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니지] 게임, 통과 의례의 힘 2002.11.3.일요일 지난번 리니지 18금 기사를 쓰고 난 뒤 매우 다양한 견해를 접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후속 기사에는 많은 게임 개발자들의 미묘한 분위기 (정서)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 다시 설명하지만 리니지 논쟁을 단순한 게임회사와 공권력간을 갈등만으로 이해하고 우리가 끼어든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영등위나 엔씨의 어느쪽 승리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 독자는 이렇게 말했다. - 딴지가 만약 리니지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 증거를 제시해 다오.
한 독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 저도 99년도에 리니지 때문에 고등학교 인문계 진학을 포기한 학생을 압니다. 성적은 반에서 10등정도로 인문계 진학이 충분한 성적이었지만 리니지에 빠져들면서 밤을 세워서 리니지를 하는 날이 반복되었고 결국 인문계에 가면 리니지 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상고로 갔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픕니다. 자신이 이룰 뜻이 있어서 상고로 갔다면 저도 기뻣겠지만, 게임을 하기 위한 시간 확보를 위해 상고를 선택했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더군요. 이 독자의 말이야말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럼 설마 그 아이의 인생, 대신 살아줄 생각인가? 살려고 하면 살수는 있나? 인간의 행복, 인간의 기쁨이란 각자 기준에 달린 것이다. 어떤 권력도 한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지를 결정할 수 없다. 그것은 청소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기존 교육에 염증을 느끼고, 대안학교나 검정교시를 준비하기 위해 자퇴하는 아이들의 선택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지금 게임을 하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결정한다면 우리는 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판단과 혹은 실수를 해나가면서 애는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어른이 되는 탈피과정이 자기 마음에 안드는 방식 이라고 해서 이러쿵 저러쿵 입질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더구나 살아있는 인간의 미래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 상고로 간 아이가 미래에 어떤 인물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질문자 보다 더 훌륭한 성취를 얻으면 그땐 부끄러워서 어떻게 살건가? 현재의 기준에 맞춰서 그 애의 미래가 불행할것이라고 믿는 것은 자신의 가치관을 지나치게 투영한 오해다. 우리가 간섭할 수 있는 것은 그 학생이 게임을 하기 싫은데, 누군가 강제로 노예처럼 게임을 시키는 경우다. 누군가 술을 마시기 싫은데 억지로 술을 들이붇는 경우다. 유혹은 죄가 아니다. 진짜 어른이란 중독에 변명하지 않는다. 술 때문에 자신이 실수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술을 마신 자신의 선택 때문에 실수한거라고 인정한다. 이게 어른이다. 또 다른 독자가 물었다. - 딴지가 왜 리니지와 같은 강자를 옹호하느냐? 무엇보다 먼저 정리할 것이 있는데, 우선 본지는 엔씨 소프트에 절대 호의적이지가 않다. 엔씨 담당자에게 문의 메일을 주고 받을때도 분명히 한 부분이 있다. 이번 기사에서 딴지는 엔씨를 옹호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어찌되었건 반 영등위 논리 개발에 절실한 엔씨 소프트가 본지 기사를 인용해서 뭔가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본지는 엔씨에 이용당할 빌미를 처음부터 주지 않았다. 첫 번째 기사를 읽어본다면 알 것이다. 굳이 엔씨 내부 사내정치의 부산물에 불과한 루머성향의 음모론이 인용된 것도 그런 목적임을 부인하지 않겠다. 물론 그보다는 영등위가 엔씨에 얼마든지 이용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고. 그러니 최소한 여러분이 믿는 것처럼 엔씨를 위해 대신 영등위와 투쟁한 것은 아니다. 이번 기사도 마찬가지다. 본위원은 "엔씨 소프트"라는 회사는 대단히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하여?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영등위를 비난하면서도 엔씨에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당신의 권리이지, 엔씨의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위원은 지난번 기사를 쓰고 나서 게임계의 놀라운 분위기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엔씨 소프트는 돈이 많으니까 좀 당해도 싸다 라는 논지다. 