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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토의 유럽이야기] 2. 유럽과 기독교 (1)

2002.12.9.월요일

딴지 유럽총국장 파토

 








우중충한 런던의 겨울. 이 정도면 꽤 좋은 날씨에 속한다...


고국은 꽤 춥다고들 하던데 건강들은 괜찮으신지 모르겠다.

이곳 런던은 한겨울에도 영하로 잘 안 내려가는 포근한 날씨라고들 하지만 사실 그 분위기는 포근함과는 거리가 멀다. 겨울에는 오후 4시면 지는 해, 매일같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 춥지는 않아도 전반적으로 썰렁한 느낌 등등... 이를테면 울나라의 가을과 겨울 사이 환절기 같은 날씨가 몇달 동안 계속되는 건데, 이거 상당히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 본 국장은 기상 조건이 거의 같은 캐나다 서부에서 살다 와서 그나마 익숙한 편이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칠흑같이 깜깜한데 이제 겨우 4시반 이라니... 머 이런 새삼스런 놀라움들 말이다.

매년 반복되는 이런 날씨가 문명에 영향을 미쳤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일년 내내 햇빛이 쨍쨍하다고 할 지중해 연안을 바탕으로 한 로마인들의 밝고 현실적인 정서와는 달리, 이후 유럽의 중심축이 지금의 프랑스와 영국, 독일 등 북쪽으로 옮겨온 이후로는 이른바 Dark Age 라고도 불리는 어두컴컴한 이미지의 중세가 근 천년이나 계속되니 말이다.


사실 이 부분은 확인할 길이 없지만 - 이런걸 일컬어 심증은 있으되 물증은 없다고들 하더라 - 이거 말고 중세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다른 요소 하나는 분명히 확인 가능하다. 그게 바로 오늘의 주제, 기독교 되겠다. 마, 지난 시간 말미에 혹시 변덕부려서 다른 이야기로 빠질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게 더 귀찮아서 그냥 예정대로 가볼란다.

암튼 기독교를 빼놓고 제정 로마 이후의 유럽을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이것도 결국 로마 없는 유럽과 마찬가지로 쏘세지 빠진 핫도그나 스트링 없는 기타... 머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아 씨바 다른 멋진 표현이 생각이 안난다. 좋은 걸 아시는 분은 메일 보내시라. 실명 달고 인용해 드린다)

거두절미하고, 그럼 이제부터 함 알아보자. 대체 왜 그렇게 중요한지.

* 지금부터 다룰 내용은 종교적 입장이 아닌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의 접 근임다. 따라서 본문에서 사용되는 각종 종교 관련 단어와 표현, 그리고 이 에 대한 설명 또한 오직 종교를 인간세상의 사회 현상으로 해석한 결과일 뿐임다. 종교적인 진리의 논의는 본문의 소재나 주제가 아님을 주지하시기 바람다.

* 이 글은 역사 교과서나 학술 논문이 아님다. 따라서 국장이 본문을 통해 이야기하는 내용의 일부는 주어진 사실들에 기초하여 나름의 사고를 전개한 역사 추리 에 가까운 측면이 있고, 따라서 이를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전적으로 열분들의 선택임다. 종교사 등 정통 학계의 관점과 상치되는 내용들이 있다면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시기 바람다. 어떤 부분이 추리적인 내용인지는 ...아닐까 나 ... 모른다  같은 문맥을 통해 대략 파악하실 수 있겠슴다.

* 예민한 주제다 보니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앞 잔소리가 많았슴다.  재미있게 읽으시압.

 

Europe and Christianity

유럽과 기독교 (1)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많은 선들을 사용해 강한 원근효과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태교와 기독교, 그리고 로마


열분들은 유태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알고 계시는가?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는...?

