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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나의 음악 인생 

2001. 1. 15.
음악해서 행복한 재미 오부리맨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1968년이었다.

 

유복하진 않았지만 남들만큼 살기는 했던 어린 시절이 내게는 참으로 빨리 지나가 버렸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든 집안의 사고로 인해 나는 세상에 혈혈단신 혼자가 되었고, 겨우 아홉살이었던 내 삶은 연말 뉴스에나 나오는, 길거리 그 부류의 최하 밑바닥 세상으로 곤두박질 쳤다.

 

당시 내 생계 수단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의 하수인역할을 하며 밥을 벌어먹는 것이었다. 굶어 죽을 뻔한 적도 수십번, 얼어 죽을 뻔한 적도 수차례, 도망가고 또 도망가도 그 나이의 내가 할 수는 것이라곤 결국 사회가 싫어하는 지저분한 일들 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 죽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사는 것은 참으로 비참했다. 춥고 배고프고 병에 걸리면서 5년 가까이를 고약하게 살아남았을 무렵이던 엘넷에, 나는 헬파로 캬바레에 취업이 되었다.

 

편하게 잠자리를 얻기 위해 기타를 배웠다. 인기고 꿈이고 필요 없고 생활을 위해서였다. 남들 처럼 거대한 꿈이 아닌 오직 돈을 많이 준다는 것 때문에 말이다.그렇게 시작된 내 음악 인생... 아무 기초도 없이 무작정 유명인들의 카피에 메달리기만 했다. 하지만 나는 진정 기타를 사랑하지 않았던것 같다. 남들 처럼 9시간을 연습한다는 건 내게는 단지 꿈같은 이야기로만 들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이트를 전전하며 머리도 기르고 노래도 하고 메탈도 알게되고 뽕짝도 알게 되고... 평생 처음의 행복한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당시에 인기있는 지방 여러곳과 일본까지 진출하게 되는 전성기를 맞았으니 말이다.

 

그러다 그 모든것을 정지시켜 버린 불운이 닥쳐왔다. 고아인 내가 생각지도 않게 갑자기 군대에 끌려가고 만 것이다. 어릴적에 죽은 형제가 호적상으로는 살아 있는 걸로 되어 있었던 거다. 게다가, 군대생활 중 그만 왼손 세손가락을 굽히지 못할 만큼 다치게 되고 말았다. 기타리스트로의 내 삶은 그렇게 끝나는 듯 했다.

 

절망한 나는 어릴때처럼 아무 희망없이 돌아 다니는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굶주리고, 춥고...  그렇게 비참히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덧 30이라는 나이에 이르고 말았다. 많은 생각을 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릴적 한때나마 가졌던 꿈을 모두 잃고 이런 식으로 살다가 죽어 가기에는 너무나 한스러웠다. 변화가 필요했다.

 

침술가 한테서 망가진 손가락 치료를 받으며 돈을 모은지 일년... 그렇게 난 삶에서의 재기를 위해 미국으로 밀항을 하게 되었다.

 
 

 

 

 




 
 

 

 

무작정 떠나온 미국의 생활은 시작부터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화려한 도시의 밤도, 아무데도 갈곳이 없는 내게는 깜깜한 밤골목의 공포 그 자체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밀항자로서 거리를 헤메던 내가 다시 이 먼 타향땅에서 방랑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부터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돈 몇 푼을 받고 여행 경비를 마련하고,  그러면 다른 주로 옮기고 또 옮기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아주 힘든 나날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2년동안 대륙을 두 번이나 횡단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좋은 곳들, 소중한 경험들을 갖게 되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뉴욕 하숙집의 룸메이트 할아버지였다. 허름한 방구석에서 매일 5시면 청소를 하러 나가시는, 이빨이 하나도 없는 35년이나 된 불법체류자 노인.

 

까막눈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 분의 책상에서 나는 우연히  정치를 소재로 한 아주 난해한 영문 추리 소설 한권을 발견했다. 사연인 즉슨, 50 되던 해에 문득 쫓기듯 살며 빼앗긴 젊은 시절이 한스러워 졌다는 거였다. 그런 깨달음 이후 그분이  목표로 한 것은 정치학 박사였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분이 말이다.

 

할아버지는 A 자 부터 배우기 시작한지 9년 만에, 청소와 야간 학교 공부를 같이 하며 드디어 대학 졸업을 하셨다. 그 과정에서 더 늙어버린 몸과 혹독한 생활과 공부 과정에서 이빨을 모두 잃기도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단다. 그러나 이제 다시 박사 학위 논문에 도전하신다는 말씀...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그분의 좌절을 모르는 정신과 하루하루의 성실함, 난 그것을 배워 그곳을 떠났다.

 

워싱턴에서는 어떤 주방 아줌마를 만났다. 미국으로 가면 잘 살게 해준다는 흑인 병사의 말을 믿고 결혼을 하자마자 도미한 그 젊던 신부는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할렘가 집안 식구들을 보고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렸단다.

 

이혼하면 추방당하는 줄 알고 웨딩드레스를 팔아 청바지와 빵을 산 아주머니는 바로 오렌지 농장으로 달려가 남편이 죽을 때까지 25년을 하루 같이 일만 하며 살았다. 30년 만에 한국을 나가려고 한다며 들뜬 소녀 같은 그 모습... 그분의 순수함은 내게 삶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줬다.

 

그 밖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수배자로 일본을 떠돌다 다시 미국을 도시마다 배회하며 동포를 상대로 이민사기를 수 없이 해먹는 철면피, 영어권 교포 2세와 관광객들의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반민족주의자들이나 각종 깡패 집단 등... 총을 항상 갖고 다니는 이런 인간 말종들에게서 나는 정직한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얻었다.

