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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어느 위험한 유부남의 커밍아웃

2001.11.22.목요일
딴지 편집국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즐겨듣던 삼십대 초반이 엊그제 같은데 이년 후면 벌써 사십대란다. 사십대.. 아 씨바 시간 겁나게 잘간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 걸 느낄 때는 얼굴의 주름살이나, 약해지는 다리힘을 통해서만은 아니다. 어쩌다 한 번씩 만나는 친구들과의 모임장소를 통해서도 세월의 더깨는 실감된다.


그 곳이 결혼식장이라면 20대 사회 초년생들일 테고, 애들 돌잔치 장소라면 30대 중반 정도가 될 테고, 부모님들의 장례식장이라면 그야말로 중년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이다.


돌고 도는 인생처럼 시간이 흘러가면 해후의 장소도 한 바퀴를 빙돌아 처음으로 회귀한다. 바뀐 것이 있다면 주인공일 뿐.


우리들의 결혼식장에서 우리 아이들의 결혼식장으로, 우리 아이들의 돌잔치에서 손주들의 돌잔치로, 마침내는 부모들의 장례식장에서 우리들의 장례식장으로 행사의 주연만 바뀔 것이다.


그렇게 바람처럼, 낙엽처럼 어쩔 수 없이 늙어가는 거.. 우짜랴, 그게 인생인 것을.
 






지지난 달,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를 봤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믿는 한 청년을 통해 그래도 순수했던 나의 이십대를 향수하고,‘사랑은 변하는 거야’라고 냉소하는 여주인공을 보며.. 동감했다.


그래, 사랑 그게 뭐 별거더냐? 소나기처럼 지나가는 열병이고 살아가노라면 사랑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사랑, 참 배부른 소리지.


그러나 마음만 그랬을 뿐 영화내내 나는 휴우 한숨도 쉬고.. 울먹울먹 거리기도 하고.. 이윽고는 찔끔찔끔 눈물까지 흘리다가 끝내 그 격앙된 감정을 인사동까지 끌고가 소주 두 병으로 달래준 담에야 귀가를 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저 나랑 잘 맞는 국산 영화 한 편 보고 청승을 떠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두 달이 지난 이 만추의 끝날까지 나는 봄날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으니.


사는 것이 웬지 공허롭고, 그냥 멍해지기도 하고, 틈만 나면 메신저를 통해 몰래 채팅을 하는 직장 후배의 닭살 사랑도 구여워보이고, 암튼 분명히 나는이상해져 버렸다.


그러다가 최근,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내 안의 나를 살살 구슬러 넘과 대화를 시도했다.‘너 왜 그러는 데?’하고 물어봤더니.. 첨엔 우물쭈물 하던 이넘이 끌쎄..


 


나도 다시 한 번 연애하고 싶어!!


 


이러는 거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유부남이 큰일 날 소리한다고 입을 틀어 막았지만 이내 녀석은 팽하고 토라지더니 또 이렇게 주절거린다.


바람을 피우겠다는 것도, 딴 여자와 잠자리를 갖고 싶다는 것도 아니야. 그냥 설레이고 싶어...



설.레.이.고.. 싶다..


그랬던 거다. 나는 봄날을 보면서 사랑이 변하니 마니 하는 대사보다 사랑에 빠진 두 젊은 주인공의 사랑놀이가 무척이나 부러웠던 거다.


오지 않는 핸폰을 만지작거리고, 술마시다 밖에 나가 전화질을 하고, 강릉까지 한 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그 싱그런 열정이 못견디게 부러웠던 거다. 딱내 이십대 때의 모습.


그러나 어쩌랴? 나는 유부남인 걸.. 나에게 주어진 내 봄날은 이미 십년 전에 다 써 버리고 말았는 걸.. 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게 속상했던 거구, 슬그머니 그런 설레임을 딱.. 딱 한 번이라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욕망을 내밀하게 키워왔던 거다. 이 가을 내내.
 






아이들도 잘 커주고 아내는 늘 편안함으로 자기의 자리를 지켜준다. 행복하다면 행복할 수 있는 지금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이런 감정이 혹 사치가 아니냐고 이성적으로 반문한다면, 그리고 당신 아내에게 미안하지 않냐고 따진다면 나는 대꾸할 아무런 말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또 다람쥐가 되어..


아침에 출근하면 휭하니 비워진 동료들의 책상에 썰렁해하고, 상사 눈치 보며 슬쩍슬쩍 인터넷 주식시세표나 훔쳐보고, 때되면 점심을 먹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가, 퇴근 후 어제의 그들과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인 후, 고기냄새를 풍기며 퇴근전철을 타는 것이 마흔을 앞둔 나의 건강한 일상이라면..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최소한 딱 한 번만이라도, 그리고 단 하루만이라도 사라진 내 봄날을 느끼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마음이다. 누군가를 그리며 두근두근 가슴도 뛰고, 질투도 느끼고, 소유하려고도 하고, 유치하게 삐지기도 하는 그거, 혹 전화라도 올까봐 화장실까지 핸폰을 들고가는 그런 감정에 빠져보고 싶다.


아니, 그런 느낌이 과연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살아있기나 한 건지 확인하고 싶다.


아내여 미안하다. 그러나 진짜 내 기분이 그런 걸 어쩌랴? 독자들아, 나 진짜 위험한 유부남이냐?



덧붙여:


얼마전 삼십대 중반의 터프한 후배가 이멜을 한통 보내왔다. <흐린가을날의 편지질>이라는 제목의 멜이었는데 녀석이 요즘 외로움을 많이 느낀단다. 갑자기 자기의 무지개가 사라지고 있는 듯 해서 절망감이 든다고 한다. 그러면서 동영상 하나를 첨부로 보내주었다. 그거 보면서 눈물까지 흘렸다나? 피식 웃으며 녀석이 첨부한 동영상을 보다가 나도 기분이 울컥해져 버렸다. 요즘.. 외로움 느끼는 중년들이 왜 이렇게 많은건지, 혹 독자들 중에 그런 종족있다면 이거나 감상하시라. 울지들 말고..



딴지 관광청장
뚜벅이(ddubuk@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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