예수가 유태인이었고 구약 성경이 사실상 유태교의 경전이나 다름 없으니 유태교나 기독교나 머 시대상 예수 이전과 이후로 나눠지는 개념일 뿐일까? 따라서 유태교는 그간 유럽에서 기독교의 모체로서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았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당사자들에게 있어서 유태교와 기독교는 이슬람과 기독교 만큼이나 다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울나라에서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관념적으로 이 둘의 관계를 좀 멀어진 사촌 정도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는 걸로 알지만, 실제 전통적인 기독교 사회에서의 그 실상은 사촌관계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렇기는커녕 역사적으로 둘 사이는 원수에 가까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한 이해는 중세는 물론이고 근대 유럽, 나아가 2차 대전과 이스라엘 건국에 이르는 근현대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이해와도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으니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니 지면을 좀 많이 할애하더라도 이참에 차근차근 살펴보자꾸나. 오케?

 




유태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로 유명한 모세다. 구약 성경의 맨 앞 다섯 장, 즉 창세기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이 모세가 직접 썼다고도 하고 흔히 모세 5경, 유태교에서는 토라 라고 부른다. 우리가 잘 아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과 이삭, 모세의 십계명판 등등의 고전적인 이야기들이 모두 여기에 속해 있다. 유태교에 있어서 토라는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영화에도 나왔듯이 이집트의 왕가에 속했던 사람으로서 혈통이 좀 모호한 모세는 - 그가 실은 유태인이 아닌 이집트인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 당시 이집트의 노예로 살고 있던 동족들을 모아 이집트를 탈출, 이른바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땅을 찾아 떠난다. 이때가 일신교로서의 유태교가 제대로 정립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유태교 신앙은 그 오래전부터 이미 존재했으나, 이를 보다 구체적이고도 강력한 형태로 정리하고 고착시킨 것이 바로 모세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십계명판을 받아 왔을때 시나이산 아래에서 기다리다 지친 동족들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던 이야기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걸 보고 열받은 모세는 계명판을 땅바닥에 집어던져 깨 버리고, 하나님께 새걸 다시 받으러 올라가야 했다. 이 죄로 인해 모세는 결국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서 죽게 된다.
 








모세가 금송아지를 발견하고 계명판을 땅바닥에 내팽겨치려 하고 있다. 가운데 수염난 이가 모세, 그 우측으로 번쩍거리는 조그만 형상이 금송아지. 시스틴 성당 벽화 중.

여튼, 이 일화는 당시 모세 외의 상당수 유태인들에게 이후의 유태교나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 사상이 완전히 정착되지 못했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모세와 연락이 끊어진 수십여일 만에 금송아지 우상 따위를 만들어 거기에 절하고 있던 모습은 이후 수천년에 걸쳐 보여준 유태교의 강철같은 신념과는 하늘과 땅 차이니 말이다. 사실, 다양한 신과 우상을 섬기는 것은 당시 전세계적인 추세였다. 결국 이때까지는 유태인들도 거기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쨋거나 모세는 가나안을 찾아 광야를 헤매던 40년의 긴 세월 동안 강력한 카리스마와 추진력, 그리고 홍해를 가르는 등 기적적인 능력을 통해 유일신 하나님 - 여호와, 혹은 야훼. 모음이 없는 고대 히브리어로는 YHWH 라고 쓰며, 여기에 적당히 모음 발음을 붙이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이에 따라 야훼라고 발음되던 것이 이후 여러번 번역되는 과정에서 Jehova 로 변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영어에서는 지호버 로 발음한다. 뜻은 모든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도록 한 자 혹은 자기 자신으로서 있는 자 정도 - 의 전능함과 강력함을 유태인의 뼈 속 깊이 주지시키게 된다.

