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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80년대 슈퍼밴드들을 돌아보며

2004.8.6.금요일
딴지편집국


80년대는 팝의 시대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60년대, 70년대, 그리고 90년대는 팝의 시대가 아닌감?하고 반문하는 독자덜 있을 걸로 안다. 60년대, 70년대, 90년대에도 분명 팝이 존재했지만 80년대 만큼 팝이 록보다 압도적 우위에 있던 시기는 없었다.


팝이 록보다 압도적 우위에 있다니, 이게 뭔 말인가.


보통 팝(pop, popular music의 약자)이라는 용어는 록을 포함시켜 사용할 때도 있고 록과 구분하여 사용할 때도 있다. 앞에서 80년대가 팝의 시대라고 말한 것은 후자의 경우다.


팝과 록을 굳이 구분한다면, 무엇이 팝을 팝이게 하고 록을 록이게 하는가? 일렉기타의 거친 디스토션이 잔뜩 들어가면 록이고 산뜻한 신시사이저가 많이 들어가면 팝인가?


록을 팝과 구분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다름 아닌 진정성이다. 판을 많이 팔아치우기 위해 음악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욕구나 사상을 표출하기 위해 음악을 창조한다면 팝이라기보다 록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척도에 의한 구분도 사실 록과 팝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못한다. 예술적 욕구를 표현하는 음악장르는 클레식도 있고 재즈도 있고 블루스도 있기 때문이다. 수천만 장의 음반을 팔아치운 레드 제플린을 보고 록음악했다고 하지 팝음악했다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팝과 록의 구분은 록 평론가라는 직업의 직업적 목적에 의해 이뤄졌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는 않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팝과 록을 구분시켜 80년대는 팝의 시대라고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80년대 미국은 레이건 정부의 보수주의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잡던 시기였다. 이 보수주의는 대중음악계에도 마찬가지로 반영되었는데, 6,70년대의 강렬한 저항의식이나 사회성 짙은 메시지의 음악은 구조적으로 발붙이기 어렵게 되었다. 음악산업은 그야말로 산업으로서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에 음악은 기업화되었고 소비사회의 풍요로움을 찬양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대서양 건너 영국의 대처정부 하에서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섹스피스톨즈나 클래쉬 같은 펑크진영에 의해 저항의식이 잠깐 불붙었다가 70년대 후반부터 뉴웨이브에 의해 변질되기 시작하더니 80년대는 급속한 상업주의에 물들어 갔다.









내가 이래뵈도 아이큐 150에
쇼 비즈니스계의 여왕이랑께


이러한 보수주의라는 우산 하에서 빅스타로 발돋움한 사람이 마이클잭슨이고 마돈나다. 둘 다 80년대를 상징하는 팝 아이콘으로써 이들에게서 사회의식이나 저항의식은 아예 고려 밖이었다. 80년대가 열리던 해, 지구촌에 본격적으로 록의 불을 지핀 비틀즈의 한 축이었던 존 레논이 마크 데이비드 체프먼에 의해 총살당한 이후 비틀즈의 나머지 한 축인 폴 메카트니의 행보는 비즈니스 맨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니었다. 레드 제플린은 이미 해체된 상태였고 핑크 플로이드는 간헐적으로 거대규모의 공연으로 그 몸집을 지탱할 뿐, 법정다툼까지 가는 내부분열을 지루하게 계속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80년대에는 록이 역력하게 피로한 기색을 보였다. 


이처럼 팝으로부터 록을 신성하게 분리시키는 척도인 진정성이나 저항의식은 80년대에 들어와서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물론,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나 유투같은 이념적 전사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6,70년대의 록의 성찬은 오지 않았다.


언더그라운드에서는 하루에도 수천개의 록밴드가 생겼다 사라졌다 하지만 오버 그란운드에서 대중음악챠트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흑인의 전통 소울 뮤직과는 차이가 있는 크로스오버류의 블랙뮤직과 댄스음악이었다.


