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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피튀기는 중세 유럽 전쟁사 - 1066년 (下)

2003.9.22.월요일
딴지 군사부

모두들 추석 잘 보내셨습니까? 지난 두 시간에서는 오늘 펼쳐지는 전투의 배경과 그들이 사용했던 물건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이번 장의 중심이 되는 전투가 펼쳐집니다. 숨을 고르고 천천히 진격해 봅시다.
 






제 자신의 앞날이 얼마나 험할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해롤드는 북부 영주 에드윈 형제의 누이, 에디스(Edith)와 결혼하고, 요크(York)까지 찾아가서 형제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했다. 새로이 왕비가 된 에디스는 웨일즈의 군주 그루피드의 미망인으로, 전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남자를 이제 남편이라고 부르며, 결혼한 지 1년도 안돼서 쌍둥이도 낳는다. 사실 해롤드에게는 자식을 5명이나 안겨줬던 에디스 스완넥(Edith Swanneck, 백조처럼 목이 길었나 보다.)이라는 실제로는 부인이나 다름없던 여자가 있었지만, 이런 사태를 대비하여 공식적으로 결혼하지 않았다. 정략결혼은 해야 하고, 종교 때문에 이혼은 힘들고.. 참으로 고달픈 귀족의 삶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제 그는 각지에 첩자를 뿌리고, 전대미문의 대병을 소집시켜 놓고 , 올테면 와봐라!! 체제로 들어갔다.
 


 1차 방어전, 스탬포드 브릿지




잉글랜드를 빠져 나온 후, 플랑데아에 머무르다가 윌리엄한테도 찾아가고, 이 곳 저 곳에도 찾아 들어가서 빌어먹을 해롤드를 깨 먹자면서 설치고 다녔던 토스티그가 와이트 섬(Isle of Wight)에 짠! 하고 나타났다. 그는 5월부터 배 60여척과 함께 여기 저기를 약탈하며 북상했다. 토스티그가 샌드위치(Sandwich)를 지날 무렵, 해롤드는 동생의 출현을 보고 받았다.


"전하! 동생 분께서 배 100여척을 이끌고 남부 해안을 약탈하고 있다 하옵니다."


"뭐!! 토스티그 그 망할 놈이 왔어? 근데 꼴랑 100척? 아냐, 뒤에 뭔가가 더 있을 거야... 그놈이 돌아 다닌 데만 몇 군덴데.. 북쪽으로 가고 있다고? 그렇군. 윌리엄 이 잡종새끼. 내가 속을 줄 아냐. 이거 유인작전이다. 함대 출동 시켜, 남부 해안에 철통 경비망을 펼쳐라!! 그리고 에드윈 형제에게 급전 땡겨,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 우리 처남들 솜씨를 한 번 봐야지."


해롤드 자신도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얼마 안 있어, 에드윈 형제에게 격파당한 토스티그가 스코틀랜드로 도망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편 노르망디에서는...


"...이러한 절차로 해롤드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백부(참회왕 에드워드)께서는 저 윌리엄에게 왕위를 약속하시었고, 해롤드는 저의 이 권리를 목숨을 바쳐 지키겠다고 맹세를 하였던 자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된 약속을 깨버리고, 교황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스티간드라는 가짜 대주교에 의해 대관된 이 거짓 왕 해롤드를 주님의 이름으로 응징하고, 우리들의 권리를 되찾읍시다."


회의장에 모인 여러 귀족들은 술렁였다.


"맞소!! 상처받은 우리들의 저력을 보여줍시다! 말을 전장에서 부리지도 못하는 저 허약한 색슨 놈들은 우리 상대가 안됩니다. 공작님은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이 질파듀스(Gilfadus)가 해롤드놈을 한칼에 보내버리겠습니다."


"어허, 여러분, 여러분, 제가 한마디 하겠소이다. 공작, 공작은 이 원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생각을 해 보셨소? 바다를 건너 적진에 들어가겠다니, 우리 목을 색슨놈들에게 갔다 바치겠다는 말이오!! 우리는 바다를 건너서 까지 공작을 따를 책무는 없소이다!!"


"경은 우리 공작님 밑에 계신 지가 몇 년 짼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공작님을 모르시는 겁니까? 아님 겁이 너무 많으신 겁니까? 공작님께서는 벌써 교황님과 덴마크 왕 스웨인의 협조도 약속 받으셨습니다. 나라는 안정되어 있고, 주변 나라들도 우리와 가까운데 무엇이 겁이 난단 말입니까? 벌써 브리따뉴와 프랑스, 플랑데아의 몇몇 귀족들은 자기들도 끼워 달라고 안달입니다. 저 잉글랜드 땅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조금만 힘을 모은다면 우리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좋은 기회는 다시 없을 것입니다."


