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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다시 읽는 한국 인물 열전(18) - 궁예·왕건 1탄

2003.9.21.일요일
딴지 역사부


  드뎌 그들이 왔다


궁예와 왕건, 그들이 왔다. 한 시대를 풍미한 남아들. 드라마 <태조 왕건>으로 전국을 들끓게 했던 화제의 쥔공들. 드라마 극본 쓰신 분께는 할 말 많다만... 창작예술인데 뭐 우짜겠나. 또 시청률 높이자면 돗자린들 뭔 짓을 못하랴. 암튼 <설총편>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그로키 상태의 돗자리, 이번엔 이들을 디빈다.


궁예랑 왕건은 따로따로 살피기 어렵다. 둘이 서로 얽히고 설켜서 나오기 때문이다. 근데 평소 돗자리 "텍스트∼ 텍스트∼" 노래를 불렀다만, 그거 그대로 믿다간 엿되는 경우도 많다. 뉘나 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국사기』 <궁예전>의 기록을 그대로 믿지 못한다. 『황강에서 북악까지』 읽고 전두환 평가할 순 없쟎은가.


아다시피 『삼국사기』는 고려 때 쓰여졌다. 그러니 지들 태조를 띄워줘야 된다. 근데 왕건은 분명히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다. 이거 빼도박도 못한다. 그럼 어케 하나. 뻔하다. 궁예를 나쁜 넘으로 조지면 된다. 근데 첨부터 까대면 안 된다. 나쁜 넘인 줄 알고도 왕건이 그 밑에 드갔다면 좀 글챦은가. 그럼 어쩌나. 어쩌긴. 왕건이 부하가 되었을 땐 아직 궁예가 괜찮은 넘이었다고 하면 된다. 글고 일단 부하가 된 뒤부턴 마구 갈구는 거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글치 지 주군을 쫒아내? 걱정 마시라. 왕건은 그럴 생각 쫌도 없었는데 자꾸 옆에서 부추기니 마지못해 쿠테타 일으켰다고 감싸주면 된다(별놈의 쿠테타도 다 있다). 민심도 왕건 편이라고 밀어붙인다.


그래도 뭔가 아쉽다. 오호라∼ 천심이 빠졌구나. 그래서 왕창근의 거울 얘기를 꾸며댄다. 그래도 한때 모시던 주군이었는데 왕건이 직접 죽였다고 하면 쓰나. 묘안이 있다. 백성들에게 맞아죽었다고 하면 된다. 왕건은 칼에 피 안 묻혀도 되고, 궁예가 민심 팍팍 잃은 걸 보여주는 효과까정 얻는다. 궁예와 왕건에 대한 가장 기본적 텍스트인 『삼국사기』 <궁예전>은 이런 절묘한 구조로 짜여졌다. 젠장... 어디가 진짜고 어디가 가짠지 모르겠지만 암튼 잘도 엮어댔구나.


글챦아도 궁예와 왕건에 대한 연구가 득실대던 차에 <태조 왕건> 열풍을 타고 각종 책들이 넘실댄다. 이런 전문가들의 연구성과를 돗자리가 대체 어케 넘어설 수 있겠는가. 글타고 남들 다 해놓은 얘기 하긴 싫다. 그러니 어쩌겠나. 방법은 틈새공략뿐이다. 전문가들은 눈길도 주지 않는, 달리 말하자면 학술적으론 개뿔도 가치 없는 그런 얘기들 말이다. 댓글에 떡 되고 멜질에 죽 되도 그게 돗자리의 갈 길이다.


죄송스런 점은, 거창스레 궁예·왕건 1탄 했지만 둘을 똑같은 비중으로 디비진 못한다는 거다. 이 글에서 쥔공은 어디까지나 궁예다. 왕건은 들러리 비스끄리하게 다룬다. 『삼국사기』 <궁예전>을 텍스트로 삼았기 때문이지만, 왕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시간도 능력도 안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좀 봐주시라. 왕건도 한번쯤 들러리 되면 어떤가.



 궁예의 아빠는 뉘신가


그럼 궁예의 가계에 대해 알아보자. 『삼국사기』엔 일케 나온다.


