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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잃어버린 우리의 가위질 유산을 찾아서

2002.2.17.월요일
딴지 영진공 문화유산 발굴단


 

 

엠마누엘 베아르라는 불란서 처자를 아시는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눈동자와 도톰하면서도 쫙 찢어진 육감적인 입술로, <마농의 샘>, <금지된 사랑>, <프랑스 여인>같은 영화 속 남자들을 저항할 수 없는 애증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던 그 아름다운 처자 말이다.

 

흑인 불법 이민자 구제 활동 등 영화 외적으로도 기특한 행보를 보여온 이 처자는, 가장 긴 누드연기를 보인 여배우로도 유명하다. <누드모델>이라는 238분짜리 영화에서 3시간가량 훌러덩 벗고 연기했던 것이다.

 

1994,5년 경,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 안에 들어서던 그 수줍은 설렘을 본 우원,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훔치며 104분 만에 극장 문을 나서야했다.

 

베아르가 영화 내내 거의 옷을 걸치지 않고 연기한 탓에 그녀의 터럭이 수도 없이 노출되었고 그때마다 검열위원은 바지런히도 가위질을 해대어 결국 원래 길이의 43% 만이 남겨진 것이었다.

 

걸레짝이 되어버린 영화 내내 베아르는 작업실의 이쪽저쪽을 순식간에 넘나드는 축지법을 시현했고, 마구 웃다가 갑자기 울어대는 미친년스런 연기를 했다. 늙은 화가의 지루하고 고단한 창작과정을 보여주는 영화가 검열위원들의 신묘한 가위질 덕분에 쉬르리얼리틱 사이코무협영화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누드모델>이 오늘날 개봉한다면, 물론 등급위원들은 변함 없이 터럭마다 쫓아다니며 색칠공부에 여념이 없으시겠지만, 당시처럼 영화의 절반 이상이 거덜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예전처럼 호락호락 그런 야만을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메시지 전달이나 작품 전체의 유기적 완성을 위해선 일반시민의 정서에 다소 어긋나는 장면이라도 용납할 수 있다는 것이 <죽어도 좋아> 이후의 상식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죽어도 좋아> 사태 이후에도 칼자루는 여전히 등급위가 갖고 있다. 등급보류같은 위헌적 조치가 아니더라도 "윤리성 및 공공성을 확보하고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등급위원들의 우국충정을 관철할 방법은 여러 가지 있기 때문이다.

 

등급기준에 어긋난다고 판단된 장면들은 앞으로도 계속 가위질로 잘려나가거나 줌 처리, 하트 처리로 화면에서 사라질 것이고, 많은 관객들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그런 사태를 한국인의 숙명처럼 감수할 것이다.

 


 

 

물론 등급위의 가위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누군가는 자라나는 청소년 보호를 위한, 혹은 건전한 사회윤리를 지키기 위한 필요악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반면 여의도 클럽 회장이나 자녀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 사업본부장, 혹은 기독교윤리실천본부 총무가 성인인 자신의 판단능력과 윤리의식을 그들보다 열등하거나 불완전하다고 파악한다는 사실에 불쾌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그런 평가는 바늘 끝에 천사가 동시에 몇 명이나 올라설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만큼이나 공허하거나 희극적이다. 등급위가 잘라낸 그 장면들을 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그 장면들의 위험성이나 부당함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최종 소비자인 관객의 의견이 등급심의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이런 폐쇄적인 심의방식은 엘리트주의적인 독선일 뿐이다. 하물며 일반상식이나 공공성이 등급위가 주장하는 가위질의 근거라면, 일반 대중이 그런 장면들을 실제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충분히 큰 표본수를 바탕으로 한 정량화된 데이터가 반드시 제시되어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일반이나 공공은 어쩌면 그들의 편협한 윤리관, 예술관이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동안 등급위의 가위질 논쟁에서 부족했던 건 바로 이거다. 등급위가 잘라낸 장면들,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거나 미풍양속을 해할 우려"가 있다며 지들 맘대로 못 보게 한 바로 그 장면들을 관객들이 직접 보고, 그런 장면들이 정말 정신건강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치는지 직접 확인해봐야 한다.

