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함주리 추천0 비추천0




[논평] 이문열, 그리고 논쟁의 법칙

2001.11.28.수요일
딴지 편집국 멋대로 씨부리기 우원회

생전에 "우리 시정(詩情)의 팔 할이 빚지고 있다" 라고 찬사 받던 시인, 미당 서정주. 사후에 이어질 무수한 논쟁들을 뒤로 한 채 작년 겨울, 영광과 오욕이 뒤섞인 이승에서의 삶을 떠나갔다.


미당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면 언제나 귀결되는 문제가, 문학과 인간, 즉 작품과 작가의 삶을 하나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들을 별개로 평가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서정주를 비판하는 쪽은 당근, 문학과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은 결코 별개일 수 없다고 단언한다. "문학, 그중에서도 시만큼 그 인간과 하나인 것은 없다." 라면서 그의 행적을 들어, 시도 함께 비판한다. 반대로 그를 옹호하는 쪽은 미당의 빈소에 현 정부를 대표해서 찾아온 김한길이 말했듯, "시인에 대해서는 시로 말해야 옳다고 생각한다"고 맞서며 그의 시가 이룬 성취를 이야기한다.


전문가 집단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일반 대중이 서정주를 화제로 논쟁할 때면, 언제나 똑같은 입씨름이 반복된다. 작품과 작가는 별개냐 아니냐 하는 것. 별개이다 아니다 중, 서로 다른 입장을 선택한 이들 사이엔 그떄부터 미당에 대한 논쟁의 여지는 없다. "넌 그러냐? 난 안 그렇다" 하는 순간, 미당을 평가한다는 구체적 사안에 대한 논의는 이미, 문학과 인간의 관계는 무엇이냐 하는 커다란 주제로 확대되어 버리고, 미당에 대한 평가는 차후의 문제로 넘어간다.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의 원칙이 서면, 구체적인 상황 상황들은 그 원칙을 따르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과연,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일까. 그리고 서정주의 문학은 그 원칙 아래에 있는 구체적인 한 사례일 뿐일까.


일단, 본 우원의 생각을 까보라고 하면, 문학과 개인은 별개일 수 없다고 확신한다. 문학이란 그야말로 치열하고 치열한 진정성(진실성이나 사실성이 아니라)을 기본으로 하는 세계다. 어떤 식으로든 내면이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것을 통하여 온갖 현상의 가짜 허울을 벗겨낸 채 타인을, 세계를 이해하고 이해 받는, 본질과 본질로만 소통하는 행위다. 작가의 세계관이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신의 작품과 별개일 수 있다는 것은 결단코 불가능하다.


만일 문학을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과 별개로 본다면, 문학은 더 이상 인류의 정신세계를 리드해 왔다는 자부와 명예를 마땅히 버려야 한다. 언어를 갈고 다듬어 보기 좋고 듣기 좋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즉 예술가가 아닌 "장인"의 자리로 제 몫을 찾아 내려가야 한다는 말이다. 문학이 단순한 글질이 아니라 문학이려면, 문학과 개인은 결코 별개일 수 없다.


그런데 말이다, 그러고 나면 서정주에 대한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일까? 문학과 개인은 별개일 수 없단다. 그렇다면 서정주는 친일을 한 나쁜놈이니까, 그러므로 당근 그의 시도 허접하고 나쁜 시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남?


그러나 진정한 갈등은 여기서부터다. 문학과, 그것을 만든 인간을 분리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고 시점 말이다. 미당의 경우처럼 문학과 인간이 현상적으로든 본질적으로든 괴리를 가지고 있을 경우, 자, 우리는 문학을 통하여 개인을 볼 것인가, 개인을 통하여 문학을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다시금 봉착할 수밖에 없다. 바로, 문학이 그의 본질이냐, 행적이 그의 본질이냐 하는 것 말이다.


정말로 문학과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이 하나라고 하자. "이런 나쁜 짓을 한 인간이 쓴 시는 그 인간과 마찬가지로 엿 같다" 라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쓴 사람이니 인간 역시 아름다울 것이다" 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안 오시는가, 꼭 와, 오란 말이여..."   "선생님 돌아가시면 가겠습니다."


