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그들만의 진실 2001.10.3.수요일
중세 영국의 풍경 하나. 어떤 남자 하나가 살인죄로 체포된다. 그런데 증거가 애매모호해서 이넘이 살인자인지 아닌지 가리기가 쉽지 않다. 이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물론 당시엔 누구나가 다 독실한 신자이긴 하다) 자신은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고 성경에 맹세를 한다. 이 경우에 오늘날의 사법제도라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되는 게 보통일 것이다. 그런데 중세엔 그게 아니었다. 전지전능한 신이 판단을 내려 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일정한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면 무죄고 통과 못하면 유죄가 확정된다. 이를 시죄법, 영어로는 ordeal이라고 한다. 그 테스트란 무엇이냐, 가령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재판관인 사제가 막대기 두개를 준비한다. 하나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다른 하나는 그냥 막대기다. 이 두개를 사제는 미리 같은 색 천으로 둘둘 감고는 제단에 올려놓는다. 혐의자가 끌려와서는 십자가 앞에 꿇어앉아 열심히 기도를 드린다. 신이시여, 당신의 전지전능함을 믿사오니 부디 저의 결백함을 증명해 주소서... 웅얼웅얼... 기도가 끝나면 사제가 온다. 그리고 천으로 싸인 막대기 두 개중 하나를 집어든다. 그리고 거룩한 몸짓으로 천을 둘둘 풀어 막대기를 꺼낸다. 막대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으면 무죄, 십자가 없는 막대기를 고르면 유죄, 그렇게 재판은 결판난다. 문제는, 사제는 둘중 어느 막대기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지 이미 안다는 것이다. 아무리 비슷하게 했다 하더라도 자기 손으로 감은 천, 아주 조금만 모양이 틀리더라도 어느 게 어느 건지 알 수가 있다. 결국 결과는 신부 맘대로 되는 것이다. 혹 잘못 판단할 경우에도 신에게 뒤집어 씌우면 되니까 비난받을 필요가 없다. "그때 그넘은 신앙이 약했나보지" 라고 둘러댈 수 있으니깐. 또다른 풍경. 노르망디 공작 리차드의 딸이자 영국 에드워드 참회왕 (Edward the Confessor, 1066부터 재임)의 어머니인 엠마가, 어느날 윈체스터 주교하고 바람을 피우다 걸렸다. 말하자면 대비마마가 이조참판이랑 바람피다 걸린 꼴이다. 걸렸으니 재판을 하긴 해야겠는데, 무죄를 선고하자니 증거가 있고, 유죄를 선고하자니 나라꼴이 망신이라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때 비슷한 방법을 쓴다. 재판관인 사제가 불에 달군 시뻘건 쇠를 여기저기에 흩어 놓는다. 구원받은 자는 지옥불에 타지 않는다는 원리를 응용, 결백하다면 뜨거운 쇠를 밟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열심히 기도를 마친 대비마마는 눈을 가린 채 앞으로 걷는다. 물론 그 뜨거운 쇳덩어리 배치는 사제 맘대로이며, 도저히 발에 걸리지 않게끔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은 건 물론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이를 무사히 걷는 데 성공한 대비마마, 무죄가 증명되었다. 즉... 재판하는 사람 맘대로였던 것이다. 졸라 어렵게 배치해 놓으면 어찌 걷다가 발뿌리에 걸리지 않을 수 있으리.
그런데 이런 건 귀족에게나 적용되던 테스트 방법이었지, 평민이나 거렁뱅이 같은 사람들은 이 정도의 혜택도 받지 못했다. 평민이 재판을 받게 될 경우, 배에 태우고 강에 나가서 물에다 빠뜨려 버린다. 물에 빠진 이 사람, 물에 뜨거나 어푸어푸 헤엄쳐서 나오면 유죄가 증명된 것으로 간주되어 사형당한다. 물에 가라앉아 빠져죽으면 무죄다. 어느 경우에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빠져죽고 나면 친구들이 모여 "그래 그넘은 착한 넘이었어" 라며 탄식할 수 있는 게 유일한 위안거리랄까. 그럼 반대로 최고위계급인 사제가 재판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중세 영국의 재판제도에서 재판관은 사제계층이 담당했다. 끼리끼리 친한 자기 친구 성직자를 유죄로 몰아서 죽일 사제는 없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무죄를 주자니 쪽팔리고.... 이럴때 비슷한 테스트를 한다. 성당에 고관대작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모인다. 성가대가 장엄한 노래를 부르고 각종 경건한 의식이 행해지는 사이, 제단 위에 빵 한조각과 치즈 한 조각을 올려놓고 혐의를 받는 사제가 그 앞에 꿇어앉는다. 그리고는 온 정성을 다해서, 목숨을 걸고 맹렬하게 기도를 드린다. "신이시여, 제가 만약 죄가 있다면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사 제 목을 졸라 주소서..." 그리고는 빵에다 치즈를 얹어 경건한 몸짓으로 먹는다. 꿀꺽, 무사히 넘기면 무죄. 먹다 목에 걸려서 켁켁거리면 유죄. 정말 재수 옴붙어서 빵 먹다가 하필이면 목에 걸린 사람의 수는? 수많은 시선과 장엄한 예식에 긴장해서 먹다 걸려서 켁켁 할 법도 하건만, 이 테스트를 통과 못한 사람은 역사상 단 한명도 없었다. 역시 신부님들은 특별하다. 이렇게 어려운 시련을 한명도 빠짐없이 이겨내다니...