 

그러고 나면 분명해질 것이다. 그동안 등급위가 헛지랄들을 해 오셨는지, 아니면 국민정신건강수호를 위해 온갖 욕을 얻어먹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오셨는지.

 


 

 

애들은 가!!
아래에는 미성년자가 보기에 졸라 부적절하다고 흔히들 말하는 사진이 많이 있다. 물론 너네들이 웹질하면서 수도 없이 봐왔을 헨타이스런 사진들에 비하면 심심하기 그지없는 사진들일 테지만, 여튼 애들은 가라. 너네들은 이런 거 보면 안 돼.

 

(라고 말 안하면 안 되겠지? 쩝...)

 

다들 알다시피 가장 철저한 가위질 대상은 자쥐, 보쥐 및 부속 터럭들이다. 예외가 없는 건 아니다. <크라잉게임>처럼 자쥐가 나오지 않으면 영화가 말이 안 되는 경우나, <퐁네프의 연인들>에서처럼 실루엣만으로 처리하였거나, 얼라의 잠지라면 등급위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힘입어 가위질되지 않는 수도 있다.








 
 

 

 

<퐁네프의 연인들> 중에서

 

<희극지왕> 중에서

 

하지만 그밖에 경우라면, 꼴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삽입된 자쥐라도 짤 없이 삭제되고 만다. 예컨대 <애니 기븐 선데이>에는 미식축구 구단주인 카메론 디아즈가 라커룸에 들어와 선수들과 악수하는 장면이 있다.

 

방금 경기를 마친 떡대들은 샤워하려고 홀라당 벗고 있었기 때문에 보시는 바와 같이 자쥐를 자랑차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장면은 당연히 삭제되었다.

 

 

라스 폰 트리에의 초기작 <범죄의 요소>에도 딱히 꼴림을 위해서라고는 보기 힘든 터럭 노출씬이 있다. 방금 한 명랑을 마치고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남자가 열이 받아서 여자를  위협하자, 여자가 창문 쪽으로 도망가는 장면이다.

 

어두침침한데다 터럭이 잘 드러나지 않는 자세인데도 등급위원들께선 터럭이 있을 거라 추측되는 부위에 한사코 검정칠을 하셨더랬다.






 
 

 

거시기 보이냐? 안 보이지.
근데 거기다가도 검정칠을 했다...

 

자쥐 노출 금지의 대원칙 때문에 여성동지들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할 배우는 아마도 이완 맥그리거가 아닐까 싶다. 본 우원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이완 맥그리거는 <트레인스포팅>과 <벨벳 골드마인>에서 그 앙증맞은 사이즈의 자쥐를 드러냈다.

 

방년 14세(!)의 미성년자와 방금 한 명랑을 끝마친 후 축 늘어져 있는 자쥐와, 노래 부르다 제 흥에 겨워 빤쓰까지 벗어제끼고 깡총대며 뛰어다닐 때, 리드미컬하게 출렁대는 자쥐가 그것이다. 특히 <벨벳 골드마인>에선 군의관에게 똥꼬 질병 여부를 확인 받는 듯한 민망한 포즈도 선보였더랬다.








 
 

 

 

<트레인스포팅> 중에서

 

<벨벳 골드마인> 중에서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의 레즈비언 커플 같은 특이취향을 가진 여성동지라면 하비 케이틀의 자쥐도 궁금하실지 모르겠다. 그의 자쥐는 <배드 캅>과 <피아노>등에서 등장했는데, 특히 <피아노>에선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관록 넘치는 우람 사이즈의 자쥐를 선보여 에이다(홀리 헌터 분)를 기겁하게 만든다.

 

 


 

 

위에서 살펴본 자쥐들이 리얼리티 부여나 팬 써비스를 위해 삽입된 반면, 어떤 자쥐들은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굳이 자쥐까지 보여주고야 마는 그런 노골적인 방법론을 어떤 관객들은 불쾌해하며 공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불쾌감 자체가 감독이 의도한 효과일 수도 있고, 대체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고유한 상징성 때문에 자쥐가 노출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일 수도 있다.

 

자쥐씬이 영화 전체의 완성도에 핵심적인 기여를 하는 모범적인 선례로는 <감각의 제국>의 피범벅 자쥐를 빼놓을 수 없겠으나, <부기 나이트> 마지막 장면의 감동적인 자쥐씬 역시 잊을 수 없다.

