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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12월 12일) 강연을 위해 모처로 출장을 갔다가 이 ‘소식’을 접하게 됐다. 미 해군 원자력 잠수함에서 남자 승조원이 여자 승조원의 몰래 카메라를 찍었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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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합뉴스>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을 지나가는 에피소드, 혹은 남성혐오, 여성혐오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을 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올 것이 왔구나.”


이 사건의 파장은 생각보다 클 것이다(나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미 해군의 정책이 통째로 바뀔 수도 있고, 이로 인해 전 세계 여군들의 군 상층부 진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국가에서 미군의 영향을 받아 자국의 편제와 화기, 군 운영 시스템을 개발하거나 차용한다. 미군의 정책은 곧 ‘금과옥조’ 아니면 ‘반면교사’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잠수함 몰래카메라 사건’은 작게는 미 해군, 크게는 전 세계 군대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0. 해군참모총장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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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5월 16일 미 해군참모총장 제러미 마이클 보더(Jeremy Michael Boorda)의 사망 소식이 속보로 뜨게 된다. 현직 미 해군참모총장의 죽음. 그것도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에 의한 죽음이란 사실에 미국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고, 그를 참모총장 자리에 앉혔던 빌 클린턴 대통령과 민주당 행정부는 ‘미 해군 항공단’의 힘을 실감하게 됐다.


이 사건 직후 엘모 줌왈트 제독은 우회적으로 미 해군 항공단을 비판했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늘날 전 세계 최강의 미 해군 함대를 일궈낸 것이 줌왈트 제독이었다(월남전 시기 미 해군 전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전 세계 최강의 미 함대를 일궈냈다). 미 해군에게는 살아있는 전설이었다(당시에는 생존해 있었다. 2000년 1월에 사망했다). 그런 그가 미 해군 항공단을 비판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보더 제독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평범한 자영업자 집안에서 태어난 보더는(아버지가 옷가게를 했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16세의 어린 나이로 해군에 입대했다. 이등병으로 시작한 그는 30여 년 뒤 해군 대장이 돼 해군 참모총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입지전적의 인물이라고 해야 할까? 개천용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는 노력했고, 또 노력했으며, 끝까지 노력했다. 고등학교 자퇴가 최종학력이었던 그는 탁월한 성실함과 재능을 인정받아 사관후보생(Officer Candidate School) 과정에 발탁돼 소위로 임관했고, 해군에 입대한 지 15년 만에 겨우 학사학위를 따 진급 레이스에 뛰어들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1991년. 그는 당당히 미 해군 대장으로 진급하게 됐고, 1994년 유태인 출신으론 최초이자 非 해사 출신으론 처음으로 미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이 영광은 2년 만에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보더 제독의 죽음. 이 죽음의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미국인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미 해군 항공단”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직접적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 역시도 미국인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테일후크 스캔들(Tailhook scandal)”


국내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전 세계 여성들. 특히나 남녀평등을 외치는 이들에게 보더 제독의 죽음은 ‘희생’의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1. 미 해군 항공단의 힘


미 해군의 장성들. 그 중에서 의사결정권을 지닌 ‘파워 엘리트’ 그룹에 올라간 장성들의 출신병과를 보면, 크게 두 개의 병과 출신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항공병과이고, 나머지 하나는 잠수함 병과이다.


특히나 해군 항공대의 힘은 막강했다. 냉전 시기 해군참모총장들은 거의 다 ‘해군 항공대’ 출신들이었다(냉전 말기가 돼서야 잠수함 병과 출신의 참모총장이 나왔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두 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겠다. 예전에 딴지에 연재했던 ‘영화로 본 전쟁이바구’에서 소개한 ‘크림슨 타이드(링크)’와 ‘탑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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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타이드(Crimson Tide)


“세계를 움직이는 3명의 최고 실권자는 미합중국 대통령,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미핵탄두 잠수함의 함장이다.”


라는 허세 쩌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크림슨 타이드는 군사전략에 문외한인 이들에게 SLBM(잠수함 발사 탄도탄)의 위력을 알려준 최초의 영화이다.


