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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광화문 2004 그리고 긴급제안

2004.3.13.토요일
딴지일보

 


벌집을 건드렸다.


그것도 한방 쏘이면 즉사해 버리는 말벌집을 쑤셔놨다.



2004년 3월 13일, 어둠이 내리는 광화문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을 포용하기에 광화문은 그리 넓지 않았고, 포화 상태를 기다리기에 시간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광화문에서 종로 1가로, 종로 1가에서 종로 2가로, 3가와 4가를 지나 5가까지 차도와 인도는 촘촘히 채워졌다. 이런 풍경...처음이다.


어린 아이를 무등 태운 아빠, 중년의 노부부, 중고등학생과 젊은 청년, 여자와 남자, 젊은이와 노인들까지 연령도, 계층도, 성별도 다양했다. 탄핵 사건이 터진 것이 불과 하루전이건만 행사를 진행하는 범국민운동본부의 진행은 일사불란했고 2천명에 달한다는 자원 봉사자들은 마치 마술을 부리듯 몰려드는 사람들을 침착시켰다. 사람들이 앉은 자리의 적당한 지점에 통로가 만들어졌고 촛불등 준비물들이 나뉘어졌다. 이런 손발 착착..또 처음이다.


어제의 국회 쿠테타는 분명 이 사람들의 감정에 진도 7.0이상의 격앙감을 심어주는 강도였건만 시위 현장에 비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혼자 있을 때 느꼈던 분노를 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는 것에 뿌듯함과 안도를 느끼는 분위기였다. 동질감이든 동지애든 같은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군중화 되었을 때 그 속에는 늘 감동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법이고 2004년 광화문도 그 점에서 예외일리 없었다. 비장함이 사라진 시위장을 채운 것은 흥분과 열기 그리고 유쾌함과자신감이었다.


맑스 형님이 설파한 변증법이라는 단어를 대한민국 시위 현장에 인용할 줄 내 어찌 알았으랴. 2004년 3월 13일의 광화문 풍경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시위의 변증법적 발전이었다.


과거의 시위가 조직화된 특정 단체에 의한 의도된 길로의 이끔과 에의 의미만을 가진 참여자들의 끌림 이었다면 작년 이른바 촛불 추모 집회는 태동부터 진행까지 네티즌과 시민에 의한 자율적 운영이 그 특징이었다. 그리고 13일 광화문은 이 두 개를 기가 막히게 혼합시킨 절묘함이었다.


주최측은 있으되 주체는 철저히 참여 시민들이었고 무대의 진행은 눈치만빵으로 객석의 눈높이에서 진행되어졌다. 그러하기에 과거 시위 현장에서의 보여졌던 진행조직의 일방적인 모습도, 촛불 시위때의 다소간 분산된 모습도 2004년 광화문에서는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깃발 논쟁과 주체를 둘러싼 미묘한 신경전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2004년 광화문에서는 꾕가리와 붉은 머리띠 대신 마스게임때나 볼 수 있는 주홍, 보라의 카드가 등장했고, 시민들의 퍼포먼스가 연출됐다. 그 많은 사람들은 무대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무대는 시민들 앞에서 오버도, 부족함도 없이, 노련한 교통정리를 수행하고 있었다.


과거 시위때의 통일감과 촛불시위때의 자율성 그리고 월드컵때의 열기를 한꺼번에 합쳐 버린 것이 딱 광화문 2004였던 것이다.


축구도 강팀, 국민도 강팀이더니 시위까지 강팀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한다. 아마도 최근 몇 년간 우리가 함께 했던 광장 문화의 경험이 이런 근사한 모습을 낳게 해줬나 보다. 민중 가요 가사까지 나눠주는 세심한 진행측과 흡사 어디서 시위에의 훈련이라도 받고 동원된 듯한 십만에 가까운 시민들이 공동으로 일궈낸.. 이건 한마디로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2004년 광화문의 경이로움은 시위의 현장에 쫒겨난 노무현이 아닌 살해당한 민주주의가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에게 친노니 반노니 하는 것은 관심밖으로보였다. 오직 유린당한 상식과 꺽여진 민주주의에 대한 회복이 이들을 음직이게 한 동기였다. 그러하기에 그 대상이 노무현이 아닌 또 다른 누군가였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합법적 절차에 의해 뽑힌 대통령이었고 지금과 같은 총칼 없는 쿠테타로 탄핵을 받는 상황이었다면 사람들은 광화문을 다시 찾을 것이었다.