"경은 꿈에서 깨어나시오!! 냉정하게 생각을 해 보시란 말이오. 해협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그 많은 배는 다 어디서 구한단 말이오? 아무런 교두보도 없는 섬에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원정을 위해 들어가는 물자는 얼마나 되는지 계산이나 해 보셨소? 공작님,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적지 않은 귀족들이 원정을 반대하고 나섰다. 윌리엄은 일단 회의를 해산하고 모두 돌려보낸 후, 하나하나 직접 찾아다니면서 모두 구워 삶았다.


 


살이 따사로운 여름, 8월 초의 디브스유메아(Dives-sur-Mer)에는 몰려드는 병사와 물자로 북적거렸다. 게다가 말을 실을 배를 새로 만드느라, 주변의 숲에서는 나무꾼의 도끼질 소리가, 조선소로 마련된 곳에서는 목수의 톱, 망치질 소리가 끊임 없었다. 군사 8000여명이 머무르면 참 많이 먹고 싸기도 하고 말썽도 피운다. 하지만 윌리엄의 병사 관리, 보급, 오물처리가 철저해서 주변 주민들의 피해가 없음은 물론이고, 어떠한 질병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이렇듯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게 준비된 상태였지만 윌리엄의 출동명령은 좀처럼 내려지지 않았다. 일반 병사들이야 도박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면 그만이었지만, 말 조련하는 이들은 전마(戰馬)들의 상태를 최상으로 계속 유지시키느라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더욱이 재미난 사실은, 해롤드의 첩자가 주둔지를 염탐하다 붙들려오자 윌리엄은 주둔지 곳곳을 찬찬히 보여주고는 그를 순순히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윌리엄은 이것을 기다린 것이리라. 9월 8일에 벌어진 해롤드의 함대와 군대 해산. 6월부터 잉글랜드 남동부 해안을 촘촘하게 순찰하느라 분주했던 이 함대는 평상시 동원기간을 훨씬 넘긴 상태였다. 금세 올 것만 같았던 윌리엄은 디브에서 세월아 내월아...하고 있고. 병사들은 지니고 왔던 식량도 다 떨어졌고 추수도 해야 한다며 집에 보내 달라고 아우성이니, 결국 해롤드도 더 이상 그들을 데리고 있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을 떠나 보낸 뒤, 용병들과 직속 가신들만 조촐하게 데리고 런던에 앉아서,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윌리엄을 한번 개 박살을 내 줘야 하는데.. 만 되풀이하고 있을 때, 전령 하나가 헐레벌떡 궁정으로 뛰어들어왔다.


"전하, 바이킹이 떴습니다!!"


위풍당당 북해를 넘은 하드라다는 리콜(Riccall)에 함대를 정박시키고, 요크(York)를 먹기 위해 진군했다. 스코틀랜드에서 병사를 모으고 있던 토스티그도 쪼르르 달려와 합류했다. 연초에 보여준 해롤드의 각별한 애정에 보답하기 위해, 에드윈 형제는 또다시 출동하여 게이트 풀포드(Gate Fulford)에 진을 치고 하드라다를 기다렸다. 9월 20일 두 군대는 격돌했다. 하드라다 부대 좌익은 강에, 우익은 강과 평행한 도랑에 섰다. 하드라다는 강 부근에 그의 초토화 갈가마귀 깃발을 세우고, 최강의 전사들을 둘렀다. 초반에는 색슨 병사들이 바이킹 우익을 밀어 내는데 성공했지만, 하드라다에 의해 고무된 바이킹 전사들은 색슨 군대를 깨 버렸다. 수많은 색슨 병사들이 도망치다가 강이나 습지에 빠져 죽었지만 에드윈 형제는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에드윈 형제의 패배 소식을 전해들은 요크 사람들은 즉각 백기를 내걸었다.


9월 25일 아침, 군대의 재정비를 위해 리콜로 돌아와 있던 하드라다는 약속한 인질과 식량을 받기 위해 요크로 출발했다. 얼마 안되는 군사에 가벼운 차림이었다.


무거운 갑옷은 배에 내 버려두고, 방패는 등 뒤로 매고 투구는 한 손에 쥐고, 털레털레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가던 병사 하나가 말했다.