이런 분위기에선 돈 많은 것도 죄라면 죄다. 그런데, 일반 독자가 아닌 게임계의 관련 독자들이여. 이런 애기를 해주고 싶다. 본지는 엔씨가 돈이 얼마나 있든지, 얼마나 부자인지, 뭐하고 먹고 사는지 사실 관심이 없다. 사실 이번 논쟁에서 엔씨의 돈을 논점화해서 거론한 것은 영등위 진영의 논리다. 즉 부패한 자본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공권력뿐이라는 논리, 쌍팔년도 운동권 같은 말장난이다. 이미 서구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합의도출 기구로 공권력이 아닌, 시민 사회 권력론, 즉 제 5의 권부 이론이 활성화되고 있다. 권력은 다른 권력을 아주 뻔하게 질투하고, 치사하게 변명한다. 공권력이 자본주의를 공공성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견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부터가 오류다. 공권력에 의한 견제는 차선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공권력은 무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공권력이 자본을 감시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공권력이 자본을 제대로 감시하는지 감시해야 한다. 안그러면 공권력은 자본과 결탁해 버린다(재미있지? 세상은 이렇게 물리고 물리며 돌아간다). 공권력이 "유료"가 되는 순간이 이 지점이다. 영등위 개혁 포럼같은 안티 영등위 조직(?)이 움직이는 사회적 비용은 우리가 부담해야 한다. 공권력이 무료라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바보가 된다. 세상에 꽁짜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영등위의 문제점을 이야기 한다. 온라인 게임에 대한 사회 주체의 합의 미비 , 법적인 혼돈 절차, 심의 과정상의 여러 의혹이 발생할 수 있는 지점들, 심의 의원의 자질 문제까지, 총제적인 "과정"을 문제 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된 과정에서 나온 결과는 "진실이라고 추정"할 가치 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등위의 행위가 "사"권력이 아니라 "공"권력인 이상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영등위 온라인 소위 위원에게 미리 이번 사태에 대한 문의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답변하지 않았다. 공권력의 엄정함은 스스로에게 그 행사의 떳떳함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 엄정함은 밀실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아래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비밀재판이 아닌 공개재판제도를 채택한 이유가 대체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리가 공권력을 저항하는 순간이 아닌 신뢰하지 못하는 순간, 공권력의 힘은 상실된다. 결국 엔씨의 돈을 이야기 하는 속내는 이거다. "저 새끼가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증거 제시를 못해. 제발 묻지 말아줘. 아무튼 근데 저 새끼 돈이 졸라 많아. 그러니까 같이 삥 좀 뜯자. 엔씨 망하면 지금 시장 점유율 약한 약소한 온라인 게임회사한테는 어쨌든 기회 아냐?" 게임 개발자들이여. 이런 말을 믿는 건 자해다. 자해하지 마라. 이렇게 생각해 봐라. 당신이 만약 엔씨 만큼 돈을 벌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줄 아닌가? 시스템이 또 찾아올거다. 그래서 어떤 핑계를 대서든 당신을 괴롭힐거다. 아이고 네 나으리! 할건가?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발상을 버려라. 지금 당장 약자일지 모르는 가난한(?) 게임 개발자의 창작 권리도 언제든지 영등위에게 공격당할 수 있다. 한번 생겨난 시스템은 순진하게 공공성 만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시스템은 희생제물을 원한다. 공무원 노조 여론 조사 결과 37%의 공무원들이 다른 동료 공무원의 비리에 대해서 묵인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공무원의 부패를 막기 위한 그 많은 법 규정들, 그리고 시민단체의 활동을 보면 자연히 깨우치게 될 일이다. 무엇보다 영등위의 게임규정에 산파 역할을 했던 박상우씨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영등위를 탈퇴해서 영등위 개혁을 위한 포럼에 참여하고 있는 것부터가 그 증거다. 몇일전 검찰의 고문으로 한 피의자가 죽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천하의 김대중 행정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믿을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죽었다. 