 

이런 살아있는 경험들은 자연스레 내게 10년,20년 후 어떤 인간으로 남아야 할지에 대한 많은 고민을 던져주었다. 그 결론은... 역시 음악이었다. 20년 전 그 시절의 맘으로 돌아가 순수하게 아무 욕심 없는 음악인으로 살아가는 것 말이다.

 
 

 

 

 




 
 

 

 

2년이 넘는 방랑의 세월을 접고 음악을 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음악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내가 입학한 곳은 20년전부터 꿈에서나 그렸던 헐리웃의 음악학교 M 의 기타 학부인 GIT. 전공 과목은 재즈. 레벨은 2. 

 

사실, 34세라는 나이에 다시 시작하는 음악 인생은 초장부터 쉽지는 않다. 학교에서는 내가 불법체류자라는 사실과 졸업장이 위조된 것, 그리고 위장 취업자 신분애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저 영어를 잘 모르는 이민 온지 얼마 안된 한국 출신으로 밖에 생각 않고 있다.

 

레벨은 생각보다 높이 받았지만 수업 쫓아가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연습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아래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거다.

 

 






 
 

나의 연습시간표

 

1.손가락을 풀기 위한 맛사지,스트레칭,크로매릭,클래식주법 등(약 50분)
2.갖은 스케일로 녹음하고 플레이하는 어프로치(1시간 가량)
3.프라이빗 레슨 준비(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함, 2시간도 모자람)
4.재즈 워크샵에서 내놓은 기초 숙지(해도 안되는데 1시간 이상) 
5.재즈 레벨2 에서 닥달하는 릭 암기(무조건 듣고 따라하는 씨디가 1시간)
6.브라질 기타 씬 쫓아가기
7.Funk 기타 (선택괴목)

 

 

 

 

 

 

 

 






 
 

나의 일상 생활

 

아침8시에 기상 학교로 출발, 10시 도착.
수업 듣고 프라이빗 레슨 이나 오픈 카운셀링.
저녁 8시 까지 연습..그리고 밤업소로 출근
새벽 3시 퇴근 후 집에서 취침

 

토요일, 일요일 조금은 여유있게 연습
월수입은 $2000
학비는 매달 $1200
아파트,차 리스비 $600
햄버거 +군것질 +기타줄+CD 녹음 할 TAPE $200

 

 

 

 

이처럼, 말 그대로 하루벌어 하루살고 배우고 연습하는 나날들이다.

 

선생이 말하는 7시간 이상의 매일 연습은 실제로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 반(문 닫고 청소 4시에 다시 오픈)사이에나 가능하지만, 그 시간에 학비를 벌려고 일을 가는 학생이 의외로 많다. 그런만큼 건장한 백인들이나 현지 학생들도 아침에 졸고 쓰러지기가 부지기수다. 연습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단지 몸이 힘든것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고생하면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철없이 부모 돈 가져다 몰려다니며 인생 허비하는 일본, 한국 사람도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이곳의 명성과는 달리 음악을 좀 해본 사람이면 학교에 처음 들어 왔을 때 크게 실망을 하게 된다. 정말 형편없이 못하는 사람들 때문이다.더 놀라운 것은 2년이나 다닌 사람들이 그런 지경이고, 졸업할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사정은 동부 보스턴의 유명한 다른 기타학교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러니 결국 자기 자신 스스로가 어떻게 공부하고 연습하느냐에 모든 것이 좌우된다. 그저 학교를 다니고 졸업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그러나 적어도 이곳에서는 특출나게 잘하는 인재를 발굴하고 학교 차원에서 확실히 밀어주는 제도와 관점이 존재한다. 역시 노력만이 해답이다.

 

경우는 일하며 학교를 다니다보니 졸업하기까지는 남들보다 2배에서 4배, 결국 한 4~8년은 족히 걸릴것 같다. 그래도 미국에서 추방당하지 않는 이상 어릴 적 꿈을 눈앞에 두고 포기 할 수는 없다.

 

여기까지 오기가 이렇게 힘들었는데 말이다...

 
 

 




 
 

 

 

남들보다 훨씬 고단한 삶을 살아온 나, 그 과정에서 좌절도 고통도 많이 받아왔지만 이제 나는 삶을 살아갈 동기와 함을 얻었다. 물론 그것은 음악이다. 이제 내게 음악은 옛날처럼 그저 빵을 위한 것만도, 현실 도피의 수단도 아니다. 음악을 하는 것 자체가 날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 것이다.

 

얼마 전 학교에서 공연이 있었다. 제목도 그럴싸한 MI와 그래미. 스티브 바이, 스탠리 조단등 한 열 명 정도 왔는데, 그들의 연주는 감동 그 자체였다. 그날 이후 꿈이 생겼다. 먼 미래에 그래미상에 함 도전해 보고 싶어진거다.

 

산타나처럼 50이 넘어서 그래미를 품에 안는 꿈... 그게 정말 실현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무시당하는 오부리를 평생 해왔지만, M.I 선생이 극찬한 그 오부리 스케일이 날 여지껏 살아남게 해줬다. 그리고 다시 내게 날개를 달아 줬다. 이제 내게는 길이 보인다. 춤만 연습하는 립싱커 가수들이 판치는, 저변이 사라진 울나라 현실에서 고군분투하는 밤업소의 이름모를 젊은 밴드들에게 용기를 가져달라고 말하고 싶다.

 

후배들의 길에 나의 시행착오가 도움이 되어 다같이 좋은 연주자의 길에서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편집자주: 진정한 음악의 길을 가는 님께 
            많은 격려 메일 부탁드림다!

 

- 음악해서 마냥 행복한 재미 오부리맨 
(ohkong2@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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