“냉전시대 인류를 구한 병기”란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닌 말이다. 전략 잠수함의 전략초계가 없었다면, 냉전시대 인류는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미 해군에게 있어서 전략잠수함과 잠수함 부대는 전쟁을 막아낸 1등 공신이자, 보이지 않는 심해에서 미국을 지켜낸 암살자와 같은 존재이다.


탑건(TOP GUN)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영화일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항공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F-14. 숫고양이의 웅장한 엔진 배기음과 꽃미남 톰 크루즈의 열연. 이게 바로 미 해군의 ‘힘’이다. 한때는 15척의 항공모함을 운영했던 미 해군에게 있어서 항공모함. 그리고 이 항공모함의 실질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는 함재기 조종사는 미 해군의 꽃이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10척이 넘는 항공모함을 운용하고 있고, 항공모함 1척의 전력이 어지간한 중소국가의 항공력을 능가하는 미 해군 항공모함. 항공모함은 미 해군의 상징이었다. 미국이 항공모함을 ‘전략자산’으로 분류해 놓고, 외교적으로 활용하는 모습만 봐도 항공모함이 미 해군의 ‘얼굴마담’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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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주대낮에 당당하게 얼굴을 내놓고 그 힘을 자랑하는 항공모함.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심해에 웅크리고 앉아 전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움켜쥐고 세상을 노려보는 잠수함 부대. 이들은 미 해군의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해군 항공대의 위상은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유명했다.


“항공모함 함장의 역할이란 80명의 도련님들의 응석을 받아주는 일”


여기서 말하는 80명의 도련님은 해군 항공대 파일럿을 의미한다. 2차 세계대전은 해전의 역사를 뒤바꾼 전쟁이다. 1차 세계대전 이래로 계속 이어져 내려온 거함거포주의를 한 번에 몰아내고, 항공모함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전쟁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다. 현대전은 제공권이 곧 승리의 바로미터이다. 이런 상황에서 항공모함, 특히나 이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조종하는 조종사들은 도련님과 같이 귀한 존재들이었다.


우리나라 공군 파일럿들의 자부심을 생각해 보라. 전투기 파일럿 한 명을 양성하는 비용이 100억을 넘나든다. 만약 전시 상황에서 전투기 기체와 파일럿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파일럿의 생명이다. 전투기는 사 올 수 있지만,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생각해 보라. 해군의 경우는 이런 공군의 자부심에 더해 망망대해의 요동치는 바다 위에서 겨우 80미터 될까 말까 한 갑판에 착륙하는 ‘묘기’까지 보여주는 존재들이다(실제 항공모함 갑판의 크기는 300미터 정도지만, 이륙 시 사용되는 갑판은 80미터가 약간 넘고, 함재기들에게 허용된 착륙 거리는 225.6미터이다. 이중 100.6미터는 와이어가 늘어나는 거리니까, 실질적으로 항공기가 사용할 수 있는 길이는 125미터 정도이다). 자부심이 어떨까?


“공군? 네들이 캐터펄트(Catapult : 사출기)에 올라타 날아가 본 적이 있어? 2.5초 사이에 우리 몸에 받는 하중만 1톤이야. 착륙은 어떻고? 어레스팅 기어(Arresting Gear : 착륙을 위해 내리는 후크를 의미. 함재기 조종사들은 이를 ‘Tailhook’란 그들만의 속어로 부른다)를 내리고 항공모함에 접근해 봤어? 바다는 요동치지, 갑판은 손바닥만하지...70미터 남짓한 공간에 내려앉기 위해서 진입 각도 3도를 유지한 채 시속 240킬로미터로 내려가는 짓을 해봤어? 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나? 한 번 쏘아 올릴 때마다 1톤, 내려앉을 때마다 1.5톤의 하중을 몸으로 느껴봐. 네들 하고는 질적으로 달라!”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미군의 상징이 뭘까? ‘한때’ 미국만이 가지고 있었고, 미국만이 ‘제대로’ 운용할 수 있고, 미국의 대외 투사력으로 상징되는 것이며, 어지간한 국가의 공군력을 능가하는 것. 바로 미해군의 원자력 항공모함. 그리고 이를 주축으로 한 항모전단이다. 이 항모전단의 핵심은 ‘함재기 조종사’들이다.


