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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열전] 맹모삼천지교는 없다

2004.4.18.일요일
딴지 역사부


 떴다~ <맹부삼천지교>


돗자리가 열나 좋아하는 조재현씨 주연 <맹부삼천지교>가 절찬리 상영중이라네요. 영화를 안봤으니 뭐라 할 말 없습니다만 대박 터졌으면 좋겠어요.


맹부삼천지교는 당근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즉 맹자 엄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3번 이사했다는 그 얘기에서 따온 제목이겠죠. 오늘은 그걸 갖고 테클 걸어보렵니다.


결론은 간딴시럽습니다. 맹모삼천지교는 누군가 꾸며낸 썰이라는 겁니다. 오해 마세요. 썰이라고 가치가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의미있는 썰도 얼마나 많은데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 얘기를 사실로 믿고 있기에, 그건 아니라는 점만 까발리려는 겁니다. 이런 게... 돗자리 전공 아닙니까.
 


 최근 맹자 엄니에 대한 자료가 나왔대요


<중앙일보> 2004년 1월 16일자를 보니 이런 기사가 실려 있네요.






맹자(孟子)의 76대 후손에 의해 2002년 12월 랴오닝[遼寧]에서 <맹씨가보(孟氏家譜)>가 발견됐다는 소식도 뒤늦게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이 맹씨 족보에는 산둥[山東]성 쩌우[]현에 보관돼온 맹자 생존 당시의 고향 그림을 비롯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일화를 낳았던 맹자 모친의 행적, 맹자의 모습 등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와~ 맹자 엄니의 언행에 대한 기록은 정말 드뭅니다. 맹자 엄니 성()조차 확실치 않다네요. 그런 판국에 이런 기깔난 자료가 나왔다니 가슴이 뜁니다(과연 학술적 가치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돗자리, 아직 이걸 못봤습니다. 어떻게 찾아야 할 지도 모르겠고요. 이것만 있어도 쓸 꺼리가 참 많아질텐데 아쉽네요. 그러니 우선은 기존에 알려진 내용과 자료만 디빌 수밖에요. 죄송~
 


 백과사전에 나오는 내용


인터넷에서 맹모삼천지교를 검색하면 네이버·다음·엠파스 <백과사전> 항목에서 똑같이 이렇게 나올 겁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뜻으로,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그 환경이 중요함을 가리키는 말. 전한(前漢) 말의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烈女傳)>에서 비롯된 말이다. 맹자(孟子)는 이름이 가(軻)로,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에서 멀지 않은 산둥성 추현(鄒縣) 출신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어머니 손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현명한 사람으로 아들 교육에 남달리 관심이 많아 단기지교(斷機之敎)의 일화를 남긴 분이다.


맹자가 어머니와 처음 살았던 곳은 공동묘지 근처였다. 놀 만한 벗이 없던 맹자는 늘 보던 것을 따라 곡(哭)을 하는 등 장사지내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이 광경을 목격한 맹자의 어머니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이사를 했는데, 하필 시장 근처였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맹자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장사꾼들의 흉내를 내면서 노는 것이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곳도 아이와 함께 살 곳이 아니구나 하여 이번에는 글방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 그랬더니 맹자가 제사 때 쓰는 기구를 늘어놓고 절하는 법이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법 등 예법에 관한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맹자 어머니는 이곳이야말로 아들과 함께 살 만한 곳이구나 하고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노력으로 맹자는 유가(儒家)의 뛰어난 학자가 되어 아성(亞聖)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맹자 어머니는 고금에 현모양처(賢母養妻)의 으뜸으로 꼽히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자녀교육에 있어서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어린이들이 얼마나 순진무구한가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과사전>이라면 그래도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어중간한 평가는 되도록 빼야 하고요. 하지만 이 항목은 별로 그렇지 못하네요. 우선 중대한 오자(誤字)가 있습니다. 이 얘기가 실려 있는 책은 <烈女傳>이 아니라 <列女傳>입니다. 여러 여인들 얘기라는 뜻이지요. 뭐 그 중에는 열녀(烈女)도 많습니다만 탕녀(蕩女)나 음녀(淫女)도 여럿 있습니다. 그러니 <烈女傳>이라 하면 안됩니다.


