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5. 05. 21. 목요일

펜더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뒤이은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서로간의 ‘카드’를 맞춰보기 시작했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 한 후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축소됐다. 그러나 아무리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일본’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고 싶었고, 러시아도 조선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걸 원치 않았다. 갈등의 조짐.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은 문명국(?)이었다. 자기의 욕망을 말하더라도 세련되게 포장할 줄 알았고, 욕망을 다 채우지 못한다면 서로간의 카드를 맞춰서 최대한 상대방의 신경을 덜 긁으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노력’을 할 줄 아는 국가들이었다. 물론, 야만의 행동을 한 건 일본이었다. 그러나 잠시 잠깐의 욕정(?)을 분출하고 나서는 곧 제정신을 차렸다(현자타임인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게 1896년부터 1898년 사이 러-일이 3차례에 걸쳐 나눈 ‘합의’였다.

 

을미사변 직후 체결된 베베르-고무라 의정서를 먼저 살펴보자.



(1) 왕의 환궁문제는 전적으로 그의 재량에 맡기되, 러일 양국 대표는 그의 안전에 대한 모든 의혹이 소멸되는 대로 왕에게 환궁을 권고한다. 이 경우에 일본 대표는 일본인 장사 단속에 가장 완벽하고도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보증한다.


(2) 현 내각의 각료들은 왕 자신의 자유의지와 선정에 의해 임명되었고, 그들의 대부분은 지난 2년 동안 각료나 기타 고위직에 재직한 바 있는 관대하고도 온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양국 대표는 왕이 관대하고도 온건한 인물을 각료로 임명하고 그의 신민에게 후의를 보이도록 권고한다.


(3) 러시아 대표는 일본 대표와 다음의 사실에 합의한다. 한국의 현 상황은 부산과 일본 사이의 전신선 보호를 위해 일본 수비병의 주둔을 필요로 할 수 있다. 3개 중대의 군인들로 구성된 이 수비병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수하고 대신 헌병으로 대체하되, 대구에 50명, 가흥에 50명, 부산과 서울 사이의 10개의 중간 지점에 각 10명씩 배치한다. 이 배치는 바뀔 수 있지만, 헌병의 총수는 절대로 200명을 초과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 헌병도 한국 정부에 의해 안녕과 질서가 회복되는 지역으로부터 점차 철수할 것이다.


(4) 예상되는 한국 민중의 공격에 대항하여 서울 및 각 개항장의 일본인 거류지 보호를 위해 서울에 2개 중대, 부산과 원산에 각 1개 중대의 일본군을 주둔하되, 1개 중대 인원은 200명을 초과할 수 없다. 이 군대는 거류지 근처에서 숙영하고, 상기한 공격의 위험이 소멸되는 대로 철수해야 한다. 러시아 공사관 및 영사관 보호를 위해 러시아 정부도 상기 각지의 일본군 병력을 초과하지 않는 수의 수비병을 보지(持, 온전하게 잘 지켜 지탱해 나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내륙의 평온이 완전히 회복되는 대로 철수할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와 뒤이은 아관파천에 일본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살짝 짓고는 어쨌든 한반도에서 그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여기서 중요한 건 최소한의 헌병을 조선에 남겨 둔다는 대목이다. 이는 이후에 있을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 니시-로젠 협정으로 이어지는 교두보가 돼 준다.


1896년. 이 한해 동안 러시아, 일본, 중국(청)은 저마다의 계산을 가지고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미 1896년 6월 3일 러시아와 청나라는 ‘러-청 비밀동맹’을 체결했는데, 이의 핵심은, '한국의 영토 보전 원칙'이었다. 그 반대급부로 러시아는 요동반도의 여순과 대련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철도 이권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러시아가 여순과 대련을 확보하는 순간 일본은 한반도는 물론, 만주로의 진출도 원천적으로 차단되게 되었다. 아울러 러시아는 부동항의 확보(시베리아 철도와 연결된 완벽한 부동항을 얻게 된다)는 물론, 아시아 진출에 핵심 교두보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야마가타는 일본의 속내를 슬쩍 내비쳤다.



