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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2. 2. 수요일


아홉친구


 


우리나라에는 관습적으로 쓰기에 머뭇거려지는 금지어들이 있다. 대표적인 말이 동무.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해주었던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은 친구라는 단어보다 훨씬 정감을 더해주는 순우리말이지만, 북에서 이 말을 정치적으로 선점해버리는 바람에 이제는 쓰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같은 취지에서,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새삼 생각하게 된 말이 인민(人民)’이었다.


 


인민은 우리가 흔히 쓰는 국민이란 말에 비하면 덜 근대화된 속성을 지닌다. 바꾸어 말하면, 국민은 근대 국가가 형성된 후에 쓰일 수 있는 개념이다. 또한 국가 권력의 통치를 받는다는 개념도 숨어있다. 그런 점에서는, 근대 국가와 무관한 백성이란 말도 수동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내가 알고 있는 뉘앙스로는, 인민은 전근대적 백성과 근대적 국민을 포함하면서도, ‘민중과 같이 깨어있는 의식의 대중까지 의미하는 복잡미묘한 개념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이 인민(人民)이란 말의 진짜 뜻이 매우 궁금해졌다.


 


()과 민()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가 활동하던 때에도 이미 쓰였던 개념이다. 따라서, 인민이란 말이 후대에 정착되었다고 하면, 제자백가들이 쓰던 인()과 민()의 개념이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그런 점에서, 중문학 비전공자인 입장에서 나중에 학문적 가르침을 더해줄 분이 계시겠지만 일단 말을 꺼내자면, ()과 민()의 결합은 지극히 비민주적인 개념을 낳는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과 민()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은 요즘 말로 하면 지식인, 배운 사람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떠올려보면 밥 한끼 먹기도 어려웠을 시절이다. 그런 와중에 글을 배운다는 건 어마어마한 선천적 혜택 혹은 무협지에서 흔히 말하는 기연(奇緣)에 해당한다. 글을 배우게 되면 소위 천명(天命)이 무엇인지도 탐구해 나갈 수 있고 도()가 뭔지도 추구할 수 있다. 유학의 입장에서는, 학문을 배운 자가 당시의 사회 엘리트로서 뭔가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걸 회피하거나 제 배나 불리려는 자들을 공자는 소인(小人)이나 향원(鄕愿)이라며 비난했다. 바꿔 말하면 소인배가 인()의 범주, 즉 사회 엘리트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욕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욕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 민()이다. 이들은 제 밥벌이말고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능력도 없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전쟁통에 농사도 제대로 못 지으며 빌어먹고 다닌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기에도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공자의 휘하에는 귀족 사대부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의 제자들도 있었다. 신분제의 현실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배움에는 무엇보다 자기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유학은 강조했다. 그러나 또한, 전혀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무지렁이의 존재를 또한 인정해야 했다. 오직 배불리 먹이기만 하면 불평이 없는 이들, 지도자가 누구든 관심 없었던 이들, 어쩌다 배우기()는 했으나 때때로 익힐(時習) 수 없었던 사람들, 엘리트에 의해 통치받아야 하는 백성들 - 이들이 민()이다.


 


논어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공이 말하길, 만약 백성들에게 널리 사랑을 베풀고 만인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 왈, ()이다 뿐이겠느냐. 성스럽다 해야 할 것이다. 요순 임금조차도 그에 미치지 못함을 걱정하였다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


 


그렇다면 사랑을 베풀고 만인을 구제하는행위는 아래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다. 그건 군자의 통치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니, 당연히 인()의 도리에 속한다.