 

 

그 장면에서 왜곡된 남성성의 허망한 말로를 발견하느냐, 아니면 쎄라비의 교훈을 얻느냐는 물론 관객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빨간 직사각형 대신에 그 유명한 33센티의 자쥐를 직접 보았다면, 분명 더욱 감동인 장면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대여섯 개의 하트를 동시에 운용하는 하이 테크닉으로 일말의 터럭노출도 허용하지 않는 막강 위용을 과시하시던 <패션쇼>의 누드 패션쇼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패션 산업의 허위를 고발하려는 의도였는지 아니면 대충 눈요깃감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려는 안이한 의도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영화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남성동지들에게는 더더욱.








 
 

 

 

요렇게 나오던 것이...

 

요렇게 변했다는 거쥐...

 

하트를 발견한 순간 남자관객들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허탈감의 탄성과 극장 안 가득 무겁게 맴돌던 절망감이 요즘도 본 우원의 심장을 옥죄어 오곤 한다.

 

물론 어떤 노출씬들은 관객들에게 상당한 정서적 충격이나 불쾌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장면들이 능력 없는 감독의 선정주의의 볼모로 삽입된 것이 아니라면, 가위질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상영되어 관객의 정서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공명할 수 있는 예술적 가치 정도는 당연히 갖고 있다.

 

어떤 관객이 피터 그린어웨이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를 보고 먹음직스럽게 익은 남자의 시체에 식인의 욕구를 느끼며, 문명과 야만의 그 작은 차이에 놀라게 된다면, 적어도 제임스 본드가 국적불명의 산사에서 빠굴하는 장면에 꼴리는 것보다는 영양가 있는 영화감상이라 할 것이다.

 

 

또한 까뜨린느 브레야의 <로망스>에서 사고를 위장한 가스폭발로 동거남이 죽는 장면과 교차편집된 마리의 출산장면의 클로즈업은 욕구불만 여성의 꼴림의 판타지를 남성성에 대한 복수극이자 여성성에 대한 찬가로 일거에 변신시키는 힘있는 장면이었다.

 

 

출산의 신비라는 주제의 성교육용으로도 쓰일 수 있음직한 저 장면이, 예컨대 <나쁜남자>나 <오아시스>에서 예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강간이나 강간미수 장면보다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등급위가 지들 맘대로 잘라낸 장면들은 영화의 리얼리티나 작품의 완성도를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삽입되어야 했던 것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맥락에 대한 파악도 없이 자쥐나 보쥐, 터럭만 발견하면 다짜고짜 가위질부터 해대니 닭짓이라 욕을 먹는 거다. 그런 식으로 하는 심의라면 10분에 많게는 7만원씩 주며 등급위에 등급분류를 의뢰할 이유가 없다. 과자 한 봉지만 주면 5살 먹은 내 조카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애시당초 등급위가 문제삼는 건 영화의 소재가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는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시체와 빠굴하거나(<키스드><잔 다르크>), 아버지와 빠굴하거나(<사랑과 슬픔의 여로>), 염소와 빠굴하거나(<빠드레 빠드로네>), 4살의 육체를 가진 남자와 빠굴하거나(<양철북>), 14살 먹은 여중생과 빠굴하거나(<트레인스포팅>), 수녀를 강간하거나(<미시시피 버닝>), 단지 눈요깃감으로 강간하는(수천편) 장면도 터럭이나 자쥐/보지가 나오지 않으면 극장에서 상영되고 비됴나 DVD로 출시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맥락상 아무리 자연스럽고 의미 있는 장면도 일단 터럭이나 자쥐가 나오면 바로 삭제다. 왜냐하면 그런 노출씬은 친구의 배를 사시미로 수십 번 담그는 장면이나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이나 그런 강간이 화간으로 둔갑하는 장면보다 더 위험하고 공공성에 더 어긋나며 일반상식에서 더 벗어나기 때문이란다.

 

긴 말 않겠다. 직접 봤으니 독자들 너네들이 판단해봐라. 저 장면들이 정말 보아서는 안 될 장면들인가?

 

 

 
꼭도에서 꼭또로 개명한
 가위질 문화유산 발굴팀장
꼭또(lachrym@postech.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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