이 시절, 일부 유태인들의 반항을 권위와 파워로 잠재우던 그의 독재적 행각의 이면에는 방랑 기간 동안의 갖가지 현실적인 어려움과 상관없이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을 유태인들의 머리에 박아 넣으려는 의도가 느껴지기도 하는데, 따라서 이집트와 가나안 땅이 천천히 걸어도 불과 몇달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장장 40년이나 걸렸다는 점 또한 결국 모세에 의해 기획된 의도적 고행 이라는 맥락으로도 보여진다. 이게 사실이라면 모세에게는 동족들에게 일신교 신앙을 주입하고 트레이닝 하는 일이 이 긴 세월을 바칠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이런 고행의 상황은 비록 위험성은 있지만 잘만 리드된다면 그 구성원들을 배타적이고 방어적인 분위기 속에서 내부로 똘똘 뭉치게 하는 효과가 있고, 이는 결국 모세가 의도했던 아니건 결국 유태교의 신념을 더욱 강하게 담금질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튼, 이렇게 특수화된 심리적 여건에 더해 모세가 신에게서 직접 받았다는 십계명판과 그것을 집어넣은 성궤 등 유태인들이 신에게 선택된 민족이라는 실제적 증거물 등이 서로 화학작용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모세가 도입한 유일신 사상은 공허한 금송아지 우상 따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권위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성궤가 사실상 신의 증표를 넘어 신 그 자체와 동일시 되기까지 하고 후일 예루살렘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후 그곳에 봉인됨으로써 예루살렘은 이른바 신이 직접 거하는 장소 로 의미 지워지게 된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바빌론 유수 등 다양한 유태인과 유태교의 수난사가 줄줄이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자. 여튼 이상의 역사적 특성에서 알 수 있듯이 유태교는 원래가 신에게서 직접 선택되어 계율을 받은 유태인들의 선민사상에 기초한 종교로서, 유태인 외의 다른 민족이나 종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폐쇄적이고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 면이 있다.

이런 유태교의 면면을 볼때, 대부분의 나라에서 맘 편한 다신교를 믿던 시절에 유독 유일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내세우는 이 종교가 주변에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였으리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민사상은 기본적으로 우월감을 내포하고 있을 수 밖에 없고, 강력한 유일신 숭배는 흔히 폐쇄적인 정교일치의 사회를 추구하게 된다. 이런 면들은 당시 패권자 로마의 사상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부분은 로마나 그리스는 다신교 국가다 보니 유태교의 신 역시 신들 중 하나로 인정했지만, 유태인들은 일신교의 특성상 다른 종교의 신을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나 그리스인에게 유태의 이런 모습은 편협하고 오만하게 비춰졌을 것이다. 와중에 유태가 힘있는 나라조차 아니고 로마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입장이었으니, 자기들의 신만이 진정한 신이고 남의 신들은 거짓이라고 공공연하게 외치는 것은 당시 역학관계 속에서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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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지만, 특히 흥미를 끄는 부분은 기독교가 성립된 시기가 바로 지난 시간의 주제였던 로마 제국의 제정 성립 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서기력이 예수 탄생을 기준으로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넘은 없을 거고, 따라서 예수가 태어난 때는 기원 0년 전후일 것이 분명하다. 일설에 따르면 기원전 4년쯤이라고도 하지만, 머 한 두 해가 중요한 건 아니다.

이때는 로마 제정의 기틀을 닦은 카이사르가 암살된지 수십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명실공히 로마의 초대 황제라고 할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가 한창 제정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다. 로마가 제정으로
옮아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외곽 속주의 확장과 그에 따른 영토 및 인구의 거대화로 인해, 과거처럼 수백명의 원로원이 난상 토론을 거쳐 모든 중대사를 처리하는 권력 형태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제국 각지의 상황을 바로 파악하고 즉시 대책을 세울 수 있도록 권력의 일원화가 요구되었다는 소리다.
 








베들레헴의 예수가 태어났다고 추정되는 마굿간 위에는 교회가 세워져 있다. 사진의 이곳이 바로 예수가 탄생한 그 지점이라고...

마, 독재정권의 필요성에 대한 이런 식의 입장은 마치 박정희가 5.16 을 일으켰을때 주장한 바와 유사하긴 하지만 - 북괴의 위협이 엄존하는데도 끝없는 정쟁을 통해 사회 혼란만을 야기하는 내각제 하의 국회의원들을 두고만 볼 수 없다 는 식의 - 여튼 당시는 시대가 시대였으니 그런가보다 하고 일단 넘어가자. 

그나저나, 카이사르의 암살 등 기존 공화정파의 엄청난 저항을 무릅쓰고 까지 통치체제를 바꿀 정도로 확장일로에 있는 제국의 영위에 힘쓴 시대인 만큼, 로마의 직접적인 세력권 하에 있던 각 속주들이나 사실상의 속국들 역시 그 분위기나 정책의 변화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로마제국 나와바리의 동쪽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유태 역시 이런 입장은 마찬가지였다.