이런 일이 당신에게 벌어지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누가 알았겠는가. 죽은 그 사람도 자신이 믿었던 공무원들의 고문에 당해 죽게 되리라고는 상상도하지 못했을 것을. 이런 일이 당신에게 벌어졌다고 치자. 어떤 그런 피의 사실로 체포되었다. 물론 당신은 죄가 없는지 없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당신의 죄는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았고(리니지로 죽은 아이들의 수는 몇 명인가?), 잘못된 방식으로 심판 받았으며(심의 과정을 왜 영등위는 공개하지 않는가?), 단순한 사실에만 집착하는 언론 플레이에 공격당해 그 피의사실이 사회적으로 확정되고, 그래서 교수형에 처해지게 된다면.... 그때도 당신에 대해서 침묵하길 바라는가? 우리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서, 틀릴수도 있고, 사실은 당신이 살인자여서 당신을 옹호한 우리만 바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바보가 되는 것보다 당신의 목숨이 억울하게 다루어지는 위험성을 더 높게 생각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처절하게(?) 이번 사태에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까워서다. 누군가 예술품을 가짜라고 믿고 쓰레기통에 버릴 때, 한 아이의 재능을 몰라주고 짓밣을때, 아집에 사로잡힌 탈레반이 석굴을 파괴했을때, 우리는 안타까움을 넘어서는 인류적 공분감마져 느낀다. 온라인 게임의 가능성을 철저히 무시하고 규제와 감시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선이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자산 하나를 쓰레기로 간주하는 어리버리한 사태를 우리는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견딜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스트리아 원주민 부족에서 벌어지는 통과의례의 한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인류, 진보인지 퇴보인지 모르는 시간의 계단을 디디고 오며 많은 것을 깨닫고, 많은 것을 잊었다. 현대 산업 사회로 접어들면서 인류문명이 서서히 잊어버린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통과의례"다. 부족한 나로써는 도저히 조셉 캠밸의 통찰력 짙은 묘사를 흉내조차 낼수 없다. 차라리 좀 길지만 그와 빌 마이어스의 대담집 형식을 취한 명저 "신화의 힘" 일부를 인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리라. (이하 인용문은 모두 조셉 캠벨 저, 신화의 힘) 모이어스 : 그 동굴은 어떤 일에 쓰였을까요? 캠벨 : 학자들은 소년을 사냥꾼으로 입문시키는 의례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소년은 사냥하는 법도 배워야겠지만 짐승을 두렵게 여겨 존중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례도 배워야 하고, 더 이상은 소년이 아니라 이제 어엿한 남자가 되었다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냥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 동굴은 의례를 통해, 소년에게 더 이상은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라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음을 깨우쳐 주었던 그 시대 사람들의 성소(聖所)였던 것입니다. 모이어스 : 소년이 이런 의례를 거치면 어떻게 됩니까? 캠벨 : 이런 동굴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가 하는 것은 정확하게는 아무도 모르지요. 그러나 우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이 베푸는 의례를 알고 있습니다. 아이의 머리가 굵어져 마음대로 다룰 수 없을 즈음에 이르면, 날씨가 좋은 어느 날 건장한 남자들이 이 아이에게 쳐들어옵니다. 이들의 몸은 옷 대신 깃털로 가려져 있습니다 몸에다 피를 칠하고 거기에 깃털을 붙인 것이지요. 이들은 황소 울음 소리를 내는데 이 소리가 바로 영신(靈神)들의 소립니다. 그러니까 이 남자들은 영신의 자격으로 아이에게 쳐들어온 것이지요. 아이는 어머니를 피난처로 삼으려고 합니다. 실제로 어머니는 이 아이를 보호해 주려는 척합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막무가내로 이 아이를 데리고 가버립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더 이상 아이의 보호자가 되지 못합니다. 아이는 이제 더 이상은 어머니에게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전혀 다른 삶의 마당에 이르렀으니까요. 남자들은 이 아이를 남자들만의 성소로 데려갑니다. 아이는 여기에서 시련을 당하지요. 가령 할례를 당한다든가, 몸의 한부분에 상처를 입는다든가, 사람의 피를 마셔야 한다든가 하는 겁니다. 