자신과 결별을 선언한 제자 시인을 어느 회합에서 만나...


그러한 맥락을 타고, 전문가 집단-문인들, 평론가, 학자들의 서정주 논쟁은, 이전처럼 결코 합의점을 찾을 수 없던 소모적인 논쟁들을 벗어나고 있다. 뭐냐 하면, 미당을 비판하던 진영의 주장이 좀 더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개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 반대쪽도 그렇고. 즉, 서정주의 행적을 통해서 그의 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서정주의 시를 통해서 그의 삶과 내면세계를 비판하고 나섰다는 거다. 무엇을 통하여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현상이냐 하는 것,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첫 빠따로 시인 고은이 미당의 <자화상>을 비롯, 여러 시들을 분석하면서 그것을 근거로 미당의 삶을 비판했다. 고은의 미당 비판을 놓고 문단은 또 한번 뜨거운 논쟁에 휩싸였으며, "스승의 무덤에 칼을 꽂는 자"니 하는 인신공격의 수준에서 벗어나, "문학과 인간 간의 긴밀한 내적 연관성"을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는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이제 미당에 대한 논의들은 좀 더 풍성해지고 있는 중이다.


찬사 일색이거나, 아니면 아예 읽혀지지도 않은 채로 폄하되기 바빴던 미당의 시들은, "애비는 종이었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라는 싯구들을 통해 "무비판적 순응주의"며 "체질적인 자기합리화"며 "현실을 회피하는 무책임의 사상" 혹은 "초월적 미의식" "책임없는 아름다움" 등등 다층적인 것들을 읽어낼 수 있는 텍스트가 되고, 그걸 통하여 시인이자 인간인 미당은 보다 신중하고 깊이있게 비판받고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털레반 애들이 불상 뽀개듯 시를 절단 낼 수야 없지 않것냐..


미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우리 근현대사가 몽땅 들어가 둘둘말이 된, 무척이나 복잡한 문제다. 미당의 행적을 문제 삼아 그의 시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밟아 뭉개는 것은 분명 지나치다.


역시나 그 반대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다.


그럼 답은 뭐냐고? 멀라. 알 수 없다. 이것은 어느 일방의 주장이 아니라, 무수한 담론과 담론들을 거치고, 수많은 가치들의 충돌 속에서 더욱 우선적인 가치를 도출해내는, "정당한 합의"를 통하여 이룰 수 밖에 없는 문제다.


그렇기에 서정주에 관해서라면, 지칠 때까지 논쟁하는 것 이외에는 해결책은 없다.


그렇다. 이것이 논쟁이다. 논쟁은 설득, 합의, 대안을 전제한 비판과 비판일 때 그 가치를 얻는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문단 내부에서의 논쟁을 통해 얻어진 변화와 발전이 여전히 대중에게까지는 전달되지 않는다는 거다. 전 국민이 이름 석 자, 아니 시 한 수는 외운다 해도 과언이 아닐, 좋든 나쁘든 우리 한 시대를 들었다 놨던 시인 서정주. 이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이 사람의 시를 어떻게 인정하고, 후세대에는 어떻게 물려줄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반대중에게도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대중은 여전히 그러한 합의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고, 여전히 "문학과 인간이 별개냐 아니냐"하는 단계의 초보적인 논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인터넷 상의 토론장이나, 개인 사이트에 자기 글이란 이름으로 올라와 있는 서정주 단평들을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확실히, 대중은 그러한 합의의 대상에서 빠져있다. 이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에. 그 원인은 무엇일까.





최근의 이문열을 둘러싼 논쟁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아웃사이더> 지에 실린 진중권의 이문열, 이문열 소설 비판이다.


 





‘리얼리즘의 승리’

정치적으로 왕당파에 속하면서 소설에서는 진보적 경향을 보였던 발자크를 엥겔스는 이 한마디로 특징지었다. 발자크는 작품 속에 현실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반영하려는 리얼리즘의 정신을 고수했고, 그 결과 작품이 작가의 주관적 세계관을 이기고 진보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다.


