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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혜 추천0 비추천0

 

 

 

 

[생활] 여자에게 몸무게라는 것

2004.8.6.금요일

딴지 생활부
 

 

나는 지금 학창시절 이후로 가장 편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어떤면에서냐면 몸무게 때문. 하지만 슬프게도 내가 평안해진 이유는 내 몸무게를 내가 극복해서라 아니라 내 몸무게가 나를 극복했기 때문이라 해야 더 정확하겠다. 그래서 나는 원없이 먹고 원없이 입는다.

 

나는 말랐기 때문에 옷가게에 가면 언제나 제일 작은 거요를 당당히 외치고 뭘 입어도 크고 심지어 초등학교때 입었던 옷도 맞고 혼자 식당 가서 떡만두국 한 사발을 다 마시면서도 눈치 안 보이고 무거운 거 들면 들어주고 핫팬츠도 막 입고 끈나시도 막 입고 아무거나 아무데서나 막 먹는다. 몸무게의 영역에서 나는 당당한 승리자인 것이다.

 

조금만 마르면 이 세상이 모두 네꺼가 될 수 있어 하는 광고따위 보면서 하나도 두렵지 않다. 난 이미 말랐고 해서 이 세상은 내꺼니까.

 

나는 안다. 내가 승리자인 이유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 살들이 지닌 무게 때문임을 안다. 내가 언제라도 살이 찌면 승리는 나의 것이 아님도 안다. 세상은 살을 빼라 그럼 세상이 네것이다 라고 말하지만 다 사기다.

 

그저 옷가게 가서 옷 고를 때 어머, 언니는 날씬해서 뭘 입어도 예뻐요. 할 때 잠깐 우쭐하고, 삼일연속 새벽에 라면 끓여 먹어도 자신이 밉지 않고, 삼년 전에 맞은 옷이 오늘도 맞아서 편리하고, 게걸스럽게 먹어도 돼지 같아 보이지 않아서 안심이고 뭐 이런 것들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특권을 빼앗길까봐 두렵다




 
 

 

어느날 백화점에 갔는데 제일 작은 옷이 맞지 않는 일이 닥치면 어떡하나 두렵고(백화점은 이제 마네킨한테도 작은 옷들을 판다.), 그래서 불과 이삼년전처럼 빵 하나 먹고 나서 죄책감을 느끼는 생활로 돌아갈까봐 무섭고, 간만에 만난 친구가 선혜 살쪘네. 팔뚝봐라! 하고 놀릴까 고민되고, 사실 지금도 며칠만 돼지처럼 먹으면 살쪘을까 고민되고, 내 팔뚝이 통통하지 않나 고민되고, 누가 내 허벅지 보고 놀릴까봐 무섭고, 누가 내 종아리 보고 흉볼까봐 두렵다

 

다이어트의 성정치학을 세 번 읽고 티비에서 거식증/폭식증 환자의 비참한 말로를 봐도.. 그래도 일단 몸무게가 45kg 이하여야지 된다. 다이어트의 폐해도 일단 45kg 이하가 된 다음에 생각해 볼 문제이고 체중조절산업과 비만에 대한 일련의 위협과의 관계도 일단은 3kg쯤 뺀 뒤에야 고민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십킬로쯤 더 찐다고 세상이 무너지거나 엄마가 날 버리거나 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몇킬로그램의 지방덩어리보다 내 존재가 하찮게 취급당하는 그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도 안다.

 

세상 참 좋아져서 대낮에 길거리에 여자애가 미니스커트에 튜브탑을 입고 활보해도 쇼킹하지 않게 되었지만, 언뜻 피스를 외치고 싶지만, 하지만 쫌만 자세히 보면, 그런 멋진 차림새를 한 여자애들의 몸무게를 추측해 보면, 그녀들의 팔뚝 굵기를 보면, 씨바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하고 머리를 조아려야 할 걸.

 

꿈의 90년대가 외친 무엇이든 할 수 있어가 진실(당신이 돈이 있다면)을 앞에 숨기고 있었던 것처럼, 핫팬츠와 탱크탑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늘씬한 미녀들이 외치는 건 자 이제 우리 여자들도 입고 싶은 걸 입고 허벅지를 내놓고 거리를 활보하겠어. 가 아니라 너도 이걸 입고 싶지? 그렇다면 살을 빼. 싫다면 평생 청바지에 박스티만 입고 다니렴. 이 뚱뚱하고 못생긴 게으른 돼지야! 라는 것.

 

마른 여자들의 파라다이스를 강요하는 이 사회에선 모두 불행하다. 뚱뚱한 애는 뚱뚱하니 불행하고 마른 애는 내가 영원히 마른 애라는 보장이 없으니 불행하다.말라도 불행하고 뚱뚱해도 불행하니 몸뭄게 따위 무시하고 행복해지는 길을 택하면 되지만 그래 그게 맞는 데. 알지만 무시가 안됀다.

 

누가 나에게 뚱뚱하고 행복해지겠냐 마르고 불행해지겠냐 묻는다면 난 분명히 마르고 불행한 길을 선택할 거다. 애시당초 뚱뚱하고 행복해진다는 말을 믿지 않거든.

 

내가 여자아이로 태어난 이래 언제 어디서나 마른몸=행복한 삶, 뚱뚱한 몸=불행한 삶의 신화가 내 한 손을 꼬옥 잡고 놔주질 않는데 내가 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지? 믿더라도 내 한 손을 잡은 벌레같은 놈이 날 놔주지 않아서 난 그리로 갈 수가 없는 걸. 난 벗어날 수 없고 불행하고 두려울 꺼야. 그러니 날씬하기라도 해야겠어.

 

2004년 대한민국에 사는 여자애한테 몸무게란 이런 거다.

 

 

 

 

윤선혜(nearlyg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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