어머니의 젖으로 자라난 아이가 여기에서는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겁니다. 이로써 아이는 어른이 됩니다. 이런 의례가 진행될 동안, 연장자는 아이에게 위대한 신화의 신화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모듬살이의 규정을 가르칩니다. 물론 부족의 신화도 배웁니다. 이 의례가 끝나면 이제 어른이 된 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에서는 부모들이 골라 놓은 배필이 기다립니다. 아이는 이로써 어른이 된 것입니다. 원시 입문 의례에서 아이는 소년 시절로부터 격리됩니다. 바로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아이는 할례를 당하든가 몸의 한부분에 상처를 입는데, 이러한 시련은 곧 아이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이 치러지면 입문자의 몸은 어른의 몸이 됩니다. 이런 의례를 치른 이상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모이어스 : 어머니에게로 돌아갈 수도 없겠지요. 캠벨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 사회의 삶 속에는 이런 게 없습니다. 마흔다섯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아버지에게 고분고분한 남자가 있다고 칩시다. 이 사람은 정신분석의를 찾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분석의가 처방을 내려 줄 테지요. 모이어스 : 오늘날에는 그런 의례가 없지 않습니까? 캠벨 : 유감스럽게도 그렇지요. 그래서 젊은이들은 저희 손으로 그 의례를 만듭니다. 그래서 불량배들이 작당하여 설치고 다니는 등의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 불량배의 동아리가 되는 이런 행태는 결국 입문 의례와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모이어스 : 그러니까 사회적 의례, 종족적 의례는 신화라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신화가 없어지니까 이런 의례도 없어지게 된 것이군요? 캠벨 : 의례의 마당은 신화가 드러나는 마당입니다. 의례에 참가한다는 것은 곧 신화에 참가하는 것이지요. 독자들에게 묻는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토록 중요한 "통과의례"를 대신할 수 있도록 청소년들에게 주고 있는 게 무엇인가. 과연 미성숙한 소년을 성숙한 어른으로 만들 수 있는 사회적 프로그램이라는게 존재하기는 한것인가? 통과의례가 실종된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의 통과의례의 대용품으로 사용되어 왔던 것은 "수능시험"과 "군입대"였다. 그러나 이건 제대로 된 통과의례라고 말할 수가 없다. 수능에 신화적 판타지가 어디 있으며, 군대에서 얼차례 말고 앞 세대의 지혜의 통찰을 전수받을 기회가 어디에 있는가. 더구나 수능이나 군입대처럼 컨닝하기 쉬운 시험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동의를 받을 정도로 공정하지도 못하다. 통과의례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캠벨의 성찰에서 드러나 있다. 그것은 신화의 형태를 띄고 있어서 앞 세대의 교훈과 패배, 경험의 결과를 전수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철저하게 보호자로부터 격리된 가혹한 시련의 시험을 거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과의례가 끝난뒤에는 한사람의 어른이 되었다는 그에 걸맞는 사회적 인증과 실제적인 대우를 부여해야 한다. 그렇다면, 게임은, 우리 시대에 가장 효율적인 통과의례 장치 중 하나다. 현재의 현실에서 확장된 현실로 들어가는 행위란 성소의 입장이다. 게임속에서 벌어지는 기적은 우리는 일상으로부터 비일상화 - 즉 일탈의 해방감을 유발한다. 본위원은 (완벽하진 않지만)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게임, 그중에서도 특히 온라인 게임이 이러한 "통과의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화적인 모티브, 기존 세계에서 확장된 세계로의 격리, 시련과 임무, 모듬살이의 규칙 깨우치기, 관계 맺기, 그리고 레벨업 (성장)..... 물론 캠벨의 말대로 영화처럼 그 종사자들이 자본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통과의례의 주술사 같은 책임 의식이 전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연장 중에서 게임은 가장 원시적인 통과의례의 원질에 가깝다. 우리는 게임의 이런 속성에 주목해야한다. 이것으로 게임이라고 하는 존재를 한번 재발견해보자.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왜 이토록 게임에 열광하는지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 아이들에게 통과의례를 치러주지 않고 방관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간절히 우리와 접촉하길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아이들을..... 방치했다. 아이들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스스로 구원하는 것 말고는.
