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아버지와 짱돌

2001.11.20.화요일
어린시절부터 무예에 조예가 깊었던 난다

본 기자, 자기 소개할 때 늘 하는 얘기가 있다.

온실 속의 화초이고 싶었으나 들판에 널부러진 잡초처럼 거칠게 살아온
그 이름도 찬란한 난다라고...

그럼, 대다수는 넝담인 줄 알고, 키득거리다 만다. 그러나, 고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

거슬러 올라가자면, 본 기자의 거친 성격은 어무니 뱃속에서부터 타고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무니는 본 기자의 오래비를 낳고, 2년 후에 나를 갖었다. 동네 아줌마들이나 할머니들은 어무니의 불룩한 배모양이나, 내가 뱃속에서 발길질하는 걸 보고는 다들 한결같이 영락없는 아들이라고 했다. 물론 낳아보니 기집애였지만...

암튼, 낳기도 전에 검증받은 바 있는 거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사회화의 과정을 겪으며 본 기자도 평범하고 조신한(?) 여자어린이로 자라나고 있었더랬다.

그러던 중, 드뎌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

사건은 본 기자 초딩 2학년때, 어무니가 명절도 아닌데 어여뿐 꽃무늬 원피스를 사가지고 오신데서부터 시작된다.

항상 오빠를 따라다니며 구슬치기며 비석 맞추기, 나이먹기 등 남자얘들이나 하는 부잡스런 놀이만 골라하던 본인에게는 좀처럼 치마를 사주시지 않으시던 어무니였다. 그러니 고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본인이 얼매나 감격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터...

때마침, 그날은 비도 개고 구름 사이로 맑은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본 기자는 이 예쁜 원피스 드레스를 자랑하고픈 맘에 아침부터 설레발을 쳐대며 이른 등교를 서둘렀더랬다.

비가 고여있는 웅덩이를 깡총~ 뛰어 건너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늘 본 기자를 못살게 괴롭히던 울동네 골목대장 기철이가 웅덩이에 커다란 돌을 던졌다. 돌이 던져짐과 동시에 웅덩이의 물이 철퍼덕~ 튀어올라왔고, 새로산 원피스는 물론이거니와 예쁘게 양갈래로 땋은 머리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시궁창 물에 절여진 생쥐같은 본인의 모습이 서러워서라기 보다는 새로산 예쁜 원피스를 오늘 못 입고 간다는 생각에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던 본 기자는 울음을 터트리며 등교를 포기하고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앙... 엄마, .. 끄끄끅.... 옆집 기철이가... 끄끄끅... 웅덩이에 돌을 던져서... 끄끄끅... 으아아앙... 일케 됐어.... 그 자식 혼내켜줘~!! 어어엉

집에 돌아와 나는 다짜고짜 본인이 당한 서러움을 피력함과 동시에 기철이의 똥꼬에 피의 불벼락을 내려줄 것을 어무니에게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때였다. 마침 아부지는 오후에 출근하시는 관계로 집에 계셨고 하나밖에 없는 딸네미의 통곡과도 같은 처절한 울음소리를 들으셨다. 아부지는 온화한 미소로 나에게 다가오셨고, 울고 있던 나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주시며 나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시는 것이었다.

조막손에 쥐어진 무언가 차갑고 흉칙한 그 느낌...

그것은 바로.....

집 안에 있던 작은 수석, 울덜 말로 하자면 짱돌이었던 것이었다.

글구 아버지는 애처로운 딸에게 격려(?)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치료비는 걱정하지 마라.

난 아부지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고무되었고, 용기를 내어 기철이에게 따지러 갔다. 예상대로 그녀석은 순순히 사과하지 않았고, 난 아부지가 쥐어주신 그 짱돌을 이용하진 않았지만 장시간의 사투 끝에 드뎌 그녀석의 코에서 한자락의 코피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 줄곧 난 초등학교 내내 뇨자 깡패라는 별명을 달고 다닐 정도로 나를 괴롭히는 넘들을 패는 일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에게 얻어맞고 울기도 하고 때론 상처도 입은 아이들은 지네 엄마 손을 잡고 종종 우리집에 쳐들어왔고, 게네들의 엄마는 나의 부모님께 아이를 어떻게 가르쳤냐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치료비를 요구하기도 했다.

난 늘 골방에 숨어 그 아이와 게네 엄마가 돌아갈 때까지 숨어있다가, 졸라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기어나와도 아부지는 그런 나를 절대 혼내시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딸과의 약속을 항상 지키신것이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나의 기질은 사회 생활까지 이어졌고, 본기자 스스로 어리광이나 애교, 혹은 뇨인의 눈물 대신 정정당당히 실력으로 이 험난한 사회생활을 헤쳐왔다고 자부하는 바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먹어가며 적지 않은 인생의 실패들도 경험했지만 말이다.

이제, 지난 어린시절의 기억이 내 삶과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지금에 이르렀다.

엄한 부모님 밑에서 스스로를 독하고 강하게 단련시켰다는 나의 자긍심은 뭐 그렇게 대단하고 특이한 자랑꺼리도 아니라는 사실, 본인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 또한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반드시 누군가에게 이기고 지느냐의 부분이 글케 인생을 좌지우지할만큼의 중요한 화두도 아님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철이의 가벼운 장난에 나에게 짱돌을 쥐어주시던 아버지의 행동이 결코 어른스러운 행동이나 옳은 행동이 아니었다할지라도 여느 딸네미덜처럼 온실 속의 화초로 곱게 키우시는 대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하는 씩씩하고 튼튼한 딸네미로 키워주신 사실에, 본 기자는 늘 감사해하고 있다.

물론, 이제 경쟁이 아니라 남과 함께 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느낄 줄 알며, 설사 이기지 못하더라도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여유로움을 갖는 것은 어른이 된 나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살얼음판같은 사회를 아둥바둥 살아가다보면, 문득 문득 아부지가 쥐여주시던 짱돌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오늘도 짱돌수집에 여념이 없는
난다(festival@ddanz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