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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역사 하편

2009-11-3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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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화요일


안분


 


아메리카로 건너간 커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자바에서,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섬에서 커피를 재배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그 이후에 유럽의 나라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커피를 대량 생산하게 된다. 일단 아메리카라는 대륙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 보도록 하자.


 


우리는 늘상 아시아와 우리나라가 중앙에 있는 지도를 보게 되는데, 이렇게 아메리카가 중앙에 있는 지도를 보면 느낌이 좀 이상할 거다. 아프리카랑 남미가 그다지 멀지 않고, 유럽에서도 그다지 멀지 않아 보인다. 유럽 아이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다니던 대항해 시대에, 유럽에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가는 방법은 무역풍을 타고 가는 것이었다.


 


심장이 벌렁거리지 않냐? 오직 바람 하나만 믿고 대서양을 건너는거다. 부산에서 출발해서 바람의 힘으로 엘에이에 가는 그런 스케일이다. 장난 아니지 않냐? 요즘 자꾸 배로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여튼 그 당시 유럽 형아들은 본인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 데려다 주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 바람이 데려다 주는 곳이 바로 중미의 캐러비안의 섬들 혹은 남미의 오른쪽 윗부분인 수리남, 기아나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이 곳은 초기부터 유럽의 식민지가 되었고, 커피도 이러한 곳에서 먼저 재배된다.


 


 


 


쿠바, 자메이카, 아이티 이런 섬나라들이 있는 곳이 바로 캐러비안해 이다. 기아나, 수리남은 브라질 위에 있는 게 보일거다. 바람이 유럽배를 저쪽으로 실어다 주었다.


 


네덜란드


 


커피 대량 생산의 선두주자 네덜란드는 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도 커피를 재배했다. 암스테르담의 식물원에서 잘 자라고 있던 나무들이 남미의 수리남과 캐러비안해의 네덜란드 식민지로 옮겨졌고, 거기에서 커피가 재배 되었다. 수리남에서 자라던 커피가 후에 브라질로 전해지는데, 이 이야기는 좀 있다 하도록 하자.


 


더치 커피


 


네덜란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더치 커피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는 것이 좋겠다. 네덜란드 애들이 아시아로 아메리카로 열심히 배 타고 돌아댕겼다는 건 지겹도록 말했다. 얘들이 배에서 마실라고 개발한 커피가 바로 더치 커피 되시겠다. 더치 커피는 찬물로 아주 오랜 시간동안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보통 8시간에서 10시간 정도가 걸린다. 승질 급한놈 기다리다가 숨 넘어 가겠다고? 에이 그런게 아니다. 그냥 물을 부어놓고 내버려두면 알아서 10시간 뒤에 진한 커피가 내려져 있다. 저녁에 물 부어놓고 아침에 마시면 되는거다. 그냥 그때 그때 만들어 마시면 되지 왜 그런 고생을 하냐고? 그건 더치 커피가 잘 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냉장 보관을 하면 일주일 정도는 상하지 않은 상태로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즉 날씨 좋고 시간 많은 날 커피를 내려 놓으면 며칠 동안은 그냥 마시기만 하면 되는 거다.


 



 


더치 커피 메이커다. 윗부분에 찬물을 붓고, 중앙부에 커피를 갈아서 넣어 두고 한방울씩 천물을 떨어뜨리면 10시간 후에 아랫쪽에 커피가 추출된다. 다른 커피에 비해서 카페인의 양도 적다고 하니 밤에 잠이 안 와서 커피가 두려운 분들도 도전해 볼만 하겠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선물로 받았던 그 커피나무의 후손들이 파리의 식물원에서 자라고 있었다. 당시에 캐러비안의 마르티니크 섬에서 근무하고 있던 해군 장교 디클리외가 휴가를 얻어서 프랑스 파리에서 쉬고 있었다. 이 장교가 다시 근무지로 돌아갈 때 커피 나무를 몇 그루 가지고 가게 된다. 캐러비안의 자신의 근무지에서 커피 농장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드클리외의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커피나무를 한 그루만 가져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러 그루를 가지고 갔는데 딱 한 그루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거나 그가 굉장한 고생 끝에 이 커피나무를 살려서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져 간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식수가 모자라는 상황에서 나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식수를 나무에게 나누어 주었을만큼 커피나무에 대한 그의 정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그의 노력 덕분인지 커피나무는 죽지 않고 살아서 마르티니크 섬에 도착하게 되고, 무럭무럭 잘 자라게 된다. 그리고 이 한 그루의 나무의 후손들이 거의 모든 아메리카 대륙과 캐러비안의 섬에 전해지게 된다.


 



 


왼쪽 아메리카 대륙쪽 캐러비안 바다위에 작은 섬이 바로 그 마르티니크 섬이다. 그 아래의 녹색이 프랑스령 기아나이다.


 


프랑스령 기아나는 네덜란드 덕분에 마르티니크 섬보다 일찍 커피를 재배하게 된다. 남미 지도를 보면 프랑스령 기아나는 수리남 바로 옆에 있다. 수리남에는 이미 암스테르담에서 이민 온 커피나무들이 재배되고 있었지만, 그 나무들을 네덜란드 사람들이 프랑스령 기아나 사람들에게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암스테르담 시장님 정도는 되야 커피나무를 선물하고 그러는거다.