또 "놀 만한 벗이 없었다"는 대목은 텍스트에 없습니다. 그리고 현모양처(賢母良妻)가 여기서 왜 나오나요. 뭐 맹모가 현모(賢母)라는 건 일단 그렇다 칩시다. 그렇지만 남편은 나오지도 않는데 대체 뭘 보고 그녀가 양처(良妻)였다고 하는지요. 현모는 무조건 양처입니까. 우모양처(愚母良妻)나 현모악처(賢母惡妻)는 없을까요. 그리고 이 얘기가 "어린이들이 얼마나 순진무구한가를 암시"한다고요? 글쎄요. 단순무식이라면 모를까...









책이랑 칼 들고 이사가는 맹자와 엄니



 맹자 아빠는 언제 돌아가셨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맹모삼천지교 얘기는 맹자가 어릴 때 아빠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걸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맹자가 알라 때 상황을 담고 있는 텍스트는, 유향이 지은 <열녀전>과 조기(趙岐)가 지은 <맹자제사(孟子題辭)>에만 나옵니다.






추나라 맹가의 어머니는 맹모라 불렸다. 그 집이 묘지 근처에 있었다. 맹자가 어렸을 때…【鄒孟軻之母也 號孟母 其舍近墓 孟子之少也】(<열녀전>)


맹자는 나면서부터 좋은 자질을 갖고 있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서 자모(慈母)의 삼천지교(三遷之敎)를 받았다.【孟子生有淑質,夙喪其父,幼被慈母三遷之敎】(<맹자제사>)


유향(BC 77∼6)은 전한(前漢) 때 사람이고 조기(AD 109∼201)는 후한(後漢) 때 사람이니 조기는 유향의 <열녀전>을 봤겠지요. 그런데 <열녀전>에는 맹자 아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언급이 없는데, <맹자제사>에서는 아예 죽은 걸로 단정하고 있군요.


그러면 맹자 연구자들은 이걸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맹자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디따 많은데, 그의 생애에 대한 연구는 헙빠 적네요. 돗자리가 그 방면 전공 아니라서 못찾은 거겠지만, 꼼지락대며 찾아낸 게 겨우 다음 몇 개입니다. 이 책들에서는 모두 맹자가 어릴 때 아빠가 죽었다고 나옵니다.






① 曹堯德, <孟子傳>(河北: 花山文藝出版社, 1992) ⇒ "4세: BC 386년. 周安王 16년. 맹자는 추나라에 있었다. 이 해 아버지를 잃고【是年喪父】어머니의 삼천(三遷)·단기(斷機)의 가르침을 받았다(<열녀전>에 따름). 사실 삼천·단기의 가르침은 1년 사이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479쪽)


② 안길환, <孟子傳>(서울: 명문당, 1993) ⇒ "조기의 <맹자제사>가 해설한 것처럼 맹자는 이미 어렸을 때, 아버지를 의의고 홀어머니 손에서 자라났다."(46쪽)


③ 양구오롱(이영섭 역), <맹자평전>(서울: 미다스북스, 2002) ⇒ "맹자는 귀족의 후손이다. 하지만 그가 아직 어렸을 때,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맹자와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는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16쪽).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네요. <열녀전>이나 <맹자제사>보다 사료적 가치가 훨씬 높은 <맹자>에 나오는 다음 대목 때문입니다.






노나라 평공(平公)이 외출하려 하니, 총신 장창(倉者)이 말했다.


장창: "다른 때는 임금이 나가시려면 반드시 담당자(有司)에게 가실 곳을 명하시더니, 이제 수레에 이미 멍에를 매었는데, 담당자가 가시는 곳을 알지 못하니, 감히 알려주시기를 청하나이다."


평공: "맹자를 만나려고 한다."


장창: "무엇 때문입니까? 왕께서 몸을 낮추시고 필부에게 먼저 가시는 것은 그가 어질다고 여겨서 입니까? 예의(禮義)는 어진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맹자는 어머니 상례(喪禮)를 아버지보다 더 후하게 지낸 사람입니다【孟子之後喪踰前喪. 君無見焉】. 왕께서는 만나지 마십시오."


평공: "그러마."
 


악정자(樂正子)가 들어와서 말했다.


악정자: "임금께서 어찌하여 맹자를 만나보지 않으십니까?"


