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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다시 읽는 조선여인열전(3) - 논개(論介) 1탄

2004.9.2.목요일

딴지 역사부


 돗자리가 한때 짝사랑했던 여인









논개 영정. 친일화가 김은호의 작품이란다.


중딩 2학년 때였으리라. 당시 국어교과서에 실린 변영로의 시 <논개>를 읽고 가슴 짠했던 기록이 새록하다. 너무나 유명한 이 대목...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조국을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는 만고의녀(萬古義女) 논개! 왜 그리도 시리도록 아름답던지... 얼굴도 나이도 모두 꽃다웠으리라는 막연한 선입견까지 보태지니 시공을 초월하여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참고로... 알퐁스 도데의 <별>에 나오는 하이디도 사랑했고... 피천득의 <인연>에 나오는 아사코도 사랑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녀를 내 기억에서 다시 끌어낸 건 80년대 초반 반짝 떴던 가수 이동기의 <논개>였다. 기억들 나시나?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떠내려간 그 푸른 물결 위에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빌었던 빌었던 그 사랑 영원하리


머리가 크고 팔다리가 짧았던 그의 열창 덕분에 한때나마 논개 열풍이 불었었다. 곰방 팍싹 꺼지긴 했지만...


아름다운 건 아름답게 남겨놓는 게 좋다. 근데도 돗자리, 한때 짝사랑했던 여인 논개를 둘러싼 이런저런 아름다운 얘기에 딴죽을 걸려 한다. 결론부터 까놓자. 논개가 왜군 한 넘(그넘이 장수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졌다는 것 빼고 나머지 이런저런 얘기는 모두 안 믿는다. 그치만 이것만 갖고도 논개는 여전히 아름답다. 이런저런 윤색과 과장, 미화가 없어도 그녀는 아름답기만 하다. 그래서 이런저런 딴지를 걸면서도 그녀에게 별로 미안하지 않다.



  윤색과 과장, 미화의 결정판, 논개의 최후


언젠가 어느 독자분의 지적대로, 역사라는 건 시간이 흐르면서 적당히 빠다가 발라지기 마련이다. 밋밋한 사료에 약간의 기름기가 덧붙여지면 훨씬 맛깔스러워진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다. 돗자리가 아는 한, 논개야말로 가장 많은 빠다로 떡칠이 된 대표적 인물이다. 우리가 아는 논개는 원형과 너무나도 달라져 있다. 설마설마 하며 사료와 연구를 디벼보던 돗자리, 그 빠다의 양과 질에 새삼 몸서리를 친다. 왜놈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든 것 자체만 갖고도 논개는 만고의녀가 되기에 충분한데 왜 그토록 분칠을 해대는가.


그녀에 대한 얘기가 어떻게 분칠 되어왔는가는 정동주, <논개>(한길사, 1998)와 김수업, <논개>(지식산업사, 2001)에 잘 드러나 있다 아, 경성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 편, <논개 사적 연구>(신지서원, 1996)에도 좋은 논문들이 많이 실려 있다. 사실 이 책들로부터 돗자리 엄청 도움을 받았다. 여기저기 흩어진 자료들을 모아 정리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치만 돗자리 주장이 이분들과 똑같진 않다. 곧 죽어도 남이 해놓은 얘기 똑같이는 하기 싫으니까.



  <백과사전>엔 어케 나오나


우선 인터넷 <백과사전>을 디벼보니 논개에 대해 일케 나오네.


조선 선조 때 기생. 성은 주(). 전라북도 장수(長水) 출생.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왜장들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베풀고 있을 때 왜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순국했다. 그녀의 순국사실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됨으로써 문자화되었고, 그녀가 순국한 바위는 진주사람들에 의해 의암(義巖)이라 불리었다.(<다음>)


성 주(). 전북 장수(長水) 출생. 진주병사(晋州兵使) 최경회(崔慶會)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며,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 6만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왜장들은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였다. 기생으로서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전사한 장군들의 원한이라도 풀어주고자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네이버>)









논개가 왜놈을 안고 떨어졌다는 의암. 빠지면 죽는다는데 너도나도 올라간다.


요것들을 섞어 정리하면, 조선 선조 때 진주병사 최경회의 사랑을 받던 장수 출신 기생 주논개가 진주성이 함락된 뒤 촉석루에서 열린 주연에 참석해 술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꾀어 바위에 올라가 손가락 마디마디 반지를 낀 채 껴안고 남강으로 떨어져 함께 죽었단 거다. 돗자리도 이 글 쓰기 전까진 대충 글케 알고 있었다.


