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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강팀이다 II

2003-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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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강팀이다 II


2003.9.1 월요일
딴지총수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 주변 힘의 등압선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게 TV 건너까지 고스란히 전달되던 비에리, 그 거구가 최진철의 방해에 아랑곳 않고 무중력공간을 유영하듯 솟구쳐 선제골을 터뜨린 순간부터 자신에게 축구선수로서 세계적 지명도를 안겨 준 안정환의 역전골이 터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단위 시간 당 아드레날린 분비량으로는 내 생애 최고치를 기록했을 것이 분명한 이탈리아전.

거의 최면상태 수준으로 몰입했던 그 경기에서 내 주의를 승부 그 자체로부터 단속적으로 이탈시킨 유일한 화상정보가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이탈리아 유니폼이다. 그들의 유니폼은, 일방적으로 적대해야 할 상대편의 제복으로는, 너무 쿨했다. 우리편 테클은 기술이고 상대편 테클은 폭력으로 자동 해석되는 그 전쟁 상황에서조차, 도대체 그들 유니폼의 상대적 세련미는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난 그 유니폼이, 비에리의 선제골만큼이나 부러웠다.

 

 게르니카

 

아마추어 화가인 아버지 덕에 기억이 닿는 한 물감과 이젤을 썬데이서울만큼이나 자주 접했음에도 공교육 12년간 내게 미술은 누가 뭐래도 암기과목이었다. 그림과 제목과 작가를 매치시키고 야수파는 누구고 점묘파 특징은 뭔가를 단기간에 외워내 시험치는 암기과목. 일 년에 한 번 정도 미술전시회를 가서 감상문을 써오라는 학교의 주문은 아무리 진지하게 작품들을 들여다봐도 아무 것도 감상되어지지 않는 내겐, 처음 보는 여자를 쳐다보는 것만으로 사랑해내란 것과 다를 바 없었고.

그러던 내가 91년 여름 배낭여행 중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찾았다. 당시 배낭여행 중 내게 미술관은 대소변을 여유 있게 해결하고 때론 일주일 절은 머리까지 감을 수 있는 시원한 대리석 깔린 무료 화장실 이상이었던 적, 별로 없다. 틈만 나면 배낭여행을 해대던 시절, 스무 번은 족히 드나들었던 파리에서 그 정문 앞을 백 번쯤은 지나쳤던, 그 거창한 루브르 박물관조차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내가 프라도 미술관을 따로 찾았던 건, 그곳이 세계 몇 대 미술관이라거나 프라도를 보면 스페인 절반을 본다는 말까지 있다거나 하는 이유가 결코 아니었다. 세계적 미술관이라서 나보고 어쩌라고.

그건 순전히 게르니카 때문이었다.


피카소. 야수파. 헤밍웨이.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프랑코. 파시스트. 스페인 내전. 히틀러. 나치. 바스크. 폭격. 대학살...


암기과목이었던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조각조각 낱개로 입력되었던 몇 개의 단어만으로도 게르니카는 단순히 유명한 그림 하나가 아니라 광기의 20세기를 증언하는 압도적 모뉴먼트였고, 그래서 마드리드에서 그걸 안 본다는 건 로마에서 콜롯세움을 안 보는 것과 삐까삐까하게 터무니없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당시 난 게르니카 통해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학창시절, 미술교과서에 소개된 소위 명작들을 들여다보며 거기 기술되었던 작품의 감상 포인트대로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난, 꼭 확인해야만 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거.. 아줌마 눈썹은 왜 밀었어.. 하는 생각만 드는 모나리자를, 보다 정확하게는 목살집에 손목 굵은 그 서양 아줌마의 어정쩡한 미소를 무려 신비롭다고 인지하길 요구하는 국정교과서는, 내겐 우월적 지위에 의한 지적 폭력에 다름 아니었다.

