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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스위스전] 스위스 현지중계 시청기

2006 6. 26 (월)
딴지 스위스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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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겹던 축제가 끝나서일까?  


마지막 시청기를 쓰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참 손가락이 무겁다.


불과 2센티미터 두께의 유리창 밖 거리에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요란하고 취리히 호수 건너편 하늘에는 기쁨의 불꽃이 춤을 춘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이어 승리에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다. 오랫동안 월드컵 본선에도 진출하지 못하다가 16강이라니 좋기도 하겠지.


친구 집에서 경기 시청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광경을 떠올리니 한층 더 우울해진다.


젊은이들은 어깨를 끼고 차도니 인도니 상관없이 뛰어다니고, 한 잔 걸친 인간들은 전차며 버스며 다짜고차 두들겨 댄다. 그 통에 전차 안에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인간들이 도대체가 공격적이란 말이야. 짜식들 좋으면 좋았지.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는 마주오던 전차에 탄 젊은 인간들이 나에게 손가락을 겨누며, "우리가 이겼지롱..." 하고 누나에게 까분다. 우울하다.....





오늘은 경기를 기다리면서 떨리기도 했지만 또 분주하기도 했다. 한국과의 경기를 기념하여 취리히 지역의 한 축제에서는 여러 한국 관련 행사가 마련되었다. 거기서 한인들과 스위스인들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잠시 살피고 곧장 여러 가족들이 모여서 응원하는 친구집으로 이동해야 했다.


먼저 축제에서는 한국 전통 무용과 사물놀이, 태권도 공연 등이 펼쳐졌다. 이국적인 공연 모습에 현지인들은 자못 흥미롭게 느끼는 모습이었고, 한국 교민들은 같이 흥을 내며 분위기를 내었다. 태권도 시범 공연에서 펼쳐지는 박진감 넘치는 모습에는 어쩐지 관중들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는 듯 했다.  



벽안의 스위스인들이 우리말로 된 호령에 맞추어 태권도를 선보이고 우리 정신을 배우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또 여기서 태어난 2세들이 한복을 입고 사물놀이 음악에 맞추어 흥을 북을 치는 것을 볼 때도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가 자랑스러웠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서도 그것을 지키려는 우리 사람들 역시 자랑스러웠다. 이런 흐뭇한 마음을 안고 수박을 한 덩어리 사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친구집을 향했다.


분위기 아주 좋았다. 모두 열 두세 명 정도. 스위스 사람은 두 명 남짓, 나머지는 모두 한국인 내지는 외국인이었다. 그래서 연신 압도적인 분위기에서 "대~~한민국" 구호까지 외치며 응원을 펼쳤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모두 한마디씩 떠들며 승리를 염원하고 있었다.



본 특파원도 흥분하여 맞장구를 치고 있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 윽, 나 시청기 써야 되는데.... 그러려면 캐스터가 하는 말을 들어야되는데.... 캐스터의 중계 소리는 방안의 소음에 묻혀 전혀 들리지가 않았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시청기는 어찌 될테고 전반전은 일단 응원이나 하자. 그렇게 마음 먹고 열심히 응원했건만, 센델로스의 피투성이 헤딩 슛이 우리의 골망을 흔들었고, 그 집 거실은 절망에 찬 탄식 소리로 가득차야 했다. 우리의 마음에도 피가 흐르는 듯 했다. 그래도 지난 두 경기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한다고, 잘했다고 서로 서로 위로를 하면서 후반전을 기다렸다.





후반에는 캐스터가 뭐라고 하는지 좀 들어 볼라고 TV 바로 옆에 바싹 붙어 앉아 15도 방향에서 화면을 봐야 했다.


그래도 활발하게 이어지는 공격에 기대를 잃지 않고 집중하고 있던 차 터진 어이없는 두 번째 골.


스위스 캐스터도 정확하게 말했다.



"어, 오프 사이드군요. 오프 사이드, 선심이 기를 올렸습니다. 아! 그러나 심판 경기 진행을 인정하고 골을 인정합니다.


아, 한국팀으로서는 치사한 골이라고 여길 것 같습니다. 골을 넣은 후에 마땅히 터지는 환호성도 없군요.


그러나 오늘 확실한 것을 하나 배운 것 같습니다. 심판이 호각을 불기까지 경기는 어쨌든 지속된다는 점이죠."


그 외에 나는 배운 점이 또 하나 있다.


유럽에서 유럽팀을 상대로 그것도 FIFA 회장의 조국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려면 실력뿐 아니라 천운 이상의 운이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저런 말을 지금 한다고 해도 패자의 변명이 될테지. 그리고 어쨌든 확실한 골로 승리를 낚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나거나 부끄럽거나 실망되지는 않는다. 오늘 우리 선수들 정말 잘 싸웠으니까. 


월드컵이라는 축제에서 축구라는 묘한 것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역전의 기쁨과 일치됨의 뜨거움과 노래와 환호를 즐겼으니까.


쉽게 말해 우리 모두 본전 뽑을 만치 즐겼으니까 손해 본 장사는 아니다. 다만 다음번 장사 때 한 밑천 잡을려면 지금부터 다시 조금 더 노력하면 되는거지.


"그래 잘 싸웠다, 수고했다. 억울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허탈하게 내뱉던 내 친구 수복이의 말이 그 방에서 응원하던 모든 이들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  딴지 스위스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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