웃기다는 생각이 드시는가? 글타. 요상하고 웃기는 사법제도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그시대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신 앞에서 생구라를 쳐서 신이 분노하면, 평소에 멀쩡히 잘 먹던 빵도 하필 그때 목에 걸리게 된다고 철썩같이 믿었을 지도 모르고, 그렇게 치면 저런 것들 전부 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그렇다. 세상에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이란 없다. 전혀 상반되는 두 주장이지만 둘 다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아주 조금의 진리도 담고 있지 않은 언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판단을 내릴 때에는 그 근거를 하나씩 따져봐야 한다. 위에서 얘기한 종류의 시죄법(ordeal)이 웃긴 이유를 굳이 따져보자면 이렇다.
첫째, 보편적이지 않다. 유죄나 무죄냐를 판정하는 기준이,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물에 빠뜨리는 것과 빵 먹이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른 종류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빵을 먹였으면 쉽게 무죄로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인데, 물에 빠져서 숨막히는 건 못 참고 헤엄쳐 나와 유죄를 받올 수도 있다. 정반대의 결과인 것이다. 둘째, 자의적이다. 판정하는 사람 맘에 따라 지조때로 결과를 달리 할 수가 있다. 맘에 드는 넘은 봐주고, 맘에 안 드는 넘은 조진다. 그리고 세째, 정당하지 않다. 그나마 힘없는 서민이 그러면 동정이라도 하지만 권력과 권위의 이름으로 그 비보편성과 자의성을 휘둘러대는 것은 정치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즉 가치판단을 하는 데는, 혹은 어떤 사람이 옳은지 그른지 판별하는 데에는, 보편성을 가지고 자의적이지 않게 해야 하고, 그래야 권력의 정당성이 생긴다는 얘기다. 그런데.... 벌써 천년전에 하고 있던 짓거리를 아직도 똑같이 하는 넘들이 바로 우리 주변에 있다.
좃선을 비롯한 재래언론들이 또 한껀 올렸다. 김데중이 국군창설 53주년 행사에서 6.25는 통일전쟁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거 가지고 대통령의 국가관 운운하며 꼬투리를 잡아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정치판도 잠깐 시끄러웠었다. 좀 하다가 꼬리를 내리기는 했지만, 이 해프닝 자체가 이넘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우선 그날 김데중이 한 말은 이거였다. 역사상 세번의 무력통일 시도가 있었다. 신라와 고려의 통일은 성공했지만 6.25는 실패했다. 통일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우리 군이 강해져야 한다..... (해당 원문 보기) 이걸 가지고 좃선은 아래와 같이 사설로 씹었다.
이 글을 요지는 다음의 세 가지다. 1. 신라와 고려의 통일은 훌륭한 시도였지만 6.25는 나쁘다. 단순히 빨갱이들의 야욕이었을 뿐 민족적 의미는 전혀 없는 건데 이걸 통일시도로 보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 2. 북한의 시각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사용한 걸 보면 김데중의 국가관이 의심된다. 3. 혹시 학자면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겠으나 대통령은 무조건 우리쪽을 옹호해야 된다. 물론 뭐... 아주 틀린 말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조금도 말이 안 되는 주장이란 없다. 그치만 니네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틀렸다가 정답 되겠다. 그럼 왜 틀렸는지 하나씩 짚어볼까?