()과 민()의 결합은 한문 수업 시간에 배웠던 병렬 관계로 맺어진 단어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인민이란 말에는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권력 관계가 가로놓여져 있고, 둘 사이의 화해나 융합은 아쉽게도 불가능하다. 애초에 인민의 개념이 관념적인 게 아니라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반영하면서 생겨난 말이듯이, 둘의 융합도 2천년 이래의 역사를 볼 때 사실상 불가능과 같았단 말이다. 아크로폴리스든 공화정이든, 묵가든 법가든,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모두 실패하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파토님이 지적한 진보와 보수의 구분을 여기에 인용해보자면, 진보란 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리라.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려는 게 아니라, 진보주의자들의 머리 속 한 구석에 숨어있는 현실적 우려, 그러니까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현실상으로는 어려울거야라는 생각이 비롯되는 어떤 원인이다. 우리가 써온 말에서, 그리고 그 말들이 재구성한 세계에 의해서 이미 한쿠션 먹고 들어가는패배주의가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언어상의 추론 때문에 생각을 굳히게 된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엘리트와 대중 혹은 지식인과 민중이 진짜로 구별된다고 믿는다. 한창 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같은 수준의 지식을 얻고 같은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세상엔 전혀 다른 계층이 존재하며,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거나 때를 놓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논리적 사고가 아니라 감정적 만족감에 의해 시비를 판단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들 상당수가 특정 정당 지지자라는 건 맞겠지만, 반대로, 다른 진영이라고 이런 사람들이 없는 게 아니다. 오직 감정적 혐오만으로 현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숱하다.


 



이러한 구별을 없애고 통치/피통치의 권력 관계를 더욱 평등하게 만들 방법은, 지금까지의 논의로 보면, 사회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기본적 요건인 교육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이다. 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비록 경상도 위주의 정권이 유지되었다고 하나, 예전에 비하면야 그래도 평등한 교육이 실시되었고, 대학 진학을 통해 나름 입신양명할 수 있는 기틀이 주어졌었다. 이런 통로가 존재한다면 백성들이 엘리트가 되든 깨어있는 민중이 되든, 민주주의의 한표가 제대로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한 표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연령대와 교육의 보급 시기를 비교해보면, 필자의 말뜻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게다. 그러므로 21세기 들어 교육이 급속도로 비평준화의 경향을 띠고, 빈곤층의 교육 여건이 악화되며, 기득권층이 교육을 통해 부의 재순환을 노리는 상황은, 실로 우려스러운 것이다.


 


 


주제에 맞게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우리는 미실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 이래로 늘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건 인()과 민()이 구분돼있는 세상이며, 그 구분의 기준은 지식이다.


 


파토님의 의견은 이 구분에 저항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공천제가 제 취지를 발휘해야 하며,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파토님이 우리가 미실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얘기한 것은, 지금도 그래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달리 볼 수도 있다. 시민 사회단체가 지분을 얻는 국민공천제란 것도 결국 계파정치 따위로 변질될 공산이 다분하다. 게다가 기존의 정당 정치가 국민공천의 취지를 담고 있는데,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결국 일반인참여하는 시민의 자격을 달리하는 셈이니 그게 인()과 민()의 구별과 다를 바 있을까 의심스럽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란 역사적으로 혁명 이외엔 성공한 바가 없으며, 현실 정치 내에서는 솔직히 공치사에 불과하다. 그 말이 제대로 실행된 경우를, 필자는 동창회에서조차 본 적이 없다.


 


파토님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하려는 뜻은 아니다. 관념적으로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어째서 경험적 사실로는 증명되지 않는가가 고민되기 때문에 나오는 이야기다. 누군가 몇 가지 반례를 들 수도 있겠지만, 그걸로 훨씬 수두룩한 역사적 사실들을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다. 파토님은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정치는 결코 국민의 수준을 따라올 수 없고 결국 MB와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는 이런 따우 상황이나 반복될 뿐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필자 입장에선 단일 후보 같은 현실적 방안 없이 이상적 제도나 다듬으려 하니 이런 따우 상황이 반복될 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다시 노무현 때와 같은 천운(天運)이나 기대할 순 없다.


 


마지막으로 밝히자면, 필자의 주장이 관념적 논의가 불필요하다고 하는 게 전혀 아님을 밝히고 싶다. 몇 달 전, 딴지 편집부와 저녁을 먹던 자리에서 이와 비슷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진보진영에겐 구멍가게 아저씨에게 한 표를 더 찍게 하는 것이 시급한가? 아니면 근본 취지가 자칫 훼손되어 기성정당처럼 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한가? 답이 없는 이야기다. 문제는,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때때로 익히는지식인의 과제라는 점이다. 이러한 논쟁이 없어지고 윗자리의 눈치나 보는 어떤 정당처럼 되는 때야말로, 보수도 아닌 꼴통으로 전락하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홉친구(ninthpal@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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