“대동강과 원선을 기점으로 하는 북위 39도 선을 경계로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분할 점취합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내놓은 ‘할지론’이 다시 기어 나오는 순간이었다. 일본은 언제나 한반도를 다 먹을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이걸 나누자는 제안을 해 왔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1896년, 근 300년 만에 다시 내놓은 것이다. 이에 대한 러시아의 반응은 단호했다.



“절대불가”



러-청 비밀동맹의 체결 문제도 있었지만(언제부터 국제사회에서 ‘신의’를 따졌던가?), 더 중요한 건 러시아의 이익이었다.



“만약 한반도 남쪽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다면 육군의 진출이 차단될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 황해 상에서 러시아 함대의 활동이 크게 제약 될 수 있다.”



어렵게 얻은 여순과 대련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한반도가 러시아 손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까지의 러시아와 일본의 행보는 서로에 대한 ‘간보기’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둘 다 한반도와 만주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all or nothing의 생각으로 한반도와 만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4dd67421974d3.jpg

 

이때 일본에서는 잠깐 ‘만한(滿韓)교환론’이란 게 튀어나왔다.

 


“러시아는 만주를 먹고, 일본은 한반도를 먹는다.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사이좋게 살아보자.”


 

란 것이 만한교환론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불성설이었다. 한반도를 쥐고 있다면, 만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고, 만주를 쥐고 있다는 건 한반도로 내려올 수 있는 교두보를 잡고 있다는 뜻이다. 설사 둘 다 올라가거나 내려올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턱밑에 칼이 들어온 상황을 두 눈 뜨고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즉, 둘 다를 먹든가, 둘 다 못 먹든가다. ‘하나만 먹겠다.’란 소리는... 개소리였다.



간을 보던 시간들


서로 눈치만 보며, 서로의 카드를 맞춰보던(맞춰보는 시늉만 한 것이지만), 1901년 러시아는 생뚱맞은 제안을 하나 들고 나온다.



“한반도를 중립화하자.”



즉, 한반도를 중립화시켜 러시아도 일본도 먹지 않는 걸로 하자는 것이다. 일본 측 입장에서는 황당한 소리였다. 당시 주청 공사 였던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는 어불성설이라며 이를 일축했다.



“만주 문제와 관련하지 않고서는 한국 문제를 만족하게 해결할 수 없으며, 러시아가 만주를 중립화하지 않 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일본은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한반도와 만주는 ‘1+1 세트메뉴’였다. 둘 중 하나를 먹는 자가 나머지 하나도 먹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만주를 먹은 러시아가 한반도를 중립화 하자는 건 만주를 다 먹은 뒤에 한반도는 천천히 먹겠단 소리였다. 고무라는 한반도와 만주를 하나의 테이블 위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고, 일본은 이 고무라의 논리를 ‘만한 일체론’이라고 불렀다. 이전에 있었던 ‘만한교환론’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한반도만 먹으면 돼. 우리 의외로 ‘소박’하다.”



라며, 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만한일체론에 이르러서는,



“야! 너희만 입이고, 우린 주둥이냐? 우리도 ‘대륙’ 먹고 싶어!”



라며, 강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고무라 주장의 핵심은,



“우리 못 먹으면, 너네도 못 먹어!”



라는 소리였다. 이에 대한 러시아의 반응은 간단했다.


5125618.gif


“개소리”



한반도의 문제는 러시아와 일본이 당사국이지만(그럼 조선은 당사국이 아니었나?), 만주의 문제는 러시아와 청나라와의 문제였다. 여기에 일본이 끼어든다는 것 자체가 개소리란 소리다(맞는 말이다. 일본이 왜 청나라 영토문제에 끼어든 거지?).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테이블 아래에 깔려있는 서로의 카드가 뭔지에 대해 ‘완벽하게’ 확인 할 수 있게 됐다.