바로 소설가 이문열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빼어난 소설임에 틀림없다. 그 안에는 이미 나중에 수입될 문헌 속에서 미셸 푸코가 지적하게 될 ‘미시권력’의 현상이 문학적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문열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이를 ‘리얼리즘의 승리’로 설명한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 이문열의 리얼리즘은 그의 보수적인 세계관에 승리를 거두고 있다. 그것이 그 작품의 미적, 예술적 가치를 이룬다.


반면 최근 10여 년간 이문열의 작품세계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운동권을 사교집단으로 매도한〈악령>, 400년 전 봉건왕조시절의 여성의 덕목을 선전하는〈선택> 다분히 이문열의 이상적 여성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아가> 등은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뻔뻔한 경향문학이다. 이 작품들이 평단에서 논의되기보다 바깥에서 요란한 스캔들이나 일으키는 데에 그쳤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작품들 속에서 이문열의 보수적 세계관, 그의 정치적 당파성은 그의 리얼리즘을 일방적으로 압도한다. 그의 리얼리즘은 완패하고, 이 패배가 그의 작품세계를 황폐화시킨 것이다. 이렇게 자기 당파성을 맘껏 드러내는 경향은 이문열이 누리는 문화권력의 크기와 비례하여 늘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 성공에서 얻은 자신감이 그를 꼼꼼한 현실의 관찰자에서 변덕스런 현실의 창조주로 만들어 버린 모양이다...    (중략)


                             <아웃사이더>-이문열, 시대와의 불화?-진중권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진보논객이라고 불려지는 진중권의 <이문열, 시대와의 불화?>는 이문열을 둘러싼 논쟁들 중 가장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글이다. 이 글은 윗 단락에서 살펴본 최근의 서정주 논쟁에서처럼, 작품을 통하여 작가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소설가" 이문열에게 접근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객관적이기에 더더욱 날카로운 비판을 한다.


하지만 <아웃사이더>는 그 이름에서 곧장 삘 꽂히듯, 다수의 대중들이 접하게 되는 책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중이 논쟁을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미디어는 무엇인가. 신문이지 모... 울 나라의 대표적인 일간지 지면을 통해서 벌어진 이문열 논쟁들을 살펴보자.


추미애와 이문열의 논쟁. 추미애는 이문열이 문화인으로서의 입장을 내세워 정치적 비판을 피해가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오피니언 리더로서 글들을 기고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올바르지 못한 가치관과 역사관을 강변한다고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 예로 각각 1993년 94년의, 태백산맥과 12.12 공소시효 문제, 그리고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발언을 들었다.


곧 이문열은 그 반론으로, 자신이 대동아공영권 이야기를 했던 배경과 의미를 설명했다. 유럽과 같은 경제블록을 만들자는 의미였다는 것, 동아시아가 뭉쳐서 서구열강을 막아내는 쪽으로 갔어야 했는데 그것이 일본의 침략주의로 실패했다는 점을 말한 것이라고.


이문열의 얘기, 뭐 일단 들으면 황당은 하다. 하지만 본 우원의 경우-물론 일반적인 대중의 입장이다-에서는, 먼저 대동아공영권에 대해서 교과서에서 배운 정도 이상으로 특별히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그래서 그에 대한 추미애의 재반론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 답은, "어이가 없다. 대동아공영권은 일제가 침략과 정신대 동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건 표어이다. 그것을 어떻게 그런 식으로 변명할 수 있는가."였다.


아무리 봐도 그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이거 참.. 서로 딴 말을 한다. 게다가 "띠바 기가 차서, 야,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 하면서 싸우는 것, 이건 미취학 아동서부터 동네 어른들까지, 한국이라면 누구나 즐겨 쓰는 쌈질 수법이다. 그리고 "정치 잘못 배웠군""문학 잘못 배웠군"이라는 말로 응수한다. 아니 무슨 신문이 자기들 자존심 싸움하는 데도 아니고... 토론도 아닌, 지 열받은 얘기를 전국민이 알도록 만들 힘 있으니 좋긴 조케따, 니똥 칼라똥이다.


