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1년 전의 약속

2001.12.18.화요일

딴지방송국 방송팀장
 

성탄절과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도 사상 유례없는 폭설에 덮여 조금씩 가라앉던 작년 이맘 때였습니다. 저는 병상에 있는 프로야구단 롯데 자이언츠의 주전 포수 임수혁 선수를 취재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딴지일보에 입사한 후 제게 주어진 첫과제가, 당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한국프로야구선수협의회와 한국야구위원회(KBO)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었으며, 프로야구 선수도 엄밀한 한 사람의 노동자이므로 경기중 부상이라는 산업 재해를 당한 임수혁 선수를 취재한다면 선수협 문제에 보다 본질적인 접근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임선수의 사고와 관련된 당시 신문 기사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000년 12월 27일 오후 2시. 서울중앙병원 신경과 154동 34호.

임선수가 입원해있는 병실을 찾아갔을 때, 저는 솔직히 적잖이 놀랐습니다. 특실은 아니더라도 명색이 프로야구 선순데 당연히 개인 병실을 쓸 거라는 제 생각과는 달리, 보호자와 가족들로 붐비는 6인 공동 병실에 임 선수가 누워있는 것이 낯설었습니다. 또한 목에 구멍을 내서 파이프를 연결하고 그 파이프를 통해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가래, 격한 기침 소리, 초점 잃은 시선 등 예상 외로 심각해 보이는 임 선수의 그런 모습도 역시 저를 무척 당황하게 했습니다.

임선수의 증세와 관련하여 당시 임선수를 담당했던 서울중앙병원 신경과 이 봉호 의사의 설명은 이러했습니다.

임선수의 병명은 저산소성 뇌병증(Hypoxic Brain Damage Injury)이다. 이것은 부정맥으로 심장의 기능이 급격히 저하되고 이로 인해 뇌에 혈액이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여 저산소 현상이 발생, 뇌기능을 떨어뜨리는 병이다. 일반인의 경우에는 즉사할 수도 있으나 임선수의 경우에는, 깨어있지만 감각과 지각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이다. 현재로는 자발적으로 호흡을 하지만 이것이 여의치않은 경우, 기도가 막힐 수도 있으며 기도폐색을 막기위해 강제 호흡을 유도해야 한다. 그리고 가래를 강제로 빼내주어야 하고, 목에 박은 파이프 주위에 살이 차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3일 간격으로 파이프를 새 것으로 교체해 주어야 한다.

저산소성 뇌병증이 지속되면 뇌피질 위축증이 발생하는데 이 경우에는, 정상인으로 돌아오는 것은 과학적으로는 불가하다. 뇌의 기능은 80세 이상된 치매 노인의 것과 유사한 상태이다. 현재로서는 치유보다는 생존에 의미를 둘 수 밖에 없다.

임선수는 4월 18일 운동장에서 쓰러진 즉시 강남시립병원으로 후송, 응급 조치를 받음으로써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습니다. 이후 서울중앙병원으로 이송되어 뇌파 검사를 받은 다음 줄곧 이 곳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임선수는 더 이상 서울 중앙병원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비응급환자인 경우, 3차 진료 기관에서 30일 간의 추가 치료에도 상태 호전을 기대할 수 없는 장기 환자는 2차 요양소로 옮겨야 한다는 의료 관련법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손가락 하나 자기 마음대로 못 움직이는 임선수를 옮기려면 불편도 불편이겠지만 비용도 만만찮았습니다. 자기운동능력을 상실한 중환자를 번번이 옮겨야하는 과정에서 생길지도 모르는 만일의 사태를 막고, 보다 더 안정적인 치료를 하기 위해 계속해서 입원 치료해야겠다고 판단한 서울중앙병원의 의료진들이 임선수를 의료관련법 예외 사항이라고 여러 차례 상부에 건의를 했지만, 다른 중환자들과의 의료 혜택의 평등과 병상 부족 등의 이유로 반려되자 임선수의 가족은 하는 수 없이 병원을 두 번이나 옮겨 다녀야 했다고 합니다.