궁예는 신라인으로 성은 김씨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으로 그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아빠가 헌안왕인지 경문왕인지 모른단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선 경문왕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돗자리도 경문왕으로 본다. 쫌 있다 나오지만, 궁예가 태어나자 왕은 알라를 죽이라고 한다. 근데 헌안왕은 아들이 없이 딸만 둘 있었다. 그러니 아빠가 헌안왕이었다면, 아무리 후궁의 아들이라도 얼굴 한번 안보고 그토록 쉽게 죽이진 않았을 거다.


헌안왕의 비가 누군지는 기록에 안나온다. 반면 헌안왕의 사위인 경문왕은 아들이 둘 있었다(뒤에 헌강왕·정강왕이 된다). 게다가 비는 헌안왕의 딸들이다. 그러니 후궁의 아들 하나 없앤다고 아쉬울 것도 없고, 괜히 놔뒀다간 빵빵한 처가쪽에 들볶일 수도 있다.


근데 정반대의 해석도 있다. 헌안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후궁의 아들이라도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분쟁의 씨앗을 없애기 위해 죽여야 했다는 거다. 근데 경문왕은 아들이 둘 있었으므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의 소지가 없었고, 따라서 굳이 궁예를 죽여야 할 이유가 없을 거라네. 그래서 궁예는 헌안왕의 아들이란다. 이 해석도 그럴 듯 하다만, 경문왕설이 더 설득력이 있는 거 같다. 글타면 궁예는 진성여왕과 이복남매인 셈이다.



  순천김씨와 광산이씨... 궁예의 후손들?


근데 궁예의 후손을 자처하는 성씨들이 있다. 바로 순천김씨(順天金氏)와 광산이씨(光山李氏)다. 이에 대해 이재범 교수의 『슬픈 궁예』(푸른역사, 2000), 54∼55쪽에는 다음처럼 나온다.


순천김씨세보에는 궁예가 신무왕의 다섯째 아들로 되어 있다. ...궁예에 관한 내용으로 "그 후손 중 하나는 순천김씨가 되었고 하나는 광산이씨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궁예의 후손 중 하나는 순천김씨, 또 하나는 광산이씨가 되었다고 했는데, 실제 광산이씨세보에는 궁예가 23세조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광산이씨세보에는 궁예는 경문왕의 서자이며 그 아들 청광은 순천김씨의 시조, 신광은 광산이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순천김씨세보』에서와 같이 궁예가 신무왕(神武王)의 아들이라면, 그 외할아버지가 신무왕 즉위에 도움을 준 장보고일 수도 있단다. 그치만 이 경우 궁예의 나이가 문제란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궁예가 나라를 세울 때는 63세, 왕건에게 쫒겨날 때는 80세가 된단다. 『광산이씨세보』에서는 궁예의 엄마를 설씨라고 하네. 참 여러가지다.


물론 족보라는 게 그대로 믿을 만한 건 못된다. 그치만 궁예의 후손이라면 고려시대엔 그걸 드러내놓기 힘들었을텐데 그들의 조상을 잊지 않고 지냈단 걸 보면 뭔가 그럴듯한 사연이 있을 거 같다. 특히 조선시대 김종서가 순천김씨의 중시조, 이선제가 광산이씨의 중시조란 점이 흥미롭다. 이에 대해 이재범 교수는 담처럼 말한다.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순천김씨와 광산이씨의 중시조가 『고려사』편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순천김씨의 중시조는 김종서이고, 광산이씨의 중시조는 이선제이다. 김종서는 잘 알려진 것처럼 북진을 개척한 영웅으로 정승까지 오른 인물로, 실제로 『고려사』 편찬을 관장했고, 이선제는 판서를 역임한 인물로 『고려사』의 한 부분을 집필했다. 이들은 『고려사』에 궁예가 어떻게 서술되는가를 지켜보았음에도, 그 궁예를 선조로 떠받들며 살아갔다. 이런 점에서 궁예가 순천김씨와 광산이씨의 선조라는 내용은 믿을 만 하다고 하겠다.


솔직히 돗자린 뭐가 맞는지 잘 모르겠다. 그치만 사지선다형 문제도 아닌데 반드시 하나만 콕 찍어내야 할 필요 있겠는가. 걍 이런저런 얘기가 두루두루 있다고 알아두자. 신무왕설·헌안왕설·경문왕설 등이 있다고 말이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난 궁예


궁예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다(음력이니 어린이날 아니다. 초딩 때 어린이날이 생일인 넘들 가끔 있었다. 참 불쌍했다). 근데 태어날 때 집 위에 허연 빛이 긴 무지개처럼 걸쳤댄다【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 또 나면서부터 이빨이 있더란다(『제왕운기』에서는, 이빨이 두 겹이더란다). 그랬더니 일관(日官)이 나라에 불길한 징조라면서 왕에게 기르지 말랜다.