그들은 곧 미국의 대외 투사력을 의미했다. 그들의 자부심과 자존심은 당연한 것이고,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이다.


“자부심에 상응할 만한 어려운 진입장벽”, “해군사관학교라는 특수한 교육 환경에서의 경험”,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 “엘리트라는 주변의 기대와 찬사”, “매일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독특한 경험", “국가 최고의사결정권자와 연결되는 위치”, “국가의 전략적 판단을 실천하는 임무”


“...그리고 남자.”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결과가 만들어 낸 것이 뭘까? 좋게 말한다면, ‘그들만의 리그’였고, 냉정하게 본다면, ‘한없이 사조직에 가까운 카르텔’이다. 그런 그들이 사고를 친다. 바로 '테일후크 스캔들(Tailhook scandal)'이다.



2. 테일후크 스캔들(Tailhook scandal)


테일후크(Tailhook)란 항공모함 함재기의 상징이다. 공군 전투기와 달리 짧은 비행갑판에 내려 ‘꽂혀야’ 하는 함재기들은 이 ‘고리’를 어레스팅 와이어에 걸어 착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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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해군 함재기만의 특징이었고, 그들만의 상징이었다(물론, 공군기도 비상착륙을 위해 달려있지만 해군기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미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은 이 테일후크란 이름을 따와 테일후크 심포지엄(Tailhook Symposium)이란 걸 개최했다.


그 역사도 꽤 깊었는데, 연례행사로 개최되던 이 심포지엄은 1991년 35회를 맞이하게 된다.


1991년의 테일 후크 심포지엄은 그 이전의 행사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1991년의 걸프전. ‘사막의 방패’, ‘사막의 폭풍’ 작전에서 미 해군, 해병대 항공단은 성공적으로 그 임무를 마쳤다. 사담 후세인의 공화국 수비대가 최초 쿠웨이트를 공격했을 때 미국의 가시적 제재 수단은 항공모함과 이 항공모함에 탑재된 함재기들 밖에 없었다. 사막의 방패 작전 초기 이들은 CNN의 집중 보도 대상이 됐다. 물론, 이후 미 공군 홍보팀의 압도적 홍보전략에 밀려 찬밥이 됐지만(미 공군은 홍보영상제공을 위해 공군 전투기와 폭격기에 최신예 컬러 카메라를 장착해 ‘따끈따끈’한 영상을 제공했지만, 미 해군은 걸프전 중반이 넘어서야 자신들의 함재기에 장착한 카메라가 구형이란 사실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승리했고, 자신들의 실적을 인정받았다. 월남전 이후 대규모 파병이었지만, 월남전과 같은 피해는 없었고, 대승을 거뒀다. 축제 분위기는 당연했다. 너무도 당연하게 Tailhook 91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됐다(그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짐작해 보라).


해군 상층부도 이런 움직임에 충분히 호응했다. 해군참모총장은 물론 해군 청장도,


“해군 항공대 장교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테일후크 91에 참석했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여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모임은 화기애애했다. 승전 분위기에 취해있던 해군 파일럿들 사이에서 해군 ‘여’대위 한 명이 당돌하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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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도 전투기 조종사가 되면 안 됩니까?”



폴라 코플린 대위(LT. Paula Coughlin)였다. 해군 항공대 전투기 조종사였던 아버지를 동경해 해군에 입대한 그녀였지만, 당시 미군은(해군뿐만이 아니라 공군도),


“여성은 전투기에 태우지 않는다.”


라는 암묵적인 규칙에 의해 전투기 대신 헬리콥터 조종사가 돼야 했다. 당시 코플린 대위의 질문에 대해 참석했던 프랭크 켈소(Frank B. Kelso II) 해군참모총장은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답을 건넨다.


“그깟 2류 시민 여성들이 전투기를 타든 말든 파티나 합시다.”