한 달에 150만 원이나 되는 간병인의 비용도, 사업 실패로 생활고를 겪고 계시는 임선수의 아버지와, 임선수의 연봉이 수입의 전부였던 부인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음은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2000년도 임 선수의 연봉이 5,500만 원이었다고는 하지만 8개월 동안의 병원 생활로 인해 그 돈마저 치료비로 대부분 다 써 버린 데다 그나마 10월 30일자로 임 선수는 구단으로부터 방출 처리되었습니다. 치료비는 고사하고 생계조차 장담할 수 없는 어려운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임선수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의 가족은, 아버지 임윤빈(65)님, 어머니 강경애(63)님, 부인 김영주(33)님, 그리고 아들 세현(8)군, 여진(6)양, 이렇게 모두 다섯 식구입니다.

취재를 하는 중간중간에도 임선수의 목을 통해 터져나오는 가래가 바닥에 튀고, 제 옷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주시면서 임선수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야구선수라고 신문에서 봤다면서 처음엔 다른 환자들이 아는 체를 하다가도, 기침을 하고 가래를 토하면 지저분하다고 다들 싫어해요. 자기들 몸도 불편하고 제대로 못쉬니까 욕을 하기도 하고. 개인 병실로 가야하는데 비용이 만만찮아서…"

하지만 다행히도 임선수의 전 소속 구단인 롯데 자이언츠도 임선수에 대한 지원을 계속 하고 있었고 특히 구단 홍보팀의 박웅필 차장님은 저와의 전화 통화에서 "임선수는 영원한 롯데맨이다. 롯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임선수와 그의 가족을 영원히 보살필 것이다"라고 해서 한 편으로는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임선수의 병이 하루 이틀 일이년 내에 완치되지 않을 것이 명백한 현재 상황에서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이상, 책임자가 바뀌거나 구단의 방침이 바뀌어도 이 약속이 계속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운동장에서 쓰러졌을 때 수혁이의 가슴만 몇 번 쳐주었더라도"라며 흐느끼시는 아버지는, 임선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달라는 제 부탁에 몇 번이고 눈물을 훔치시면서 어렵게 어렵게 편지 한 통을 써 주셨습니다. 그리고 "수혁아, 너를 보려고 딴지일보에서 이렇게 와 주셨는데 벌떡 일어나서 인사라도 해야할 것 아니냐"며 다시금 오열하시는 모습에 저도 끝내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임선수와 그 가족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우선 딴지의 독자들에게 임 선수의 근황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원 문을 나서자 다시금 폭설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준비했던 임선수의 이야기는 결국 기사화되지는 못했습니다. 선수협 문제의 본질을 다루고자 했던 주제에서 벗어났고, 또 다른 매체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이 임 선수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소재의 차별성에서 뒤떨어져 최종 편집 과정에서... 잘렸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간절했지만 임 선수의 이야기와 사진들은 그냥 제 파일 보관함에 그렇게 넣어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났습니다.

2001년 올 한 해는, 작년보다 더 많은 관중이 야구장을 찾았고 박찬호, 김병현 선수 등 해외파의 선전으로 그 어느 때보다 야구에 대한 일반인들의 열기는 높았습니다. 그 열기 못지 않게 임선수에 대한 모두의 애정도 뜨거웠습니다. 롯데의 김용희 수석 코치, 박정태 선수, OB 베어스의 안경현 선수, 장원진 선수, 삼성의 이승엽 선수, 프로축구 서정원 선수, 메이저리그 박찬호, 김병현 선수 등 그 외에도 많은 동료 야구 선수들과 대한민국의 운동 선수, 연예인, 또 각계 각층의 저명 인사들이 하나같이 임선수를 잊지않고 임선수의 회복과 임선수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며 물심양면으로 끊이지 않는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큰 힘이 되는 수많은 야구팬들이 팀과 연고를 떠나 임선수를 돕기 위해 일일찻집과 호프를 여는 등 다양하고 직접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저도 마치 제 일인 양 마음 뿌듯했습니다.

오늘,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제가 굳이 임선수의 이야기를 이렇게 다시 올리는 것은 아직도 제 마음 속에 남아있는 1년 전의 약속 때문입니다.

2001년 12월 17일 오전 10시.

저는 다시 임선수의 병실을 찾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의료 관련법 때문인지 2001년 1월 5일, 임선수는 한림대학교 강동성심병원 신경과 일반 병실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저와 촬영을 맡은 이윤철 PD를 다시금 반갑게 맞아주신 임선수의 아버지는, 우선 관심가져 주신 팬들과 딴지일보 독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하셨습니다. 그리고 강동성심병원의 배려로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병실을 비워달라는 요청은 들은 적이 없다고 애써 강조하셨습니다.

