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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죽어도 좋아>와 이강림, 그리고 언론

2002.12.1.일요일
딴지 영진공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의 제한 상영가 조치로 지난 8월부터 4개월 동안 끌어왔던 <죽어도 좋아>의 사태는 결국 12월 6일 개봉이라는 결과를 낳으며 마무리되었다... 고 하면 좋겠지만 일단락 지어졌다.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는 밑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그간 <죽어도 좋아>의 상영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본 공사를 비롯한 언론이라든지, 영화협회, 민간단체 등등의 광범위한 지원 사격은 결국 당 영화의 무삭제 개봉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으로 <죽어도 좋아>가 마침내 상영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도 무삭제 개봉이라서 마냥 좋아할 일일까?


당 영화의 개봉은 외견상으로 무삭제라는 금빛 두른 휘장으로 영등위와의 게임(?)에서 승리한 듯한 인상을 풍기지만 그 이면에는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죽어도 좋아>가 무삭제 인 건 사실이다. 근데 그거 아는가? 영등위가 당 영화의 제한 상영가 등급을 내리면서 문제삼았던 구강성교 장면을 살리기 위해 <죽어도 좋아>측이 필름의 조도를 낮추고 어둡게 처리했다는 사실을.


어허! 오해하지는 마시라. <죽어도 좋아>의 무삭제 개봉을 폄하하거나 흠집 내려는 것이 아니니까. 다만 김수용 위원장을 비롯한 영등위 위원들이 당 영화의 18세 관람가 등급을 미끼로 문제시 된 장면에 뭔가의 조치를 요구하였고 배급사 측은 그 부분의 조도를 낮춤으로써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다.


영등위는 구강성교를 어둡게 처리하면 등급을 주겠다고 아닌 척 검열을 가하였고 <죽어도 좋아>측은 개봉을 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이는 엄연한 검열행위다.


게다가 당 영화처럼 기구한 운명을 가진 제2, 제3의 <죽어도 좋아>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왜냐, 검열단체인 영등위가 그 많은 비난과 불만 속에서도 여지껏 서울시 중구 장충동 2가에서 등급업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얘기를 꺼낸 건 단지 제한 상영가 등급을 받아 개봉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간 언론 등에서 줄기차게 외쳐왔던 몇몇 주장들이 일순간 사라진 것을 말하려 하는 거다.


<죽어도 좋아>의 개봉이 확정되기까지 당 영화를 응원하고 도왔던 모든 이들의 주장은 비단 상영 촉구에만 있지 않았다. 제한 상영가 등급이라는 불합리한 규정에 대한 개정요구가 이 후 검열로 짓밟혀진 표현의 자유문제로까지 번졌고 결국엔 이 모든 악()의 요소를 품고, 전파하는 영등위의 존폐 여부를 공격함으로써 검열 없는 표현자유의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마지막 방해물을 제거하자는 목소리로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죽어도 좋아>가 18세 관람가 등급을 받자마자 그러한 주장들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런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 영화계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시다.


그리고 <죽어도 좋아>의 상영에 가장 열을 올리며 표현의 자유를 엄호하던 언론은 현재 당 영화의 선전 보도에 한창이다. 아~ 표현의 자유 수호는 정녕 이리도 멀단 말인가...



 


본 공사는 지난 9월 2일자 "한국의 래리 플린트를 꿈꾸며 - 이강림 씨네프로 대표" 기사에서 영등위를 상대로 등급보류 결정 취소소송을 낸 이강림 감독과의 이너뷰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리고 당 이너뷰에서 이강림 감독은 에로 비디오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한 심의로 인해 고사 직전에 놓인 업계의 부활을 위해 또한 삭제라는 고통에 신음하는 표현의 자유와 검열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영등위의 해체를 위해 끝까정 싸울 것임을 밝힌 바 있다. 물론 본 공사는 그의 행보를 쭈욱 지켜보기로 했었다.


그럼 그 이너뷰 후 이강림 감독의 행보는 어떻게 되었을까? 먼저 그를 이너뷰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8월 10일의 영등위를 상대로 한 소송은 그 자신이 취하하였다.


원래는 그가 감독한 <보도방>과 <냄비가게닷컴>에 대해 영등위가 등급보류판정을 내린 것에 소를 제기했던 건데 그들의 무언의 요구대로 필름을 삭제, 그 요구를 받아 들였다는 점에서 별다른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이강림 감독의 이런 적극적인 액션을 계기로 결국 지난 9월 27일 영등위와의 면담이 성사되었고, 노계원 비디오 등급 위원장과 위원 2명 그리고 이강림 감독과 업계 대표 몇 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 각자의 입장을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그 결과, 노 비됴 등급 위원장으로부터 개선의 약속을 받았고 현재의 에로 비디오는 은근히 비추는 음모 노출 및 정사장면에서의 풀 샷 장면과 부분적인 클로즈 업이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총대를 맨 이강림 감독은 에로 비디오 업계가 그간 줄기차게 희망하고 요구해왔던 바를 얼마간 이루어냈으니 임무 땡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2년 전, 영등위가 생기기 전에 등급심사를 맡았던 공연예술진흥협의회(이하 공진협) 시절은 지금보다 성()적 표현에 대해 한결 제재가 덜하였다. 그러나 공진협이 사라지고 영등위가 새로 생기면서 심사위원들의 면면이 바뀌자 에로 비디오 업계는 그나마 있던 약간의 표현 자유마저 박탈당하였다.