해군참모총장이 한 말이다!! 테일후크 스캔들이 언론에 알려지고 나서 켈소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셌고, 그를 불명예제대 시키라는 여론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대해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윌레엄 페리는 불명예제대 대신 대장 계급을 유지시킨 채로 조기 전역시키는 쪽으로 타협안을 내놓았다. 이때 여성 상원의원 6명이 들고 일어나(당시 여성 상원의원은 7명이었다) 그를 2계급 강등시켜 전역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가 성공적으로 걸프전을 지휘했고, 병과 출신이 ‘해군항공대’가 아니라는 점이 감안돼 임기를 마치게 됐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켈소가 잠수함 병과 출신이란 점이다. 냉전 말기에 해군참모총장이 된 22대 제임스 왓킨스(James D. Watkins) 제독부터 시작해 23대 칼라일 트로스트(Carlisle A.H. Trost), 24대 프랭크 켈소(Frank B. Kelso II)는 모두 잠수함 병과 출신이다. 해군참모총장이 되기 위해선 해군 항공대 출신이든가, 아니면 잠수함 병과 출신이어야 한다는 공식이 증명된 것이다. (이 대목을 ‘꼭’ 기억해 두라)


여기까지만 보면, 군 내부의 보수성과 시대에 뒤떨어진 ‘여성 차별적 발언’으로 끝났을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그날 라스베이거스 힐튼 호텔 3층에서 시작된 테일후크 심포지엄(Tailhook Symposium) 파티는 소라넷을 능가하는 ‘막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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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은 무려 83명의 여성과(이 중에는 여군도 포함돼 있었다) 7명의 남자들(이 중에는 해군 수병도 있었다. 성적취향을 배려한 모습이었다)과 섹스...아니, 성폭행과 성추행을 하고 있었다. 이 한 가운데 코플린 대위가 들어갔다. 그녀는 순식간에 ‘먹잇감’이 돼 해군 조종사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성폭행 직전에 그녀는 상대방을 깨물고 탈출한 뒤 직속상관에게 이를 보고했지만, 상관은


“네 잘못이다. 만취한 해군 조종사들 사이에 들어간 자체가 잘못이다.”


란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일단 피해자가 있고, 사건이 있었다는 ‘정황’이 있었기에 해군 범죄 수사대(NCIS : Naval Criminal Investigative Service,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상황이다!)에 신고가 됐고, 수사는 진행됐다. 그러나 마크 하먼과 같은 열정적이고 멋진 수사관은 없었다. 당시 해군은 이 사건을 덮고 싶어 했고, 또 실제로 그러려고 했다. 코플린 대위가 범인을 특정할 수 없었다는 걸 핑계로 사건을 유야무야 덮으려 했다.


이때 코플린의 유일한(!?) 우군이 돼 준 인물이 당시 해군청 인적자원차장이었던 바버라 포프(Barbara Spyridon Pope)였다. 그녀는 해군 관계자들과 만나 사태의 심각성을 말했지만, 보수적인 해군 관계자들은 냉소를 지을 뿐이다.


“코플린이란 여자애가 잘못했다.”, “코플린이 범인을 특징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해군 항공대 애들이 그렇게 노는 건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존재들이다.”, “해군 항공대 여자애들이 원래 헤픈 존재라는 건, 해군 내에서도 유명하다.”


어디서 많이 본 레퍼토리가 아닌가? 성폭행 사건의 전형적인 수순을 밟아 나가고 있었다. 결국 바버라 포프는 이를 해군 내에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정식으로 미 국방부에 이 사건을 고발했다. 아울러 사건 당사자인 코플린 대위 역시 방송에 나가 이 사건의 전말을 폭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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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게 됐고,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딕 체니는 행사에 참석했던 해군 청장을 경질했고, 철저한 수사를 명령했다(사건 처리결과를 보면, 말뿐인 공약이었다).


수사를 철저히 했긴 했지만, 놀랍게도 법적인 처벌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통적인 행사였다. 테일후크 심포지엄의 ‘전통’은 해군 내에서도 유명하지 않은가?”