 

러시아의 경우는,

 


“만주는 우리가 100% 먹는다. 그리고 한반도는 일정 수준의 영향력, 그래 한 반만 먹자. 좋아! 그 이상은 안 돼!”

 


였고, 반면 일본의 경우는,

 


“한반도는 100% 우리가 먹는다. 그리고 만주는... 그래 우리가 좀 손해 보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우리 몫 조금만 떼 주면 인정해 주께.”

 


였다. 서로의 ‘욕망’이 부딪히고 있었다. 영원한 평행선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건 끝까지 부여잡고, 남의 걸 먹겠다는 소리였다. 서로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일본은 약간의 양보방침을 1903년 6월 23일의 어전회의에서 결정했고, 이를 배경으로 러시아는 그해 7월 획기적인(?) 제안을 하나 내놓게 된다.

 


“한반도 남부의 너희들의 ‘특수이익(다 먹어버리라는)’을 인정하는 대신에 39도선 이북을 중립지대화 시키 자. 더 이상 양보 못해! 이 정도면 잘 쳐준 거야!”



39도선 이남을 먹고 떨어지라는 소리였다. 야마가타가 내놓은 39도선 분할 점령 안에서 진일보한 제안이었지만, 일본은 이를 거절한다.



“러시아가 만주를 통째로 먹으려 한다.”



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시기가 일본의 만주에 대한 ‘욕망’이 절정에 올랐던 때였다. 한반도는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인데, 대륙에 진출할 수 없는 한반도라면, 그냥 ‘땅’일 뿐이었다. 게다가 위에 러시아가 죽치고 앉아 있다면, 일본의 제국으로의 길은 완벽하게 봉쇄된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은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보낸다.



“중립지대를 만들고 싶다면, 조선 국경 기준으로 양쪽으로 50킬로미터(비무장지대냐?)의 지역이어야 한 다.”



러시아와 일본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다.



러일 전쟁. 그 시작점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이긴 결과, 아시아 민족은 독립에 대한 큰 희망을 품기에 이른 것입니다.”

 

러일 전쟁에 대한 쑨원의 평가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소설이 있다. 얼마 전 NHK에서 드라마로(영화에 버금가는 CG를 처발라서) 방영됐다. 드라마 오프닝 때마다 전쟁국가 일본이 마지막으로 활기차게(?) 사회를 돌렸고, 희망을 품고 전쟁에 뛰어든 시기였다며(그런 뉘앙스로) 자평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일본인 스스로가 기적 같은 승리였다며 자평하는데, ‘기적 같은 승리’가 아니라 ‘기적’ 그 자체였다.

 

언뜻 이해가 안 가겠지만, 러일 전쟁은 무모함의 극치였다.


64.jpg

한반도 남쪽에 한 발을 디디고 있는 일본과 이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러시아

 

일본 국가예산의 10배가 넘는 국가예산을 쓰던 게 러시아였다. 국력의 차이는 곧 군사력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러-일 전쟁을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눈들은 러시아의 승리를 점쳤다.



“일본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는 틀린 예상이 아니었다. 만약 러시아의 국내 사정이 없었다면, 영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일본은 패배했을 것이다. 


20525761711396394196.png

일본의 등을 밀어주는 영국과 이를 지켜보고 있는 미국


아니, 이겼어도 진 전쟁이었다. 전쟁 전비(戰費)만 일본 1년 국가예산의 8배를 들여야 했고(이는 청일 전쟁 전비의 약 8.5배에 달했다), 전사자만 5만 명 가까이 됐고(질병사는 제외. 당시 질병으로 사망한 일본군 숫자만 27,000여명에 달했다), 1년여의 전쟁 기간 동안 일본 국민의 삶은 피폐함의 극치를 달려야 했다. 당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전쟁 때문에 생활이 어려워 부인이 도망간 와중에 징병통지를 받은 젊은 아버지들이 어린 자식과 부모를 생매장하고 입대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정도였다.