 


여튼 프랑스령 기아나 사람들은 국경 건너에서 침만 꼴딱꼴딱 삼키고 있었는데, 한 범죄자가 큰 일을 해내고야 만다. 이 범죄자는 잡히지 않으려고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수리남으로 도망을 갔는데, 거기서도 자신의 장기를 십분 발휘하여 커피씨를 훔쳐 가지고 돌아온다. 여기서 당국과 이 기능인 사이에 빅딜이 이루어지는데, 씨를 당국에 바치는 대신에 자유를 얻는 조건이었다. 교도소 창가의 화분에 심어서는 대량 재배가 불가능하겠다는 판단을 했던지 이 범죄자는 빅딜에 응하게 되고 프랑스령 기아나도 커피 재배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브라질


 


브라질도 커피 씨나 묘목을 좀 구해볼라고 했지만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국립 대도 학교를 세워서 실력있는 도둑들을 수리남이나 프랑스령 기아나로 침투시키는 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여튼 도둑을 키우기도 전에 브라질에게 멋진 기회가 찾아온다. 수리남과 프랑스령 기아나 사이에 국경 분쟁이 생긴 것이다. 싸우다가 영 결판이 안 나자 양국은 가까이에 있는 브라질이라는 큰 나라에 중재인을 보내 달라고 요청을 한다. 아싸라비야 콜롬비야. 아니 브라질리아. 브라질은 장교인 팔예타를 프랑스령 기아나에 파견한다. 그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임무는 분쟁의 중재. 숨겨진 임무는 커피나무 밀수였다.


 


이 팔예타라는 장교는 요즘으로 치자면 완전 007 제임스 본드다. 그는 분쟁을 멋지게 해결하는 동안 틈틈히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여 그곳 총독 아내의 마음도 훔치게 된다. 그리하여 총독이 팔예타를 위해 베푼 작별 연회의 자리에서 총독의 아내는 커피씨와 어린 묘목이 숨겨진 아름다운 꽃다발을 팔예타에게 선물하게 된다. 딴지스들아. 바로 이거다! 여자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 이렇게나 중요한거다. 이 글의 연재 목표와 참으로 아름답게 부합하는 에피소드라 아니할 수 없다. 그 꽃다발 속에 있던 커피 묘목들이 지금의 브라질 커피 산업의 시발점이 된다.


 






영국의 에프터눈 티. 



 


영국에도 커피가 전해지긴 했지만 커피보다는 차가 사랑을 더 많이 받았다는 느낌이 든다. 작년에 필자가 홍콩에 갔을 때, 페닌슐라 호텔에서 거금을 주고 마셨던 애프터눈 티도 커피가 아닌 홍차였다. 오랬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홍콩에 남아있는 영국의 흔적 중 하나인 애프터 눈 티. 영국의 귀부인들이 점심 식사 이후, 저녁 식사 전의 오후 시간에 차와 함께 간단한 쿠키나 빵 같은 것을 먹던 풍습이다. 서울에도 고급 호텔 같은 곳에서 애프터 눈 티를 판매하고 있는 것 같더라. 돈을 좀 투자해서라도 마음을 얻고 싶은 여성이 있다면 애프터 눈 티를 마시러 가자고 제안해보라. '어머 이 오빠 엄청 낭만적이네' 라고 생각하지 않겠냐? 물론 가서 먹어보면 '겨우 이걸 주고 이렇게 기가 막힐 돈을 받는거냐!!' 라는 마음이 들겠지만, 어쩌겠냐? 투자라고 생각해야지.


 


영국에서 커피보다 홍차가 더 사랑을 받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네덜란드나 프랑스 등이 식민지에서 커피를 재배할 때 영국은 커피 재배에 적합한 식민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네덜란드가 커피를 키우려다 실패했던 스리랑카에서 영국은 홍차를 재배하게 되고, 이 곳의 홍차가 영국에서 그리고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서 소비되었다. 북미 대륙에는 영국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 많이 살다보니 이곳에서도 커피보다는 홍차가 널리 음용되었다. 그런데, 1773년의 한 사건이 커다란 변화를 불러온다.



 


보스턴 차 사건



 


미국에 홍차를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게 독점적으로 허용하는 법안이 영국에서 통과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홍차를 미국에 비싸게 팔고, 그 대신에 영국정부에 세금을 많이 내는 시스템을 기대한 것이다. 물론 미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열받는 일이었고, 그래서 급진적인 반영국파 사람들이 보스톤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에서 홍차를 훔쳐서 죄다 바다에 수장시켜 버렸다. 이런 판국이니 홍차를 마시는 일은 비애국적인 일이 되고, 적국인 영국에 도움이 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홍차의 대용 음료로 커피가 더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에스프레소


 


