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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엘비스를 기억하라


2002.4.1. 월요일

딴따라딴지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집구석에서 뒹굴거리던 본 우원과 자당 어른은 여느 때처럼 연예인 얘기와 남자 얘기로 긴 오후 시간을 죽여대고 있었다. 본 우원이나 본 우원의 어머니나 근래에는 심각한 로맨스 부재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까닭에 이야기는 거슬러 거슬러 울 어머니의 고딩 시절까지 기어 올라갔다.


울 어머니, 파릇파릇한 소녀 시절엔 제복 입은 남자들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다고 한다. 갈래머리를 땋고 중앙청 앞길로 등하교를 할 때마다 군복입고 호루라기를 달고 있는 헌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오셨다는 말을 하시며 어머니는 먼산 마저 바라보셨드랬다. 하지만 어머니의 소녀시절 취향을 순수하게만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아는 것이 많아져버린 본 우원은 문득. 울 어머니의 제복 페티쉬가 어디서 시작된 건지 궁금해지고 말았다.


" 왜 제복입은 남자를 좋아했던 건데?"


" 글쎄…어릴 때 엘비스가 군복 입고 찍은 사진을 봤는데 그게 아주 멋지드라구.."









빛바랜 기억 속의 엘비스 in 제복


엘비스가 어디 군복만 입었겠냐마는 엘비스의 군입대 시기와 울 어머니의 나이를 대충 짚어보니 군복의 엘비스 사진이 어머니가 처음 접한 그의 모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그의 노래가 꽤 자주 들렸었다. 발라드 취향의 어머니 덕택에 꽤 자주 들어야만 했던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 [Love me tender] 같은 기름진 노래들은 어린 본 우원에게도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막연한 로맨스에 대한 꿈을 매일 꾸게 했던 것이다.
 


 엘비스, 소녀들의 꿈을 훔치다.


엘비스에게 매료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나타나기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 예감했던 백인의 얼굴로 흑인의 노래를 부르는 뛰어난 가수였으며, 잘생긴 얼굴과 멋진 미소로 소녀들의 화장대를 장식하는 핀 업 보이었다.


사랑할 대상을 찾아 헤매고 판타지를 투영할 스타를 찾아 나선 소녀팬들에게 모든 논쟁과 그의 육체에 부여된 의미들은 한 컷의 사진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척 베리나 제리 리 루이스로부터 시작될 수 있었던 로큰롤 역사의 진정한 시작을 뒤로 미뤄낸 엘비스의 진정한 힘은 그의 육체 자체였을 것이다.


EPE (Elvis Presley Enterprises) 의 집계에 따르면 해마다 그레이스랜드를 방문하는 방문자의 절반 이상이 25세 미만, 그러니까 살아있는 엘비스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젊은이들이라고 한다. 왜 그들은 그를 추억하기 위해서 그레이스 랜드를 방문하는 것일까?


인더스트리얼과 테크노의 시대에 전복을 꿈꾸는 젊은 로큰롤의 상징으로서 그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면 답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그가 멋진 외모의 섹시한 남자였으며 시대를 초월한 로맨틱 보이스의 수퍼스타였다는 점은 맥락 없이 그를 사랑하는 젊은 팬들의 존재를 설명하는 타당한 이유가 될 것이다.







콘서트 무대이건 영화에서이건 간에 그는 불타 오르는 성적인 에너지 그 자체였다. 그가 허리를 흔들어대지 않는 순간에도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을 도발했으며 그가 내뿜는 아우라는 매우 분명하게 팬들을 성적으로 자극해왔다. 그가 노래 부르는 모습이 청소년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에드 설리반쇼의 연출진들은 그가 출연했을 때 허리 아래를 절대 비추지 않아서 미국 TV 검열의 한 획을 그었고 빌리 그래이험 목사는 그의 음악이 악마의 것이라고 선언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자연인 엘비스는 자신의 그러한 이미지를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난 노래 부르는 걸 즐깁니다. 젊은이들도 내가 그걸 좋아한다는 걸 알아요. 내 음악에서 섹스의 코드를 읽는 사람들은 깨끗치 못한 마음을 가진 것 같아요. 나는 노래할 때 섹스를 생각하지 않아요. 만약에 내가 섹스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그 사람들이 그걸 찾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 - 선량한 많은 사람들은 그저 내가 정직하고 진실한 감정으로 노래한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 엘비스 프레슬리


"I enjoy singing...and the kids know I do. People who read sex into my music have dirty minds. Sex isnt in my mind when Im singing. If it seems that way to some people its because theyre looking for it. I think most people...the nice kind of people...know that Im just singing with honest and sincere emotion." - Elvis Presley


 









요런 부니기의 호색한인줄 알았더니...