이어 위의 추미애의 응수 방법과 똑같은 구조로, 진중권이 젖소부인에 이문열을 묶어서 비판했다. 그것은 이문열이 시민단체와 홍위병의 관계에 대하여 쓴 글에서의 논리적 비약을 똑같이 적용시켜, 젖소부인과 이문열한테 딱히 불륜의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의 관계가 의심스럽다 라는 내용의 글.


이 글을 읽으면 일단 졸라 재미있고 속 시원하다. 그리고 이럴 때 이문열도, 나중에 반론을 하든가 말든가 어쨌든 일단은, 분명 자기 글에 선명하게 드러났던 논리적 비약과 오류를 인정할 수 있는 배포가 있으면, 정말이지 울나라 어른들이 글케나 멋지면 얼매나 좋겠냐만은, 물론 아니었다.


그 뒤의 결과는 다들 아다시피, 누구누구가 이문열의 대타로 나서서 글로 죽을 쑤고, 그에 대해 또 누구누구가 "이문열과 꼬봉들, 야~ 니들 진짜 멍청하구나" 가 내용의 절반이나 되는 반론의 반론을 쓰고... 그리고 나서는 곧장, 그의 문학에 대하여 모두가 입을 모아 비웃어댔다. 글도 못 쓰는 놈이 모 믿고 까부냐, 입이나 닥쳐라 이거다. 이건 아무리 봐도 편갈라서 하는 닭싸움 같다. 이미 상대를 설득하는 건 때려쳤고, "우리 편들아 다들 이거 좀 봐봐, 얘가 이랬어" 하는 선동으로 보여진다. 이런 건 개인적으로 찾아가서들 하면 좋겠다.









문열이와 꼬봉들. 이런 건 삼류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저널인 우리가 알아서들 한당께야...


 





논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득하기 위해서인가 선동하기 위해서인가. 대중 다수가 읽는 일간지를 통하여 이런 논쟁들을 하는 것은 혹, 상대를 설득하여 보다 발전적인 합의나 대안을 끌어내기 보다는 각자의 진영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한 대중 선동에 더 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식이라면 논쟁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결국, 처음 자기가 서 있던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더욱 굳건하게 밟아 다지면서 상대편을 경멸하고, 그러니 뭐 당근 결과적으로, 어떠한 발전도 변화도 끌어낼 수 없다.


추미애와 이문열. 다시 진중권과 강준만. 조선일보 그리고 이문열의 새 소설.


이런 순으로 이어진 일련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소위 "진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과 "보수" 혹은 "극우"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대중을 판관으로 하고 벌어지는 논쟁의 방식과 태도에 있어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이다.


함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이문열에 맞서서, 이문열과 똑같은 방식으로 응수하여 엉겨붙어 싸우고, 함께 바닥까지 내려가 아웅다웅하는 광경을 연출한 다음, "자 이 쳐죽일 놈 좀 봐라" 라고 사람들에게 외쳐서 편을 가르기에 앞서, 좀 더 진지한 토론을 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없었을까. 이문열의 주장도 한번 들어나 볼 수는 없었을까.


그 중 하나. 우리가 좃선일보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 이문열 말마따나, 신문의 논조나 사상에 반대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나, 그 신문의 존립 자체를 반대하고 나서는 운동을 하는 것은 지구상에 유례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유례없는 일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이유는 먼가.


욕을 하면 함 생각해 보자. 정녕 우리가 옳다면 자신있게, 같이 욕하고 맞서기 전에 침착하게 말이다. 왜? 진짜 우리가 옳으니까. 옳다면 까짓 거 생각해 보지 못할 거 뭐 있남.


왜 우리는 안티좃선 운동을 하는가. 조선일보가 내세우는 이러이러한 정책과 요러저러한 주장을 반박하는 것만으로는 왜 우리는 멈출 수 없는가. 과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신문의 존립 자체를 문제 삼는가.