‘테일후크 91’의 막장스러움은 그 전에 있었던 테일후크 심포지엄에 비하면 평균적인 수준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군대 특유의 폐쇄성과 온정주의가 한몫을 단단히 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프랭크 켈소의 유임이 대표적이다. 여성 상원의원 6명이 2계급 강등 후 전역시키려 했던 이유는 명예도 명예지만, 실질적인 불이익을 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켈소는 38년간 해군에 복무했고, 계급이 대장에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전역을 하게 되면, 매달 7천 달러의 연금을 받게 된다(정확히 7천 50달러). 그러나 2계급 강등하게 되면, 연금이 삭감돼 여기서 1천 4백 달러가 줄어들게 된다. 당시 미국은 켈소의 연금 1천 4백 달러는 고사하고, 그의 해임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렇다고 처벌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법적인’ 처벌이 없었을 뿐이지, 나름의 ‘응징’은 있었다. 당시 테일후크 91에 참여했던 관계자들 중 14명의 장군을 포함해 수많은 장교들이 옷을 벗어야 했다.


문제는 피해자였던 코플린 대위였다. 그녀 역시 옷을 벗어야 했던 것이다.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서의 꿈은 포기한 채 위로금 명목으로 5백만 달러를 벗고 그녀는 군인의 길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족적은 ‘위대’했다. 미 해군에서 여군들의 전투함 승선과 전투기 조종사 지원의 문호를 열었다(지금은 항모 항공단에 여성 조종사가 당연하게 배치돼 있다). 해군이 하니 공군도 어쩔 수 없이 전투기 조종사의 문호를 개방하게 됐다.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은 코플린과 바버라가 미군 내 여군들에 대한 ‘성폭력’에 관한 실상을 폭로하고 이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냈다는 대목이다.


미군 내 여군의 비율은 무려(!) 16%나 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성폭력’의 실상은 ‘군’이라는 특수성 덕분에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었던 상황이다. 최근에 미국 제대 군인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의 여군 성폭력에 관한 실태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 실상은 충격적이었는데,


 “여군의 30%가 성폭행을 당했고, 71%가 성추행을 경험했으며, 여군의 90%가 성희롱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21세기의 미군이 이러한데, 1990년대 초반의 미군은 어떠했을까? 코플린의 희생으로 여군들에 가해지는 성폭력에 관한 담론들이 공론화의 장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그에 따른 대대적인 성교육이 실시됐지만, 성폭행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러나... 테일후크의 긴 꼬리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3. 제독의 죽음


김영삼 대통령 시절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숙청하기 위해 김영삼 대통령이 선택한 포석 중 하나가 바로 김진호(金辰浩) 前 합참의장 발탁이다. 역대 합참의장 중 유일하게 ROTC 출신이었던 김진호 의장은 그 자체가 문민정부 군 개혁의 아이콘이었다.


비슷한 시기 태평양 건너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도 김영삼 대통령과 비슷한 생각, 비슷한 인사(人事)를 단행하게 된다.


“미 해군 내 해군 항공대의 힘을 약화시키고, 해군 개혁을 실행할 해군참모총장을 자리에 앉혀야 한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때까지 해군참모총장은 전부 다 미 해군 사관학교(The United States Naval Academy). 즉, 아나폴리스(Annapolis :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스에 위치해 있어서 아나폴리스란 대명사로 불린다. 이 명칭이 더 유명하다) 출신들이다. 그 흔한 ROTC도 OCS(Officer Candidate School : 우리나라로 치면 학사장교)도 없었다.


미국에서 해군참모총장이란 자리가 만들어진 게 1915년. 1994년까지 무려 24명의 해군참모총장이 이 자리를 지나갔지만,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아나폴리스 출신들이었다.


클린턴은 여기서 ‘혁명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ROTC도 OCS 출신도 아닌, 해군 수병 출신의 고등학교 중퇴자를 미 해군의 25대 해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제러미 마이클 보더(Jeremy Michael Boorda) 대장의 화려한 등장이었다.


