흐름이었다. 회사가 협조해주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보통은 잘 안 해준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 조심스레 대관 담당자에게 문의를 했다. 회사는 '노조의 설립을 축하하며, 대관이 가능하다'고 전해왔다.

 

여태까지 고민했던 게 허무해지긴 했지만 이 편이 우리에게도 이득이었다. 단순히 장소를 구했다는 문제를 넘어 '회사가 노조를 존중한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줄 좋은 계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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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람들을 만나는 일만 남았다.

 

간담회는 이틀에 걸쳐 점심시간에 진행되었다. 노조가 익숙치 않아 참석이 꽤나 부담이었을 텐데 무려 100명이 넘는 분이 다녀가셨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많은 분의 방문에 큰 힘이 생겼다. 모두에게 감사하다.

 

간담회는,

 

- 노동조합을 만든 이유

- 이루고 싶은 목

- 향후 단체교섭

 

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준비한다고 했지만 생소한 노동법 용어와 첫경험(?)의 낯섦 때문인지 다소 어리둥절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진정성과 목표만은 분명히 전달된 것 같았다.

 

간담회의 마지막은 Q&A 시간이었다. 이런 질문들을 받았다.

 

Q1. 조합비 일부는 민주노총으로 간다던데?

 

A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조합비는 우리 지회와 상급단체가 일정비율로 나누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립'의 개념이 더 맞을 거 같다. 이 돈은 나중에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노무사 선임 비용, 생활비지원 등으로 쓰인다. 또 우리 같은 꼬꼬마 노조를 도와주시는 분들의 월급으로도 쓰인다.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돌아오는 비용이라고 보시는 게 더 맞다.

 

 

Q2. 어디 가입하지 않고 우리끼리 노조를 하면 안 되나?

 

A : 회사는 대형 로펌의 자문도 받고, 전문가도 고용할 수 있다. 그런 회사를 우리 힘만으로 상대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만렙에 풀템 차고 있는 상대와 단검 하나 들고 PK 뜰 순 없다. 우리도 스타터팩 정도는 있어야 했고, 지원해줄 곳을 찾아 산별노조로 시작하게 되었다.

 

 

Q3. 노조 가입하면 집회 등에도 나가야 하나?

 

A : 당연히 강제사항은 아니다. 다만 의미에 공감, 참여한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Q4. 아버지가 노조에 반대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진지)

 

A : 노동조합은 즐겁게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 '즐겁게 사는' 것에 가족만큼 중요한 게 없다. 노조가 가족의 평화를 해친다면 가족을 택하시는 게 맞다. 그래도 오늘 설명 들으셨으니, 우리 이상한 사람들 아니고 다 같은 회사 동료라고 한번만 더 설득을 하시면 좋을 것 같다.

 

최첨단을 달리는 게임업계지만, 노동권에 있어서는 한참 뒤쳐져있음을, 아니 기초조차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나도 '노조' 하면 바로 파업부터 하자고 했을 정도니 말 다했지만. (참고로 이 경우 불법파업이고, 파업하면 월급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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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간담회 이후 '단체협약 요구안'을 위해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결과를 토대로 요구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2번째 간담회는 설문 결과와 주요 내용이 정리가 되었을 무렵 진행했는데, 요구안을 공유하는 자리라 보안(요구안을 회사가 알면 안되니)을 고려하여 외부에서 했다. 거리가 멀어서인지 지난 번보다 참석인원은 줄었지만, 사람이 적은 만큼 밀도 있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프로젝트 드랍 그리고 권고사직

 

뒷풀이에서 '프로젝트 드랍 후 대기 상태'에 있는 분을 만났다. 이 회사에서만 두 번째로, 그나마 초반에는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후로는 일 없이 하루하루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 눈치가 많이 보인다고 하셨다.

 

듣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지만 걸음마를 뗀 우리 노조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이번 단체협약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공허한 말만 했다. 아무리 빨라도 단체협약에 4개월은 걸릴 텐데, 그 시간이면 지쳐 나가떨어지고도 남았다. 정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까?

