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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니그로 리그 이야기

2003.9.22.월요일
딴지 야구부

- 니그로 리그의 대표적인 스타들


 루브 포스터 (Andrew Rube Foster)









감독 루브 포스터. 어째 백인천이랑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포스터는 원래 명투수이기도 했지만(1902년에는 44연승이라는 믿어지지 않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선수로서의 경력보다는 1920년부터 수행한 니그로 리그의 커미셔너 역할로 더욱 유명하다. 흑인야구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그는 메이저리그에 필적하는 수준의 흑인야구 리그를 만들고 싶어했고, 결국 1920년 NNL을 창설하며 그 꿈을 이뤘다.


당시 그는 니그로 리그의 커미셔너이자,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의 감독 겸 구단주이기도 했다. 그가 1910년부터 이끌었던 아메리칸 자이언츠는 흑인야구역사상 최고의 팀 가운데 하나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포스터는 투수출신답지 않게 빠르고 공격적인 스타일의 야구를 추구했는데, 이것이 니그로 리그 초창기 흥행성공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메리칸 자이언츠는 1920~1922시즌 NNL을 제패하며 니그로 리그 초창기의 최강팀으로 군림했다.









커미셔너답게 점잖게 차려입은 포스터


한편 커미셔너로서의 포스터는 현명한 독재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팀간 전력균형을 맞추기 위해 스타들을 약팀으로 보내고, 재정적으로 어려운 팀에는 자금을 융통하는 등의 중대사안들을 대부분 독단적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니그로 리그 창설과 발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그에게 감히 토를 달 사람은 당시로선 아무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오지랖이 지나치게 넓었던 탓일까. 1926년경부터 그는 정신건강상의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된다.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NNL이 심각한 재정적 위기를 겪게 되었으나, 포스터는 이를 병석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이 거구의 텍사스인은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그 이듬해, 포스터가 세운 오리지널 NNL은 파산하였다.


오늘날 흑인야구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포스터의 공로는 1981년 명예의 전당 헌액을 계기로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 한가지 유감스러운 사실은, 니그로 리그 감독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인물은 아직까지 포스터뿐이라는 것이다.


 


 새첼 페이지 (Leroy Satchel Paige)


니그로 리그 최고의 투수로 현재까지 기억되고 있는 새첼은 만화주인공으로 써먹기에 딱 좋은 캐릭터를 지닌 인물이다. 행크 아론, 어니 뱅크스 등 많은 스타를 배출해낸 앨라배마주 모바일(Mobile)에서 태어난 새첼은 고교졸업후 모바일 지역의 세미프로팀에서 데뷔했는데, 그의 강속구와 컨트롤이 다른 팀에 소문이 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27년 NNL에 진출한 새첼은 얼마 후 니그로 리그를 완전히 평정하게 된다. 피츠버그 크로포즈 소속이던 1932년과 1933년에는 각각 32승 7패와 31승 4패의 성적을 올렸으며, 당시로서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드물었던 4만달러의 연봉을 받았다고도 전해진다. 1934년 시즌이 끝나고 나서는 빅리그 선수들과의 시범경기를 벌였는데, 여기서 새첼은 디지 딘(Dizzy Dean)과 6차례 맞대결을 벌여 4승을 따냈다. 1942년 캔자스시티 모낙스에서는 당대의 최강팀 홈스테드 그레이스를 맞아 니그로 월드시리즈에서 혼자 3승을 거두는 대활약을 보이며 팀의 우승을 견인하였다. 그가 20여년간의 니그로 리그 생활에 걸쳐 작성한 노히트게임만도 55경기에 달한다.









니그로 리그 시절의 무적투수 새첼


그의 활약이 워낙 인상적이다 보니, 확인할 길 없는 온갖 소문이 난무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이런경기 저런경기 다 합쳐 무려 105경기에 등판했는데, 그중 그의 소속팀이 승리를 거둔 것이 104게임이라는 확인 불능의 소문까지 돌았다(정말 경악스러운 것은, 이 소문이 아직까지도 꽤 신빙성있는 자료들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소문까지 돌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 당시 새첼의 인기가 워낙 대단하다 보니 그가 소속된 팀은 그를 한 게임이라도 더 등판시키려고 안간힘을 썼고, 성격 좋은 낙천가였던 새첼은 그 요구에 번번이 응했던 것이다.


게다가 오프시즌 중에도 쉬지 않고, 멕시코, 도미니카공화국, 베네수엘라 등지의 리그를 전전하며 부수입을 챙겨댔으니 등판횟수는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었을 터. 제대로 된 통계가 없어 그가 정확히 몇 경기에 등판했는지는 파악할 수 없으나, 2500경기(!!!) 정도는 되리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단일리그에서 세운 기록이 아님을 유념해둘 필요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기록의 무식함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무시무시한 강속구에, 상상을 초월하는 연투 자라나는 꿈나무 투수들에게는 정말이지 절대 권해주고 싶지 않은 활동양상이다. 이렇게 엄청난 혹사를 당했다면 선수생명이 길지 못했기가 쉽겠지만 천만의 말씀. 그는 1948년 만 42세의 나이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계약하며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빅리그 최고령 신인기록을 세우게 된다.









늘그막에 빅리거가 된 새첼


그의 빅리그 경력은 니그로 리그 시절 못지않게 놀랍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아무래도 볼의 스피드는 예전같지 않았지만, 컨트롤은 여전히 핀포인트급이어서 불펜투수로 활용가치가 높았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소속이던 1951년, 45세가 된 그는 12승을 올리며 팬들을 감동시켰고, 이듬해에는 올스타에 선정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은퇴한지 12년이 지난 1965년의 어느날, 그는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의 커튼콜을 받았다. 결국 59세의 새첼은 어슬레틱스 유니폼을 입고 1게임에 등판, 3이닝을 투구하며 빅리그 최고령 출전기록을 세웠다. 이 징하게 길었던 선수생활의 추억을 새첼은 [난 영원히 공을 던질 거야(Maybe Ill Pitch Forever)]란 제목의 자서전에 담았다.