(1) 비 보편성 : 6.25와 통일을 갖다 붙이지 말라? 멀리도 아니다. 1년전, 2000년 6월호 월간좃선에 허문도가 기고한 글에 나오는 다음의 소제목을 보라. 본문도 아니고 아예 제목으로 뽑은 문구들이.. - 실패한 통일전쟁 6·25 6.25는 무력으로 통일을 시도한 전쟁이었다는 아주 단순명료한 사실이, 자기들 보수 논객이 이야기하면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이 하면 국가관이 의심스러운 근거가 된다. 혹은, 이걸 보시라. 조갑제 아자씨가 94년에 쓰신 글의 일부 되겠다. 김유신(金庾信)과 김일성(金日成)은 1천3백년이란 간격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통일을 위한 전쟁을 결심했던 한국 역사상 유이(唯二)한 지도자이다. 아아니 김일성이 통일을 위한 전쟁을 하셨다고 하니... 김데중보다 훠얼씬 더 강력한 빨갱이 발언인데? 또, 김일성이 하려던 건 너무 이단적인 것이라서 통일이라는 단어조차 붙이기 어렵다면 적화통일이라는 단어는 도대체 무엇일까. 적화는 통일이 아니라면서? 얘네들 말대로 하면 "적화통일 야욕 분쇄하자!" 하고 외치는 순간... 당신은 빨갱이가 된다. 좃선일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넘들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평가의 기준이 달라져 버린다. 건전한 우익은, 건전한 좌익도 그래야 하듯이, 남을 비판할 때의 잣대를 똑같이 자신에게 들이댈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우익 좌익도 필요없고, 그저 건전한 교양인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 넌 물에 빠지라고 하고 난 빵 먹겠다고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2) 자의성 : 북한의 시각을 연상시키는 단어? 사설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렇다. 바로 이거다. 북한의 시각을 연상 시키는 용어... 아니 더 정확히 인용하자면 북한의 시각을 연상시키는 듯한.... 좃선이 자주 써먹는 수법이다. 그런데 그 연상하는 주체는? 물론 좃선이다. 사설 본문에도 보자. 80년대 수정주의 학파의 전쟁책임이 미국과 남한에 있다는 이론 운운 하는 말을 써 놓고는 은근슬쩍 김데중 얘기를 한다. 그러면 김데중이 그 학설을 신봉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냥 밑도 끝도 없이 그런 학설이 있다고 써 놓고는,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는 김데중의 연설 내용을 끌어들인다. 연상 시킨다면서... 항상 그노무 연상은 김데중이 아니라 좃선이 시키고 있다. 온 국민을 상대로... 게다가 항상 물고 늘어지는 건 특정 단어이다. 최장집 때도 그랬고 한완상때도 그랬다. 역사적이라는 단어, 결단이라는 단어, 이런 몇개의 단어를 문맥에서 떼어놓고는, 봐라 빨갱이가 쓰는 단어하고 똑같다며 거품을 물었다. 여기서도 똑같다. 이렇게 특정 단어를 떼어내어 이상한 연상을 시키고 나서는, 북한의 시각을 연상시키는 듯한 애매한... 모여 있지 않은가 의심되며... 초래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난다... 아 씨바.. 그래, 상상의 나래를 펴고 훨훨 날아가시라...
(3) 비 정당성 : 대통령은 우리쪽을 옹호해야 한다?
한 나라의 대표자로서 분명히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국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우리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건 당연하다. 그런데 그 우리의 범주에 누가 들어가는지가 문제다. 이승만을 국가의 아버지로 믿고 박정희의 근대화를 믿으며 미당을, 서울대학교를, 재벌경제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만이, 국가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고 대통령이 지켜야 할 사람들이라는 게 긴긴 세월 좃선의 주장 아니었던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하면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주는 종교단체가 국가는 아니다. 대한민국은 무엇무엇을 믿는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한반도(이남)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가는 국가이다. 이승만이 분단에 책임이 있고, 박정희가 끼친 악영향도 크다고 생각하며, 친일파를 척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면, 대한민국은 그런 국가가 되는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공산주의자가 된다면 우리도 공산주의 하는 것이다. 이승만을 국조로 믿어야만 대한민국 구성원의 자격이 있다고 그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좃선은 자기들이 국가를 수호한다고 생각하지만, 국가는 본지도 지킨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이 옳고,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는 종교적 사고방식, 그것이 "국가"의 이름으로 포장될 때 그것은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일이다. 나찌의 정식 이름이 국가사회주의당이었다.
좃선이 좋은넘 나쁜넘을 가리는 방식은 중세, 그것도 천년쯤 전의 해괴한 재판방법하고 하나도 다르지가 않다. 한넘은 물에 빠뜨리고 다른 넘은 빵 먹이는 것하고 똑같이 보편성이 없으며, 애매한 연상을 가지고 지조때로 물고 뜯는 것이 자의적이고, 국가라는 권위에 기대어 강제하려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물론 천년 전 그넘들도 물에 빠뜨리면서, 빵 먹이면서, 그것이 너무나 지당하고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좃선도 마찬가지다. 그 순수성까지 본우원 의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년전 그때를 지금 돌아보면 이상하듯이, 30년전 40년전 군사독재 국가주의 개발시대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시대는 19세기 말 일본의 메이지 시대의 판박이이니, 결국 이들은 용감하게도 19세기의 잣대로 21세기를 살려 하는 셈이다. 용기는 가상하다만... 울나라도 예전같지 않아서 이런 거 가지고 그들이 바라는 것만큼의 소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좃선이 이짓거리를 계속해도 희망이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다. .... 불쌍하니 마지막으로 그림이나 한 장 만들어 주련다. 딴지 편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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