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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의 초대] 회식자리의 곤혹스러움

2004.12.18.금요일
딴지 일상칼럼

 







 


회식.


직장인들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그보다 자주 업무의 연장이라 불리는 회식이 한다. 특근수당도 야근수당도 없지만 오직 밥과 술을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참석을 해서 자리를 빛내야한다. 물론 내 돈 들이지 않고 밥과 술을 공짜로 먹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못된 시어머니 앞에서 떡을 먹으면 채하듯 회식 자리에 아무리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술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기쁘지는 않다. 회식자리가 일하느라 노고가 많은 직원들이 밥과 술을 먹으며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알다시피 직장이란 서열사회이다. 대표이사아래 사장. 사장아래 부장. 부장아래 과장. 이런 식으로 직계서열이 분명한지라 사적인 자리라고는 하나 회식자리 역시, 회사에서 그러하듯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며칠 전 우리 회사에서 공포의 회식이 있었다. 대표이사와 사장 모두가 참석하는 회식자리였고 오후 7시까지 월차, 연차를 낸 직원들까지 나와야 했다. 우리들은 (대리이하 직원) 회사 근처에 새로 생긴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기를 원했으나 장소는 대표이사의 단골집이자 장장 한 시간 반 동안 차를 타고 달려야 하는 멸치회 전문점으로 정해졌다. 직원들 중 어느 누구도 비린내가 창궐하는 멸치 회를 원하지 않았지만 몸에 좋으니 들어보게라는 사장의 말 한마디에 찍소리도 못하고 열심히 멸치 회를 입으로 가져갔다. 여직원들을 위해 맥주를 시키자고 과장이 한마디 했지만 사장은 안주가 안주니 만큼 소주가 왔다지라고 했고, 모두의 잔에는 소주가 차고 넘치게 부어졌다.


뭘 위하는지 모르겠지만 위하여를 외친다음 제일 먼저 사장이 소주잔을 단숨에 비웠고 슬슬 눈치를 보던 우리도 따라서 소주잔을 말끔히 비워야 했다. 괜히 거기서 어머 저는 술을 잘 못해요라고 했다가는 기분 좋은 회식자리를 망치는 눈치 없는 직원이 될 뿐이다. 더구나 치과 신경치료중이라는 직원에게는 술 마시면 낫는다. 독감이라는 직원에게는 감기에는 소주에 고춧가루를 태워 마시면 직빵 이라는데 더 말해 무엇 하리.


소주가 네 병에서 열병. 다시 스무 병쯤 비워졌을 때 사장은 2차를 가자고 했다.(다행스럽게도 이 과정에서 내일 골프약속이 있다는 대표이사는 빠졌다.) 이미 술을 마실 대로 마셔서 더는 못 마시겠다 싶었지만 우리는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2차로 간 곳은 언니들이 앉아서 멸치 똥을 까주는 양주바(Bar)였다. 테이블 두개를 합쳐서 대충 앉으려는데 부장은 여직원들을 남자들 사이사이에 끼워 앉혔다. 술시중을 들라는 얘기였다.


충성주, 칙칙폭폭주, 회오리주, 원자폭탄주 등이 쉼 없이 제조되었고 사장은 자기가 마신 잔을 손바닥으로 쓰윽 닦은 다음 그 잔에 또다시 술을 따라서 직원들에게 건넸다. 각자의 술잔이 있건만 사장은 굳이 자신의 잔으로 모두가 마시길 바랬다. 그래야 그 잔을 마시고 또 다시 직원이 사장에게 술을 건네어, 도중에 술 마시기가 끊기는 사태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직원들 중 어느 누구도 간염을 비롯해서 기타 전염성 질환이 없었던 건 정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폭탄주를 거푸 3잔정도 마셨을 때 도저히 제정신으로 버틸 자신이 없어서 부장이 주는 폭탄주를 거부했건만 돌아오는 소리는 술을 못 마시면 시집을 못 간다는 엄한 말이었다. 나이가 꽉 들어찬 여직원의 결혼문제 마저 걱정해주는 회사가 감격스러워서 계속 받아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하긴 잠시 후 3차로 노래방에 가면 맨 정신보다는 조금 알딸딸해야 술기운에라도 버틸 수 있겠지 하고 말이다. 우리 회사의 회식자리는 단 한번도 1,2차에서 그친 적이 없다. 1차는 술과 밥. 2차는 술. 마지막으로 3차는 노래방 아니면 성인나이트였다. 술이 차오르자 사장과 부장들은 슬슬 여직원들의 어깨에 손도 올리고 안주도 집어서 입에 넣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싫다고 말 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회사생활이 결코편하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내가 있다. 회식 자리에서 부장과 부둥켜안고 브루스를 출 것을 거부해서 회식자리를 싸하게 하는 천인공노할 죄를 지은 나는 그 다음주 인사고과에서 그 부장으로부터 개판 5분전의 점수를 받았고, 연봉협상 때 감봉이라는 영광의 상처를 얻었다. 그걸 지켜본 여직원들은 그 다음부터 너 나 할 것 없이 사장이 브루스를 추자면 냉큼 달려가 안겼고 부장이 노래를 부르러 나가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옆으로 가서 박수를 쳐 주거나 팔짱을 꼈다. 브루스를 추면서 사장의 손이 간혹 허리 근방을 더듬어도 꾹 참아야 한다. 그래 엉덩이나 가슴을 주물럭거리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며 말이다. 회사에서 어떤 직함을 달고 있건, 어떤 업무를 하고 있건 회식자리에서는 모두 다 여직원일 뿐이다. 술잔이 비기가 무섭게 콧소리를 내며 술을 따르고, 주면 주는 대로 받아 마시고, 임원들이 술잔을 내려놓는 순간에 바로 안주를 집어서 술을 마신 장한 입에 넣어줘야 한다. 누구도 꼭 해야만 한다고 시킨 적은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절대로 우리가 원해서 하는걸 아니라는 것이다. 좀 심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떨 때는 우리 여직원들을 회식자리에 데리고 가는 이유가 도우미들을 부를 돈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절대로 반감을 사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여직원들은 분명히 돈을 갹출해서 도우미 부를 돈을 줄 용의가 있을 것이다.


