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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아이티사태, 그리고 미국의 중남미경영

2004.3.4.목요일

딴지 국제부

해묵은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아이티에서 결국 사건이 터졌다. 아이티 역사상 33번째의 유혈쿠데타가 일어났고, 그간 수차례 집권과 실각을 거듭해온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 Bertrand Aristide) 대통령은 결국 2월 29일 하야한 뒤 망명길에 올랐다. 한때 아이티 민주주의의 희망으로 여겨지던 아리스티드는, 무능과 부패의 오욕을 뒤집어쓴 채 모국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주목할 대목은, 아리스티드가 자신이 "미군에 의해 납치됐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거다. 애초 사임할 의사가 없었던 자신은 무장한 채 들이닥친 미군의 하야압력에 직면했으며, 이에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하야를 결심했다는 얘기 되겠다. 당근 미국 정부에서는 거짓말이라고 펄펄 뛰고 있고. 1990년 실각했다가, 1994년 미국의 힘을 업고 재집권에 성공한 아리스티드이다 보니 이 언급은 진위여부를 떠나 상당히 아이러니컬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고보니, 중남미 지역에서 일어나는 온갖 정치적 격변의 현장에 미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일은 그리 낯설지 않다. 확인된 사례만 해도 얼마든지 많다만, 그중 가장 대표적이고도 극적인(그리고 유명한) 3가지 사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각각 시기도 다르고 상황의 본질도 조금씩은 다르다만, 잘 살펴보면 뭔가 중대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거다.
 


 칠레



칠레. 이번에 FTA 비준건 땜에 남다른 감회가 생겨 버린 나라이기도 한데, 이 나라 헌정사도 알고보면 참 파란만장하다.


1970년 선거에서 승리해 집권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대통령은, 남미 역사상 최초로 혁명이 아닌 선거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 사회주의 정치인이었다. 당시 칠레는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이 그러했듯, 해외 다국적 기업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구조와 극심한 빈부격차 등으로 인한 사회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아옌데는 이러한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광산을 국유화(당근 무보상)하는 조치를 단행했는데, 특히 칠레의 주요 수출품인 구리 광산을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던 기업들이 대부분 미국계 다국적 기업들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돈이 더 큰 문제였는지, 사회주의 정권이 더 큰 문제였는지는 모르겠으되 아무튼 미국은 대 칠레 차관을 동결시켜 버리는 한편, 자국내에 비축되어 있던 구리를 시장에 내놓아 국제시장에서의 구리 가격을 조작함으로써 칠레의 가장 주요한 수출자원 중 하나인 구리 수출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그러잖아도 사회주의 정책으로 인해 생산성의 상대적 저하를 피할 수 없었던 칠레경제에, 이러한 조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왼쪽부터 아옌데, 네루다, 하라


다른 한편으로는, 군부를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사주/공모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1973년 9월 11일, 아옌데에 대한 재신임 국민투표가 열리기로 되어있던 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장군을 주축으로 한 군부가 정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그날 아옌데는 머리에 총을 맞아서 죽었고, 아옌데 정권의 주요 협력자였던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Victor Jara)를 포함해 쿠데타후 1주일간 3만명이 살해당했으며, 아옌데의 절친한 친구이자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아옌데 사망 소식으로 인한 충격으로 지병이 악화되어 9월 23일 사망했다.


한편 정권을 탈취한 피노체트는 소위 개발독재를 표방하며 어느 정도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이후 반공을 구실로 십수년간의 집권기간 동안 3천여명을 더 학살하는 등의 철권을 휘둘렀으며,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당시 칠레에 영국군 군사기지를 설치하도록 함으로써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총리를 국제사회의 든든한 지원자로 만드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지금도 대처와 피노체트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중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1988년 재신임 국민투표에서 패배함으로써 피노체트는 실각하게 된다. 그리고... 88세가 된 지금까지도 멀쩡히 생존해 있다. 지난해에도 그는 방송을 통해 내뱉은 "나는 애국의 천사다"라는 발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천사란 단어의 정의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 바 있다.
 


 파나마




파나마는 사실 그 태생 자체가 미국의 이해관계와 얽혀있는 나라다. 파나마는 1903년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였는데, 이는 미국이 파나마의 분리독립주의자들을 옆에서 졸라 충동질해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젤 짧은 거리의 해로를 만들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는데, 젤 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 바로 파나마였던 거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파나마의 독립을 지원한 대가로 운하의 건설권 및 운영권을 챙겼다. 파나마에 운하가 생기면 지덜도 대서양으로 진출하기 용이한 것도 있다만, 다른 나라 배덜도 여기를 거쳐 다니는 게 좀 많겠어? 유럽에서 태평양 쪽으로 가든, 혹은 그 반대로 향하든. 당근, 여기서 생기는 수익이 졸라 짭짤하리라는 계산속이 있었지. 앤드, 파나마 사람덜이 언제까지나 이 상황을 좌시하기만 할 리도 없었고.