 

며칠 후 그 분에게 연락이 왔다. 회사에서 기어이 권고사직을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최선을 다한 프로젝트가 하루 아침에 사라진 것도 억울한데 회사를 나가달라니. 게다가 이걸 받아 들이지 않으면 동종업계인사팀 네트워크를 이용해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은근한 압력까지 선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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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회사의 비상식적인 처분(?)에 매우 분노했다. 회사가 얼마 전 '노조와 모범적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쉽게 한 약속이 아니었다.

 

주 52시간제 실시로 유연근로제를 도입하려던 시기, 우리 회사도 '근로자 대표'도 뽑고 절차를 진행했다. '근로자 대표'는 법률상 서면합의가 필요해서 뽑은 바지였는데, 어떤 분이 이에 반발하며 전직원의 의견을 수렴하려고 했다. 회사는 이 분을 좋게 보지 않았고, 대표이사가 직접 권고사직을 했다. 여기까지 이르자 이 분도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사직을 받아 들였다. 혼자의 힘으로 대표와 맞서는 것은 정말 힘들다.

 

이를 안 국회의원이 부당함과 함께 게임업계의 장시간 노동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대표이사를 국정감사 증인으로 세우려 했다. 사건이 널리 알려지고 기사화되자 회사는 다급히 국회의원실에 새로 생긴 노조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모범적 노사관계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약속하였다. 우리는 회사의 진정성을 믿었고 증인 채택 취소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약속으로부터 두 달도 지나지 않아 회사는 '업계 관행'이란 가면을 쓰곤 ‘권고사직’을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 이 문제와 근로자 대표 문제를 밝히고 회사에 공문을 보냈다. 회사는 우리에게 '오해로 기인한 문제로 회사의 명예를 실추하고 있으며, 그러한 사실이 1도 없다'고 전해왔다. 몇 차례 사실 공방이 오갔고, 익명게시판은 회사와 우리 중 어느 쪽이 맞는지 뇌피셜 배틀장이 되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회사는 우리가 지적한 문제들을 모아 게시판에 해명글을 게시했다. 노조는 충분한 근거나 인과관계 없이 사실을 부인하며 무고한 회사를 모함하고 있고, 회사는 직원들을 위해 힘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글을 보고 직원들이 의혹을 모두 해소하고 회사의 진심을 믿어주기를 바라다니 성의가 부족했다. 화룡정점은 글을 최상위에 노출하기 위해 수동으로 글 순서까지 바꿨다는 점이다. 이 가상한 노력(?)은 전직원 수의 조회수를 기록한 후에야 멈췄다.

 

누가 이 말을 믿을까 싶었지만 의외로 회사의 강경한 대응에 여론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회사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우리도 가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회사보다 근거가 탄탄하고 논리적인 글을 쓰기로 했다. 누구 말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보여주면 된다. 심지어 우리는 팩트다. 팩트로 갈비뼈 몇 대 날려주기로 했다.

 

‘긴글은 노잼’ 법칙에 입각해 A4 1장 분량에 모든 내용을 담기로 했다. 이해가 쉬우면서도 타당하게, 그러면서도 하나도 빠뜨리지 말아야 했다. 주말을 반납해가며, 아내에게 '외부인의 시선에서도 이해가 되는지' 점검도 받았다. 본조의 도움을 받아 최종교정까지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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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이제 글을 올려야 했다. 글을 올리면 회사에서 바로 연락이 올 테고, 전체가 보는 게시판이니 주변으로부터 주목을 받을 것이다. 떨렸다. 아니 쫄렸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해야만 했다.

 

글을 올렸다. 엄청난 속도로 조회수가 올라갔고 익명게시판에도 퍼져 화제가 되었다. 사건의 개요, 회사의 공지를 반박한 내용에 사람들은 납득을 했는지 회사를 지탄했다. 여전히 쫄렸지만 속이 시원했다. 회사 다니면서 이렇게 속시원하게 말할 수 있다니, 이게 진짜 '노조'라는 생각도 들었다.

 

회사는 반박을 멈추고 권고사직을 철회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급히 빵빵한 외부 인력을 스카웃해 노조 전담부서를 만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