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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지난 7월과 최근의 홍콩 현지 취재 이후, 

 스스로 정리의 시간이 필요해 기사가 늦어졌다.

(약간의 트라우마가 남았다)

 

독자분들께 양해를 구하며

 직접 취재한 현지 현장과 함께 

홍콩의 역사를 깊이 있게 알 수 있도록 구성에

최선을 다하겠다.   

 

 

 

 

 

 

 

 

7 2공항버스 A21 타기위해 카우롱 모스크 앞으로 트렁크를 끌고 가며, MTR(지하철)역에서 배포하는 무가지를 주는대로 받았다. 거기엔 하나같이 파괴된 홍콩 입법회 건물과 이날 새벽 긴급 담화를 발표한 캐리람 홍콩 행정 장관의 분노한 얼굴이 함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예정된 출국이었지만, 도망자가 기분이 들었다.

 

호시탐탐 시위를 혼란으로 몰고가고 싶은 친중국 언론에게 이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어제의 입법원 점거는 누가봐도 유인책이었고, 안에서 벌어진 파괴를 주도한 누군가의 의도는 의심스러웠다한국에서의 많은 장면이 오버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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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명지대생 강경대가 죽고 이어진 수많은 학생들의 분신속에서 나는 청계천, 을지로, 종로가 사람들로 가득찬. 분노한 그들이 돌을 주변의 모든 금속물에 부딪치며 소리로 절규하는 광경을 봤다지하철에서, 종로의 술집에서 시민들에게 오늘은 누가 죽었다는 소식을 울면서 전할 시민들은 맥주를, 노가리를 내어줬다.

 

야, 네 하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울지말고 이거나 마셔라."

 

그러던 시민들은 시인 김지하가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무리 있는 양 언론에 기고하고 난 뒤로 냉담해졌다적어도 나에게 맥주를 권하는 사람은 없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전교조 대량 해직사태를 불러일으킨 교육부 장관 정원식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자 학생들은 폭발했고, 굳이 경호인력도 없이 외대에 강의하러 정원식에게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안겼다.

 

지금와서 보면 그런 뻔한 수에 넘어가냐 하겠지만, 당시는 분노가 모두를 지배했고 가끔은 개인보다 대중이 쉽게 낚인다. '? 뭐지?' 라는 일말의 의심은 '와아아아아' 라는 격한 함성의 블랙홀을 만나면 쉽사리 빨려들어간다언론은 다음날 일제히 헤드라인을 맞췄다초반에 함께 어깨를 걸었던 야당도 일제히 학생들을 비난하며 발을 빼기에 급급했다.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이 들었다.

 

가부키 배우처럼 밀가루를 뒤집어 쓴 정원식의 사진과 스승을 폭행한 인륜을 저버린 운동권 학생들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1991년의 한국은 유교적 윤리가 사회를 잠식하던 시대였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널리 회자됐고, 나는 그날 이후 격해진 시위에 휩쓸려 쫒겨서 도망가다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가속도가 붙어 거의 나뒹굴 정도로 넘어졌다시민들이었다한 달 전쯤 맥주를 권하던 장소였다.

 

그날 도망가는데 누가 다리를 걸더라, 욕을 하더라라는 증언이 이어졌다. 분위기가 달라졌다그렇게 1991 4 26 강경대의 죽음으로 촉발된 사태는 종지부를 찍었다7 1 입법원 사태를 보면서 내내 장면이 오버랩됐다.

 

7 2 홍콩 출국을 도망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패배가 뻔해 보이는 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탓도 있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패배하는 보고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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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점

 

7 1일의 파괴장면을 모든 기자라면 의구심을 가졌다. 문제는 이걸 누가, 어떻게 쓰느냐였다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는 홍콩 경찰이 의도적으로 사보타지를 했으며, 시위대의 폭력을 유도해 강경진압 명분을 쌓으려 한다고 기사를 냈다1991년의 한국과 달리 분위기가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는 분위기였다. 외신이 기사를 내고 실시간으로 본국의 모든 사람에게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가는 시대다.

 

홍콩 경찰은 채증한 전원을 연행해 모두 사법처리하겠다고 기세등등했으나 여론이 받쳐주질 않았다. 홍콩 야당의원들도 폭력사태에는 우려만 표시하고 경찰을 비난하기 시작했다야당이 거리를 두면 어쩌나하고 고민했었지만, 홍콩은 1991년의 한국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게 느껴졌다.