그리하여 60년대부터 파나마운하 운영권을 파나마에 돌려줘야 한다는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다. 게다가 1968년 미국의 지원으로 집권했던 토리호스(Omar Torrijos Herrera)는, 70년대 들어 파나마운하 문제를 국제문제화시켜 버림으로써 미국의 뒤통수를 쳤다. 그런 토리호스가 198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마누엘 노리에가(Manuel Noriega)는 CIA에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미국의 첩자 노릇을 했다.








 


노리에가


사실 노리에가는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70년대부터 미국 CIA로부터 공작금을 받고 활동하던 인물이었는데, 재밌는 건 당시 조지 부시(George Bush)가 CIA의 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는 거다. 미국의 41번째 대통령이었으며, 현 대통령인 조지 W. 부시의 아버지이기도 한 바로 그 조지 부시 말이다. 그러나 노리에가는 철권통치로 파나마 국민들의 심한 반감을 샀다. 게다가 공공연하게 마약밀매에 개입하는 노리에가의 행태는 미국의 눈밖에 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결국 미국은 1989년, 스텔스 폭격기까지 동원해 가며 파나마를 침공하여 노리에가를 마약밀매죄로 체포해 버리기에 이른다(미국으로 흥한 자 미국으로 망했다. 그런 면에선 아리스티드랑 흡사한 행보다). 노리에가가 체포될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조지 부시였다. 노리에가는 징역 40년을 언도받았으며, 말많고 탈많던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은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에 반환되었다.
 


 니카라과



바로 앞에 언급한 노리에가의 간첩질로 붕괴된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Sandinista) 정권은, 원래 1979년 독재자 소모사(Anastasio Somoza Garcia)를 혁명으로 끌어내리고 집권한 세력이었다. 소모사는 1934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집권에 성공했는데, 산디니스타라는 이름은 당시 암살당한 민족주의 지도자 산디노(Augusto Cesar Sandino)의 이름을 본따 지어진 거다. 소모사는 그후 수십년간 폭압적인 통치를 펼쳤고, 산디니스타는 이러한 소모사 정권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중심으로 60년대 초반에 결성된 결사체였다.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 정권이 자꾸 중남미에 들어서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게다가 소모사 정권 시절에는 어땠던가. 니카라과에 진출한 수많은 미국계 다국적 기업들은 소모사 계열 기업들과 유착했고, 그리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니카라과 경제를 지배할 수 있었단 말이다. 근데 이놈의 산디니스타는 집권하더니만 농장과 기업을 지덜 맘대로 몰수해버리네.








 


이란-콘트라사건 관련 청문회


이에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반혁명 게릴라 집단인 콘트라(Contra)에 현금지원을 했는데, 이 자금은 당시 이라크와 전쟁중이던 이란에 무기를 수출한 대금으로 충당되었다. 참고로, 당시 미국 실정법에 의하면 이란에 대한 무기수출 및 의회의 승인 없는 군사지원은 모두 불법이었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이란-콘트라 스캔들 되겠다.


1986년 불거진 이 사건으로 청문회가 열리고 특검제도가 도입되었으며, 당시 자금지원을 직접 집행한 올리버 노스(Oliver North) 대령을 포함한 NSC의 핵심간부들이 기소되었다. 또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과 부시 부통령의 관련여부도 관심을 모았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했던 로렌스 월시(L.E. Walsh) 특별검사는 레이건 행정부가 이 공작을 알고 있었다고 확신했지만, 뚜렷한 위법행위의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했다고 1994년 발표한 최종보고서를 통해 밝힌 바 있다. 한편, 1988년 대통령에 취임한 부시는 노스를 포함한 이란-콘트라 스캔들 관련자들을 1992년 전원 사면하기도 했다.









오르테가


어쨌거나 산디니스타는 1985년 총선에서 압승하고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게 되지만, 콘트라와의 내전과 미국의 경제제재 등으로 니카라과 경제에 회생의 여지를 제공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산디니스타는 산디니스타대로, 경제재건에 필요한 돈을 조폐창에서 찍어내는 방식으로 조달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폭발적인 인플레를 자초하는 삽질을 하게 된다.


결국 오르테가는 1990년 대선에서 차모로(Violeta Barrios de Chamorro)에게 패배하며 권좌에서 내려오게 된다. 그러나 산디니스타는 현재까지도 니카라과의 주요 야당세력으로 남아있다. 참고로 현재는, 산디니스타 정권 시절 재산을 몰수당한 기업가 출신인 엔리케 볼라뇨스(Enrique Bolanos, 자유헌법당(LCP))가 니카라과 대통령으로 재직중이다.