이런 당시의 국제 정세를 놓고 본다면, 수천년 역사를 가진 기존의 유태교가 유태 사회 내에 강력한 구심점으로 이미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이 기독교 철학이 만들어진 원인 자체가 실은 유태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이같은 통치 시스템 및 마인드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대두된다.

다시 말해, 이 시점에서의 기독교의 발흥은 명백한 배타성의 한계를 가졌던, 따라서 로마 치하의 유태에서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위험성을 지니고 있던 기존 유태교에 대한 시대적 대안 마련의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기독교가 비록 이스라엘이라는 토양에서 생겨났고 유태교를 계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핵심 사상은 유태교와 크게 다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더 이 상 특정 민족의 선민사상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다. 이유는 유태인들의 신이었던 여호와가 예수를 통해 만인의 신으로 업그레이드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그를 신의 일부로서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자식이며, 따라서 구원의 자격을 얻게 된 거다.

이런 변화는 기독교에서는 더 이상 유태인들이 과거와 같은 우월한 위치를 차지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전까지 하나님의 이미지가 율법을 앞세운 채 복종하지 않는 자를 가차없이 벌하는 무서운 전제 군주였다면, 이때부터는 죄를 뉘우치기만 하면 끝없이 용서하는 따듯한 아버지의 양상으로 변하게 된다.

유태교와의 이런 차이점이야말로 기독교가 세계종교화 할 수 있었던 핵심 포인트다. 수천년의 역사를 가졌음에도 유태인들 외에 유태교도는 아직도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차이가 가져온 효과는 분명하다.

이런 보편성을 통해 유태교로는 절대로 불가능했을 대사건, 즉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이미 민족을 초월한 보편 종교의 사상을 갖춘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과거의 유태교에서 느껴지던 것 같은 거부감은 아무래도 덜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집트의 파라오 아크나톤의 실패담에서 보듯 다신교 사회가 일신교로 변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고 따라서 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하는데도 많은 박해와 3백년의 세월이 걸리긴 했지만, 최소한 특정 민족의 선민사상이나 배타성 등 기존의 유태교가 가졌던 기존의 전제조건 만큼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유태의 배타적인 일신교 사상은 예전부터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에서 상당한 문제를 초래해 왔었다. 그러니 특히나 패권을 잡고 있던 로마인들과의 관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 결과, 비록 예수 사후이긴 하지만 서기 70년 경 로마는 반란을 일으킨 이스라엘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그곳에 모인 백여만명이 죽음을 당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인구 수준에서 백만명이라 숫자는 실로 엄청난 거다. 그리고 로마가 이런 대규모의 학살 - 비록 로마 군인이 직접 죽였다기 보다는 포위된 상태에서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도 하지만 - 을 감행한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당시 사태가 얼마나 곪을대로 곪아 있었는지 이해할 만 하다.










유명한 마사다의 비극 역시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마사다의 비극은 이곳 마사다 산 위의 요새에서 3년간이나 항거하다가 결국 자살한 960명의 유태인  이야기다.

예수가 유태교도 동족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보편적 사상을 들고 나온 까닭은 물론 철학/신학적인 이유가 주된 것이겠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이와 같은 당시 유태가 처했던 정치적인 상황들과도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가 당시 유태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로마에 대한 정치적 항거의 입장이 별로 없었다는 것 - 결국 유다가 배반한 이유가 된 - 은 예수의 유태문제 해법이 기본적으로 로마의 패권적 현실을 인정하면서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정신적인 영향을 노렸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예수의 이런 입장은 아래의 성경 구절에서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 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 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태복음 22장 15절~21절, 개역한글 성서. 단락 나눔과 따옴표 등은 필자가 첨가.)
 

이 대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의 핵심인 바리새인 과 당시의 세금 개념 등에 대한 다소간의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유럽과 기독교 라는 이 글의 주제를 생각하면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도 같지만 기왕에 나온 거니 함 짚어보고 넘어 갈란다.