“어차피 내가 군대에 가면, 우리 가족은 굶어죽는다. 비참하게 굶어죽을 바에는 내 손으로 죽이고 입대하는 게 낫다.”



지금의 시선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당시 일본의 삶이 그랬다.


러일 전쟁 이후 런던군축회담까지 일본 국민들은 ‘군함’을 건조하기 위해 딸을 팔고, 자식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까지 몰려야 했다. 러-일 전쟁 이후 ‘제국열강클럽’에 가입한 일본은 이후 제국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군비투자에 열을 올리게 됐고, 국민들의 삶은 ‘막장’으로 치닫게 됐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러-일 전쟁은 일본 국민에게 ‘지옥’을 안겨줬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일본은 ‘자위를 위해’ 러-일 전쟁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어떤 의미의 자위인지는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일본은 너무 많은 것을 잃어야 했고(물론, 정치적-선언적 의미에서 충분한 성과를 거뒀지만), 이후에 더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재미난 사실은 러-일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조선이 일본 편을 들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은, 일본의 승리를 위해 적극 협력한 경우가 많았다. 왜 그랬을까? 일본이 승리해야지만 조선의 독립이 유지된다고 믿었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의 승리를 빌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러-일전쟁은 한반도 문제가 아니라 만주 문제다.


‘러-일 전쟁’을 ‘청-일 전쟁’과 유사한 사태로 바라봤던 것이다. 청-일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조선의 독립은 유지됐던 전례로 봤을 때 이번에도 그럴 것이란 막연한 착각. 거기에 더해 ‘러-일 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문제가 아니라 만주에 관한 문제라 생각했던 것이다. 한반도와 만주가 ‘1+1 세트메뉴’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국제정세에 둔감한 모습은 이후 닥쳐 올 일본의 침략야욕에 무방비하게 당하는 당연한 결과로 이어졌다.


둘째, 인종주의적인 판단.


앞에서 말한 쑨원의 말처럼 당시 아시아권의 많은 정치지도자들은(그 후의 많은 아시아 지도자들도) 러-일 전쟁을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봤다(이는 서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색인종에게 자신감을 주고, 반대로 백인종에게는 시기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러일전쟁은 세계 미증 유(未曾有,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의 인종적 대전란의 예고가 될지 모른다. 일본이 강국이 될수록 일본의 불안도 커지고 타국민의 불안도 커지며, 세계평화는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메이지 시절의 소설가인 도쿠도미의 말이다. 이 말처럼 러-일 전쟁의 성격은 ‘인종주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었다(당대의 시선으로는). 아니, 인종주의 전쟁이 맞았다. 20세기 초 전 세계 지표의 90%는 백인이 통치하고 있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쓰고 나서 생물학적으로는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지만, 사회적으로는 제국주의자들의 ‘전가의 보도’가 돼 주었다. 바로 ‘사회적 다윈이즘’의 출현이다. 적자생존이라는 이론을 사회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열등한 유색인종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 인종적인 우월감과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지워내기 위해 ‘유색인종’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고, 이들을 인간과 짐승의 사이에 있는 존재로 규정해 버리고는 철저히 탄압하고 지배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제동을 건 것이 바로 ‘러-일 전쟁’이었다.


유색인종이 세계열강. 그것도 영국과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러시아와 싸워 이겼다는 건 세계사적인 사건이었고, 그 동안 핍박 받아왔던 수많은 유색인종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돼 주었다(반면 서양인들에게는 200여년 넘게 공고하게 만들어왔던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깨버리고, 그 빈자리에 ‘황화론’을 채워 넣는 계기가 돼 주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람들은,



“로스께(ろすけ, 러시아인을 멸시하는 말) 보다는 쪽바리가 낫지.”



란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 누구도 1년 후에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예감하지 못했다.


32-ComicLg.jpg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http://hohodang.com/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펜더


편집 : 딴지일보 cocoa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