"여, 대장, 저기 지평선이 반짝반짝 한 것이, 꼭 우리고향 얼음판이 햇빛 받은 것 같지 않소?"


"그러게, 고향생각 나누만. 쩝, 근데 여는 가을에 얼음판 안생기는 데잖아. 어이, 너, 잽싸게 가서 자세히 좀 보고 와라. 뭔지 되게 궁금하다 야."


명령받은 병사는 한참을 가서 둘러보더니, 헐레벌떡 뛰어오기 시작했다.


"대장!! 쌕쓴 놈들이 몰려 오고 있소!! 무쟈게 많쏘!!"


상상도 못했던 해롤드가 나타난 것이었다. 황급히 재동원한 군대가 적당히 모이자마자 출발한 해롤드는 로마가도를 타고 5일동안 300킬로미터를 주파하여 타드캐스터(Tadcaster)에서 하룻밤 머물고, 방금 요크를 지나왔다. 놀란 하드라다는 바로 앞에 보이는 다리에 얼마간 병사를 박아놓고, 리콜로 전령을 보내고, 뒤의 평원에다가 진을 쳤다.


"전하, 안되겠습니다. 다리에 서 있는 저 커다란 바이킹은 인간이 아닙니다. 벌써 우리 편 장사 열댓 명이 고꾸라졌습니다."


"으이구 이 돌탱아, 그냥 꼼수 써! 지금 정정당당 따질 때냐."




다리를 지키던 바이킹들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던 색슨 병사들은 결국 배를 이용, 다리 밑에서 사타구니를 찔러 거인을 물리치고 다리를 건넜다. 그 순간에도 하드라다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곳에 병사들을 모아놓고 원형 방어 진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의 파란 튜닉(tunic)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호통을 쳐댔다. 해롤드의 군대는 그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정면돌파로 나왔다. 바이킹들은 죽기 살기로 버텼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하드라다는 칼을 양손으로 쥐고 휘두르며 색슨 병사들을 척살했다. 결국 날아온 화살에 목이 뚫리고, 입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색슨 병사들이 달려 들었다. 한참 후 증원병이 도착하고, 오리(Orri)와 그의 병사들은 땅 바닥에 구르던 하드라다의 초토화 갈가마귀 깃발을 다시 들고 미친 듯이 싸워 색슨 병사들을 약간 주춤 하게 만들지만, 너무 급하게 뛰어와서 쉽게 지쳐 버리고 만다.


바이킹은 패주하고, 색슨은 도망치는 바이킹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토스티그의 시신 역시 전장에 누워 있었다. 리콜에 정박해 있던 300여척 중 24척만이 잉글랜드를 떠날 수 있었다. 바이킹의 놀라운 용맹에 색슨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지만 요크에 모여서 승리를 만끾했다.


"형님의 전광석화와 같은 진격에 의한 기습작전!! 저는 이렇게 멋진 대승은 본 적이 없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일입니다. 자, 모두 해롤드 대왕을 위해 건배!!"


"와하하하, 레오퓐(Leofwin), 너무 비행기 태우는 것 아니냐, 내가 좀 멋지게 이기기는 했지. 바이킹이 별거더냐, 우리가 짱이다! 움화화화, 먹자, 먹자꾸나."


해롤드와 측근들이 한참을 이렇게 놀고 있는데, 전의 그 전령이 또 다시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해롤드는 흠칫 했다.


"전하, 이번에는 노르만입니다요!!"


"아이 씨발, 왜 갑자기 한꺼번에 몰려오고 지랄이야. 야, 전부 빨랑 짐싸!!"
 