록 역시 80년대 초 L.A쪽을 중심으로 하드록이 변형된 감각적이고 매끄러운 메틀이 유행하는가 싶더니 후반으로 오면서 팝감각이 노골적으로 용해된 메틀음악,이른바 팝메틀이 본 조비, 데프 레파트에 의해 절정을 이루었다. 씨바, 본 우원 본 조비팬에 의해 맞아 죽겠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말이 팝메틀이지 이거 순 록을 흉내낸 팝이나 다름없다. 걍 헤비메털이라 보기엔 너무 사탕발림성 멜로디가 많이 들어가 버렸고 걍 팝이라고 부르기엔 비트가 강렬했기 때문에 붙였졌지만 팝메틀이라는 용어는 폐기처분되어야 할 용어다. 본 조비나 데프레파트가 이 당시에한 음악은 록이라기 보다 걍 팝송이었다.


이처럼 80년대는 록이 팝의 유행에 침식을 받던 시기였다. 때가 그랬다.


많이 파는 것만이 가치를 독점하던 80년대 대중음악계에도 자신의 음악적,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군의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과거 6,70년대의 명밴드에서 활동하다가 음악적으로 의기투합해 결성한 프로젝트성격의 밴드가 그 중 하나다.


이 프로젝트성 밴드들은 80년대 와해된 록의 예술성에 대한 노력의 이합집산이었다. 물론 이전 밴드에서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해 새로운 밴드가 생겨날 수도 있지만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록의 예술성에 대한 고려를 하고 있었다. 물론 크로스비스틸즈 내쉬 앤 영,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블루스 브레이커스 같이 6,70년대에도 이같은 프로젝트성격의 슈퍼밴드들은 있었다. 하지만 상업성이 가장 고조되었던 80년대의 악조건 속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은 충분한 그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6,70년대만큼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고 그대로 잊혀져 간다는 느낌도 다분히 받는다.


이에 본기자는 80년대 활동했던, 그러나 지금은 잊혀져가는 프로젝트 성격의 슈퍼밴드들을 재조명...이라 할거는 없고 걍 함 들춰보고 환기하고자 한다. 물론 지금 소개할밴드 이상으로 음악적 성취를 이룩한 숨은 밴드들도 있을 수 있으나 본기자의 선호도를 우선으로 선정했다는 점 참고 바란다.



  아시아(Asia)







음악이 좋네 나쁘네를 떠나 무엇보다 이 밴드를 구성하는 멤버들 개개인이 걸어왔던 경력을 보면 입이 쩍 벌어진다. 이 밴드의 베이스와 보컬을 맡은 존 웨튼은 킹크림슨, 유라이어 힙, 록시 뮤직 등 영국의 주요 프로그레시브 밴드를 두루 거춰왔다. 또 예스의 기타리스트로 투명하고 클레식한 기타주법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스티브 하우가 기타리스트로 있고, 클레식과 록의 접목을 시도했던 70년대의 명밴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칼 파머가 드럼채를 휘두른다. 이거 머 초울트라 캡숑 슈퍼밴드다. 이쯤되면 눈치 빠른 독자덜은 얘네덜 음악이 대충 클레시컬함이 기본 바탕으로 두고 뭔가 심오한 음악을 하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본 결과, 듣기 쉽고 말랑말랑한 팝화된 록(혹은 록화된 팝)이 앨범전체를 수놓고 있다. 82년 발표되어 빌보드챠트 1위 먹은 동명타이틀 데뷔 앨범에서 <Heat Of Moment>가 빅히트를 하긴 했지만, 먼가  심오하고 아트 록(이 용어도 사실 일본얘들이 지어낸 말로 영미 본토에서는 이런말 거의 사용치 않는다.)적인 분위기를 기대한 자는 얘네들 걍 돈벌려고  모였나라며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의 경력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파울풀한 존 웨튼의 목소리와 섬세하면서도 차가운 스티브 하우의 기타연주, 그리고 치자처럼 정교하게 멜로디 메이커로써의 역할을 한 버글스 출신의 제프다운스의 키보드 솜씨, 칼 파머의 정교한 드러밍이 어우러진 이 앨범은 마니아를 잃는 대신 더 폭 넓은 대중을 얻었다. 이들의 등장은 록음악이 급격하게 퇴조하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록음악의 한바탕 화끈한 시위였다. 아시아는 80년대에 등장한 최초의 슈퍼밴드였던 것이다.