"나 외로워서 죽을거 같아요.([Heartbreak Hotel]) 라면서 처절하게 허리를 돌려대며 무대에 설 때마다 섹시함을 줄줄 흘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엉덩이를 가진 그가 저런 말을 했다는 거 쩌매 실망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가 골반이라는 뜻의 Pelvic과 그의 이름을 합친 Pelvis 라는 별명을 끔찍하게 싫어했다는 비교적 잘 알려진 사실에서처럼 자연인 엘비스는 분출하는 젊음의 표상이 되기에는 다소 사상이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는 살아 생전에는 소녀 팬들의 욕망을 투영할 육체로  죽은 후에는 젊음의 매력과 에너지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미국 문화의 기저에 자리 잡아 왔다. 다시 한 번, 모든 것은 이미지와 그것을 담는 육체의 문제인 것이다.


해마다 60만이 넘는 관광객들은 그가 살았던 그레이스 랜드를 찾아 발걸음을 옮기고, 그의 사소한 사생활을 파헤치거나 엘비스 현상을 다루는 책들이 1400권이 넘으며 영국에서는 월간 엘비스(Elvis Monthly)가 1960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발간되고 있고 엘비스교의 진실한 신도 2000여명은 땅콩버터와 바나나 샌드위치의 성찬식을 이어오고 있다. 재작년부터는 발달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활동이 추가 되었는데 복제 엘비스 만들기 를 재촉하는 팬들의 서명운동이 그것이다..









엘비스의 대저택 그레이스랜드의 전경


세계 곳곳에서는 가짜 장례식 후에 숨어 지내는 엘비스를 만났다는 증언자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 자신이 엘비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미국인들이 - 18명의 흑인을 포함해서 - 500명을 넘는다고 한다. 라스베가스에는 엘비스를 흉내내서 먹고 사는 가짜 엘비스들이 넘쳐나고 1999년 BMG 에서는 FTD (Follow That Dream; 엘비스 주연의 1962년 영화) 라는, 컬렉터를 위한 레이블을 따로 출범시켰다.


그가 젊음 이라는 코드로 불릴만한 로큰롤 문화의 시작점에 있었고 수려한 외모와 로맨틱한 기름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의 소녀들까지 폭넓게 감동시키고 있다는 점을 백번 인정한다고 해도 이 엄청난 엘비스 사랑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오바하는 것 처럼 보이지 않나? 이유없이 반항해댔던 제임스 딘의 갑작스러운 죽음 - 그것이야 말로 청춘의 상징이랄 정도로 화끈하다 - 도 마릴린 먼로가 가진 불멸의 미소도 이만한 파급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이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될까? 대체 왜 사람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그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엘비스 팔아먹기







확실히 그는 미국의 전설이 될만한 많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트럭운전사로 생계를 꾸려나가다가 우연히 기회를 잡아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가수로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가 활동을 중단하고 다시 재기한 그의 스토리는 전형적인 영웅담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비극적이고 갑작스러운 죽음과 말년의 망가짐조차 그의 이미지에 그리 나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영웅의 죽음에 비극의 드라마틱함과 영혼의 깊이를 더했을 뿐.


엘비스가 활동하던 당시, 그는 가장 효과적으로 상품화된 스타 중의 하나였다. 그의 매니저인 톰 파커는 팬클럽을 이용한 상품 판매의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미국 전역을 커버하는 방송망을 이용해 콘서트의 비디오를 팔았다. 그는 영화와 음반, 콘서트와 비디오등 엘비스라는 소스를 이용한 다각적인 상품을 개발하여 그의 상품 가치를 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레이스랜드의 내부 응접실


그가 사망한 후 엘비스 마케팅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모든 이미지와 상품에 대한 권리을 소유하고 있는 EPE (Elvis Presley Enterprises) 는 1981년 엘비스의 저택을 일반에게 공개했고 곧 그 집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방문자가 많은 집이 되었다. 가장 많은 방문객을 가진 집은? 당연히 백악관이지.