예순 살이 넘는 다른 다섯 명의 환자들과 공동 병실을 쓰고 있는 임 선수는 아주 편한 잠을 자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정말 모두가 바라던‘기적’이라도 일어나서 임선수의 상태가 호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임선수는 1년 전에 비해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습니다. 현역 시절 93킬로그램에 육박했던 체중은 2년 여에 가까운 병원 생활로 이젠 70킬로그램도 채 나가지 않는다고 하며, 얼핏 보기에도 광대뼈가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지난 여름 코에 대었던 강제 호흡기를 가슴으로 옮겨다는 수술을 받은 이후, 부적응으로 인한 고열 증세로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고 합니다. 결국, 임선수는 지난 1년간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임선수가 물리 치료를 대신해서 하루에 한 번 하는 병원 복도 산책을 저도 따라 나서기로 했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저와 이 PD는 한강변에 차를 세워두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얼마를 더 살지 모르지만 그 날이 당장 내일이 될지라도 모든 것을 걸고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아버지, 애들이 마음 아파할까봐 더 강하게 보이려고 애써 입술을 깨무는 아내, 장난감보다 아빠의 회복이 더 큰 소원이 되어 버린 세현이, 도움주신 분들을 생각하며 울먹이는 엄마 앞에서 엄마를 달래려고 일부러 아양을 떨 만큼 철이 든 여진이, 이 가족이 그렇게 저희들을 울렸습니다.

현역 시절 위기의 순간에서 결정타를 터뜨리고 승부처에서 담장 너머로 공을 쳐넘기던 임선수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오늘 이런 그의 모습이 적잖은 충격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낯선 이 모습이 그의 가족들에게는 지난 2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대해야 했던, 이제는 조금도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되어버렸을 뿐입니다.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은 오빠 대신에 조그만 손으로 아빠의 휠체어를 미는 여진이의 모습 위로 바로 1년 전, 저와 세현 군과의 약속이 생각납니다.

작년 겨울, 초등학교 1학년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빠의 증세와 엄마의 걱정을 이해할 만큼 커버린 임선수의 아들 세현 군은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저씨가 우리 아빠 낫게 해줄 건가요?"

크리스마스에 무슨 선물을 받았냐는 제 물음에 고개를 숙이면서, 동생 여진이와 엄마 손을 잡고 아빠 병 낫게 해 달라고 밤새 기도만 했다고 했습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년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착한 너희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실 거란다.
아저씨가 약속할께."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 올해 성탄절이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올 성탄절에도 작년과 다름없이 그 흔한 성탄 트리 하나 없이, 빨간 양말 하나 걸지 못하고 이 가족들은 그렇게 밤을 새워 기도할 것입니다. 기침 소리와 약 냄새가 가득한 아빠의 침대 곁에서 그렇게 졸린 눈을 부벼가며 쓸쓸한 성탄을 보낼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이 닿지 않는 저 먼 곳에서 어쩌면 임선수는, 푸른 운동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억의 벽을 넘어 그를 기다리는 가족의 곁으로 오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께 어려운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세현이와 여진이와 이 가족의 산타가 되어주십시오. 여러분의 종교가 무엇이든, 여러분이 좋아하는 야구단이 무엇이든 이 두 아이와 이 가족에게, 수많은 팬들이 임선수가 낫기를 바라고 있음을 말해주고, 보여주십시오. 저렇게 천진난만한 여진이의 웃음을 지켜주십시오. 임선수의 쾌유를 격려해 주시고, 임선수에 대한 보다 정성어린 진료를 부탁해 주십시오. 그리고 임 선수의 가족을 응원해 주십시오.

우편번호 134-814
서울시 강동구 길동 445번지 한림대학교 강동성심병원 1123호
임수혁 선수
 

우리가 잊지 않는 이상, 그는 절대로 먼저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참, 세현이는 로봇 장난감을 좋아하고 여진이는 키티인형을 좋아한다는 말을 빼먹을 뻔 했군요. 뭐, 다른 뜻은 없고... 그냥 좋아한답니다.

딴지방송국 방송팀장
빨간고추(redpepper@ddanz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