조 디마지오(Joe DiMaggio)가 "내가 아는 가운데 최고의 강속구를 가진 투수"라며 탄복했고, 디지 딘이 "그와 내가 한팀이었다면, 우린 7월쯤에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해 놓고 월드시리즈 때까지 낚시나 다니면서 편히 놀 수 있었을 것이다"라며 아쉬워했던 이 불가사의한 대투수는 1971년, 니그로리거 자격으로는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리고 평화로운 말년을 보내다 1982년 눈을 감았다.


 


 조시 깁슨 (Josh Gibson)


새첼이 만화주인공이라면, 니그로 리그 최고의 타자이자 포수인 깁슨은 가장 중요한 조연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장수만세/인간승리의 표본인 낙천가 새첼에 비해, 과묵한 성실파였던 깁슨의 삶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비극적이었다(참고로 이 두사람은 30년대 초반 피츠버그 크로포즈에서 배터리를 이루기도 했다). 물론 깁슨도 새첼 못지 않은, 어쩌면 그 이상의 능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깁슨은 1930년(20년대 후반이라는 설도 있다) 홈스테드 그레이스에서 니그로 리그 캐리어를 시작했는데, 그 경위가 매우 황당하다. 사연인즉슨, 어느날 경기도중 그레이스의 주전포수가 부상을 당해 게임에서 빠질 수밖에 없게 되자 인근 세미프로팀에서 황급히 공수되어 나머지 게임을 치른 땜빵포수가 바로 깁슨이었다는 것이다. 이 경기에서 깁슨은 주전포수 못지않은 기량을 과시했고, 곧바로 그레이스의 정식선수가 될 수 있었다.









The Black Babe Ruth


이후 깁슨의 활약은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했다. 그는 1931년에만 무려 75개의 홈런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피츠버그 크로포즈 소속이던 1933년에는 137게임에서 55개의 홈런과 .461의 타율을, 또한 1943년에는 .521의 타율을 마크했다는 믿기 힘든 기록도 있다. 생애통산 홈런은 823개라는 설과 962개라는 설이 교차하며, 생애통산타율에 대해서도 .347이라느니 .373이라느니 .391이라느니 설왕설래가 심하다. 한번은 깁슨이 양키스타디움의 좌측펜스를 넘기는 장외홈런을 쳤는데, 대부분의 관중들이 그 홈런의 비거리에 대해 580피트는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니그로 리그의 기록체계가 워낙 부실하다 보니, 그 모든 얘기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깁슨은 빅리그 팀들과의 시범경기에서 총 60타석에 .426의 타율과 5개의 홈런을 기록하였는데, 당시 그가 상대한 투수들은 디지 딘, 자니 밴더 미어(Johnny Vander Meer) 등 당대의 고수들로 꼽히던 인물들이었다. 빅리그 역대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는 월터 존슨(Walter Johnson)은 그런 깁슨에 대해 "깁슨이 치는 공은 1마일이라도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최고의 포수이기도 하다. 빌 디키(Bill Dickey)조차도 그만큼 좋은 포수는 못된다"는 극찬을 늘어놓기도 했다. 당시 깁슨에게는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Black Babe Ruth라는 닉네임 외에, 특유의 강견에서 착안한 Rifle Arm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Rifle Arm


무적의 홈런왕으로 군림하던 깁슨은, 1942년경부터 출장이 위태로울 만큼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결국 1943년 어느날 병원에 옮겨진 깁슨은 그곳에서 뇌종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판정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당시 그는 수술보다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메이저리그)와의 입단협상에 더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꽤 구체적으로 진행되던 이 협상은 그러나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저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병마로 인한 고통에 허탈감이 겹치자, 깁슨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술과 약물에 의지하며 살았다.


끝끝내 수술을 거부한 채 선수생활을 지속했던 깁슨은 1947년 1월,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딱 모차르트가 이 세상에 살았던 만큼만 지속된 재능이었다. 당시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데뷔가 유력하던 시점이었다 보니(실제로 3개월 후 로빈슨은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깁슨의 죽음은 이로 인한 홧병 탓이라는 설이 한동안 나돌기도 했다.


사상 최고의 공격형 포수로 꼽히지만, 그것조차도 저평가받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 이 비운의 천재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은 1972년의 일이었다. 새첼이 헌액된 바로 다음해였다.


 





지금까지, 그야말로 전설일 수밖에 없는 니그로 리그와 그 대표적인 스타들에 관한 이야기를 거칠게나마 훑어보았다. 아울러 니그로 리그의 부실한 기록관리는 그들이 배출해낸 스타들을 메이저리그 스타들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은 반면(이래저래, 참으로 시바스러운 캡 앤슨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에 대한 신비감을 부여하는 동전의 양면으로 작용함을 확인하기도 했다. 본지, 앞으로 또다른 신비감 넘치는 스타들에 대한 신비감 넘치는 이야기들을 계기가 닿는대로 펼쳐보일 양이다. 고로 본 기사, 엄밀히 말해 여기가 끝이 아닌 셈이다. 비록 완전한 과거완료형이지만 여전히 기억해둘 가치는 충분한 니그로 리그의 전설, 기대하시라. 졸라.



 
딴지 야구부 우원
안전빵(comblind@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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