근데 웬걸... 이런저런 자료 뽀개다 보니 온갖 의심이 용암처럼 솟구치네. 솔직히 돗자리... 논개가 진주성 함락된 뒤 왜군(왜장이 아니라)을 껴안고 바위에서 남강으로 뛰어내렸다... 요 것 말곤 못 믿겠다. 즉, 논개가 장수 출신이었는지, 주씨였는지, 기생이었는지, 촉석루에서 주연이 열렸는지, 함께 죽은 넘이 왜장 게야무로 로구스케였는지, 아님 누군지 모르는 왜장이었는지, 그 넘이 술 취했었는지, 그 넘이랑 춤을 췄는지, 논개가 손가락 마디마디 반지를 끼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자료가 없거나, 있는 자료라도 믿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때 논개 나이 꽃다운 20세였다는 건 더더욱 그렇다. <백과사전>에 나온 내용말고도 별별 희한한 얘기들이 여기저기 떠돈다. 어케 시신을 건졌는지 논개 무덤도 있고, 어떤 근거로 찾았는지 논개 생가도 있다. 햐~ 정말 재주도 좋다.



  <어우야담>에 나오는 논개의 최후


논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유몽인의 <어우야담>(1621)이다. 그녀가 죽은 게 1593년이니 그로부터 28년이나 지난 뒤 나온 책이다. 그치만 이게 그나마 가장 빠른 기록이다. 더욱이 유몽인은 사건 난 이듬해 진주 사람들로부터 직접 논개의 최후에 대해 들은 듯 하다. 이에 대해 정동주, <논개>, 151쪽에는 담처럼 나와 있다.


(유몽인은) 1594년 삼도순안어사가 되어 삼남지방 곳곳을 두루 살펴보게 되었다. 이때 그는 진주 사람들을 위무하기 위해 세자 광해군을 수행하여 진주에도 들렀는데 진주에 머물면서 진주성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논개의 얘기를 듣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책은 한참 지나 나왔지만 그 얘기를 들은 건 훨씬 빠르단 거다. 글타고 그 내용이 정확하단 뜻은 아니나, 우야튼 당시 진주에서는 논개를 일케 알고 있었단 점이 중요하다. <어우야담>의 내용은 담과 같다.


논개는 진주 관기다. 만력 계사년(1593) 김천일 의병부대〔倡義之師〕가 진주에 들어가 머물며 에 항거했다. 성이 함락되고 군대가 패배하고 인민이 모두 죽자 논개는 화장과 단장을 하고 촉석루 아래 우뚝한 바위 위〔?巖之巖〕에 서 있었다. 그 아래는 ... ①여러 [群倭]가 (논개를) 보고 기뻐했으나 아무도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는데, ②오직 한 一倭〕가 갑자기 앞으로 나오니, 논개가 웃으며 그를 맞았다. ③가 그녀를 유인하려 하니〔倭將誘而引之〕, 논개가 마침내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곧바로 물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論介者 晋州官妓也 當萬歷癸巳之歲 金千鎰倡義之師 入據晋州 以抗倭 城陷軍敗 人民俱死 論介凝粧?服 立于矗石樓下?巖之? 其下萬丈卽入波心 群倭見而悅之 皆莫敢近 獨一倭挺然直進 論介笑而迎之 倭將誘而引之 論介遂抱持其要 直投于?】.  


자. 디벼보자. 우선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들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베풀었단 얘기 없다. 논개가 춤췄단 얘기도 없다. 글고 논개가 그넘을 꼬셔서 바위에 올라간 게 아니라, 바위에 올라가 꼬시니 그 넘이 건너온 거다. 더욱이... 논개가 끌어안고 같이 죽은 넘이 왜장(倭將)이란 얘기도 없다. 텍스트엔 위의 ①~③에서 보듯이 그냥 그 넘이 왜()라 나올 뿐이다.


헉, 근데... ③의 원문 倭將誘而引之에 분명 왜장(倭將)이 나오네. 왜장이 그녀를 유인하니라 해석하면 안 될라나? 안 된다. 여기서 은 장수가 아닌 장차~하려 하니로 해석해야 한다. 만약 장수로 해석하면 어케 되냐고? 일케 된다.