 2차 방어전, 헤이스팅스




윌리엄은 바닷가에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해협을 건너기엔 딱 좋은 날씨였다. 2주전에 해협을 건너려 했다가 거센 서풍에 떠밀려 이곳, 쎙발레리스유쏨(ST-Valery-sur-Somme)으로 오면서 잃은 배 몇 척이 다시 생각났다. 이번에는 모두 무사하도록 주님께 기도했다. 지금 그의 옆에서는 선원들이 다시 돛을 올리고, 말, 보급품을 싣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가 명령한 출항지시에 모두 부지런히 잘 따라주고 있었다. 9월 27일 저녁, 북과 나팔, 피리 소리가 바다에 울려 퍼졌고, 병사들을 가득 실은 배들이 차례로 항구를 빠져나갔다. 병사들의 마음에는 처음 밟아볼 잉글랜드란 곳에 대한 두려움과, 큰 원정인 만큼 승리 후에 따라올 보상에 대한 기대가 교차되었다. 다음 날 아침, 공작부인 마틸다(Matilda)가 이름 지었다는 기함 모라(Mora)는 피븐지(Pevensey) 만 앞에 도착했다. 아직 다른 배들은 보이지 않았다.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그와 측근들은 로오옹(Rouen)의 궁정에서 먹던 것처럼 거창한, 와인까지 포함된 아침 식사를 마쳤다. 속속 배들이 도착했고, 상륙이 시작되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궁수들이 제일 먼저 바닷가에 내렸다. 그들은 활시위를 먹이고선 주위를 노려보았다. 그 다음 무장한 기사들이 배를 떠나 주변을 탐색했다.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보급품과 말이 내려지고, 근방에 있던 로마 성벽을 활용한 진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윌리엄이 해안으로 뛰어내리다가 그만 앞으로 자빠지고 말았다. 그의 옆에 있던 기사 한 명은 병사들이 나쁜 징조라고 여길까봐 잽싸게 외쳤다.


"오, 주군은 방금 잉글랜드를 품에 안으셨습니다. 이제 잉글랜드는 주군의 것입니다. 아니 이제 전하라고 불러야 하나요?"


 


체없이 런던으로 돌아온 해롤드는 윌리엄의 움직임을 보고 받았다. 피븐지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헤이스팅스(Hastings)로 이동하고 성을 쌓아 기지로 삼은 뒤에,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고드윈 집안의 발상지인 서섹스(Sussex) 지역이 집중적으로 털리고 있다는 소리에 해롤드는 탁자를 부셔 버릴 뻔했다. 또한 병력 재동원을 명령해 놓았던 남부 지방 영주들로부터 일이 그다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으며 특히 숙련된 궁수 수급에 차질이 있다는 보고도 올라왔다. 해롤드는 측근들을 모았다.


"노르만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특히 그들의 기병은 가공할 돌파력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적의 규모는 하드라다보다 더 많은 10000명 정도라고 보고 되고 있다. 모두, 의견을 기탄없이 말해보도록 하라."


"시간을 끄시는 게 상책인 줄 아옵니다. 조금 전에 출발한 우리 함대는 적의 보급선을 문제없이 차단할 것입니다. 지들이 먹을 것이 떨어지면 어쩌겠습니까? 게다가 조금만 더 있으면 서부, 북부의 지원병들도 도착할 것입니다. 병력은 많을수록 유리합니다. 그리고 9월 20~24일에 걸친 강행군, 25일의 전투, 10월 2~6일에 걸친 또다른 강행군으로 지친 병사들을 쉬게 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번 싸움에서 예상외의 타격을 입은 궁수들도 염두에 두십시오"


"안됩니다! 형님, 되도록 빨리 윌리엄의 목을 따야 합니다. 그놈은 지금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고 있습니다. 왜 그런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고드윈 가문에 불만을 가진 영주들이 생각 외로 많습니다. 특히 형님이 아무런 혈연없이 왕위에 올랐다고 더합니다. 윌리엄은 지금 그들을 포섭하고 있을 것입니다. 전왕 에드워드께서 데려온 대륙출신 영주들은 더욱 안심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윌리엄에게 정보와 식량 등을 지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건 재앙입니다. 그리고 형님께서 걱정하실 게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병사들이 있습니다. 노르만 놈들을 겁낼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 색슨의 용맹은 방금 전에 또 한번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형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렸을 적 뛰놀던 그 마을이 불타고 있습니다. 형님이 가장 아끼시는 그 백성들이 집을 빼앗기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들을 구해 주어야 합니다. 형님."


레오퓐의 긴 연설이 끝나고,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해롤드도 길게 침묵했다. 해롤드의 표정이 여러 번 바뀌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레오퓐, 준비를 해라. 닷새 후에 떠난다."


"안됩니다, 형님!! 이번은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기일을 늦추십시오. 정 안된다면 형님은 여기 가만히 계십시오. 이 동생 거쓰(Gyrth)가 레오퓐과 함께 가서 윌리엄 놈을 때려 잡겠습니다."


거쓰의 말에 해롤드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스탬포드 브릿지의 승리를 재현하기로 마음 먹었다.


 
헤이스팅스 축성, 서섹스 지방 약탈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게 마음 먹은 데로 풀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13일의 금요일 밤, 해롤드는 윌리엄의 주둔지로부터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거대한 사과나무 밑에 도착했다. 여러 지방 영주들도 이곳, 집결지로 속속 도착했다. 방금 나타난 한 영주가 말했다.


