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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짱 추천0 비추천0



2009년 12월 1일


파토




 


어제 아침에 갑자기 우체국에서 문자가 왔다. 택배 배달 예정이란다.


 


많이들 아셨겠지만 어제 아침은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아이폰 예약 물량이 배달되기 시작한 그 시점이다. 트위터에서도 다들 아이폰이 왔네 안 왔네, 송장번호를 넣어도 배송추적이 되네 안되네 시끌벅적했다(참고로 요즘 트위터 많이 하니 들어와서 patoworld 팔로우하시라. 질문에 신속히 대답해 드리고 말상대 서비스도 한다)


 


근데 이상한 건 난 분명히 아이폰을 주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필자의 옴니아 1 1년 가까이 각종 취재와 집필, 급한 메일 송수신에 큰 도움을 주고 있고, 비록 두 살 바기 아기에게 던져지고 밟혀 왔지만 여전히 제 성능을 발휘하고 있다. 아이폰이 탐이 나긴 하지만 이걸 버리고 그걸 살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홈쇼핑이나 인터넷 쇼핑에서 딴 거 뭘 산 것도 없었다.


 


이 시점에서 간교한 필자의 머리를 스친 생각은, 혹시라도 어떤 광팬 독자께서 내게 아이폰을 사서 보내 준 건 아닐까 하는 거였다. 머 누구처럼 생리혈서까진 안 보낸다 한들


 


, 꿈도 야무지지 생각해보면 독자가 내 집 주소를 알 리도 없고 안다 한들 수십 만원이나 하는 아이폰을 그냥 보내줄 리도 만무하지만, 세상에는 간혹 스토커라는 이름의 기적도 존재하지 않는가 말이다(물론 맨날 이런 생각 하고 사는 건 아니다. 트위터가 웬수다)


 


그렇게 택배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는 일파만파로 증폭되고,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우체부 아저씨가 벨을 눌렀다. 그리고는 그가 전해준 물건은 바로 아래의 것이었다.


 


 


 





  


그랬지. 깜빡 잊어먹고 있었구나. 노무현 재단에 후원 신청하면 이걸 보내 준다고 했었다. 그때 물건 안받는 옵션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책과 쌀이 욕심나서, 아니 그보다는 먼가 기념으로라도 받고 싶었다. 그게 꽤 오래 전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이제 배달이 온 거다. 하필 아이폰 배달하는 날과 같은 날, 같은 우체국 택배로.


 


우체국 오늘 꽤 바빴겠다.


 


여하튼 어이없게도 진짜로 아이폰이 아닐까 실낱 같은 기대를 걸고 있던 필자, 순간 약간의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는 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머 굳이 노무현 재단 기념품이라는 점이 실망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단지 이건 어차피 언젠가 올 물건이고 아이폰은 만약 온다면 일종의 횡재를 하는 것이라는 차이였을 뿐


 


상자를 열어봤다.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l  봉하쌀


 


오리 및 우렁이 농법으로 지었다는 그 무공해 쌀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손길이 닿은 마지막 쌀이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서거 직후 취재를 갔을 때 그 기나긴 조문행렬의 옆에서 익어가던 바로 그 쌀이다.


 


이걸 어떻게 먹냐. 밥을 지으면 목구멍으로 넘어갈까. 차라리 불쌍한 사람을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양이 너무 적다.


 


근데 이상하게도 표지의 글씨가 자꾸 봉하 우렁이 쌀이 아니라 눈물의 봉하쌀로 읽힌다. 에유, 난 여전히 맛이 가 있구나. 


 


 





  


l  성공과 좌절


 


이런, 오마이뉴스에서 나온 노무현의 마지막 인터뷰 책도 사놓고 오늘까지 못 읽은 난데. 그 책은 딱 세 페이지 보고는 덮어 버렸고 여지껏 다시 열지 못하고 있음이다.


 


그래도 세월이 그 동안 좀 지났다고 이 책은 진도를 조금 뽑을 수 있을까. 특성상 치밀한 구성이나 줄거리를 기대할 수 없겠지만 노무현 만년의 고민과 진심을 알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아니겠냐.


 


  





 


  l  증명서


 


나름 성의 있게 만든 노무현 재단 후원회원 증명서가 들어 있다. 깔끔하고 예쁘게 생겨서 액자라도 해 놓고 싶은 맘도 든다. 그래 머 이런 것도 있어야 후원할 맛이 나기도 하겠다 싶다. 하지만 자랑스러워 하기에는 내가 내는 돈이 너무 적다. 누구는 매월 몇천만원 씩 기부도 한다는데 난 꼴랑 월 만원이니.


 


  





  


l  후원신청서와 스티커 등.


 


3장씩 든 후원신청서는 주변에 누구라도 당장 후원을 시키라는 노골적인 압력이 분명하다. 내 주변에 이걸 내밀 만한 사람 중에 아직 후원 안하고 있는 넘뇬이 있을까? 아무래도 별로 없지 싶어 이건 독자 열분들께 부탁 드린다. 싫음 말고.


 


역시 눈에 들어오는 건 스티커. 근데 이걸 어디 붙여야 할까나. 차에 붙이면 떨어질 것 같고, 기타에 붙이자니 무조건 운동권 밴드 같이 보일 것 같아 좀 그렇고여하튼 궁리 중이다. 스티커는 어딘가에 붙어야 맛인거니.


  


 





  


 





 


이렇게 내용물들을 늘어놓고 바라보고 있지나 올만에 또 울컥한다.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이 물건들이 어딘지 노무현의 유골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죽은 노무현의 재단에 시시한 돈 몇 푼 보내니 유골 몇 조각 보내 준 것 같은아 물론 재단을 폄하하려는 소리가 아니다. 그저 내 개인적인 감상이 그랬다는 말이다.