과거 일제시대며 군부독재 시절의 과거가 더럽다? 아니 그건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과거가 더럽고, 그런 주제에 용서도 안 빌고 계속 그 짓거리를 하는 인간이 있다 치자. 그 인간 욕이야 실컷 하더라도, 가서 죽일 수는 없다. 좃선의 과거가 더러운 건, 우리가 그들의 존폐를 논하게 된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존립 자체를 문제삼는 이유는, 그들은 언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론이 아니다, 라는 우리의 전제를 정당하게 만들어주는 근거. 그것은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정책이며 논조며 사상, 즉 "내용"의 문제가 아니다. 조선일보의 이중성, 이중적인 잣대, 관점, 즉 조선일보의 "방식"이다. 내용은 다음 문제다. 보라.


만일 조선일보가 "통일 결사반대다", 혹은 "북침을 통해 통일을 이뤄야 한다" 라는 슬로건 아래 이러이러하고 그러그러한 호전적이고 급진적인 정책들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름대로 어떤 급진적 언론이 되는 것이고, 본 우원 조선일보의 그 극우적인 "논조"와 "사상"을 비판하지, 조선일보의 "존립 그 자체"를 비판하는 안티좃선 운동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에 조선일보는, 극우 언론이 됨과 동시에 지금과 같은 전국적인 지지세력을 얻는 것은 포기했어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언론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일관성이다.


그렇다. 문제는 조선일보가 대전제로는 누구나처럼 "평화통일"을 내세우고 있으면서, 사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그것과 대립되는 정책들을 주장하는 이중성을 통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늘리는데만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런건 기업일 뿐 언론은 아니다.









   


속보이게 내숭 떨지 말구


차라리 이렇게 솔직하게 나오란 말이여~


한겨레에서 이문열에게 물었다. 조갑제가 "주석궁에 탱크가 들어가야만 통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냐고. 이문열은 그런 주장도 존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정말로 다양성 있고 민주적인 사회라면 그런 주장도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문제는 그런 진짜 속내를 위장하고, 평화통일이라는 온건함의 얼굴을 띠면서 이쪽과 저쪽 모두에게 기대어 세력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 것은 언론이 아니다. 그런 것은 보수도, 극우조차 아니다. 각자의 이익이 부합되는 사람들끼리 모여, 최대의 권력과 이윤을 창출하려 하는 기업일 뿐이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겠으나 소위 "진보진영"이라는 쪽은, 이런 점을 두고 이문열과 진지하게 논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미 어떤 진정성을 잃고, 이문열과 똑같은 구조와 방식을 택해 "싸우고" 있다. 싸움이 하고 싶다면 어디가서 들고 패주거나 쌍욕을 하는 게 훨씬 더 솔직하다. 어떤 공개적인 지면에서 논쟁하는 것은 공격이 아니라 설득이 목적 되어야 한다. 이문열이 어떤 인간이기 이전에, 과연 우리는 이문열을 설득하려 애써보았는가.





우리 모두 논쟁을 왜 하는가, 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고 대중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은, 대중을 다만 선동할 수 있는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끝으로, 이문열 씨에게 묻고 싶다. 안티조선운동이 진보성으로 위장한 제몫 챙기기, 라고 회의 하는 당신의 주장, 분명히 한번쯤은 돌이켜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아니었더라도 지금은 혹시 그렇게 변질된 것은 아닌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회의하지 않으면, 이러한 운동의 순수성을 지켜나가는 게 너무도 어렵다는 것을 우리도 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당신의 그토록 엄격한 회의정신이 똑같은 방식으로, 조선일보는 보수성을 위장한 제몫 챙기기를 하는 것 아닌지, 에도 적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안티조선 운동을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일보도 비판해야 마땅하다. 비록 촌스러운 양비론의 혐의를 덮어쓸지라도. 당신은 그러한 균형을 가진 사람인가. 자신의 이익을 초월한, 어떤 엄격한 일관성을 가진 진짜 보수주의자인가. 그렇다면 우리들은 당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딴지 멋대로 씨뿌리.. 아니 씨부리기 우원회
함주리(dandy@ddanzi.com)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