  펌(The Firm)


존 본햄의 사망으로 레드 제플린은 온전히 70년대의 밴드가 되었다. 지미페이지는 과거 배드 컴퍼니와 프리의 포론트 맨이었던 폴 로저스와 의기 투합해서 밴드를 만드는 것으로 포스트 레드 제플린시대를 열어가리라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이렇게 해서 결성된 밴드가 더 펌이다.









최근의 지미 페이지


85년에 내놓은 이 밴드의 동명타이틀 데뷔앨범에서 지미 페이지의 기타 톤은 전체적으로 레드 제플린의 미발표곡을 모은 앨범 Coda에서 보여준 오버더빙의묘미를 잘 살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원래 지미 페이지는 기타리스트로써도 탁월하지만 결코 기타 테크니션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 기타리스트로써의 역량에 비해 사운드를 조율해가는 음악감독으로써의 역량이 더 뛰어나다는 느낌 때문이다.


이 밴드의 데뷔앨범에서 <radioactive>가 소폭의 인기를 얻었지만 지미 페이지의 예전의 다이나믹한 기타리프와 폴 로저스의 호소력 짙은 보컬을 느끼게 하는 곡은 뭐니뭐니해도 <Satisfaction Guaranteed>와 이 앨범의 마지막 트랙인 <Midnight Moonlight>이다. 더 펌의 최고곡으로 본기자는 주저없이 이 곡들을 꼽을 것이다.


조금은 엉뚱하게 라이처스 브라더스의 명곡 <Youve Lost That Loving Feeling>을 하드록 버전으로 이 앨범에 삽입시켜 대중성을 노려보지만 대중들의반응은 그야말로 시큰둥한 것이었다. 과거 레드 제플린이나 지미 페이지의 골수 팬들은 쌍수들고 환영할 것이지만 그다지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지지 않았고 이들의 앨범을 라이센스로도 구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 앨범은 과거 제플린메니아들이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들어보고 싶게 했던 슈퍼밴드의 데뷔앨범이지않은가.



  파워 스테이션(Power Station)


80년대 듀란듀란의 대중적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당시 국내 라디오 팝프로 방송국은 듀런듀런 멤버들의 생일날이면 수백장의 팬레터가 쌓일 정도였다. 너무 꽃미남들만 모여서 음악을 했기 때문에 음악이 상대적으로 절하된 느낌이 있지만 음악역시 이들 외모만큼 쌈빡하게 잘 한 밴드다.


이런 듀란듀란이 지난 2월 열렸던 브릿 어워드에서 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 상이 다름아닌 평생공로상이었다. 평생공상이라니! 참, 격세지감을 느낀다. 78년에결성 되었고 활동한 물리적 시간이 25년이 넘기 때문에 평생공로상을 주어도 어색함이 없지만 말이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85년경 멤버들 간의 음악적 이견이 심해져 잠시 나뉘어서 활동하는게 어떨까싶어듀란듀란은 두 개의 밴드로 나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아카디아(Arcadia)고 다른 하나가 파워 스테이션(Power Station)이다. 먼저, 베이시스트 존 테일러와 기타리스트 앤디 테일러가 듀란 듀란을 뛰쳐나와 만든 밴드가 파워 스테이션이다. 이 파워스테이션의 게스트 보컬리스트로 참가한 사람이 <Badcase Of Loving You>, <Addicted To Love>로 잘 알려진 로버트 파머다. 그리고 남은 듀란 듀란의 멤버 닉 로즈, 사이몬 로본, 로저 테일러는 듀란듀란이라는 이름 대신 아카디아라는 밴드명을 사용하여 활동한다. 이 때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영국 전역의 듀란 듀란팬들 역시 둘로 나뉘어져 신경전을 벌였다.


먼저 선제 공격을 한 쪽은 파워 스테이션이었다. 누구보다 기존의 듀란듀란의 음악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존과 앤디는 소녀들이 좋아할 취향의 산뜻한 전자음악을폐기처분하고 록적이고 보다 파워풀한 노래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20th Century Boys>로 잘 알려진 글램록 밴드 티 렉스의 <Get It On>을 리메이크한 곡 <Bang A Gong>, <Some Like It Hot>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아카디아를 압박했다.