윤곽선을 흐리게 하는 스푸마토 기법이 어떻다느니, 원근법으로 배경이 깊은 맛을 낸다느니 하는 감상들을 시험을 위해 주워 섬기긴 했으나, 영원한 미소의 수수께끼 라는 식의 호들갑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어 혼자 뽕이다...라고 혼자 읊조리는 걸로 대처하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그 국정 표준 감상에 비음 섞인 웃음을 날리면서도, 어린 마음 한구석에선 혹여 그건 내 감성 시스템 자체에 뭔가 중대한 하자가 있어 그런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사실은 떨치기 힘들었다. 혹여 나만 그런 건 아닌지. 그래서. 확인해야만 했다. 게르니카 정도라면,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20세기 최고의 걸작 중 하나라는 그 정도의 세계적 물건이라면, 그 물건에 피드백 하는 내 감성의 반응을 살펴보면 내 시스템의 결함 여부가 판가름이 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색맹검사 받는 심정으로 게르니카 앞에 섰다. 파시스트 프랑코의 요청에 나찌 히틀러가 퍼부은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어버린 조국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기리며 한 달 만에 완성했다는 그 역사적 대작을 마주하여 5분을 올려다 본 후 나의 첫 정서 반응,

아... 그림이... 크다...

였다. 생각보다 그림이 훨씬 컸다. 충격, 비탄, 격동, 역사, 긴장.. 따위는 없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걸 실제 눈앞에 뒀을 때 따르기 마련인 종류의 흥분이 물론 있었으나, 그게 끝이었다. 어떤 영감도 없었고, 어떤 감동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서서도 보고, 곁눈질로도 보고, 벽에 기대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봤건만 내겐 그 어떤 예술적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30분을 그림 주변을 서성거리며 돌았다. 혹시 배낭여행의 고단함 때문인가 싶어, 아예 그 앞에 주저앉아 고개를 제끼고 한참을 더 올려다봤다.

내 마지막 반응은,

모가지가 아프다...

였다.

 

 명품

 

이탈리아를 처음 배낭여행 할 때다. 매일 당근 씹어먹고 바게뜨에 고추장 발라먹던 그 궁색했던 여행의 어느 날, 쇼윈도위에 진열된 핸드백 하나가 내 눈을 끌었다. 핸드백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내가 그 문양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게르니카로부터 목관절을 혹사하면 몇 일은 고생한다.. 라는 허탈한 좌절의 각성을 얻는 것이 전부였던 내가 여자 핸드백을 장식한 패턴 하나에 그렇게까지 매료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신기할 지경이었다. 훗날 그 패턴을 이지적이라고 표현하게 되기 전까진 그 느낌을 뭐라 해야 할지도 몰랐던 그 핸드백은, FENDI 였다.

그 후 그 양복 허리 참 야들야들하네 했더니 아르마니였으며, 뜨개질 참 요사스럽네 했더니 미소니였다. 그렇게 난 페라가모와 프라다와 베르사체를 만났다. 그것들이 세계적인 명품인 줄 안 것은 그렇게 충분히 감탄하고서 몇 년이나 흐른 후였다. 그 시절 방학이면 여행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했던 난, 이탈리아를 열 번 정도 더 방문했고 그때마다 그렇게 새로운 브랜드를 발견해내는 즐거움은 계속됐다. 가방은 커녕 가방끈조차 사지는 못하는 가난뱅이 여행자였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여름의 피렌체. 학생들을 이끌고 가죽시장을 누비다 우피치 미술관으로 학생들을 우겨 넣고는 광장의 다비드상 앞에 주저앉았다. 광화문의 이순신동상만큼이나 많이 지나쳤던 상이었기에 하필 그 근처에 주저앉은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완전히 탈진해 죽은 병아리 모가지처럼 제 멋대로 돌아가는 고개를 간신히 제껴 다비드상을 멍하니 올려보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돌팔매를 위한 가죽주머니를 움켜 쥔 다비드의 왼 팔꿈치에서 페라가모 구두 뒷축에서 느닷없이 느꼈던 긴장감이, 돌맹이를 움켜 쥔 오른팔의 늘어진 곡선에서 아르마니 양복의 허리라인이 오버랩 됐기 때문이다. 터무니없게도 말이다.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늑대소년

인도 밀림에서 늑대에 의해 길러진 모글리가 자라서 여차저차한 모험을 펼친다는 정글북, 일본 역대 최고 수익을 올린 미야자키 하야오 마지막 작품 원령공주,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늑대 젓을 먹고 자랐다는 로마 건국신화의 주인공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까지, 모두 다 유사한 모티브의 소산이다.