 


용기를 내서 책을 좀 들여다봤다. 아 씨파, 첫 장부터 유언이다. 다 외울 정도로 많이 본 글귀. 이렇게 건조한 유언 몇 줄 남겨 두고 갈 정도로 세상에 미련이 없었나.


 


책 전체는 전반적으로 노무현의 노트와 회의록 등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식이다. 제대로 된 회고록이나 저서는 아니다. 단지 그가 죽기 전에 무엇을 생각했는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말 그대로 성공은 머고 좌절은 먼지 스스로의 목소리로 고통스럽게 읊조린 이야기들이다.


 


이미 몇 번 이야기했지만 나는 소위 말하는 노빠가 아니었다. 외국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노사모도 아니었다. 사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기대도 그리 크지 않았었다. 그러나 노무현 탄핵 때는 누구 못지 않게 큰 소리로 반대했고 서거 때도 미친 듯이 분노해서 떠들어댔다.


 


어찌 보면 그것은 노무현이라는 인간과 관련한 것이라기 보다는 세상을 향한 것이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가장 양심적이었던 정치인을 완벽하지 않다는 죄로 죽여버린 세상, 나 자신도 포함된, 이 너무 야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토양 하에서라면 노무현 같은 정신을 가진 정치인은 이 땅에서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최근 노무현에 대한 표적 수사의 증거들이 여기저기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거기에 덤으로 이명박의 도곡동 땅 이야기도 나온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이런저런 상념 끝에 결국 책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아래의 한 대목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나의 실패를 진보의 좌절, 민주주의의 좌절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사고는 역사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략)



여러분은 여러분의 갈 길을 가야 한다. 몽땅 덮어씌우려는 태도도 옳은 것은 아니지만 노무현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극복해야 할 자세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할 일이 있고 역사는 자기의 길이 있다.


 


혼자만의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이제 즈음에는 그가 왜 죽어야 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다. 죽음으로서 크나큼 슬픔과 절망을 주었지만, 한편 죽음으로써 거대한 희망의 싹을 심어 주었던 것은 아닐까. 결백은 아닐망정 - 본인이 결백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나는 이를 존중한다 - 스스로의 좌절과 실패를 군말 없이 목숨과 맞바꿈으로써, 아직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하며 말이다.


 


결국, 생명을 던짐으로써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는 처절한 각성을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고, 그래야만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 거다. 그 스스로 자신이라는 상징적, 현실적 장애물을 불태워 버리고 우리에게는 마음껏 새로운 미래를 그릴 수 있게 한 거란 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이 책을 보면 노무현은 분명 직접민주제, 혹은 참여민주제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시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의민주제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투표의 뜻이 왜곡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와 우리 이후 사람들의 과제일 것입니다라며 나름의 고민을 토로한다.


 


이것도 저것도 막힌 상황에서는 저항권이라는 것을 행사해왔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별 막힌 것도 없는데, 국민 다수의 여론이나 투표의 결과가 다수 국민의 이익과 서로 어긋나는 결과가 나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입니다.


 


대통령을 지내지 않았었다면, 혹은 생각할 시간이 더 길게 있었더라면 나는 그가 결국은 직접/참여민주제라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된 대로 그는 더 이상 정치적 논의를 끌고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여 버렸다. 살아서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죽음으로서 그 무거운 짐을 이제 남아있는 우리에게 넘겨주는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과연 진정한 노무현의 유지가 무엇인지 또 생각하게 된다. 노무현을 반복하는 것, 그가 하려 했던 일을 똑같이 다시 시도 하는 것은 그 유지를 잇는 길이 아니다. 그의 이름에 마냥 기대어 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노무현을 기억하되 그를 밟고, 그가 시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찾아서 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이 있고 역사는 자기 갈 길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머 반 농담이긴 하지만, 평소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필자조차도 순간적으로 공짜 아이폰의 망상에 빠져 버리는 게 세상인 것 같다. 별로 필요 없는 반짝거리는 물건은 쉽게 얻으려 하고 꼭 필요한 힘든 길은 자꾸만 피하려고 한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정신을 차릴 수 있고 또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와중에 방금 전국공무원노조에서 메일이 왔다. 오늘 새벽 5 30분 조합 사무실과 서울본부 사무실에 경찰의 압수 수색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200명의 대규모 경찰 병력이 동원되었다. 오늘 낮으로 예정된 기자회견 및 통합노조설립신고서 제출을 6시간 남짓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그와 동시에 철도노조의 압수 수색도 이루어졌단다.


 


모든 노조를 적으로 규정하고 모든 파업을 유권해석이 떨어지기도 전에 무조건 불법이라고 밀어붙이는 이 정부. 연예인들이나 앉혀 놓고 훈훈한 분위기에서 짜고 친 대통령과의 대화’.


 


그래도 노무현 때는 국민과의 대화였다. 이런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에서 벌써 발상의 차이가 드러난다. 유인촌의 대동아전쟁 발언처럼 아예 문제의식 자체가 없으니 아닌척 할 수조차 없는 거다.


 


참고로 이게 왜 짜고 친 고스톱인지 확인하려면 아래를 보시라.



 



 


 


이런 와중에 4대강에 수십조 쏟아붇고 복지예산 급식예산 삭감하고, 대신 삐까뻔쩍한 4천만 원짜리 최첨단 로봇생선을 강에 띄우겠다는 화려하고도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는 우리의 대통령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아이폰이 없어도 된다.  


 



딴지 논설위원 파토(patoworl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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