회식자리에서 고생하는 것은 비단 여직원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자 직원들의 경우 아양이라도 떨면서 폭탄주를 거부 할 수나 있지 남자 직원들은 어림도 없다. 아무리 술이 약하고 더는 못 마실 것 같아도 사내자식이 술 한 잔 못해서야 큰 일을 하겠냐고 외치는 직장상사 앞에서 죽어도 더는 못 마신다고 할 간 부은 남자 직원은 아무도 없다. 거기다 3차 노래방에서 조용한 노래를 부를 경우 무조건 브루스를 추려고 하는 상사들을 피하기 위해 여직원들이 조금 빠른 노래라도 부를라치면 남자직원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탬버린을 흔들며 정체불명의 댄스를 미친 듯이 춰대야 한다.


그뿐인가. 분위기가 다운된다 싶으면 고무장갑을 콧김으로 부는 차력쑈도 해야 하고 (가끔 페트병도 등장한다.) 머리와 팔에 붕대처럼 휴지를 감거나 넥타이를 머리에 동여매고 숟가락을 꼽고 춤도 춰야한다. 쪽팔리는 건 그 다음 문제이고 일단은 체력이 따라줘야 한다. 거기다 노래방에서도 음주는 계속된다. 몸에 쌓인 알코올 때문에 죽어서 썩지도 않을 것 같은 사장은 술이 어찌나 쌘지. 노래방에 가서도 끊임없이 남자직원들에게 술을 권한다. 그리고 그들은 관행에 따라 완샷을 하고 잔을 머리위로 거꾸로 들고 흔들어 한 방울도 남김없이 퍼마셨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여직원들은 빠져도 되는, 아니 당연히 빠져야 하는 4차 룸살롱도 따라가야 한다. 그때쯤 되면 이미 새벽 2시가 훌쩍 넘어있다. 토요일이나 국경일 전에 회식자리를 마련해주면 좋으련만 한없이 늦게 출근해도, 혹은 안온들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사장이나 대표이사의 경우 그런 점까지 배려 할 리는 만무하다. 룸살롱에 간다고 하면 자기돈 안내고 여자들이 나오는 술집에 가니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예쁜 여자들은 다 직급대로 차지하게 되고 쫄따구들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그나마 덜 생긴 여자도 옆에 앉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긴 그 자리에서 여자가 옆에 앉은들 그걸 기뻐할 남자직원이 있을까 싶다.) 직장상사가 젊은 접대부를 상대로 주물떡거리며 추태를 부리는 걸 구경하는 게 재밌어봐야 얼마나 재밌겠는가. 거기다 폭탄주는 계속 돌고 출근 시간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에 쓰린 속이야 어찌어찌 참는다고 해도 새벽 3시 넘어 까지 술을 마시면 그 다음날 아침에도 술이 깨질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도 노래방에서 하던 차력쑈와 택도없는 댄스댄스는 계속된다. 노동도 그런 중노동이 없다.


내가 정말로 궁금한 것은. 이렇게 아무도 원하지 않는 회식을 대체 왜 하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들은 저런 회식자리가 우리의 사기를 드높여 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어젯밤 사장이 브루스를 춘답시고 허리께를 더듬은 것을 본 남자직원은 여자직원이 안됐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가고 난 뒤에도 대체 얼마나 더 끌려 다니며 시달렸기에 팬더 곰처럼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겼을까 싶은 남자직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다. 점심으로 콩나물 해장국을 먹으며 우린 아무도 전날의 회식에 대해 회상하지 않는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불쾌하고 괴로운 기억뿐이니까 빨리 잊어버리는 게 낫다.


근데 정말 이런 사실을 회식자리를 주관하는 저 위에 높으신 분들은 모르는 걸까? 아니면 그분들은 말단사원시절 회식을 한다고 하면 심장이 터질 정도로 설래 이며 기대하는 특수한 종류의 인간들이었던 걸까? 분명히 자기네들도 평 직원이었던 시절, 원치 않는 회식자리는 곤혹스러웠을 텐데 막상 자기가 윗사람이 되면 생각이 달라진다. 에이 그래도 회식을 한번 해 줘야 직원들이 일할 맛이 생기지 하면서 말이다. 곧 얼마 안 있으면 연말이라 회식의 꽃이라 불리는 망년회를 하게 된다. 작년도 제작년도 그러했듯. 우리는 끝끝내 사장이 잡아놓은 여관방까지 따라 들어가서 밤새도록 술을 퍼야 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정말 신물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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