늑대소년. 동물이 키운 아이.

수많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소재가 되었던 이들은 과연 실재했나. 사실은 전설이나 민담 수준을 넘어 사진이나 신뢰할만한 자료가 존재하는 케이스가 상당히 많다. 사진까지 남아 있는 경우로는 1920년 인도 켈커다 서부 미드나포르(Midnapore)에서 성공회선교사에 의해 늑대굴에서 발견된 카말라(Kamala)와 아말라(Amala) 자매가 유명한데, 사진 속에서 벌거벗은 체 땅바닥에서 마치 짐승처럼 둘이 엉켜 자는 그들은 발견 당시 송곳니가 길고 턱이 이상발달해 있었다고 한다.

 

과학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문서화된 최초의 케이스는 19세기초 프랑스 남부 마을 아베롱(Aveyron)에서 발견되어 아베롱의 야생아로 불린 빅또르(Victor)로, 11살에 야생상태에서 발견되어 파리의 농아연구소에서 40살에 사망한 그의 생은 그의 개인교사 역할을 했던 쟝 이타르(Jean Itard) 박사에 의해 세밀하게 관찰, 기록되었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유명감독 프랑소와 트뤼포는 야생의 아이(LEnfant sauvage)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들 기록들에 의하면, 늑대소년들은 인간사회로 복귀 후에도 네 발로 뛰고 썩은 고기만 먹거나 옷 입기를 거부하고 바닥에서만 자거나 하는 야생의 행동방식을 오랫동안 고수하다 몇 년에 걸친 긴 적응기간을 거쳐서야 비로소 인간의 룰을 서서히 수용한다. 그러나, 이들 늑대소년들이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그 어떤 경우에도 완벽해지지 못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언어다.

어떤 경우에도 몇 단어 혹은 몇 문장을 말하는 정도에서 그들의 언어발달은 정지한다. 인간사회로 복귀한 뒤 30여 년을 보낸 빅또르의 경우도 말귀를 알아듣고 또 일부 읽기도 했으나 끝내 말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으며, 인도의 카말라 역시 몇 단어를 제외하곤 말이 아니라 소리를 내는 것으로 커뮤니케이션 했다고 한다. 이해하기 쉽지 않다. 11살 소년이 30년 동안 인간의 말을 배울 수 없다니.

이런 의문들이 학문의 영역에서 본격 검토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197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다. 일명, 지니(Genie) 사건이다. 심한 우울증을 시달리는 폭력적인 아빠와 그에 저항할 힘이 없는 장님엄마 사이에 태어난 지니는, 위험한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겠다는 그녀 아빠의 뜻에 의해 낮에는 어린이변기에 고정되도록 만든 장치에 묶여, 밤에는 슬리핑백에 묶여 철사로 망을 치고 뚜껑까지 덮힌 어린이 침대에 뉘여, 생후 20개월이 되는 시점부터 13세 반이 될 때까지 키워졌다. 발각된 후 아동학대죄로 재판에 회부되는 날 자살한 그녀의 아빠는,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하게 했으며 그 자신 지니에게 말을 할 때는 개처럼 짖거나 으르릉거렸다고 한다. 인간적 접촉과 대화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되어 11년을 산 것이다. 말하자면, 인위적으로 키워진 늑대소년이었던 것이다.

발견 즉시 심리학자, 언어학자, 신경학자 등 두뇌발달과 관련된 전문가들로부터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된 그녀는, 엄마가 그녀를 다시 데려가기 전 7년 동안 아동병원에 머물면서 UCLA의 언어학자 수잔(Susan)에게 전문적인 언어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지니는 기록이 남아 있는 20세가 될 때 까지도 I와 You 를 구분하지 못했고 Hello란 말에 Hello라고 답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며, 끝내 3단어 이상의 문장을 만들지 못했다. 다른 늑대소년들처럼.