그러니 영등위가 무슨 권리로 인류의 수천, 아니 수만년된 문화적 회귀 본능에 도전하는가? 영등위가 온라인 게임의 폭력성과 위험성을 빌미로 청소년 보호로 온라인 게임을 탄압하는 것은 진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짓이다. 왜냐하면 통과의례는 원래가 위험한 거다. 왜냐하면 통과의례는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단계를 철저하게 선정하고 그 이상을 넘지 못하는 개체는 죽여버리는 검증 시스템에서 연유했기 때문이다. 캠벨 : (원시시대의 암각화의 주요 테마로 죽음과 식량획득을 설명한 다음)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아이를 어른으로 변모시키는 일일 테지요. 모든 사람들의 의례적인 삶에서 변모라고 하는 주제는 상당히 근본적인 관심을 환기시킨 문제였던 것으로 보여요. 오늘날에도 이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시 사회도 문제아, 말하자면 순수한 자연의 충동을 그대로 표현하는 아이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시키는 데 굉징한 어려움을 겪었어요. 별수를 다 썻지요 .그런데 사회는 규칙을 따라오지 않는 문제아들에게 견디지 못했어요. 그런 아이들을 용인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사회가 그들을 죽여 버렸던 겁니다. 할례를 거부하거나, 무서워서 동굴에서 뛰어나오면, 그 소년은 죽임을 당하거나, 평생을 어린애 취급을 당하며 사회적 격리를 당하게 된다. 이것은 군집 생명 동아리의 비정함이다. 군집 생명체는 잘못된 유전자를 가진 개체를 성장단계에서 박해해서 죽여 버린다. 그것은 후손들이 강하게 자라나게 하기 위한 자연의 시스템이다. 성장기가 긴 인간의 특성상 인류의 문명은 그런 생명의 비정한 요구를 통과의례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렇다. 정말 위험하다. 원시의 원형질에 가까울수록 통과의례는 할례나 문신처럼 직접적으로 몸에 상처를 내거나, 번지점프와 같은 아드레날린으로 충만한 고양감을 불러일으키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신화는 인간의 알몸을 관능으로 더듬어 감각을 일깨운다. 통과의례가 되는 게임은 위태로워야 한다. 그래야 통과의례의 효과가 생길수 있다. 한계가 존재하고 그 벽을 넘어서야만, 인간의 경험은 레벨 업 된다. 인간의 한 인지가 열리는 순간, 신화의 피는 진짜 피다. 그 피가 불러일으키는 주술은 폭력에 굴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비릿한 피 냄새에 이끌리는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자신속에 야만과 문명, 말과 행위, 고통과 쾌락, 슬픔과 즐거움이 존재함을 말한다. 그리고 타인과 나누며 교류하는지를 결정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것은 잔인해야 한다. 현실보다도 더! (하지만 온라인 게임의 위험을 과장하는 영등위에게는 참으로 안된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게임의 통과의례는 인류가 지금까지 해온 통과의례 중 가장 신체적으로 안전을 보장하며, 반복적인 체험으로 낙오자를 막을수 있다.) 위험하다. 그러니까 도전해야 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게임에 끌릴 수밖에 없다. 그 애들의 뜨거운 피는 우리가 박탈한, 그러나 당연히 우리가 줘야할 의무가 있는 신화적 체험을 향해 뜨겁게 맥박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본능이다! 그런데 그게 통과의례가 위험하니까 18세 이하 어린애들은 하지도 말라고? 이게 대체 말이 되는가? 수만년도 더 된 인간의 원질적 본성에 반항하고 있는 건 바로 영등위가 아닌가! 18세 이하의 청소년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게임과 같은 위험한 통과의례다!
본위원, 그럭저럭 인생상담에 잔재주가 있다. 무료상담이며 동시에 책임을 안 져준다는 분명히 하는 상담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고민남, 고민녀도 장난삼아 상담을 청해 해오는 것이 분명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상담의 결과로 내가 느낀 인생의 진실이 하나 있다. 왜 이렇게 자신이 뭐가 되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인간이 이토록 많은거냐? 하고 싶은 일은 있는데, 당장 못하겠다. 혹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은 차라리 편하다. 어떻게 하면 그 일을 해낼수 있는지 같이 걱정해 주고, 뭐 자료 좀 찾아주고, 더 잘 도와줄수 있는 사람 소개시켜주고, 넌 할 수 있다고 부추켜 주고 눈 똑바로 쳐다보면서 믿어주고. 그럼 된다. lifepen 인생상담소에서는 주로 이런 레파토리로 삼십년동안 장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이 뭘 해야할지 모르는 사람, 특히 어른은 치명적이다. 