아카디아도 지지 않았다. 아카디아는 파워 스테이션과 정반대로 오히려 더 정교하고 세련된 전자음과 신스팝을 곁들인 현대적 음악을 들고 나와 <Election day>, <Goodbye Is Forever>를 히트 시킨다.


각자 뚜렷이 대비되는 한 장씩의 앨범을 발표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펼친 후, 이 두 밴드는 86년 다시 듀란듀란이라는 이름으로 재결합하게 된다.



  지.티.알 (G.T.R)









최근의  스티브 하우


위에서 언급한 아시아에서 뛰쳐나온 스티비하우와 제네시스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해킷, 이 두 스티브 브라더스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밴드가 지.티.알이다. 예스와 제네시스에서 각자 리더 기타리스트로 활약한 이 두 걸출한 기타리스트가 함께 한 이 슈퍼밴드는 86년 딱 일 년 동안 딱 한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깔끔하게 해산했다. <When The Heart Rules The Mind>를 히트시켰지만 G.T.R은 한 번 반짝 타올랐다가 꺼진 불꽃이었다.


당근, 이 두 기타리스트의 팬들은 한 밴드 내에서 누가 기타 더 잘치나로 관심이 갔지만, 밴드 내에서 불꽃 튀는 경쟁이나 신경전은 그다지 없었다. 동명 타이틀 앨범에서도 리더기타를 누가 맡는냐보다 어떻게 조화하느냐에 더 치중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이 밴드가 장외에서 라이브를 할 경우 두 기타리스트가 끌어들이는각각의 팬들은 서로 신경전을 벌였다.


공히 프로그레시브 록 필드에 있었다는 점, 클래시컬한 분위기를 띤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이 두 기타리스트를 굳이 비교하자면 스티브하우는 디스토션이나 바브리토를 거의 쓰지 않아 객관적이고 차가운 느낌이라면 스티브 해킷은 일렉기타의 연주법을 충분히 사용하면서 즉흥적 정서를 노출시킨다는 느낌이다.



  트래블링 윌브리스(Traveling Wilburys)


보통 슈퍼밴드들은 각기 다른 밴드에서 악기 파트별로 출중한 기량을 가진 사람들이 헤쳐모여서 결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트래블링 윌브리스는 멤버들이 전부 보컬리스트이며 솔로로서의 경력들이 전부 화려하다 못해 평생공로상을 받을만큼 산전 수전 공중전 다 겪어본 사람들만 모였다. 나이도 결성할 당시인 88년에 이미 쉰이 넘었거나 쉰을 바라보는 노땅들이 모였다.







그 면면들을 보면 5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로이 오비슨, 6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밥 딜런과 비틀즈의 조지 헤리슨, 7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톰 페티와 ELO의 제프 린 이렇게 다섯 명이 모였기 때문에 30년의 영미 대중음악계를 장악했던 장본인들이 다 모인 셈이다. 이들은 조지 헤리슨의 싱글 B면을 새로녹음하고 리더보컬을 나눠 맡으며 앨범작업을 함께 하게되는데, 88년 당시 팝본고장에서는 굉장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반향이 일지못했다.


더할 나위 없이 무게감 있는 멤버 면면들과 상관없이 이들의 데뷔앨범의 사운드는가볍게 흥얼거리는 투의 포크록 기조에다 정교하진 못하지만 생동감있고 달관한 듯한 보컬과 연주관으로 일관한다. 이들의 데뷔앨범에서 밥 딜런이 리더 보컬을 맡은 <Handle with Care>와 <End of the Line>이 히트했다.


이제는 이 다섯명 중 두 명이 이미 고인이 되었는데 이들이 결성되던 88년 심장마비로 사망한 로이 오비슨과 2001년 암으로 사망한 조지헤리슨이 그 두 명이다.



  댐 양키스(Damn Yankees)







댐 양키스의 <High Enough>, 반가워하실 독자덜 많을 걸로 안다. 국내에선 댐 양키스 하면 <High Enough>, <High Enough>하면 댐 양키스를 떠올릴 정도로 댐 양키스는 록 발라드를 하는 밴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호방하고 스케일이 큰 하드록을 연주하는 밴드다. 89년에 결성된 이 밴드의 면면을 살펴보면, 70년대 이미 <Stranglehold>, <Cat Scratch Fever> 등으로 투박하고 포악한 기타사운드를 들려준 테드 뉴전트와 스틱스의 감성적인 기타리스트 토미 쇼가 트윈기타의 진용을 갖추고 나이트 레이저스에서 베이스와 보컬을 담당한 잭 블레이즈가 보컬을, 세션 드러머 마이클 카테론이 드럼을 연주한다.