 

 우리 것이 좋은 것이다.

 

다비드상이 명작인 이유는, 명품이 명품인 이유와 같다. 명품이 명품인 이유는 사람들이 그걸 접했을 때, 자신의 감성이 그 상품이 가진 고유의 라인과 색상과 패턴에 정서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그렇게 반응하라 강제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비드상도 마찬가지다. 다비드상이 가진 고유의 선과 비례와 표정이 사람들의,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들의 일정 정서를 자극하여 사람들에게서 감탄과 감동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기에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명작으로 살아 남은 것이다. 난 그걸 알아볼 눈이 없었던 것이고.

다비드 이후 그렇게 여행을 통해 선과 색과 면이 만들어 내는 세련됨과 촌스러움의 차이를 조금씩 배워가게 되면서, 내겐 의문 몇 가지가 생기게 된다. 왜 나의 정서적 반응장치는 그렇게 둔하게 세팅되어 있었던 걸까. 타고나길 그렇게 둔하게 타고난 것인가. 이탈리아에는 왜 우리에겐 하나도 없는 세계적 명품 브랜드가 그렇게 많은가. 이탈리아 시골의 허름한 식당의 인테리어가 왜 서울에 있는 나름대로 그럴듯한 레스토랑 인테리어보다 더 세련된 건가. 서울의 레스토랑에 비용은 더 많이 투입됐는데 말이다. 애초 재능의 문제인가. 이탈리아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우수한 예술적 유전자를 타고나기라도 했다는 건가. 활용 가능한 20대 중반의 시간 대부분을 배낭여행으로 보낸 나로선 여행을 하면 할수록 그 의문은 커져갔다.

그래서, 난 여행 후 돌아와 듣게 되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야란 구호가 특히 싫었다. 시장개방에 따른 불안감을 그런 방어적 국민계몽운동 수준에서 대처할 수밖에 없는 그 수세의 멘탈리티가 싫었다. 그렇게 우리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떨어대는 수선은, 역설적으로 사실은 우리 것이 후진 것이란 자인으로 들렸다. 이탈리아인들이 사실은 더 우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로 들렸다. 자 이제 국산을 더 멋들어지게 만들자는 결의가 아니라, 아무리 외제가 좋아도 우리끼린 뭉쳐서 국산 써줘야 한다는 다짐을 애국의 이름으로 받아 내겠다는 그 기획은 이미 패배주의적이었다.

우리 것이기만 하면 좋은 것인가. 그건 거짓말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명품 II

 

이탈리아의 고급 남성복 중에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라는 브랜드가 있다. 양복을 고객에게 내놓기 전 다림질을 진공상태에서 하는 걸로도 유명한 이 브랜드의 현재 회장이자 창업자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손자인 파울로 제냐는 언젠가 라이벌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 아르마니, 페라가모, 구찌가 우리 경쟁업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 회사들은 할아버지대부터 친한 사이"라 답했다.

그러고 보면,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들은 대부분 회사 자체가 하나의 가족 단위다.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증손녀가 사장이며, 내가 난생 처음 관심을 가졌던 핸드백 펜디는 창업자 이후 다섯 명의 딸들이 계승했고, 구두 뒤축으로 나를 감동시켰던 페라가모는 창업자 살바토레의 장남 페루치오 페라가모가 현재 회장이며, 검은 나일론 백으로 내 고정관념을 깼던 프라다는 손녀딸 미우쳐 프라다가 최대주주다. 그 외도 베르사체, 베네통, 막스마라... 그 리스트는 길기만 하다. 오히려 몇 년 전 후계구도를 정하지 못해 다른 회사와의 합병을 포함한 경영방안들을 모색한다고 발표했던 아르마니 같은 케이스가 큰 화제가 될 정도다.