애들이라면 그나마 대책이 있다. 시간이 어느정도 있고, 머리도 굳지 않은 상태라서, 타인의 다양한 경험 (책이나 역할모델)을 권해줄 수 있고, 아예 맨땅에 헤딩하면서 길을 찾는 방법을 알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른이 이지경이면, 그냥 술이나 같이 먹어주고, 한탄 받아주는거 밖에 해줄 일이 없다. 나는 궁금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무책임한 어른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보호주의의 논리대로라면 잘 보호된 청소년이 자기 인생을 책임질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 그들과 얘기하면, 한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언제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는 확실한 자각이 없었다는 점. 남들이 다 하는대로, 자기 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모범생처럼 삶을 살아왔고, 어느날 문득 자신이 어른이 아닌가... 그냥 느끼게 되었다는. 결정적인 한 생의 단계, 통과의례의 체험이라 할만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어른은 나이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겠다는 결정을 하는 순간 어른이 되는 거다. 정말로 인생을 잘 살고 싶은 청소년이 있다면, 보호주의자들 믿지마라. 영등위는 청소년을 보호하는 단체가 아니다. 속지 마라. 단순히 컨텐츠의 등급 심의나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 마치 청소년 보호의 선봉인냥 나서는 꼴이 우스꽝스럽다. 이른바 "청소년 보호"라는 말 자체가 오만하다. 정말로 현명한 사회라면 "보호"가 아니라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아이들을 제대로 된 어른으로 "통과시키는 것"을 말해야만 한다. 영등위와 같은 나이주의자들 원칙대로 세상에 "생산"되는 어른들은 극단적으로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어른이 적은 세상은 아무리 고치려고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모든 보호주의는 과보호다. 진정으로 우리가 그 아이를 사랑한다면, 세상으로 집어던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을 오히려 약하게 만든다. 그래서 탄생하는 것은 공포, 그것도 자신에 대한 공포로 속으로 움추린 기형적 아이, 자신이 무엇을 해야 삶의 기쁨을 누리는지 모르는 어른의 형상을 한 아이다. 가장 단적인 예가 청소년기에 집중적으로 가해지는 섹스에 대한 공포 심리 조장이다. 미래의 희망인 청소년들은 언젠가는 섹스를 하고, 다시 소중한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모듬살이 체계의 어른이 되어야만 이 사회가 제대로 구성 유지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섹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공포를 조장한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공포는 순결주의로 포장되어 과도하게 학습된다. 당장은 소녀들이 임신과 출산에 대한 두려움으로 청소년기의 섹스를 회피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는?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출산시 제왕절개율이 43%로 가장 높은 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세계 보건 기구가 권장하는 10%를 훨씬 웃도는 엄청난 비율이다. 쉽게 말해서 한국 여성의 절반 정도가 자연이 부여한 섭리를 부정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한 사회에서, 그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몸을 가진 여자들의 절반이 자신의 자궁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를 직접 낳지 못한다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설령 의사들이 높은 의료수가를 획득하기 위해 제왕절개를 강권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고통이란 삶의 또 하나의 얼굴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결과는 자연스러운 출산의 고통이 소녀를 어머니로 만들어서 자신의 아이에 대해 모성애를 애착하게 하는데 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제왕절개는 하나의 작은 예다. 하지만 우리의 소녀들이 청소년기에 섹스를 회피하기 위해 임신과 출산에 대해 강요받은 다양한 공포기제들이 훗날 그녀들의 고통에 반응하는 방식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안전을 위해서 더 많은 삶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방식의 삶이다. 