평공: "어떤 사람이 과인에게 말하기를, 맹자가 어머니 상례를 아버지 보다 더 후하게 지냈다고 하여서 가보지 않았노라【或告寡人曰 孟子之後喪踰前喪 是以不往見也】."


악정자: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께서 더 후하게 지냈다고 하시는 것은 아버지 때는 맹자가 당시에 선비였으므로 선비의 예로써 했고, 그 뒤의 어머니 때는 대부였으므로 대부의 예로써 했으며, 전에는 삼정(三鼎)의 제물을 썼고, 뒤에는 오정(五鼎)의 제물로 했다고 해서입니까【何哉君所謂踰者? 前以士, 後以大夫; 前以三鼎, 而後以五鼎與】?"


평공: "아니다. 관곽(棺槨)과 수의(壽衣)가 좋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악정자: "그것은 지나쳤다고 할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맹자의 빈부가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맹자> 양혜왕장구 하)


대충 어떤 스토리인지 아시겠습니까? 모르시면... 다시 읽어보세요. 이해가 되신 걸로 치고 바로 테클 들어갑니다. <맹자>에 실린 위의 대화는, 맹자가 어릴 때 아빠를 여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왜냐굽쇼?









맹자


(1) 만약 맹자가 알라 때 아빠가 죽었다면, 장례를 후하게 치렀든 박하게 치렀든 그건 맹자 책임이 될 수 없습니다. 알라가 뭘 압니까. 아빠 죽었을 때는 박하게, 엄마 죽었을 때 후하게 장례 치렀다고 맹자에게 문제삼는 것은, 아빠 죽었을 때 맹자가 이미 어른이었다는 뜻입니다.


(2) 평공에게 맹자를 만나지 말라고 부추긴 장창은, 맹자가 부모 장례를 어떻게 치렀는지 알고 있었나 봅니다. 만약 맹자가 어릴 때 아빠가 죽었다면, 몇 십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후하다 박하다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우리 할아버지 4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 장례 치렀을 때 후했는지 박했는지를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또 장창은 맹자가 어릴 때 같은 동네에 살았을까요.


(3) 악정자의 말에 따르면, 맹자는 아빠가 죽었을 때는 선비(), 엄마가 죽었을 때는 대부(大夫)였다고 합니다. 국사시간에 신흥사대부=학자적 관료 어쩌구 할 때 들으셨겠지만, 아빠가 죽었을 때 맹자는 관직이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설마 어린 알라를 선비()라고 불렀겠습니까?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신 분도 계십니다. 이 분의 생각은 제가 꼽은 이유 (3)과 같네요.






여러 전적(典積)에서 자료를 모아 편찬한 이 책(주: <열녀전>)에는 민간에 유포되던 전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창작도 물론 들어 있습니다. 충격적으로 들리시겠지만, 지금 우리가 살펴본 맹모삼천의 이야기는, 어르신네들이 들으면 펄쩍 뛸 얘기지만 역사적으로는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입니다. 떠도는 소문을 실은 것이 아니면 유향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중략)… 지금 고사는 맹자가 아주 어렸을 때, 보다 구체적으로는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맹자>라는 책에는 맹자가 다 커서 사(士)라는 하급 관리를 지내고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린 맹자를 이끌고 시장바닥을 전전하는 맹모삼천의 고사는 사실일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원문을 보려면 여길 누질르시라).


결국 맹자가 어릴 때 아빠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배우고 자랐다는 얘기는 근거가 얄짤시리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맹자가 어른이 될 때까지 아빠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네요.


그러면 이렇게 반격할 분도 계시겠지요. 아빠가 있든 없든 맹모삼천지교는 가능한 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교육열에 불타서 이사다니는 엄마들이 모두 미망인은 아닐테니까요. 어쩌면 맹자 아빠는, 똘똘한 부인 때문에 평생 기죽어 산 띨띨한 남편일 수도 있겠죠. 마치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처럼 말입니다. 어쨌든 맹자 아빠가 살아 있었다면 가정의 대소사(大小事) 결정권은 엄마에게 있었던 듯 하네요. 이 경우 여필종부(女必從夫)나 삼종지도(三從之道)에는 어긋나게 되는데... 뭐 제 알 바 아닙니다. 저야 뭐 맹모삼천지교 자체가 허구라고 보니까요.
 