 

7 첫째 시위는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겠다는 엄마들의 집회와 학생들을 보호하겠다는 교사들의 집회로 기록된다. 모두 시위의 주력인 10대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고, 이게 홍콩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내가 수행하는 홍콩 시위 취재를 조력해주는 홍콩인 메이도 같은 의견이었다홍콩 입법회를 점령했을 때만 해도 환호성을 질렀지만 이후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심상치 않아 걱정하던 차에, 그녀는 타이완으로 잠시 도피할 것을 고려했다고 했다그녀가 다시 홍콩에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한 바로 엄마들의 집회였다고.

 

이렇게 집회는 시위대들에게는 시민들이 여전히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그래도 입법원 점령은 과한 거 아니냐며 돌아서려던 홍콩 시민들의 마음을 다잡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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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홍콩 행정부도 느꼈다. 부모세대들이 거리로 나와 아이들을 보호하겠다고 나서는 판에 연행 작전은 지지를 받을 없는 상황에서 캐리람 행정 장관은 7 9 승부수를 던진다.

 

중국 송환법의 사망을 선언하는 것.

 

캐리람은 어차피 2021 9 차기 입법회 선거까지 법의 논의가 중단 될 테니, 그게 바로 법안의 자연사 아니겠냐는 논리를 폈다진전이라면 진전이었다. 만약 7 1 사건으로 대중이 지지를 철회했다면 선언으로 각자 면피를 하는 상황에서 사태가 종료 될 수도 있었을지 모르나, 이미 자신감을 얻은 시민사회는 캐리람의 제안을 일축했다.

 

"웃기지마."

 

"법안의 철회(Withdraw) 아닌 한, 말장난일 뿐이다."

 

라는 게 다수의 반응이었다.

 

캐리람의 기대와 달리 7 중순에도 11만명이 모였다시위대의 숫자가 하향세를 보이는 완연했지만, 최소 연착륙이 가능한 수준은 유지했다텔레그램에서는 시위대 숫자가 주는 이유가, 어쨌건 캐리람이 한 발 물러서면서 이제 시민들이 관망세로 돌아선 것인지, 아니면 경찰 폭력이 점점 고조되면서 시위는 지지하나 연행이나 폭행을 두려워해 2선에 있는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적어도 시위대 텔레그램방의 분위기는 간다였다. 단톡방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여전했다. 모를 일이다.

 

 

 

원룽 폭행사건

 

7 24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던 일련의 시위대가 흰 옷을 입은 괴한들에 의해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룽은 베드타운이다. 한국식으로 설명하자면 광화문에서 시위를 마친 ,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천호역에서 내린 시위대가 천호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깡패들에 의해 집단 린치를 당했다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폭력사태는 시위 현장에서는 벌어졌지만, 귀가하는 사람들을 길목에서 지키고 있다 이러는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다폭력은 무차별 적이어서, 만삭의 임산부도 폭행을 당했고, AFP 취재에 의하면 시위와 전혀 상관없는, 식당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요리사도 린치를 당했다. 요리사의 경우는 블랙 코드의 드레스도 아니었고, 주방에서 주로 신는 장화 차림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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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언론은 일제히 삼합회를 지목했다. 2014 우산혁명 말기에도 삼합회 위씽워(和勝和)파와 쑨이온(新義安)파의 사주를 받은 괴한에 의한 폭력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의문의 눈길은 자연스레 삼합회로 향할  밖에 없었다삼합회 전문가인 로웡 홍콩 시티대학 사회행동과학부 교수는 조직원이라기 보다는 삼합회 조직이 중국 농촌에서 모집한 아마추어들의 소행이라고 분석했다.

 

이날 사건은 다시 격분한 시위대가 모여들어 백색테러 용의자가 도주한 성벽마을 남핑와이(南邊圍)를 포위, 범인에 대한 자력 체포에 나서고 경찰이 이를 해산하기 위해 최루탄을 발생하며 2 충돌이 발생했다경찰은 용의자를 보호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최루탄을 발포했으며, 의심되는 용의자를 현장에서 체포하지 않았다.