처음에 EPE는 엘비스의 땀을 모아둔 작은 병이나 화장실 휴지등 당황스러운 아이템들을 포함하여, 그의 사적인 물품들을 판매하는데 주력했다. 물론 그를 가까이서 느끼기 위해 땀 몇방울에 어마어마한 돈을 기꺼이 지불할 만한 골수 팬들은 늘어서 있었으므로 꽤 괜찮은 장사를 했음이야 의심할 바 없지만 화장실 휴지까지 동원해도 그가 남긴 물품들은 전 세계의 팬들을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새로운 사업의 방향을 찾아내야만 했던 EPE 는 미국 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엘비스의 초상을 이용한 물품을 만드는 업체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면서 그들만이 엘비스에 관련한 상품들의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팬들과 업계에 확인시키는 한편 새로운 엘비스의 이미지를 잡아내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영원한 섹스 심볼로 남기 위해, 엘비스의 후기 모습은 장사꾼들의 손에 철저히 지워져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1970년대 중 후반의 살이 찌고 망가진 엘비스의 이미지는 철저히 거부되었다. 엄청난 시장 잠재력을 가진 젋은 층들을 사로잡기 위해 그들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의 성숙하고 매력적이고 늘씬한 엘비스의 이미지를 택했다. 그들은 젊고 뛰어났고 반항적이며 로맨틱한 초기의 엘비스의 이미지를 이용한 백 여 개의 상품들 - 시계, 벨트, 전화기, 등등 - 을 개발하였고 로열티를 포함해 다소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는 그들의 상품들은 500개 이상의 각국에 산재해 엤는 팬클럽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적 판매망을 넓히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팔린다는 것은 곧 기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팔기 위해 끊임없이 기억시켜야만 했다. 엘비스의 팬클럽을 관리하고 그에 관련한 사소한 정보들을 담은 뉴스레터를 끊임없이 전세계적으로 발송하며 게시판을 통해 엘비스는 살아있는가? 라는 논쟁을 지속시키는 것은 확실히 장사에 도움이 되었다. 그레이스 랜드를 찾는 사람들은 흰 가죽 구두를 신고 검은 선글라스를쓰고 엘비스의 얼굴이 그려진 긴 접시에 밥을 먹으며 그를 기억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엘비스는 추억 속의 인물인 동시에 현재를 살고 있는 사회적인 상징이 되었다. 죽은지 25년이 다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재의 미디어와 상품들 속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과시하게 되는 불멸의 상품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뭐든지 팔아치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엘비스 현상의 진짜 수혜자가 EPE 라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요란함을 반대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현상의 한쪽 언저리에서는 그와 한 시대를 살았던, 그를 사랑하고 추억하는 진지한 팬들이 있기 때문이다.



 엘비스를 추억하기


어떤 사람이 평균 이상의 기억력을 가졌는지 알아보는 간단한 방법은 제도 교육에 편입되어 짜여진 스케줄을 가지기 전에 일어난 일 중에 몇 가지나 기억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라고 한다. 관련된 사진이 없는 기억이 5개 이상이면 그 사람은 평균보다 훨씬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것이랜다. 심심하면 한번 해보시라. 본 위원은 두 개 밖에 생각 안난다.


낡은 사진 한 장일지라도, 기억이란 항상 기댈 구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변진섭의 노래가 자연스럽게 학창시절의 얼굴들을 떠오르게 하는 것처럼 스타들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공통된 기억의 매개로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하다.


매해 엘비스의 기일이 되면 그가 사망한 해부터 단 한해도 성지순례를 거르지 않았다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행렬이 그레이스 랜드로 이어진다. 그레이스 랜드에 모여든 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바나나 샌드위치를 먹으며 엘비스를 추억하고 그들의 젊음을 다시 호출하는 신성한 의식을 치른다.









연중 끊이지 않고 그레이스랜드를 찾는 엘비스 추종자들


엘비스에 대한 농담들을 손자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할머니들의 자긍심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을까? 그들이 사랑했던 바로 그 사람이 시대를 넘어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고도의 자본주의적 상술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기쁨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엘비스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노랗고 빨간 플레어 스커트 자락을 흩날리며 공연장에서 괴성을 질러대던 시절을 기억할 수 있는 미국의 아줌마들에 비해 우리의 아줌마들은 기대서 기억할만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여서 슬프다. 고도의 상술이건, 복고 마케팅이건 젊은 시절의 추억 한 자락 정도는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게 아닐까? 사랑하던 오빠들을 다 뺴앗기고 밥상머리로 일찌감치 쫓겨난 우리의 아줌마들일지라도..
 






다시 햇볕이 길게 드는 어느 일요일 오후,  모녀는 게으른 수다를 다시 시작했다.


"엄마 엘비스 안죽었을지도 모른대."


"뭐 그런 소리 하는 사람들도 있나부드라. 근데 그게 설마 진짤려구."







"인터넷에 보면 관 열고 나오는 사진도 있어. 어떤 사람은 뉴욕에서 비둘기 모이 주는 것도 봤구 멕시코에서 주유원으로 일하는 거 본 사람도 있대. 독일에서 택시 운전한다는 소문도 있었구.. 또 모드라. 아 참 라스베가스에서 엘비스 모창하는 가수로 일한다는 소리도 있구.."


"니가 지어낸 소리냐?"


"아니라니깐. 진짜 본 사람 있대."


"헛소리 지껄여서 먹고 사는 게 너 혼자는 아닌가부다."


"진짜일지도 모르잖아. 내가 라스베가스 가서 찾아보고 올까?"


"밥이나 먹자."


이렇게 엄마는 스무살의 추억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엄마 덕분에 잠시 딴따라로 옮겨온 남로당 여성위원
페니레인 (imnotsorry@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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