바리새인은 지금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일종의 교조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즉, 유태교의 율법과 관습을 일거수 일투족에 이르도록 철저히 따름은 물론, 그 결과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자신들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결국 당시의 보수 기득권층인 셈이다. 이런 바리새인에게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가르침을 들고 나온 예수가 여러가지 의미에서 눈엣가시 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세금 문제가 중요한 것은, 그리고 신약 전체에 걸쳐 세리(세금징수원) 가 창녀 등과 함께 멸시 받는 사람의 대표격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이때 유태는 독립국이 아니라 일종의 로마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때의 세금은 독립국 유태를 위한 것이 아닌 로마에 내는 세금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고, 따라서 유태인들에게 세리는 로마, 혹은 로마의 보호/지배하에 있던 당시의 반민족적 유태 정부의 앞잡이 같은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그려진 로마 동전. 예수가
예로 든 동전이 이것과  똑같은 것이었을지도...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제자를 헤롯당원 - 헤롯은 예수 탄생 무렵 로마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유태의 왕. 따라서 헤롯당원은 그의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 - 들과 함께 예수에게 보내서 세금을 낼까요 말까요 란 질문을 던지게 한 것은, 예수로 하여금 예스/노 어느 대 답을 해도 궁지에 빠지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만약 세금을 내라고 한다면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는 셈이니 바리새인들로서는 예수의 반민족적 성격을 공격할 빌미를 잡게 되는 것이고, 만약 내지 말라고 한다면 친로마파인 헤롯 당원들에게 반로마적/혁명적인 인물로 낙인 찍혀 역시나 고초를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열라 어려운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바로 유명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이다. (물론 이때 가이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 아닌, 그에게서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로마 황제 - 이 시기에는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 를 뜻한다)

예수의 이런 논법은 현실 세계의 정치권력과 하나님의 세상을 적절히 이원화 함으로서 바리새인들의 함정을 교묘히 피해가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약소국 유태가 처해있던 복잡한 상황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와 관련된 예수의 사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추리하자면 이렇다. 제 아무리 유태인들이 뛰어나다 한들 당시 역학관계 속에서 정치적/군사적 수단으로 로마를 이긴다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했다. 그리고 로마의 제정 성립 등으로 인해 배타적 일신교인 유태교가 겪게 될 미래의 위험성 - 70년의 예루살렘의 비극이 말해주듯 - 은 점점 증대되고 있었다.

예수가 판단하기에 이런 정세 하에서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지켜나가고 나아가서 전파시키는 방법은 유혈사태로 번질 가능성이 큰 반란 도모가 아니라, 로마의 세속적인 힘을 일단 인정한 채 기존 유태교의 배타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이를 바탕으로 로마인마저 포용이 가능한 보편화된 믿음 체계를 만들어가는 일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예수가 주창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같은 이원적 사고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이런 밥법은 눈에 띄는 당장의 효과는 적지만 잘만 되면 장기적으로 열라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되고, 이후 실제로 실현된 것처럼 어쩌면 다신교 국가인 로마제국 - 당시로서는 세계의 중심이자 거의 전부였던 - 까지도 그들의 신을 믿고 따르게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실로 야심찬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예수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임과 동시에 매우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의 이런 접근법이야말로, 비록 많은 박해를 겪고 난 이후이긴 하지만 그의 사상이 로마는 물론 전유럽, 나아가 세계의 상당 지역을 리드하는 종교로발전하고 심지어 2천년이 지난 현재에까지 융성하고 있는 비결,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사실 정통 유태교도들에게 있어서는 기독교는 자신들의 종교를 변질시킨 일종의 이단이나 다름없다. 그들의 시각에서 볼때, 불과 삼십여년을 살고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만 예수는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일 수 없었다. 유태인들의 메시아는 죽음으로서 인류 전체 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숭고한 정신적 스승이 아니라, 유태 민족 을 고난과 어려움에서 구해 영적, 육체적인 지복으로 이끌어줄 힘을 가진 현실적 구원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여담이지만, 2천년만에 처음으로 미국과 서양 열강의 힘을 빌어 과거의 이스라엘 땅에 다시 국가를 세운 지금 상황을 본다면, 유태인들의 실질적인 메시아는 사실상 미국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반대로, 기독교도들에게 있어서 예수를 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유태교도들의 이런 입장은 결국 이슬람이나 다른 모든 이교도들과 다를 것 없는 치명적인 신성모독인 한편, 오히려 한가지 죄목을 더 추가하게 만든다. 이건 일종의 괘씸죄에 해당하는 부분 되겠다.