최대 히트곡 <High Enough>는 테드 뉴전트의 원시적인 하드록사운드보다 토미 쇼의 날렵하고 대중친화적인 감성이 더 묻어나는 곡이다. 하지만 이 곡 외의 다른 곡 이를테면 <Piledrive>나 <Runaway>같은 곡에서는 테드 뉴전트의 속도감 있는 기타 프레이즈를 맘껏 감상할 수 있다. 여타 슈퍼밴드들이 영국 일색인것과는 달리 이 밴드의 음악 스타일은 미국의 70년대 어메리컨 하드록에 80년대의 팝감성이 묻어난 사운드로 9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가졌다.


데뷔앨범의 성공과는 달리 92년에 발표된 두 번 째 앨범 <Dont Tread>는 1집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는 비평과 상업적 실패가 부담이 되었던지 93년 밴드는 돌연 해산해 버렸다.



  노팅힐 빌리스(The Notting Hillbillies)


컨츄리 음악은 미국 백인들의 전유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영국에서도 컨츄리페스티발이 자주 열릴 정도로 만만치 않게 저변을 가지고 있다. 노팅힐 빌리스는 영국인들로 구성된 컨트리 밴드다.


노팅힐 빌리스의 멤버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인물이 마크 노플러다. 마크 노플러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이면서도 미국의 전통적인 록큰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아티스트로, 다이어 스트레이츠 시절부터 컨트리풍 혹은 홍키통크풍의 록큰롤을 자주 선보인 바 있다. 그는 노팅힐 빌리스를 결성할 무렵 컨츄리계의 대부인 쳇 엣킨스와 듀엣앨범을 발표하는 등 컨츄리 음악에 빠져들며 기존의 해왔던 록음악과 점점 결별하는 듯한 인상을 보여줬다. 이 때가 89년경으로 그는 노팅힐빌리스를 결성할 무렵이다.


노팅힐 빌리스의 멤버는 마크 노플러와 그의 10대 후반 음악친구였던 스티브 필립스,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키보디스트 가이 플렛쳐, 이전부터 컨츄리음악을 해왔던 브랜던 크로커 이 네명이다.







재즈의 뉘앙스를 풍기는 <Your Own Sweet Way>, 흥겨운 홍키통키 스타일의 <Will You Miss Me?>, 진득한 블루스 풍의 <Feel Like Going Home>이 포진한 이 밴드의 데뷔앨범은 금속성의 비인간적이고 차가운 록사운드에 지친 사람들에게 여유로움과 정겨움, 인간다움 머 이런 걸 느끼게 해준다. 노팅힐 빌리스는 90년대 중반까지 간헐적으로 소규모공연을 자주 해왔으나 데뷔앨범 외에 더 이상의 앨범은 발표하지 않았다.


80년대 등장한 슈퍼밴드로써 위에 소개하지 못한 밴드로는 배드 잉글리쉬(Bad English), 허니드립퍼스(Honeydrippers), 마이크 앤 메카닉스(Mike & Mechanics) 등을 들 수 있겠다.


다른 집단에서 일하던 아티스트가 뮤지션쉽에 의해 함께 모여 음악한다는 것은 뮤지션 개인에게 있어서는 음악적 생명력을 연장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다. 밴드가 멤버들 간의 음악적 이견으로 해체되고나면 음악적 희망사항이 아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함께 일하고 싶었던 다른 뮤지션을 통해 음악적 활로를 개척하는 할 수 있다는 점은 이러한 슈퍼밴드들의 순기능이다. 음악팬 입장에서도 뮤지션간의 새로운 결합이 신선한 기대와 함깨 음악채널을 다양화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솔로가수 위주의 팝음악이 챠트를 누비고 있고, 음반을 팔아치우는 것만이 모든 것이었던 그 80년대에도 말이다.



 
두근거리는 맘으로 처음 딴따라기사 써 본
술탄(sultan@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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