이탈리아인들은 이런 회사를 아지엔데 파밀리알레(Aziende Famigliale)라 한다. 가족기업이란 말이다. 이런 형태의 기업이 2만 개나 된다. 그들 대부분은 그들의 선대가 터 잡은 지역을 중심으로 그 지역 토산의 재료와 환경에 맞는 단일한 품목생산에 집중하면서, 선대의 장인적 재능과 기술적 노화우를 가문의 명예로 여기며, 그 자산을 기업화하고 대를 이어 종사하는 것을 가문의 전통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의 기술은 대를 거쳐 숙련됐고 그들의 설비는 대를 거쳐 전문화되었다.

중세 이후 이어져 온 개인 단위의 장인적 가내수공업이 고스란히 가족 단위의 중소기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늑대 소년 II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 노암 촘스키를 두고 뉴욕타임스가 평한 말이다. 세계 테러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바로 미국 자신이 테러를 멈추는 것이라고 명쾌하며 설파하며,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누구보다 강경하게 질타해온 세계적 진보학자인 이 양반이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동시에 사실은 컴퓨터언어, 인지과학, 심리학, 철학 등 다방면에서 탁월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전공자들 외에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 그가 언어학 분야에서 세운 이론 중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가 언어생득설이다.

인간의 언어는 단순한 자극과 반응, 즉 반복 훈련의 소산이라고 믿었던 당시 행동주의 실험심리학계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내놓았던 이 이론의 요체는, 인간의 언어능력은 선천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기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학습장치를 타고 난다는 것이다. 오리가 처음 본 움직이는 물체를 엄마로 인지하는 능력이 선천적이듯 말이다.

아무리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어려운 성인들과는 다르게 어린아이는 특별한 의지나 체계화된 훈련을 거치지 않아도 언어를 습득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 이미 두뇌에 장착되어 있던 이 능력은 인간의 언어에 노출되면 습득이 촉발되었다가, 신체기관이 크다가 일정 나이가 되면 그 성장을 멈추는 것처럼 일정한 시기가 되면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촘스키의 이런 주장 외에도 인간의 언어발달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은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가설에 있어서는 대부분 의견 일치를 본다. 인간이 언어를 배우는 일정한 시기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 일정한 시기를 언어학자들은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라 한다.

이 시기를 넘기면 인간이 인간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 되어 아무리 가르치려 해도 혹은 아무리 배우려 해도 인간의 언어를 완전히 배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정한 나이를 넘어서게 되면 아무리 많이 먹는다고 팔다리가 더 자라지 않는 것처럼, 11살 때부터 30여 년을 인간과 살았음에도 끝내 온전한 문장을 만들어 내지 못한 빅또르처럼..

 

 우리 것은 좋은 것이다 II

 

내게 공교육 12년 간의 미술교육은 지니의 12년 간 침대생활과 그리 많이 다르지 않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작들이 명작인 이유들을 암기하기만 한 내게 모나리자의 미소를 신비롭다고 인지하라는 요구는, 그저 으르렁거리고 짖어대는 소리 밖에 들은 적이 없는 지니에게 인간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라는 요구와 그리 많이 다르지 않았다.

고도로 훈련된 언어학자의 전문적 지도를 몇 년간이나 받고서야 지니가 그나마 3단어 조합 문장을 읊조릴 수 있게 되었듯, 운 좋게 세계 수준의 명품들이 선사한 선과 색의 세례를 수 년간 받으며 몇 마디 더듬거릴 줄 알게 된 나는, 그러나 스스로 타고난 미적 감수성이 과연 언제 그 성장을 멈췄는지, 애초 그 온전한 분량이 얼마였는지 알기엔 한참이나 늦어버린 늑대소년이었던 것이다. 결정적 시기를 놓쳐버린 늑대소년 말이다.