그것은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피를 받고 세상에 태어난 신의 아들 을 알아보지 도 못하고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아 버렸다는 점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받은 것은 로마인이라기보다는 유태인들 자신이다. 총독 빌라도는 오히려 예수를 살려줄 빌미를 찾고 있었지만 당시 유태인들의 여론이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기독교도들에게 있어서 유태인은 감히 지상에 강림한 신을 죽여버린 용서받지 못할 넘들이 되어 버린 셈이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기독교의 성립과 발흥은 유태인의 지위 향상을 가져오기는 커녕, 그들에게 가졌던 유럽 각국민들의 그동안의 안좋은 감정을 더 완벽하게 합리화 할 수 있는 단초마저 제공하게 되고 말았다. (참고로 울나라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유태인에 대한 입장이 비교적 온건한 것은 울나라에서 기독교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확산된 시점이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 이후 - 이때를 기점으로 유태인에 대한 유럽의 시각은 동정론으로 돌아선다 - 라는 점과, 유럽인들과는 달리 뿌리깊은 유태인 혐오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열분들은 한가지 의문이 떠오를지 모른다. 그건 예수 자신 역시 유태인이 분명한데 어떻게 예수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유태인을 멸시할 수 있냐는 부분이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는 유태인의 몸에서 났지만 이미 신으로 승격된 만큼 그 인간적인 혈통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예수가 목수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마굿간에서 태어난 것 때문에 목수나 마굿간이 숭배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결국 예수가 창시한 기독교의 영광이 곧 유태인의 영광이 될 수는 없다는 답이 나온다. 영광은 고사하고, 오히려 유태인들이 죄가 많았기에 예수를 그들 사이에서 나게 하셨다라는 논리도 실제로 존재한다. 수천년간의 전통적인 박해와 나치의 학살에까지 이어진 유태인 증오는 이렇게 오랜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해가 되시는가들.

여튼 이렇게 해서 새로이 만들어진 기독교는 로마에 이어, 로마를 계승하는 게르만족에게 받아들여 짐으로서 유럽 역사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 종교로서 발돋움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와 중세의 시작

자, 이런 배경하에 탄생한 기독교는 내외의 상당한 어려움과 박해를 경험한 끝에 결국 AD 313년, 즉 예수 사후 약 이백 팔십년 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합법화 되고 392년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정식 국교가 되었다. 이때부터 로마와 그 뒤를 이은 동로마(비잔틴)제국은 상징적인 - 때로는 실제적인 -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서 천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된다.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일설에 따르면 하늘에서 거대한 십자가를 보고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했다고도 하고, 갈수록 많아져 가는 교인과 커져가는 교세를 더 이상 힘으로만 눌러 버릴 수 없 다는 현실적인 필요의 결과라고도 이야기되지만 - 그리고 로마에 이렇게까지 기독교가 전파된 공로의 상당부분은 유태 출신 로마 시민권자였던 사도 바울의 몫으로 돌려진다 - 어느쪽이던 간에 로마의 공인과 국교화의 결과 이때부터 기독교에 본격적인 힘이 실린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신앙의 자유를 선포함으로서 그간 불법이었던 기독교를 공인하고 본인도 기독교인이 된다. 지난 시간에 나왔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 지금의 이스탄불- 은 이 양반 이름을 딴 것.

그러나 원래적 의미의 거대 로마제국은 기독교가 국교가 된지 겨우 3년 후인 395년에 동서로 나뉘고 말았다. 그리고 원래의 로마 중심부가 속했던 서로마 제국은 불과 수십년 후인 476년에 멸망했다.

따라서 이때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지 백년이 채 안된 때다.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울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도 사실 백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과, 동양이라는 문화적 바탕의 차이를 극복하고 지금의 교세를 이룬 것을 본다면 로마 황제의 후원을 등에 업은 기독교가 서로마 멸망 시점에는 이미 매우 융성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어스름부터가 이른바 유명한 중세 의 시작 되겠다.