 

이날 충돌로 45명이 부상당했다. 홍콩 경찰은 7 26 10여명의 가해자를 추적 체포했다고 밝혔다. 한국에서는 이후 추적보도가 안됐지만, 이후 로이터가 홍콩 중앙정부의 홍콩주재 연락판공실 관리가 중국에서 이주자로 이루어진 원룽 주민 수백명을 모아서시위대를 몰아내라 촉구했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홍콩 프리 프레스가 해당 발언을 들었다는 원룽 주민의 인터뷰를 후속 보도했다.

 

인민일보 산하 국제뉴스 전문지인 환구시보(요즘 한국언론은 매체를 글로벌 뉴스라고 순화 번역하더라) 이례적으로 폭로가 나오자마자가짜뉴스라며 반박뉴스를 ,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메튜 청(張建宗) 부총리가 원룽테러 당시 경찰의 처리가 미흡했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이미 당시의 백색테러 영상은 퍼질대로 퍼진 상태였고 설상가상 일부 홍콩 경찰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경찰 신분증과 제복 견장 사진을 올리며 경찰은 직분에 충실했을 뿐인데 사과를 하느냐고 항의하는 이른바 항명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자 25,000명의 조합원이 있는 경찰노조도 부총리의 사과에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이쯤부터 슬슬 홍콩 행정부가 홍콩 경찰을 통제하고 있는 건 맞냐는 의구심이 퍼지기 시작한다.  사건으로 책임을 경찰관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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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반영국 폭동, 용무파 라이징

 

홍콩의 과거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한다. 지금이야 중국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는 홍콩 사람들이지만, 시간을 소급해 50 전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지난 편에서 홍콩의 역사를 슬쩍 훑고 지나간 이유는 홍콩이라는 지역의 모호한 정체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홍콩은 영국식민지 시절에 영국인이었던 없고, 지금은 중국인이었던 없는 사람들이다. 딱히 내가 홍콩인이라는 소속감이나 자긍심도 옅었다그럼에도 한 가지 일관된 흐름이 있다면 홍콩인들은 그들을 억압하는 압제자들과 꾸준히 싸워왔다. 영국식민지 시절엔 당연히 홍콩인들의 적은 중국이 아니라 영국이었다.

 

1960년대 중국 전역은 문화대혁명의 광기에 휩싸였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꾸준히 몇가지로 갈리고 있는데, 홍콩인들에게 시기가 중요한 건 홍콩내 좌파들의 선동에 의해 발생한 소위 홍콩 대폭동이라는 저항운동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시작은 조화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하면서 부터다. 경찰이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21명의 노동자를 체포했다. 당시 홍콩은 지금과 달리 2 산업이 발달한 생산기지였고 노동조합은 좌파들에 의해 장악돼 있었다. 이들은 베이징의 지도를 받았다. 대약진 운동, 연속적 혁명론, 문화혁명으로 이어지는, 끝마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붙지 않으면 조어 자체가 불가능한 혁명이 넘치던 시대. 밥먹는 일도, 잠자는 일도, 섹스조차 혁명적이지 않으면 하지 못하는 나날이었다.

 

1967 5 6일에 발생한 충돌은 다음날인 5 7 수많은 좌파 노동자, 시민들이 손에 손에 마오 어록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지금과는 정반대의 상황, 경찰은 진압에 나섰고 중국 관영 언론은 홍콩 경찰의 행위를 파시스트들의 폭력진압이라고 비난했다5 16 지도부는 영국의 압제로부터 투쟁하는 홍콩, 카우룽 위원회(Hong Kong and Kowloon Committee for Anti-Hong Kong British Persecution Struggle 港九各界同胞反對港英迫害鬥爭委員會)라는 조직을 결성, 단일화된 조직을 만들었다좌파계 노동조합연맹의 총파업, 학생들의 집단 휴교가 잇따랐고, 시위는 격렬해졌다.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 광둥군구는 황용셩(黃永胜)이 지휘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형식상 민병대였던 중국군을 지휘했던 그는 다시 민병대를 조직한다. 정규군이 아니니 중국과 영국이 전쟁 상황까지 치닫지 않을 있고. 기회에 홍콩을 접수하면 공을 세울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7월이 되자 사태는 겉잡을 없어 커져 중국 국경에서 홍콩 해방군을 자처하는 민병대가 중국-홍콩 국경을 넘어 홍콩 경찰에 총격을 가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한동안 카우룽 반도 일대는 좌파에 의해 점거된다. 도시의 주요 지역엔 사제 크레모아가 설치되는 시가전 양상을 띄고, 영국도 이에 맞서 항공모함 HMS Hermes 빅토리아 하버에 급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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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여론은 이때만 해도 반반이거나 중국에 우호적이었다. 홍콩 시민들은 영국의 지배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뤄후 국경너머 중국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실향민들이었고 그들에게 고향인 중국은 그립고 두려운 존재였다반면 공산화된 전통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중국과 달리 중국의 전통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강했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식민지배 상황에 놓인 상하이를 배경으로 이소룡의 1972년작 정무문이나, 청 말 외세로부터 중국을 지켜내는 황비홍 같은 영화는 기본적으로 중국영화가 아니라 홍콩 영화다. 당시만 해도 중화의 일원이라 느끼는 홍콩의 자부심은 대단했다이건 중국에 대한 일종의 문화적 우월감이기도 했다.