보더 제독은 클린턴의 기대에 부응했다. 여군들의 전투함 승선을 실행했고, 남녀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개혁조치들을 연이어 시행했다. 그 자신이 해군 수병 출신이었기에(이등병이 해군참모총장이 됐으니) 병과 하사관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병과 하사관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일에 적극적이었고, 여군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해군 항공대의 힘을 빼기 위한 방법도 지속적으로 강구했는데, 이렇게 해서 내놓은 것이 바로 아스널 쉽(Arsenal ship) 계획이었다. 500기나 되는 수직발사관을 싣고 미사일로 초토화 시켜버리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나온 이 배는 해군 항공대의 힘을 확실히 빼버릴 수 있는 회심의 카드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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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항공모함에서 전폭기 날려 보내 폭탄 떨굴 필요 없다. 순항미사일을 잔뜩 싣고 달려가 적의 사정거리 밖에서 미사일의 ‘비’를 쏟아부어 버리면 된다.”


해군 항공대 출신들에게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배였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배가 실효성이 있을까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당시 환율로 척당 8억 불 가까이 되는 비용을 지불하고 획득하기엔 의문이 갈 수밖에 없는 배였다. 순항미사일 탑재와 발사에 특화된 이 거대한 배가 과연 실효성이 있을까? 전장이 251미터가 넘는 이 미사일 컨테이너는 적의 목표가 되기 딱 좋았다. 차라리 오하이오급 전략원잠을 개수해 순항미사일을 날리는 편이 생존성이나 효율성, 운용 편리성에서 훨씬 나아 보였다. 뭐 결국 그렇게 됐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런 ‘어마 무시한’ 프로젝트를 미 해군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한차원 더 업그레이드했다고 해야 할까? 미 해군이 최근에 줌왈트급을 찍어냈다. 외계인을 고문하는 기술이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


문제는 보더 제독이 너무 ‘상식’적이었다는 대목이다. 테일후크 스캔들이 터지던 당시 해군 항공대 출신 제독과 장교들은 코플린과 여군들을 비난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보더 제독은 코플린과 여군들을 두둔했다.


“그녀들은 명백한 피해자다!”


물론, ‘군’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공식적인 발언을 한 것은 아니다. 비공식적으로 여군들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발언이 해군 항공대 출신들의 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건 해군 전체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해군 내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파벌의 눈 밖에 나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해군참모차장 스탠 아서(Stan Arthur) 장군. 직함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명목상의 해군 서열 넘버 2였고, 해군 항공대 파벌의 최고 우두머리였다. 당연히 ‘문제의’ 테일 후크 91에도 참석했다.


경력으로 보자면, 그는 영웅이며 동시에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아 올라간 ‘준비된 해군참모총장’이었다. 전투기 파일럿으로 베트남전에 참전. 11번의 비행무공십자훈장을 받았고, 제독으로 진급한 뒤에는 제7함대 사령과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그대로 간다면, 스탠 아서는 태평양 사령부(United States Pacific Command : USPACOM) 사령관으로 영전하면 됐다.


그런데 여기서 스탠 아서는 퇴역을 하게 된다. 미끄러진 것이다.


이 일을 두고 해군 항공대 출신들은 벌집을 쑤신 듯 들끓었다. 문민통제(civilian control) 전통의 미국이었기에 물리적인 반란이나 항명은 생각할 수 없었지만, 군심이 뒤집어 진 건 사실이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게 보더 제독이었다.


스탠 아서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테일후크 스캔들 당시 피해자인 여군을 두둔한 점, 해군참모총장 취임 이후 여군들을 위한 처우 개선에 노력한 점, 전투함에 여군들의 승선을 허용한 점, 해군 항공대의 힘을 빼기 위한 목적으로 아스널 쉽 계획을 추진했던 점, 아나폴리스 출신이 아닌 점,


...결정적으로 클린턴이 ‘목적’을 가지고 임명했던 클린턴의 ‘꼬붕’이라는 점.


이 모든 조건들의 결과는 보더 제독에 대한 ‘왕따’였다. 군대용어로 말하자면, 기수열외(期數列外)였다. 해군참모총장이 해군에게 ‘왕따’를 당한 것이다.