요는 작금처럼 영등위의 등급심사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칫 위의 구두약속은 등급위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언젠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표현의 자유를 사수하기 위한 최종 단계는, 이전 공진협이 위헌기구임이 밝혀져 사라졌듯 법이 금하고 있는 검열행위를 버젓이 자행하고 있는 지금의 영등위를 심판대에 올려 위헌기구임을 공표 하는 것일 테다.


그래서 거의 혼자 표현의 자유를 얼마간 회복한 이강림 감독은 이에 그치지 않고 김수용 감독이 위원장으로 있는 영등위를 상대로 이 단체가 헌법에 위배된다며 다시 소를 제기하였다 (자세한 소송의 내용을 알고 싶으면 요기를 누질르시라). 이 소송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영등위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가지며,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을 인정하지 않는 이 나라의 헌법에 저촉되는 명백한 위헌단체라는 거다.


이 위헌심판청구 소송은 지난 11월 14일 헌법재판소에 접수된 상태다.



 


이렇듯 표현의 자유를 위해 앞장서서 애쓰고 있는 에로 비디오 업계이지만 그간의 행보가 주목됨과 동시에 안쓰러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강림 감독이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행동들은 영등위라는 동일 상대를 두고 대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죽어도 좋아>의 문제와 결부시킬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only 본 공사의 주목만 끌뿐이지 <죽어도 좋아>의 사태를 자기 일처럼 아파하며, 분개하며 목소리를 높였던 언론 및 많은 단체들은 그 이전 소송문제도 그렇고 이번 소송에 대해서도 짐짓 모른척 외면하거나 관심도 두지 않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제위덜 중 이강림 감독이 영등위를 상대로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했다는 기사를 영화 주간찌라지 및 각종 재래식 찌라시들에서 접한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꺼다. 혹시 이 사실을 찌라시에서 읽었다는 잉간 있으면 증거물과 함께 자신의 신발을 입에 물고 본 공사로 똥꼬털 휘날리며 잽싸게 달려오기 바란다.


이강림 감독은 현재 거의 혈혈단신 영화계에서 그렇게 바라마지 않고 있는, 표현의 자유라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걷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언론 및 영화인들이 없다는 건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본 우원은 <죽어도 좋아>가 상영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에 대해 상영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죽어도 좋아>의 감독 및 배우, 배급사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영등위를 압박할 수 있는 거대 집단을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본다.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대응하였기 때문에 영등위를 압박할 만큼의 큰 힘을 발휘했다는 얘기다(물론 그 압박이 <죽어도 좋아>의 상영을 전적으로 가능하게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근데 그 큰 집단이 <죽어도 좋아>의 상영 허가만을 위해 모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들은 <죽어도 좋아> 사태에서 우선적으로 영등위의 해체를 위한 구실을 잡았고, 결과적으로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계기를 보았기 때문에 <죽어도 좋아>에 힘을 실어 준 것이다(그니까 언론 니덜도 <죽어도 좋아> 사태에 대해서 표현의 자유, 영등위의 불필요성에 대한 기사를 줄창 내 보냈던 거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죽어도 좋아>의 18세 관람가는 표현의 절대 자유를 위한 첫 단계가 된 것이고 그 이후 이강림 감독의 영등위를 상대로 한 위헌심판청구 소송은 영등위라는 인습을 폐기할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는 관문이 된다는 것이다.


근데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는 관문에는 이강림 감독 혼자 쓸쓸히 출발선에 서 있는 형국이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무모함처럼. <죽어도 좋아>때 보였던 그 큰 힘들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결국 <죽어도 좋아>의 상영허가 조치는 그걸로써 끝이 아니라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단계가 막을 내렸다는 소리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몇 번의 홍역을 더 치뤄야 할지도,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크게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모을 수 있는 언론의 역할은 필수적이자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근데 <죽어도 좋아>의 일 단계 과정이 막을 내리자 이들이 보인 모습은 뭔가? 고작 <죽어도 좋아>의 할아버지, 할머니 섹스씬 부각시키는 일 말고 한 게 모가 있냔 말이다.


게다가 이강림 감독의 움직임은 에로 업계라고 해서 무시하는 건가? <죽어도 좋아>의 상영이 갖는 상징성이나 이강림 감독이 보이는 행동은 모두 표현의 자유 수호 아닌가. 근데 에로 비디오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다고 나서니 우습다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들 묵묵부답인가?


언론이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니덜이 힘을 쓸 때다. 표현의 자유가 일개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건 니덜이 더 잘 알 거 아니냐. 뭐, 니덜보러 십자가를 거머쥐고 선봉장 역할을 하라는 게 아니다. <죽어도 좋아>의 일이 무난하게 해결되었다고 해서 표현의 자유가 수호된 양 마냥 손놓고 있지 말라는 소리다. 그리고 언론의 역할에 충실하게 이번 이강림 감독의 행동을 외면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게 바로 언론으로서 해야 할 일 아니겠냐...



 
딴진공 논설우원
나뭉이
(namung@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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