나라에 불길한 징조? 허걱∼ 그럼 음력 5월 5일, 즉 단오에 태어나신 분들 어카라고? 걱정 마시라. 그거 알라한텐 길조다. 집 위에 무지개가 걸치고 태어날 때부터 이빨이 있는 거 등등 모두 길조다. 허나 궁예는 후궁의 소생이니, 그 넘이 잘되면 왕비쪽이 큰일난다. 그래서 나라에 불길한 징조라고 우긴 거다. 암튼 경문왕은 사자(使者)를 보내 알라를 죽이도록 한다. 뭐 여기까진 그런대로 뭔 소린지 알아듣겠다. 그치만 이 담부턴 무척 헷갈린다.


사자(使者)가 (아이를) 강보에서 빼앗아 누() 아래로 던졌는데 유비(乳婢)가 몰래 받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찔러 애꾸가 되었다. (아이를) 안고 도망쳐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其一目 抱而逃竄  勞養育】.


뭐가 헷갈리나고? 현장검증 함 해보자. 우선 사자가 알라를 내던진 장소인 누()가 뭔지 모르겠다. 자전을 보니 ①다락 ②누각 ③망루 등의 뜻이 있다는데... 하나씩 살펴보자.


① 다락 : 뭐 거기 숨어 있다가 잡혔을 수도 있겠지만 울나라 전통가옥에 다락이 있나. 있다 쳐도, 거기서 아래로 던지려면 창이 있는 팬트하우스 정도의 높이와 넓이여야 한다. 그런 게 어딨냐. 사자가 비좁은 다락에서 찔찔대며 힘들게 창으로 알라를 내던질 이유도 없다.


②누각 : 울나라 누각이란 게 기껏해야 2층이고 높아봐야 5m다. 물론 이 정도라도 알라를 밑으로 던져서 죽일 수는 있다. 근데 말이다. 그러면 위에서 아래가 뻔히 보인다. 왕명을 받은 사자가 걍 던지기만 해놓고 밑을 안 봤겠냐. 죽었나 살았나 확인도 안 했을까. 글타면 밑에서 여종이 알라를 나이스캐치한 걸 못 볼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혹시 절벽 근처에 있는 누각이면 되려나. 그치만 그 경우 밑에서 받는 게 넘 어렵다. 글고 여종이 어케 미리 알아서 내려가 기둘리고 있겠는가.


③망루 : 궁예 외가가 어딘지 모르겠으나 망루가 왜 있겠냐. 교도소냐 군부대냐.


요컨대 ①②③ 전부 꽝이다. 그럼 딴 데서 던진 거 아닐까. 허나 딴 곳이래야 뭐가 있냐. 끽해야 지붕인데... 거길... 왜 올라가냐. 걍 땅바닥에 패대기를 쳐도 될텐데. 따라서 결론은... 이 얘기 그대로 믿기 좀 글탄 거다. 아울러 유비(乳婢)가 뭐하는 여종인지도 궁금하다. 다음 둘 중 하나일텐데, 뭐가 맞든 문제는 남는다.


① 젖을 먹여주는 여종 : 출산을 했으니 젖이 나오는 거 아니겠나. 그럼 결혼도 했겠네. 남편이랑 알라도 있겠구나. 근데 남편이야 몰라고 지 배속에서 나온 알라 팽개치고 남의 알라 안고 도망쳐?


② 젖먹이를 돌보는 여종 : 갑자기 도망치는 판국에 보따리 챙기진 못했을 거다. 그럼 분유도 우유도 없던 시절 알라한텐 뭘 먹였겠나. 동냥젖? 그것도 한두 번이다. 또 심봉사도 아닌데 엄마로 행세하면서 동냥젖 얻어 먹이면 남들이 의심하지 않았을까.