비상식적인 소수가 상식적인 다수를 분노하게 했다면 그 결과는 참으로 명약관화하다. 밥줄이 아무리 다급했기로 한 수 앞마저 내다보지 못한 저 똥개들에게 측은지심까지 들어 버릴 정도로 오늘 광화문은 훌륭했고 또 훌륭했다.


벌집을 건드려도 참 단단히 건드렸다.


 


 


그런데 아쉬움이 딱 13밀리 그람 남아버린다.


비쥬얼한 통일성이다.


시위의 중요한 목적은 메시지 전달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 전달에 가장 효과적인수단은 참여 인파의 무게감이다. 즉 숫자다. 100명이 모인 시위와 1만명이 모인시위는 차원 자체가 다르다. 숫자는 보여지는 것이다. 즉 비쥬얼이다. 결국 시위는 타인에게 참여자의 주장을 들려주는 것이 아닌 보여지게 하는 힘이다. 그 힘이 클수록 목표 대상은 공포감을 크게 느낀다. 그게 성공한 시위다.


우리는 이미 2002년 월드컵을 통하여 비쥬얼의 힘을 경험했다. 붉은 대한민국을 전세계에 보여줬다. 그것은 경악이었고 눈물 나는 자부심이었다. 우리의 붉음이 외신을 통해 전세계에 송전되어질때 그 뿌듯함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더불어 우리 스스로 붉은 옷을 입음으로써 느꼈던 거리의 일체감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2004 광화문의 첫날 느꼈던 13밀리 그람 아쉬움은 바로 붉음으로 상징되는 그런식의 일체감이 없었다는 점이다. 전체가 만들어내는 비쥬얼의 힘이 약했다는 점이다.


3월 12일을 첫집회로 하여 매일 광화문에서는 탄핵무효 부패정치 척결 집회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정도의 성숙한 진행과 참가자들의 흥겨움이라고 한다면 누군가 말한대로 산책하듯 광화문을 가는 시민들의 발길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일테면..


3월 12일을 딴지는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명했다. 피로 일군 대한 민국의 민주주의가 살해당한 날이다. 아울러 전세계적으로 개망신을 당한 날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 정도 수준이었냐고 세계가 우리 국민을 바보라며 조롱한 날이다.


광화문 첫날 이 많은 인파가 의회와 민주주의의 죽음을 근조하며 검정색 옷을 입고 있었다면? 아니 검정색 두건을 쓰던 검정색 손수건을 흔들던 하여간 검정색으로 광화문을 물들였다면?



이게 죄다 검은색이라면...


첫날 시위는 좀더 파괴적인 효과를 보여줬을 거라고 본다. 193명의 개들에게는 저승사자같은 위압감을, 우릴 바보라 생각한 세계인들에게는 우리가 절대 바보 국민이 아니라는 증거를, 참여자들 끼리는 좀더 밀착된 결속감을 심어줬을 거라 본다.


지금 본 우원은 획일화된 운동 방식으로 하자는 거가 절대 아니다. 이 만큼 세련되졌는데 왜 과거로 회귀하나. 보여지는 효과를 극대화 하자는 거, 다시 한번 강조한다.


글구.. 일테면..이라고 했다. 요즘 본지 미쳤다. 일케 기사 많이 뽑다 보니 검정색제안에 대해 뭔가 떨떠름한 기분도 든다. 블랙이 주는 우중충함 같은거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즉 비쥬얼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뭔가가 있을 것 같다.


그거 이제 열분들이 함 줘보시라. 먼가가 휙까닥 떠오르면 게시판에 [제안]이라고 달고 함 써보시라. 월욜까지 모아서 최종 확정한 후 공식적으로 대대적으로 뿌리겠다. 이왕 할거 화끈하게, 효과적으로 해보자. 이상 제안 끝.



 
국민은 강팀이다 조직 위원장
뚜벅이 (ddubuk@ddanzi.com)

















대통령 탄핵에 관련한 니덜의 의견, 기사, 사진 및 만화, 지역 집회 소식, 집회 스케치, 해외 언론 동향, 해외 교포들 반응, 기타 등등등 몽땅 다 투고받습니다. 후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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