 텍스트를 디벼봅시다.


자, 이제 맹모삼천지교의 텍스트를 디벼봅시다. 맹모삼천지교의 텍스트인 <열녀전>은 몇 개의 번역본이 있습니다. 제가 참고한 건 이숙인 번역, <열녀전-중국 고대의 106여인 이야기>(예문서원, 1996)입니다. 물론 원문도 함께 나옵니다. 이 책에서 역자는 맹모삼천지교 얘기를 후대에 꾸며진 걸로 보고 있네요. 이렇게 말입니다.






맹자 어머니에 관한 고사는 <열녀전>에서 처음으로 나오고 맹자 당시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맹모의 자식 키우기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열녀전>은 사실 그대로를 옮긴 것이라기보다, 실제 인물들이 활동한 시대보다 훨씬 후대에 저자의 상상력으로 각색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맹모에 대한 고사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녀 교육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위의 책, 11쪽).


요컨대 <열녀전>이란 책 역시 그다지 믿을 게 못된다는 거네요. 어찌됐든 이제 <열녀전>에 실린 맹모삼천지교 텍스트의 내용을 <백과사전>과 비교해봅시다(맹자가 뭘하고 놀았나 부분의 <열녀전> 번역은 여기를 보고 옮겼습니다. 실력이 쫄리다 보니, 의역하기가 어려워서요).











































 


 


첫 번째 거주지


두 번째 거주지


세 번째 거주지


어떤 곳이었나?


백과사전


공동묘지 근처


시장 근처


글방 근처


열녀전


묘지 근처[其舍近墓]


시장 근처[乃去舍市傍]


학궁 근처[復徙舍學宮之傍]


맹자가 뭘하고 놀았나?


백과사전


곡을 하는 등 장사지내는 놀이를 하면서 놀다.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꾼들의 흉내를 내면서 놀다.


제사 때 쓰는 기구를 늘어놓고 절하는 법이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법 등 예법에 관한 놀이를 하다.


열녀전


어린 맹자는 묘지에서 하는 상여꾼들 흉내를 내며 발을 구르고 널을 묻는 놀이를 하고 놀았다.[孟子之少也 嬉遊爲墓間之事 踊躍築埋]


물건을 파는 장삿군들의 흉내를 내며 놀았다. [其嬉戱爲賈人衒 賣之事]


제기(祭器)를 배열하고, 예(禮)를 갖추어 인사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의식들을 흉내내며 놀았다. [其嬉遊乃設俎豆揖讓進退]


맹모가 어떻게 했나?


백과사전


안되겠다 싶어서 이사를 하다


아이와 함께 살 곳이 아니구나 하여 이사를 하다


"이곳이야말로 아들과 함께 살 만한 곳이구나" 하고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살다.


열녀전


맹모가 말하기를, "이곳은 아들을 데리고 살 만한 곳이 아니구나"라 했다 → 이사


[孟母曰 此非吾所以居處子也].


맹모가 또 말하기를, "이곳도 아들을 데리고 살 만한 곳이 아니구나"라 했다 → 이사


[孟母又曰 此非吾所以居處子也]


맹모가 말하기를, "정말 이곳은 아들을 데리고 살 만한 곳이구나"라 했다 → 정착


[孟母曰 眞可以居吾子矣 遂居之]



 서당 근처에 살며 글읽기 흉내를 냈다고요?


맹모삼천지교 얘기는 맹자가 아직 취학 연령이 되기 이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글을 배웠다는 언급이 없으니까요.


텍스트에 나오는 첫 번째 거주지, 묘지 근처입니다. 아마도 공동묘지 근처였을 것 같군요. 맹자가 이런 흉내를 낸 게 한두번이 아닌 듯 싶으니까요. 전쟁이 나거나 염병이 돈 건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맹자, 짱구처럼 시체놀이도 했겠지요. 맹자 엄니가 무슨 이유로 거기로 이사간 건지 모릅니다만, 집값 문제가 아니라면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두 번째 거주지, 시장 근처입니다. 요새 같으면 좋은 입지 조건입니다만 그렇지 않은 걸 보니 당시 상업을 천시했었나 보군요.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이런저런 책에서 읽은 그대로입니다.