역시 이도저도 모두 개운치 않다. 따라서 결론은... 앞과 같다. 그럼 대체 이 얘긴 뭐란 말인가. 뭐긴. 궁예가 꾸며댔겠지. 그가 정말로 버림받은 왕자일 수도 있다. 그치만 위에 나오는 극적인 구사일생은 아무래도 믿기 힘들단 거다. 그럼 이런 얘길 뭐하러 꾸며대? 일거양득이다. "내가 이래뵈도 신라왕족 출신이야" + "애꾸가 된 데는 이런 기맥힌 사연이 있었어" 뭐 밑지는 장사는 아니쟎은가.


 
  <태조 왕건>에서는 어케 나왔나







<역사스페셜> 궁예편(2000.10.28)에선 걍 『삼국사기』 내용만 소개하고 있다. 근데 <태조 왕건> 대본을 보니 잼스런 해석이 나오네. <태조 왕건>에서도 궁예의 아빠를 경문왕으로 봤다. 근데 동생 위홍과 왕비가 알라를 죽이라고 닥달댔고, 어쩔 수 없이 글케 하라고 허락했단다. 문제는 그 담이다.


궁예의 엄마는 친정이 아닌 후궁(後宮)에 머물고 있다(에잉? 텍스트엔 분명히 외가라고 나오는데?) 글고 군인들에게 쫓긴 엄마는 궁예를 안고 누각으로 올라간다. 이 때 밑에서 유비가 아이를 던지라고 채근댄다. 그래서 던진다(오잉? 텍스트엔 분명히 "사자가 강보에서 꺼내 누 아래로 던졌다"고 나오는데?).


암튼 유비는 알라를 받는다. 그치만 지가 뭐 어카겠나. 군인들이 "저 년 잡아라" 하면서 몰려온다. 꼼짝없이 잡힐 판이다. 여기서 드라마 작가는 초강수 조커를 빼든다. 흑기사의 등장! 흑두건을 쓴 넘이 잽싸게 나타나 이들을 안고 빠져나간다. 제엔장∼ 절묘키도 하고 대담키도 하구나. 작가도 이 부분에서 고민에 빠졌던 거다. 드라마는 화면으로 보여주는 거 아닌가. 일종의 현장검증이다. 근데 이거 찍다보니 도저히 말이 안 된다. 그래서 텍스트엔 얄짤시리 안 나오는 흑기사를 등장시킨 거다. 그 자유스런 상상력이 부럽다. 글고 텍스트란 새장 안에 갇혀 허접스레 지랄떨며 퍼덕이는 돗자리가 불쌍타.


 
  궁예가 왕자 출신이라면 그걸 언제 알았을까


궁예가 왕자 출신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뭐 글타고 치자. 그럼 그걸 언제쯤 알았을까. 담 기록을 읽어보자.


(궁예의) 나이 10여 세에도 유희를 그치지 않으니【年十餘歲 遊戱不止】 유비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태어나서 나라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나 내가 차마 그것을 두고볼 수 없어 몰래 길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子之狂如此】 반드시 남들이 알게 될 것인 즉, 너와 내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찌할꼬" 하니, (궁예는) 울면서 "만약 그렇다면 제가 떠나서 어머니의 근심이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 하였다.


10여 세가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는 유희란 뭘까. 걍 노는 거 아녔겠나. 도망쳐 숨어사는 형편에 무슨 글공부를 했겠냐. 글공부를 한들 출세할 가능성은 한탱아리도 없다. 혹시 먹고살기도 힘든데 앵벌이나 동냥질을 안 했단 뜻인가. 근데 텍스트에선 이 유희를 미친 짓이라고도 했네. 꽤나 부잡하게 미친 듯 놀았나보다.  


암튼 ① 어떤 이는 유비(乳婢)가 호통을 칠 때야 비로소 지가 왕자 출신이란 걸 알게 되었다고 보며, ② 어떤 이는 그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고 본다. 그럼 뭐가 맞을까.


①일 수도 있다. 글타면 담과 같은 의문이 남는다. 그 전에 걍 깽판치며 미친 듯 놀기만 했다면 그게 뭐 그리 큰일인가. 남들이 그걸 보고 궁예가 버림받은 왕자라는 걸 어케 알 수 있겠는가. "어? 저 넘 쌩양아치네... 혹시 왕자 아녀?" 이거 좀 어색하쟎은가. 미친 듯 노는 게 신분이랑 뭔 관계가 있단 말인가.   