오직 한 가 갑자기 앞으로 나오니, 논개가 웃으며 그를 맞았다. 倭將이 그녀를 유인하니, 논개가 마침내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주어가 앞 문장에선 倭였다가 뒷 문장에선 倭將이 된다? 문법적으로 틀릴 건 없다만, 빼어난 문장가인 유몽인의 글이라곤 믿기지 않게 어색해진다. 글고 倭를 유인한 건 논개다. 왜장이 그녀를 유인해서 논개가 마침내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내용이 맞지 않는다. 倭는 논개를 바위 위에서 끌어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진 못한 거다.



  <양곡집>에 나오는 논개의 최후


<어우야담>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오두인의 <양곡집>(1651)에 실려 있는 「의암기」다. 이 기록 역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왜냐면 논개에 대한 기록으론 두 번째로 빠른 것이며, 그가 1651년 진주에 갔다가 직접 그 곳 사람들에게서 들은 얘기이기 때문이다.


근데 그 내용이 유몽인의 <어우야담>과 삐까삐까하다. 뭔 뜻인가? 논개에 얽힌 얘기는 50여 년 동안 별로 달라진 게 없단 거다. 글탐 <어우야담>과 <양곡집>의 내용이 가장 원형에 가깝다고 할 것이며, 그 원형이란 실제 있었던 사실과 비슷하다 해도 좋을 것이다. 담은 <양곡집>의 내용이다.


그때 관기 논개가 적과 더불어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서하고 죽기를 (고향에) 돌아가듯 생각하여 단장과 치장을 하고 표연히 이 바위 위에 서 있으니, ①여러 들〔衆倭〕이 (그녀를) 바라보고 기뻐하나 그 위태함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는데, 홀연히 ②한 一倭가 앞으로 나와 ③(왜가 그녀를) 꾀어 (바위에서) 나오게 하려 하니〔將誘以出〕기녀가 거짓으로 미소짓고 그를 맞았으며, 마침내 그 倭를 끌어안고 강에 몸을 던졌다.【時有官妓論介者 誓不與賊俱生 視死如歸 凝粧服 飄然特立乎 此巖之上 衆倭望見而悅之 懼其危而莫敢近 忽有一倭挺身直進 將誘以出 妓乃佯笑而迎之 遂抱持其倭投江】.


이 기록에선 약간의 애교스런 오바가 나타난다. 논개가 적과 더불어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서 했다는 부분이 그것이다. 대체 제3자가 그걸 어케 알 수 있나(이런 어설픈 윤색이 오히려 사료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여기서도 ③의 원문 將誘以出에 나오는 장() 역시 倭將이 아니라 장차~하려 하니의 뜻이며, 將誘以出의 주어는 다. 그래도 을 왜장으로 보면 안되냐고? 함 해보자.


이 (논개를) 꼬셔서 (의암에서) 나오게 하니〔완료형〕 (논개)가 거짓으로 웃으며 그를 맞았다


이게... 말이 되냐. 이미 의암에서 나왔는데 어케 의암에서 떨어지냐.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해석이다. 글탐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죽었단 건 아직 증거가 없는 셈이다. 근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함께 죽은 넘이 왜장인 건 물론이고, 그 이름까지 이넘저넘 알려져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넘이 게야무로 로구스케〔毛谷村六助〕라네(위의 <네이버>에서도 글케 나왔다). 그치만 돗자리 이거 전혀 못 믿는다. 왜 그러냐고? 쫌만 지둘려주시라.


암튼 <어우야담>과 <양곡집>이야말로 논개의 최후에 대한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이다. 물론 워낙 축약된 내용이라 생략된 부분도 적지 않았으리라. 글타고 해서 섣불리 첨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근데 요 기록들에선 우리가 흔히 들어온, 앞의 <백과사전>에 나오는 내용들이 안 보인다. 논개가 장수 출신의 주씨였다는가, 촉석루에서 주연이 열렸다던가, 함께 죽은 넘이 취했다든가, 같이 춤을 췄다던가, 논개가 손가락 마디마디 반지를 끼고 있었다든가 등등 말이다. 이거 좀 수상쩍지 않나. 뻔하다. 후대 사람들이 기름칠해댄 거다. 아니, 거의 뺑끼칠 수준이다. 어쩜 이리도 뻔뻔스레 뻥을 쳐댔을까. 뭐 문학적 상상력이라면 할 말 없지만...


그럼 논개는 어떤 과정을 거치며 어케 윤색되었을까. 담탄에서 그거 살펴보자. 근데 이번 <논개 편>도 한참 끌을 것 같네. 워낙 디빌 게 많아서다. 만만한 인물 하나도 없구나. 하기사... 그래야 돗자리가 깐죽댈 건덕지도 있을 거 아닌가.



 



딴지 역사부
돗자리(e-rigby@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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