"전하, 오던 중에 만난 주민들에 의하면 노르만은 오늘도 약탈을 나갔다 왔다 합니다."


"오, 좋은 소식이군. 그럼 피곤할 테지. 오늘 밤 지옥을 보여주지. 조금만 기다려라."


그 순간 윌리엄의 주둔지로 보냈던 정찰병이 돌아왔다.


"전하!! 급보이옵니다. 노르만의 주둔지에는 화톳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으며, 병사들은 하나같이 무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 장수가 병사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기습은 물 건너 갔다고 판단한 해롤드는 한숨을 쉰 뒤, 야영을 명령했다.


 


음날 아침, 노르만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해롤드는 생각해 두었던 곳에 진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곳은 병목지형으로 된 언덕으로, 좌우로 경사가 심하고 게다가 그 아래로 나무 덤불이 펼쳐져 있어 측면 공격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가파른 오르막은 기병의 돌격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가로 700미터에 이르는 12겹 1자 방어 진을 짰다.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웨섹스(Wessex)왕조의 용 깃발과, 해롤드 개인의 싸우는 사람 기치가 섰다. 바람이 불어 용이 물결치고 있을 때, 노르만 군대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교황이 보내준 성 베드로의 머리카락이 감겨있는 깃발을 앞세우고, 맨 앞줄은 활, 석궁, 돌팔매와 같은 원거리 무기 보병, 둘째 줄은 보병, 마지막 줄에는 기병이 포진했다. 좌익은 브리따뉴, 우익은 기타 프랑스 병사들, 중앙에는 윌리엄을 포함한 노르만 병사들이 섰다. 이 전투에 참가한 해롤드 쪽 전투병력은 왕의 두 동생 레오퓐과 거쓰, 직속가신 500을 포함한 8000여명, 윌리엄 쪽에는 브리따뉴 병사 2000, 프랑데어를 포함한 기타 프랑스 병사 1500, 노르만 병사 4000, 합이 7500여명이었다. 날은 화창하고 건조했다.


병사들의 전의를 끌어올리는 나팔소리가 양쪽에서 울려 퍼지고, 윌리엄은 손동작으로 귀족들에게 진격을 명령했다.


"디이누우제다하아!! (Dieu nous Aideras!! 신이 우리를 도우신다.)"


함성과 함께 노르만 보병들은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궁수들이 쏜 화살이 색슨 방패들을 향해 날아갔고 색슨 쪽에서는 투창과 손도끼가 날아왔다. 화살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해롤드는 이런 방어 진에 꼭 필요한 궁수들을 끝내 시간 맞춰 모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색슨 뒤 열에서 날아오는 것들을 뚫고 방어 벽에 도달한 노르만 병사들에게는 도끼, 쇠몽둥이, 칼 등이 "오울리 크로오쓰!! (Holly Cross, 성 십자가), 고더마잇!! (God Almighty, 전능한 신이여), 웃!웃! (Out, Out, 꺼져 새끼들아)"소리와 함께 덮쳐왔다.