자 지금까지 커피 묘목이 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닌 이야기를 해 보았다. 이제 커피의 음용법에 대해서도 조금 이야기를 해보자. 현재 우리가 즐기는 커피는 추출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번째는 볶은 콩을 갈아서 깔때기 모양의 거름종이에 넣고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 내려마시는 드립 방식의 커피이고, 두번째는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소량의 에스프레소를 추출하여 마시는 방식이다. 한국에 진정한 커피 붐을 일으킨 것도 바로 이 에스프레소가 아닌가 생각이 되는데, 이녀석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유럽 사람들이 왜 에스프레소를 만들어내게 되었을까? 잘 모르겠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드립보다 에스프레소가 조금 더 빨리 커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기계가 발명되기 전에는 오히려 더 번거로웠을 것 같기 때문에 100% 동의 하기가 힘들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발전 과전을 보면 "좀 더 빨리" 보다는 "좀 더 강한 압력으로"에 초점이 맞춰진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추출하여 더 맛있는 커피를 즐기고 싶다는 욕구가 에스프레소 라는 커피 스타일을 만든 원동력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모카 포트


 



 


 


에스프레소를 설명하기에 참 좋은 녀석이라 모카 포트에 대해 이야기 해 볼려고 한다. 이 친구는 지금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상부와 하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하부(A)에는 물을 넣고, 중앙(B)에는 커피를 갈아서 넣고 끓인다. 그러면 물이 증기 상태로 중앙부의 커피 가루를 지나서 상부(C)로 커피가 추출된다. 중요한 점은 물의 상태가 아닌 증기의 상태로 커피 분말을 지나간다는 것. 그래서 더 큰 압력으로 커피를 추출한다는 것이다. 더 큰 압력!! 이것이 핵심 되시겠다.


 


모카 포트가 만들어내는 압력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은 조금 더 큰 압력으로 커피를 추출하기 위해 고심하게 된다. 가장 쉽게 고려해볼 수 있는 것이 끓는 물에서 증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출구를 막고 계속 가열하여 원하는 정도의 압력이 발생한 이후에 출구를 열어 강력한 힘으로 커피를 추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충분한 압력은 얻을 수 있지만 적정 온도보다 물이 더 뜨거워져서 커피의 맛이 좋지 않은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적정한 온도의 물을 기계적 힘을 빌려 더 큰 압력으로 커피 가루쪽으로 미는 방식이다. 현재의 에스프레소 기계들은 90도 정도로 가열된 물을 9기압으로 밀어낸다.


 



미국에 건너 간 에스프레소.


 


미국에서는 각 가정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은 이른 시기부터 에스프레소를 마셨지만 전국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유럽 여행을 하면서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등을 맛 본 사람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에스프레소 문화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역시나 미국 에스프레소 문화를 폭발시킨 장본인은 스타벅스다. 스타벅스가 전국적인 체인망을 갖추고 에스프레소 음료를 제공하면서 미국에서 에스프레소 커피가 붐을 이루게 된다.


 


한국 커피의 역사


 


한국은 100년이 조금 넘는 짧은 커피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우리보다 170년 정도 빠르게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로 커피를 마신 사람은 고종 황제다. 아관파천이라고 아시는가? 신변에 위협을 느낀 황제께서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신 사건이다. 한 나라의 황제가 남의 나라 공관에 가서 안전을 보장 받았던 슬픈 역사의 장면에 커피가 등장한다. 러시아 공사였던 위베르가 고종 황제에게 커피를 소개하였고, 1년 동안의 러시아 공사관 생활 동안 고종 황제는 커피 애호가가 된다. 보드카가 아니라 커피라니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국운이 기울어 심사가 많이 복잡하셨을 텐데, 그 때 그 커피가 황제의 마음을 잘 달래 주었기를 빌 뿐이다.


 


1년간의 러시아 공관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신 고종 황제는 덕수궁 내에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대신들 혹은 다른 나라의 사신들과 커피를 즐기셨다고 한다.


 



고종 황제


 


1930년대에 다방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당시 다방을 열었던 사람들이 영화 배우, 영화 감독, 시인 등의 예술가들이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특히나 영화로도 소개되었던 시인 이상과 그의 연인 금홍이 문을 열었던 다방도 있었다. 예술가들이 사장이었으니 이러한 다방들이 문인과 화가 영화인 등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음악을 감상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다음 작품을 구상하는 그러한 아지트 같은 역할을 했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이 때 참전한 미군들이 마시던 인스턴트 커피가 한국 사회에 알려지게 된다. 한국에서 커피를 논하면서 인스턴트 커피를 빼 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현재도 우리 나라 커피 문화의 상당 부분은 인스턴트 커피가 담당하고 있다. 1968년 동서 식품이 문을 열면서 국산 인스턴트 커피가 생산 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커피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드립 방식으로 추출하는 원두 커피에 대한 수요가 있기는 했지만, 인스턴트 커피가 워낙에 강세인지라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다가, 스타벅스를 필두로 한 에스프레소 커피점들의 성공적인 안착으로 인스턴트가 아닌 원두커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안분


 


*원래 커피는 2회로 마칠라고 했는데, 쓰다 보니까 각 원두 생산지의 커피에 대해서 조사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어떠냐? 관심있냐? 케냐 AA, 과테말라 안티구아, 자메이카 블루 마운틴 뭐 이런 것들 말이다.

운영수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