텍스트완 다르지만, "너는 신라의 왕자니 앞으론 납대고 깝치지 말라"고 꾸짖었을 수도 있다. 그 때 궁예가 허걱! 충격을 받고 가출을 맘먹었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일케 썩으며 지낼 넘이 아니구나" 하고 말이다. 충격이 큰 데다 그 동안 목숨을 걸고 지를 길러준 유비가 고맙기도 미안키도 했을테니... 펑펑 울만도 하겠구나.


②로 본다면? 궁예는 두 가지 핸디캡을 갖고 자랐다. 하나는 애꾸라는 거고, 하나는 아빠가 없단 거다. 자라는 알라들에게 이건 제법 큰 상처다. 놀림감 되기 쉽다. 글타면 궁예가 엄마로 알고 있는 유비에게, "엄마, 난 왜 애꾸여여?" "엄마, 난 왜 아빠가 없어여?" 하고 안 물어봤겠는가. 첨엔 이리저리 둘러댔겠지. 사실대로 말해줬다간 궁예가 친구들에게 나불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치만 결국은 사실대로 말해줬을 수도 있겠다. 대신 나불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을 거고. 근데 궁예가 계속 놀림을 받자 홧김에 "내가 이래뵈도..." 라며 주절댔고... 자칫하면 신분이 알려질 수도 있었고... 그래서 유비는 그걸 미친 짓이라고 한 건 아녔을까.


 
  궁예의 자가발전(自家發電) 가능성


뭐가 되었든 돗자리 요 부분은 별로 신경 안 쓴다. 어차피 궁예의 자가발전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궁예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얘기는 본인말고 다른 증인이 없다. 특히 출생 부분은 궁예가 유비로부터 들었을 수도 있지만 아예 지가 싸그리 꾸며댔을 수도 있다. 궁예가 방방 뜰 당시엔 이미 유비가 없었으니 뭐 확인할 길도 없쟎은가.


글타고 첨부터 이걸 떠벌이고 다니진 않았을 게다. 경문왕의 후손이 여전히 정권을 잡고 있었으니 말이다. 담번에 나오듯 궁예는 나중에 도적떼에 들어가는데, 이 때 "난 신라 왕자요" 했을 리도 없다. 그랬다간 두목한테 디지게 뚜둘겨맞을테니 말이다. 그럼 언제쯤? 독립해서 지 힘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울 때다. 지가 나름대로 괜찮은 혈통을 갖고 태어났으며, 신라왕실에 맞장 뜰 만한 충분한 명분이 있다는 걸 내세우려고다. 왕위에 오른 궁예가 글타는데 누가 뭐라겠나. 확인해 줄 유비도 없다. 자가발전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만, 진실은 오직 궁예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세달사로 출가하여 땡추가 되다


암튼 유비에게 쫑코를 먹고 눈물을 떨군 궁예, 담처럼 말하며 가출에 나선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떠나서 어머니의 근심이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지금의 흥교사(興敎寺)가 그 곳이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불렀다. 장성하여서는 승려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활달하며 담력이 있었다【及壯不拘檢僧律 軒有膽氣】.







젠장, 반성을 했으면 어쨌든 길러준 엄마 모시고 열심히 살 일이지 지 혼자 달랑 가출한다. 세달사로 갔으니 출가구나. 세달사(=흥교사)가 어딘진 확실치 않다. 이전엔 부석사로도 봤는데 요새는 강원도 영월군 태화산에 있었다고 본단다. 그 근처에 세달촌(世達村)이 있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암튼 스님이 되었으면 당연히 불가의 계율을 지켜야 한다. 근데 궁예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단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다. 일종의 위장출가(僞裝出家)다. 입학했으면 교칙을 지켜야 한다. 입대했으면 군률을 따라야 한다. 근데 스님이 되고서도 계율에 얽매이지 않아? 그럼 땡추에 다름 아니다.


헌데 궁예의 출생과 성장에 대한 앞의 얘기가 만약 자가발전의 썰이라면, 그가 출가한 동기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절에 빌붙어 밥이라도 얻어먹으려 그랬다는 얘기도 있고, 죄를 짓고서 은신처로 삼으려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궁예는 불교 수행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거 같다. 그치만 이 시절 듣고 배운 불교 지식은 나중에 백성을 끌어 모으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나름대로 요긴하게 써먹는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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