 

하지만 8 24 벌어진 하나의 사건으로 홍콩의 여론은 반중국 친영으로 돌아선다.

 

람분(林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1929 생이니 당시 나이 38. 'Commercial Radio Hong Kong'이라는 라디오 방송사의 뉴스 해설가였는데, 시기 그는 좌파에 대한 극렬 풍자 코너인멈출 수 없어(欲罷不能) 운영하고 있었다.

 

김총수 + 김용민에 한창 때의 김구라 황봉알을 합친 것 같은 캐릭터였는데, 당연히 비판의 대상인 좌파진영은 그를 영국 제국주의의 주구라고 불렀다. 상호 입씨름으로만 끝나면 다행인 미디어 진행자와 시위대의 싸움은 결국 번의 살해위협 끝에 일부 시위대가 그가 방송국으로 향하는 이동동선을 파악한 , 차에 가두고 산채로 불을 질러 살해했다.

 

언론인에 대한 위협이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무협작가 김용이 주필을 맞기도 했던 밍바오(明报)의 편집장은 아예 이 시기 홍콩을 떠나 1년가량 해외를 전전하기도 했다.

 

여론이 나빠지자 광둥의 황용셩은 아예 인민해방군을 투입, 전쟁을 벌일 각오까지 다지지만, 다행히 총리 저우언라이에 의해 발각되고 총리명의의 성명이 발표된다.

 

"홍콩에서 벌이는 모든 무장 행동을 중단하라."

 

사태는 한마디로 수습국면에 접어들었다홍콩 경찰이 시위대가 점거하고 있던 지역을 접수하면서 1167발의 사제폭탄을 해체한다 사건으로 경찰 10명을 포함 51명이 사망했고, 802명이 부상을 입었다. 공식 통계가 이렇단 이야기다. 실제 사망자와 부상자는 많다.

 

홍콩의 노년들은 이시기의 기억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홍콩의 노인에게 개인사를 제외하고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을 말하라고 하면, 대부분 이소룡의 사망과 함께 1967 홍콩 폭동을 떠올린다특히 언론인 림반을 산채로 태워죽인 사건은 양쪽에서 갈피를 못잡던 홍콩의 일반 시민들이 반중국, 친영국으로 기우는 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중국과 좌파라면 지긋지긋 하다는 정서는 이후로도 쭈욱 이어졌다. 홍콩으로서는 다른 비극이었다. 사건 이후 영국, 그리고 영국으로부터 결탁한 친기업 위주의 정책에 제동을 수있는 정치적 자산을 모두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2014 우산 혁명 때도 시위대의 행동을 통제한 건, 1967년의 기억이었다. 2016 오뎅혁명이라 불리는 폭력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 홍콩 시민들은 시위대의 폭력에 대한 강한 염증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2019, 일련의 경찰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자는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제는 더이상 2016년처럼 폭력시위를 하면 안된다고 극구 말리는 사람들은 목소리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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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이후, 무장을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들이 등장했고. 이들이 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한다홍콩시민들은 무력사용을 불사하는 일단의 시위대를 이렇게 불렀다.

 

'용무파(勇武派)

 

이제 시위는 새로운 국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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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북 깎는 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