문제는 세 번째 거주지입니다. <백과사전>에선 글방으로 나오는데, 텍스트에 나오는 학궁(學宮)은 글방, 즉 서당과 다릅니다. 하지만 우선 학궁은 서당과 다릅니다. 우리로 치자면 향교를 뜻합니다. 그러니 맹꽁이서당 정도로 생각하면 안되지요.


그리고 <백과사전>에 나와 있듯이, 맹자가 따라한 건 글 읽는 게 아니고 제사와 예법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어릴 때 읽으셨던 대부분 책에 나오는, 맹자가 글방 근처에 살면서 글을 따라 읽었다는 그 얘기는 전혀 근거가 없네요. 아마도 제사 지내는 법을 배웠다고 알라들한테 얘기하는 게 좀 거시기해서 달리 꾸며낸 거겠지요.
 


 이천(二遷)인가 삼천(三遷)인가


칠전팔기(七顚八起)란 말이 있습니다. 뭐 홍수환 선수의 사전오기(四顚五起) 신화도 생각나네요. 그런데 7번 넘어졌는데 어떻게 8번 일어나나요? 이거 정말 궁금합니다. 한번 해보세요. 이게 정말 가능한지요. 처음에 서 있는[] 상태는 일어난[] 게 아니지요. 7번 넘어지면 끽해야 7번밖에 못일어납니다.


하지만 뭐 그만큼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거라고 넘어가도 되겠지요. 사람은 입이 하나고 한번 죽지만 "입이 열 개라도..." "백번 죽더라도..." 라고 흔히 말하듯 말입니다.









맹자의 생가라는데... 장담은 못함


하지만 삼천지교는 경우가 다릅니다. 삼천(三遷)이라 했으면 이사를 3번 갔어야 합니다. 하지만 텍스트를 보면 묘지 근처 → 시장 근처 → 학궁 근처, 즉 2번 이사갔습니다. 묘지 근처에서 시장 근처로 이사간 것은 거사(去舍), 시장 근처에서 학궁 근처로 이사간 것은 사사(徙舍)라고 나오니 분명하지요. 하지만 원래부터 묘지 근처에 살았던 건지,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 묘지 근처로 이사온 건지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맹자가 묘지 근처의 집에서 태어나 줄곧 거기서 살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곳이 반드시 맹자의 출생지여야 할 이유는 없다는 말입니다. 출생지에서 바로 묘지 근처로 이사왔을 수도 있고, 몇 차례 이사를 하다 묘지 근처로 왔을 수도 있겠지요.


문제는 그 경우라도 이사의 목적이 맹자의 교육을 위해서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맹자 엄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묘지 근처로 이사왔다는 점이 밝혀져야 합니다. 그래야 삼천지교의 첫 번째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런저런 이유로 이사 다닌 횟수 전부를 포함시킨다면 여러분 엄니 중 삼십천지교하신 분도 있을 겁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나


그런데 유향이 지은 <열녀전>에는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삼천란 말조차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요. 앞서 나온 조기의 <맹자제사>에서입니다. "맹자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서 자모(慈母)의 삼천지교(三遷之敎)를 받았다"【孟子 生有淑質 夙喪其父 幼被慈母三遷之敎】는 대목에서 자모삼천지교=맹모삼천지교가 비롯된 셈이지요. 그리고 이후 별다른 비판 없이 그대로 이 말을 따라 쓰게 된 겁니다.


앞서 말했듯이, 맹자가 어릴 때 아빠를 잃었다는 얘기도 이 책에만 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봤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조기의 <맹자제사>는 오히려 맹자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책이라 해도 되겠네요.
 


 맹자의 어머니는 매∼앵하셨나


맹자 엄니가 아들 교육 위해 3번 이사다닌 건 과연 사실일까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사를 가려면 먼저 답사를 하고 나서 마음에 들면 계약을 하고... 뭐 그리고 나서 가는 게 정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분은 일단 갑니다. 그러다 "여기가 아닌가벼" 해서 다시 짐꾸리고 이사를 갑니다. 그리고 또 "여기도 아닌가벼" 한 거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 엄니께서 이렇게 하셨다고 칩시다. 주위에서 좋은 소리 못들으실 겁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거의 이 수준 아닙니까. 자식 교육에 관심을 쏟는 거 자체야 백번천번 좋은 일이지만, 치마바람 여부를 떠나, 이건 좀 미련스럽지 않나요. 이 정도면 맹자 엄니라기 보다는 맹구 엄니 아닙니까. 현실성이 전혀 없다고나 할까요. 재산이 얼마나 넉넉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무대뽀로 이사다닐 정도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맹모삼천지교의 색다른 해석


인터넷을 보니 맹모삼천지교에 대한 색다른 해석도 있네요. 이 해석을 인용한 다른 글도 본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군요.