그밖에도 1954년 과테말라, 1983년 그라나다 등에서 미국의 개입으로 정권이 뒤집어진 경험이 있다만, 일단 대표적인 사례는 저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도 엄연히 아메리카의 일부일진대, 어째 영어로 아메리카라고 하면 미국밖에 떠오르지 않는 상황은 어쩌면 미국이 내심 바라고 있는 바인지도 모른다. 전 아메리카의 미국화, 생각만 해도 환상적이지 않냐? 쯧...


지금부터는 졸라 단순한 상식에 의거, 단순무식하게 따져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하자.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대부분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맞물려있다는 중대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뭐 미국의 입장에서야 중남미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얻어낼 자원도 많으니, 지들의 막강한 국력을 밀어부쳐 힘없는 중남미 나라들을 맘놓고 좌지우지하는 게 여러모로 얻는 것도 많고 편할 터이다. 뭐 꼭 그런 걸 따지지 않더라도, 어느 정부건 자국의 경제적 이익에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제대로 된 정부가 아니다.


근데, 그걸 위해서 결과적으로는 다른 나라 국민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게 될 봉쇄책을 남용해댄다면? 내가 살려면 쟤가 죽어야 된다는 절박한 상황이라면 또 모를까, 언제 미국경제가 실업률 50%를 넘나드는 니카라과 수준으로까지 떨어질 위험에 직면한 적이라도 있었던가?


게다가 남의 나라 정권도 지들 입맛대로 세웠다 없앴다 하는 경우는 도대체 뭐하자는 플레인지. 그나마 친미적일망정 민주적인 외연을 두른 정권이라면 대충 봐줄만한데, 피노체트나 노리에가같은 애들을 지원한 건 아무래도 너무하지 않나? 그나마 피노체트는 나름의 경제발전이라도 꾀했다지만, 노리에가 건은 완전 지들 입맛에 따라 들었다 놨다 하며 한 나라의 국정을 유린한 셈이자너.


아이티는 세계 최초의 흑인 독립국이었다. 1804년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아이티는, 수년간 지속된 게릴라전의 결과로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이후 소위 제3세계 국가들의 잇단 독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후 잇단 정쟁과 빈곤의 악순환으로 인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찬란한 위상에 비해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이 나라가 차지하는 위치는 참으로 초라하다. 독립 200주년이 되는 올해까지도 쿠데타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하는 판이니.


자타 공인의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라는 미국, 일단 아리스티드의 집권에 그들의 영향력이 작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이 사태의 책임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그나마 그때는 사전에 UN 안보리의 승인을 얻었었다고 그러네). 비록 현재의 아이티에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좌우할만한 결정적 요소가 있는 건 아니지만, 아리스티드가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면 그의 발언에 조금은 무게가 실린다. 실제로 아리스티드는 집권이후 자주노선을 견지했다고 한다.


일단은 아리스티드의 발언이 거짓말이길 바라지만, 앞으로라도 미국이 더이상 애꿎은 남의 나라 내정에 간섭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이번에도 민주적 헌정질서 확립 어쩌고 하는 구실을 내세워 어느날 갑자기 개입을 선언하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그 순수한 동기를 믿어줄 근거보다는 믿지 못할 근거가 훨씬 많으니까.


어찌됐든, 아무쪼록 아이티에 제2의 피노체트가 등장하는 사태는 없어야 될텐데...


 
자꾸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콧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지는
안전빵(comblind@ddanzi.com)
 


덧붙여...) 우리덜의 좃선일보 이너넷판이 아이티사태를 안 다루고 지나갈 리 엄따. 기사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으니, 어째 누구 들으라는 소리처럼 여겨지는 까닭은 뭔지. 아래는 바로 그 대목을 발췌한 내용 되겠다.






아리스티드는 1990년 반(反)독재와 반미(反美)주의를 기치로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불과 7개월 만에 쿠데타로 쫓겨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4년 뒤 미군 파병 힘을 빌려 권좌에 복귀했다. 하지만 2000년 11월 대선 재선을 위해 아이티의 빈곤 책임을 1915~34년 아이티를 점령했던 미국의 탓으로 돌리는 등 다시 반미주의를 내세운 포퓰리즘으로 회귀하는 등 집권 연장을 위해 반미·용미·반미를 거듭했다.


성직자 출신에 행정 경험이 없었던 그는 실속없는 구호만 내세운 포퓰리즘 경제정책으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지난해 아이티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마이너스 3.8%를 기록했고, 영양실조 국민이 전체 인구의 50%에 달하는 지경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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