중세와 관련된 본격적인 이야기는 담 시간에 들어가도록 하고, 예습하는 의미에서 중세의 대략적인 특징이나 함 살펴보고 넘어가자. 마,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교과서식으로 중세의 외형적 특징을 열거해 본다 면 대충 이상과 같은 정도가 될거다.

기독교의 종교/문화적, 정치적 파워

게르만족의 발흥

사회/문화, 예술상에서의 폐쇄성과 정체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결합

봉건제도의 시행

다른 건 건 다 나중에 다루도록 하고 일단 이중 한가지만 부연설명 하자면,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의 공백을 메꾸고 새로운 유럽을 만들어나간 사람들은 로마 시절 내내 제국의 경계 밖 에서 로마와 아웅다웅했고,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아직도 유럽 내의 여타 국가들에게서 로마에도 끼지 못한 야만족이라는 식의 비아냥을 듣기도 하는 바로 그 게르만 족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게르만이 로마에 이어 앞으로 기독교와 열라 밀접한 관련을 맺어나가게 된다.

마, 그렇다고 중세가 독일인 들의 천하였다는 식의 생각은 마시라. 울나라에서는 게르만이라고 하면 독일만을 떠오르기가 쉬운데, 사실 이때의 게르만족은 지금의 독일은 물론 스웨덴인,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아이슬란드인, 앵글로색슨인, 네덜란드인 등의 조상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즉 이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남서 유럽 일부를 제외한 유럽의 대부분이 게르만계 혈통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거다. 여튼, 이렇게 로마를 이어받은 게르만 왕조들이 중세의 분위기를 형성해 가게 된다.

근데, 위에 나열한 외형적인 점들도 중요하지만 필자가 느끼기에 중세의 가장 재미있고도, 한편 놓치기 쉬운 특성은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사회 전체가 오히려 그리스/로마 시대보다 더 옛날, 혹은 야만으로 회귀한 것 같은 양상을 띈다는 점이다.

무슨 소리냐구...? 함 살펴보자.

로마 시대에는 힘을 못썼던 미신과 점술, 그리고 마법 등이 이 시기 전체를 통해 다시 부활한다. 그리스의 선진적인 민주주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로마의 합리성과 관용도 사회 전반에서 실종된다. 로마 시대에 어느 정도 정치적, 사회적 발언권을 가졌던 민중들은 이제 대부분 노예에 가까운 농노로 전락하고, 귀족과 왕족 등 각 계급의 고착 및 세습은 과거보다 오히려 더 공고해진다. 그 결과 부와 권력의 극단적인 집중화로 인해 로마 시대와는 달리 각지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마녀사냥은 유럽 문명이 보인 광기의 최고봉이다. 수백년간 지속된 이 경향은 인구가 십만여명에 불과한 지방에서 3,4년 동안 수백명을 마녀로 사형시킨 기록까지 남겼다.


과거 눈부셨던 음악과 미술은 정체되고, 창조적인 작품들은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스 시절부터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 -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열라 작은 오차로 측정하기까지 했다 - 을 포함한 많은 상식적 과학 지식들 조차 중세에는 까맣게 잊혀지고 말았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흔하지 않았던 끔찍한 사형과 잔인한 고문이 사회 전체에 횡횡했다. 17세기에 이르기까지 마녀사냥 같은 집단 광기가 곳곳에서 발휘되었다. 로마의 사회간접자본 개념도 대부분 잊혀지고, 도로와 상하수도는 먼지와 오물을 뒤집어 쓴 채 방치되었다. 그 결과 페스트 등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천만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이런 모습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중세가 로마를 이은 유럽 문명의 발전 의 결과라고 보기엔 영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역사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전한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역사라는 말 속에서는 철학이나 신학 등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관련된 부분은 물론, 정치 형태, 법률과 제도, 그리고 과학 기술 등 전반적인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중세를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듯 하잖나 말이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이런 양상은 로마의 멸망 및 기독교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다음 시간에 살펴보자꾸나.




 


 
뒤늦게 해리 포터 읽는데 미쳐버린 딴지 유럽총국장
해리 파토(pato@ddanz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