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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복학생

2004-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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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 복학생


2004.7.15.목요일
딴지 생활부



며칠 전 학교 후배 녀석들과 술자리가 있었다. 전부 최근에 복학한 시커먼 넘들로 오죽 놀아줄 사람이 없으면 졸업한 남자선배 불러낼 만큼 불쌍한 넘들이다. 그 중 한 넘이 내내 똥씹은 표정을 하고 있길래 궁금하던 차였는데, 사연인즉슨 군대 가기 전 사귀었다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여자친구가 딴 넘과 날짜를 잡았댄다. 순간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한 마디.


야 너도 복학생 됐구나


머리 속에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이 웅웅거리며, 눈앞의 풍경이 몇 년 전의 대학촌으로 바뀐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서울 근교 캠퍼스들이 으레 그러하듯 내가 다닌 학교의 대학촌도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기묘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군대 가기 전만해도 논두렁 사이로 고갈비 굽는 냄새가 진동하던 판자촌 실비집과 문을 열면 눈 앞에 논밭이 펼쳐지는 - 아마 추정컨대 전국 유일의- 락카페가 공존했던 곳이 그 곳이었다.


내가 후배넘의 아픈 사연을 듣고 복학생과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을 동시에 연상한 건 우연이 아니다. 요절가수의 아우라를 능가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냐마는 내게 있어 사랑했지만은 김광석이 아니라 복학생만의 온전한 몫으로 남겨져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왜 그가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그토록 퍼 먹어야 했는지,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이끌고 온몸이 진흙범벅이 된 채 논두렁을 헤집고 다녀야 했는지, 울먹임을 넘어 거의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로 악다구니를 쓰며 사랑했지만을 불러야 했는지 말이다. 떠나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었든, 멀어져가는 청춘에 대한 아쉬움이었든, 스러져가는 한 시대의 종말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든, 사랑했지만은 그렇게 오직 복학생들만을 위한 노래로 오롯이 남아있었던 거다.


몇 년 후 내가 복학생이 되어 학교로 돌아왔을 때, 논두렁은 아스팔트로 깨끗하게 포장되었고, 판자촌 실비집은 모두 헐리고 매끈한 새 건물들이 들어섰다. 더 이상 빠질 진흙 구덩이도 없는데, 같이 복학한 동기넘들이 하나둘 사랑했지만을 부르기 시작한다. 그때 나도 그 노래를 불렀던가. 정확한 기억은 없다. 다만 내가 그것의 의미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한 게 한참 후의 일이란 것 밖에.


떠나가는 청춘에 대한 아쉬움을 담은 노래로 흔히 서른 즈음에를 떠올린다. 20대는 영원한 청춘의 상징이기에. 근데 뜬금 없이 이런 생각을 해본다. 생물학적 20대가 문학적 청춘을 지시한다면, 적어도 한국남자들에게 있어서 복학생은 실제적 청춘의 마지막 시기를 지시하는, 일종의 인디언썸머 같은 게 아닐까 하는생각 말이다.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은 했으되, 아직 예비역으로의 존재이전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마지막 남은 청춘의 유예기간이랄까.


군대를 갔다 온 후 학교에 복학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새로운 학교생활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신입생 때의 그것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거다. 아울러 복학 후 그를 맞는 것이 대개의 경우 신입생 때보다 더 난감한 상황이란 것도.


군대 가기 전 내가 사랑했던 여자의 옆에 나 아닌 누군가가 있거나, 남모르게 가슴앓이를 했던 여자 동기가 이미 졸업을 하고 행적조차 묘연하거나, 한때의 청춘을 불살랐던 한 시대의 열정이 이미 죽은 개가 되어 버려져 있거나... .


바로 이 때가 사랑했지만과 병나발이 조우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걸로 그의 인디언썸머도 막을 내린다.


신입생 시절의 풋풋함으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어정쩡한 복학생으로 계속 남아있을 수도 없는 그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기 때문이다. 잠시잠깐의 머뭇거림을 뒤로 한 채 이제 그는 복학생에서 예비역이 된다. 야상과 오토바이와 족구와 예비군 훈련이, 군대 가기 전 까먹었던 학점의 복구와 기성사회 진입을 위한 빡센 경쟁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


종종 흘러나오는 예비역들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에 내가 마냥 웃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 있다.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 게 대견해서가 아니다. 학점관리와 취업준비로 평소엔 도서관에서 살다가, 도서관을 나와서는 지들끼리 몰려다니며 기껏해야 음담패설과, 축구얘기와, 군대얘기로 소일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를 동의는 못해도 이해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도 외롭다. 죄가 있다면 군대에서 이미 사회의 냉정함과 부조리를 먼저 체험했다는 것일뿐. 그들에게 복학생 시절은 꿈에서 현실로 내려오는 사다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가끔 학생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복학할 무렵이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청춘의 가장 빛나던 순간만큼이나, 그것의 소멸을 지켜보는 순간의 고통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가 훗날 이영애를 기억하는 건 첫 만남의 가슴 떨림 보다도 자신에게서 하염없이 멀어져 가던 그 모습이었을 게다.


후배넘은 여전히 똥씹은 표정으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근데 씨바 왜 난 그 녀석이 부러운거냐고?



 


신짱(redpia@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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