그 시기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적어도 공교육 12년 사이에 걸쳐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선 이탈리아인들과의 집단적 평균치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애초에 타고난 예술적 유전자의 격차가 인종간에 있을 리 없다. 두개골의 크기 계측 따위로 인종간 선천적 능력차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히틀러 유전학 시대도 아니고 말이다. 예술적 감수성의 집단적 수준 차는 결국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이다. 우리네 공교육은 그 결정적 시기에 우리들을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촌스럽게 길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탈리아에 엄청나게 새롭고 도저히 카피할 수 없는 유니크한 시스템이 있는 건 아니다. 이탈리아 장인들은 스스로 익숙한 것을 한다. 선조들이 대대로 살던 땅에서 대대로 하던 일을 한다. 이탈리아 기업들을 특징 짓는 지역주의와 가족주의는 그 지역의 햇빛과 토양이 선사한 색상과 재료를 소재로 대대로 익숙한 것들, 그것들을 엮어내서 뭔가를 만들어 내서 그 지역의 경제기반이 되는 거다. 뭐 대단한 비법이 아니다. 익숙한 걸 오랫동안 하니 잘 하는 거다. 그리고 그걸 산업화했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의 햇살과 토양에 맞는 색상과 문양이 있다. 그래서 아프라카의 문양은 아프리카의 문양답다. 당연하다. 우리 주변에 그런 것들이 남아 있던가. 우린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 대대로 이 땅에서 해오던 것들을, 그래서 우리 유전자에 차곡차곡 새겨졌을 익숙한 것들을 제대로 남겨두지도 못했고, 또 그것들을 산업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보지 못했다. 서구 흉내만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린 우리 것이 통하는 꼴을 본 적이, 근대 100년사에 없다. 우리 것은 언제나 촌스러운 것이었다. 개량한복 정도에서 멈춘, 혹은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 라는 프로파간다에서 멈춘, 촌스런 애국만 켐패인 되었을 뿐.

우리 것은 좋은 것이다. 그게 우리 것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것이기만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이 환경과 토양에선 우리에게 가장 맞고 익숙한 것이어서 좋은 것이다.

그리고, 익숙한 걸 해야 잘한다.

 

 다시, 우리는 강팀이다

월드컵 끝난 지 1년이 넘었다. 1주년 행사는 시시했으며 K리그 중계는 정규방송 편성에서 빠진 지 오래고 우리 경제는 허덕이고 북핵 문제는 여전하다. 세계가 놀란 한민족의 저력이라느니 하는 국가주의적 수사가 지겹지도 않냐는 핀잔과 축구는 축구일 뿐이라는 시니컬이 힘을 받는다.

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 이제부터다.

서구가 발명하고 이젠 내면화한 우리 속의 오리엔탈리즘을 이젠 정말 벗어나고 싶고, 언제나 스스로를 역사의 조연으로 포지셔닝하는 초라한 변방의식도 이젠 정말 벗어나고 싶고, 정치적 군사적 식민이 끝났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사회적 문화적 식민을 이젠 정말 벗어나고 싶으며, 세계레벨에선 택도 없이 아마추어면서 안방에서만 똥폼 잡는 이 땅의 조또 아닌 엘리트 시스템이 정말 싫고,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도 도저히 승리를 자축하지 못하던 습관화된 패배의식이 정말 싫고, 맞서야 할 때 안으로 안으로 기어들어가며 매맞는 아내 증후군이 정말 싫으며, 세상이 미국만으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던 순간을 다시 잊어버리기 싫고, 유럽이 우리보다 더 쿨하지 않음을 깨달았던 순간을 다시 잊어버리기 싫고, 중국이 우리의 큰형님이 아님을 깨달았던 순간을 다시 잊어버리기 싫으며, 이젠 김남일이 양아치인 것이 좋고, 이젠 이천수가 싸가지 없는 것이 좋고, 이젠 냄비근성이 우리 특성인 게 좋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 이야기가 하고 싶다.

근대가 발명한 민족주의라는 허구의식으로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며 단군신화 파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스스로 몰랐던 우리네 가치와 새롭게 정립해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보다 세련되고 보다 당당하고 보다 자유롭고 보다 행복한 개인이 되자는 이야기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련다.

 

난 다신 주눅들기 싫다.
우린 강팀인데 왜.

 

- 딴지총수
( chongsu@ddanzi.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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