맹자의 어머니를 가르켜 아주 지혜롭고 훌륭한 어머니라고합니다. 맹모삼천지교란 말도 그래서 생겨난 말입니다. 그런데 지혜있는 여인이 왜 처음부터 맹자를 서당이 있는 곳에 가서 키우지 않고 공동묘지가 있는 곳에서 살았을까요? 그리고 다음에는 시장으로, 마지막에는 서당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까? 그녀는 진정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까?


진정 그녀가 지혜 있는 여인이었다면 3번씩이나 이사를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처음부터 무조건 학문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인생을 가르쳐 참사람의 길을 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맹자를 데리고 공동묘지로 가서 가난한 자, 부요한 자, 있는 자, 없는 자, 권력을 가진 자, 못가진 자 누구나 사람은 다 죽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죽음을 알고 난 후에 그녀는 맹자를 데리고 시장에 갑니다. 그곳에서 인생의 사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의 삶을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인가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죽음을 알고 난 사람에게 생존경쟁이라는 것은 어쩌면 무익한 것인지 모릅니다. 죽을 줄도 모르고 아귀다툼을 하고 내일을 알지 못한 채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참사는 것일가를 궁금해하고 고민하면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아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서당에 왔을 때 진정 학문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 학문을 통하여 인생이 참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연구하고 연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삶은 죽음을 아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알 때 진정한 삶을 살게 됩니다. 막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다 사람답게 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월남뽕 같은 해석이십니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모두를 깡그리 뭉갰으니까요. 이 글 쓰신 분... 정말 맹자 엄니가 이런 목적에서 이사를 다닌 게 "지혜 있는" 거라면, 어린 자녀들 있으시면 그렇게 해보세요. 얼마나 약빨이 먹힐런지요. 고시촌 주변에 사는 알라들은 모두 공부 잘하겠네요. 텍스트에 나오는, "이곳은 아들을 키울 만한 곳이 아니구나【此非吾所以居處子也】"라는 대목은 대체 어쩌구요. 이사 다니는 게 무슨 <체험 삶의 현장>입니까.
 





세상만사가 당연히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알라들 키우고 싶어도 그렇지 못한 부모들이 더 많습니다. 형편이 안되면 어쩌겠습니까. 강남 8학군 좋다고 하지만 아무나 갈 수 있습니까. 누구는 좋아서 공동묘지 근처에 살까요. 좋아서 산동네 달동네 사는 분 얼마나 있겠습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맹모삼천지교가 썰이냐 아니냐를 떠나, 자칫하면 그 얘기가 묘지 근처나 시장 근처에 사는 알라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알라들한테 이 얘기를 해주려면, "옛날에는 상업을 어쩌고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보충설명도 곁들여주는 게 좋겠지요. 자칫하면 묘지 근처나 시장 근처에 사는 엄니들이 입장 난처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라나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맹모삼천지교는 그런 환경이 되지 않는 알라나 엄니들한테 자칫하면 상처를 주는 얘기가 아닐런지요.


맹모 말고도 우리는 현모(賢母)로 한석봉 엄니와 이율곡 엄니를 꼽습니다. 이 두 분도 나중에 한번 테클 걸 겁니다. 한석봉 엄니, 그 유명한 불 끄고 떡 써신 얘기... 출처 아시는 분 연락 간곡히 바랍니다. 그리고 출처가 있다 해도... 불 끄고 떡 써는 거 하고 글씨 쓰는 거... 정말 어떤 게 더 어려울까요. 이율곡 엄니에 대해선 하고 싶은 말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참습니다. 언젠가 그 날을 위해... 아껴둬야죠.


 
딴지 역사부
돗자리(e-rigb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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