해군 항공대의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집요하게 보더 제독의 잘못을 파고들었다. 그들이 주목했던 건 보더 제독의 기장 패용이었다. 보더 제독은 월남전 참전 기장인 ‘참전용사 V기장’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월남전 당시 보더 제독은 소해함인 패럿(USS Parrot) 함에 함장으로 참전을 했다. 문제는 참전용사 V기장은 참전을 해 전투를 치른 군인만이 달 수 있었다. 그러나 관행적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은 이를 달았고, 보더의 경우는 상관이 부대원 전체에게 V기장 패용을 허락했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이 기장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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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해군 항공대 출신들은 이 V기장을 물어뜯었고, 이를 언론에 제보해 보더 제독을 부도덕한 인물로 몰아갔다.


보더 제독은 언론 보도와 해군 항공대의 지속적인 괴롭힘을 참지 못하고, 1996년 5월 16일 자살을 하게 된다.


...생명보다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선택했던 것이다.


여군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한 최초의 시도를 한 장군은 그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됐다.




1부를 마치며...


미 해군 전략원잠에서 여성 승조원들을 대상으로 몰래카메라를 찍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이 기사를 쓸지 말지 몇 시간 동안 고민했다. 여성혐오, 남성혐오가 만연한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섣불리 건들만한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폭력’이다. 그것도 가장 치졸한 ‘성폭력’이다.


안타깝게도 군대는 ‘폭력’을 다루는 집단이다. 덕분에 폭력에 대해서 둔감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다. 여기에 ‘성(性)’이라는 한 글자가 더 붙었다. 남자이기에 여자들에게 일어난 성폭력의 후유증이나 피해 정도에 대해서 다 이해할 순 없다. 다만, 어떠한 이유나 목적에 의해서도 자기 신체의 결정권을 침해하는 건 명백한 잘못이며, 폭력이다.


최초 전략원잠에서의 사건을 접하고, 간단하게 미 해군의 성폭력 역사와 미 여군의 실상을 소개하는 A4 10장 정도의 글을 올릴까 했는데, 쓰다 보니 길어졌다. 12장을 썼는데도 잠수함 사건은 건들지도 못했다. 그 만큼 예민한 문제이기에 차라리 모든 걸 토해내 보자며 이 글을 붙잡고 있다. 1부로 기획한 건 예상해 보니 2부까지 이어질 것 같고, 만약 여력이 된다면 ‘여군’의 존재이유와 효용성에 관한 이야기까지 쓰고 싶다.


1부를 보면 알겠지만, 여성인권의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조차 여군들은 성폭력의 희생양이다. 이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일의 경우도 미국과 비슷하다. 독일 여군의 3%는 성폭행과 성추행에 시달린 경험이 있고, 24%는 원치 않는 신체접촉을 강요받았으며, 47%는 남성군인들로부터 상시적인 ‘성적 농담’(음담패설)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스라엘 여군은 어떠할까? 40%의 여군들이 성폭행, 성추행, 원치 않은 신체접촉 경험이 있다.


이 모든 사실의 결론은,


 “어떤 나라이든, 여군은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돼 있고, 그 정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


라는 것이다.


장황하게 썼지만, 1부에서는 미군 역사상 최악의 성폭력 스캔들인 테일후크 스캔들에 관해 썼다.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잠수함 부대 내의 여군 차별(?)과 성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겠다. 나름 ‘군사 분야’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과연 여자를 잠수함 부대에 들이는 것이 옳은 가에 고민을 몇 번이나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을 잠수함 부대에 배치하는 게 옳은가란 질문을 한다면, 섣불리 대답을 못 할 것 같다.


길게 써서 미안하다. 2부는 되도록 짧게 쓰도록 하겠다. 3부는 아예 안 썼으면 좋겠다.





*참고자료


1. 나무위키 (https://namu.wiki/)

2. 중앙일보

3. 동아일보

4. 소모되는 남자/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F. Baumeister)/ 시그마북스


*이미지 출처: Legacy of the Tailhook Scandal, Retro Report, The New York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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