첫 번째 격돌을 지켜본  윌리엄은 이 싸움이 쉽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가 의도했던 적 방어 벽의 균열은 생기지 않은 상태였지만, 기병 돌격을 지시했다. 노르만이 자랑하는 기사들은 그들의 잘 훈련된 말과 하나가 되어 색슨 방어 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해롤드의 선구안에 의해 잘 골라진 이 언덕은 색슨에게 엄청난 이득을 제공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온 기병의 돌격력은 휴지 조각에 불과했으며, 높은 곳에서 완전히 힘을 실어서 날리는 양손 도끼 공격은 방패고 갑옷이고 간에 아무 상관없이 적을 빈사상태로 보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만 기사들은 적의 방어 벽을 뚫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창을 잃으면 칼이나 쇠몽둥이를 들고, 말을 잃으면 보병으로 변하여 열심히 두들겨 댔다. 점차로 색슨 방어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뒤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노르만 좌익인 브리따뉴 병사들 쪽으로 서서히 전진하는 것이었다. 거리를 두고 공격하던 노르만 석궁수와 궁수들도 삽시간에 최전선으로 몰려 버렸다. 좌익의 움직임에 동요한 중앙까지 뒤로 막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공작이 죽었다!!"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병사들은 썰물처럼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병사들을 진정시키려 호통을 쳐 댔지만 걷잡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말 위로 몸을 크게 일으키고, 투구를 뒤로 넘기고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살아있다!! 도대체 무엇이 너희들을 겁나게 하느냐? 이렇게 도망치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는단 말이냐? 신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승리는 우리 앞에 있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병사들이 주춤 했다. 오도 주교(Odo the Bishop of Bayeux, 이하 오도)를 비롯한 여러 귀족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사들을 나무랐다. 윌리엄과 그 측근들은 앞서서 다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공작을 따르라는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병사들은 다시 전의에 불타 올랐다. 벌써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오른쪽 끝은 투구를 들어올리는 윌리엄, 왼쪽 끝은 병사들의 사기를 조율하는 윌리엄의 씨다른 동생 오도. 이 시기에 전장에 참여하는 성직자의 임무는 병사들의 물과 음식에 축복을 내리는 것은 물론, 전투에 같이 나가 전의를 돋구고, 접근하는 적에겐 서슴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윌리엄과 병사들은 먼저 브리따뉴 병사들을 쫓아 내려온 색슨 병사들을 정리했다. 그들은 대오를 깨고 나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다. 다시금 색슨 1자 방어 벽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한참 전투 중에, 어디선가 날아온 창이 윌리엄의 말을 꿰뚫었다. 능숙하게 낙법을 쳐서 위기를 빠져 나온 윌리엄은 창을 던진 적병을 발견하고는, 울부짖는 사자처럼 달려들어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한 측근이 금세 달려와 자신의 말을 내어줬다. 윌리엄이 전투 중에 잃어 버린 말이 3마리나 되었다. 양쪽 모두 앞만 보고 정신없이 싸우는 것을 감지한 윌리엄은 또다시 귀족들에게 손동작으로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명령을 이해한 귀족 몇은 자신의 병사들을 이용하여 거짓 퇴각을 연출했다. 방패를 등에 매고 전선을 이탈하는 노르만 병사들이 여러 군데에서 목격되었다. 후퇴하는 듯한 노르만 병사를 쫓아서 아무 생각없이 따라 나온 색슨 병사에게는 좌우에서 동시에 칼이 날아들었다. 그래도 색슨 방어 벽은 뒤에서 끊임없이 보충되는 병사들로 메워졌다. 해는 서서히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윌리엄은 대오를 재정비하기 위해 병사들을 조금 뒤로 물렸다. 그에게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롤드야 이대로 날이 저물고 퇴각하면 곧바로 병력 보충이 가능하지만, 자신에게 남는 건 하나도 없다. 잘못하다가는 공작 자리가 위험할 수도 있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지쳐 보였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무기를 하루종일 휘두른다는 게 쉬운 일인가? 하지만 윌리엄은 아직도 이들의 힘이 필요했다. 때마침 진지로부터 새 화살이 공급되었다. 귀족들은 한번 더 병사들을 격려했다. 모두 투구를 고쳐 쓰고 무거운 발을 띄었다.


해롤드는 지쳐있었다. 주변의 병사들도 숨을 헐떡였다. 아직 진형은 유지되고 있지만. 두터웠던 벽은 많이 얇아졌고, 두 동생 레오퓐과 거쓰는 벌써 전장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다시 노르만 궁수들의 화살이 날아오고, 기사들은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들어 왔다. 이를 악물고 그들을 떨구어내 보지만, 방어 벽에는 점차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퍽 소리가 났다. 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해롤드는 눈을 만져봤다. 화살이었다. 뽑아 보려고 화살을 쥐는 순간 가슴이 화끈 달아올랐다.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왕의 죽음을 지켜본 몇몇 병사들은 즉각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전장을 이탈했다. 이런 빈틈을 노린 노르만 병사들이 비집고 들어왔고, 거의 모든 지휘관을 잃은 색슨은 수습될 방안도 없이 밀렸다. 웨섹스의 용 깃발은 꺾여져 버렸고, 해롤드의 기수는 깃발을 내던지고 도망 갔다.


 


후, 윌리엄은 천천히 런던으로 진군했다. 색슨은 에드가를 왕으로 세우고 저항의 몸부림을 쳤지만, 그 해 크리스마스, 노르망디 공작 사생아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 왕 정복자 윌리엄 1세로 왕관을 받았다. 황금과 여러 귀한 광물로 장식되었던 해롤드의 싸우는 사람 깃발은 교황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싸움은 끝났습니다. 대단원의 막은 내렸지만 우리는 아직도 궁금한 것이 많지요. 다음 편에는 의문과 그에 대한 설명이 있겠습니다.



 
딴지 군사/역사/국제부
런던고양이밥(drom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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