안전을 위해 쾌락의 문이 닫으면, 고통의 문도 닫힌다. 모이어스 :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천복을 좇으라, 삶의 기회를 잡으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라고 가르치신다는데, 혹시 이 신화를 들려주시면서, 모험이라고 하는 것은 그자체가 곧 모험에 대한 보답이다, 이렇게 가르치시는지요? 캠벨 : 암요. 모험 자체가 모험에 대한 보답이고 말고요. 하지만 모험이라는 것은 위험해요. 모험에는 긍정적인 가능성도 있고 부정적인 가능성도 있는데, 이 둘 다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에요. 우리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길이 아닌, 우리의 길을 좇고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강한 권능자들의 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모험에는, 조금 전에 내가 소개한것 같은 원형적인 이야기가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게 과연 무엇인가를 아는 데 약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악마와 결혼하는 것만큼 이나 위험한 일이지요. 그러나 희망도 있어요. 우리를 부름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던짐으로써, 여행을 상상 밖의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노인은 도처에 있으니까요. 모이어스 : 그런 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는 것, 어머니의 자궁 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캠벨 : 좋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러면 자기 나름의 모험에서 공급 되는 삶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생명은 곧 말라 버려요. 통과의례 없이 태어난 어른의 삶은, 자궁으로 태어나지 않는 아이의 삶과 같이 휑뎅그레하다. 결국 우리들은 지난친 애정으로 보호의 이름을 빙자한 방치와, 보호의 이름을 빙자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화적 상상력이 사라진 사회를 만들어 결국 이 사회에서 진실한 생명이 서서히 말라 죽도록.
한 사회에 기존의 사회적 연장도구로 측정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출현한다면, 미개한 사회는 그것을 기존의 연장으로 잴 수 있도록 억거지로 깍아내어 간신히 틀을 맞추고 현명한 사회는 그것을 잴 수 있는 새로운 연장을 만든다. 평가는 평가하는 자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자신보다 이질적인 것을 얼마나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느냐는 결국 그 사회의 기본 내공이 얼마큼인가에 따라 달라지게 되므로. 그러나, 온라인 게임이라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컨텐츠에 대해서 영등위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은 자신들의 잣대에 온라인 게임을 맞추라는 것이다. 옷에 몸을 맞추라는 발상이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만약 우리의 18금 게임 리니지에 갈갈이의 아들 투명소년 탐이 실리콘밸리에서 접속했다고 하자. 탐은 중학교때 이민을 가서 한국어 플레이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으나 16세이고, 국적은 미국이다. 그런데 탐이 접속한 리니지 서버는 영등위의 간섭을 받는 서울 한복판에 있다. 자. 탐을 어찌할꺼냐? 애를 우리 기준으로 봐서 내쫓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게임 하게 내버려 둬야 하는가? 애를 내쫓으면 이건 세계화라는 국가시책에 반하는 거고, 외국인 차별이다. 그럼 그냥 둘것인가? 그럼 우리 십대들은 뭐가 되는가? ISP로 막을 것인가? 심의 만능주의자들 잘 생각해 봐라. 우리의 심의는 우리가 현재 처한 문화적 정서적 환경에 기반을 두고 우리에게 최적화 되는 것라고 당신들은 주장한다. 따라서 외국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그것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다.
영등위 그만, 세계적인 기관으로 발돋움 하셨다! 온라인 게임은 이 정도로 "확장되어 있는 현실"이다. 이것을 제대로 잴 수 있는 자가 없으면 솔직하게 "우리한테는 아직 그런 자가 없다"라고 인정하는 게 어른의 태도 아닌가? 지금까지 무난하게 대강 세상을 속여왔듯이 영화를 재듯, 음반을 재듯, 구태의연한 과거의 방식과 과거의 관점으로 게임을 평가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과연 옳은가 말이다. 이 세상에 온라인 게임이 존재 한다는 것은 이미 영등위 라는 기관의 존재가치를 파괴시켰다. 기존의 방식과 기존의 틀로, 그 이상의 것을 재려고 하는 시도는 자기 입크기를 생각하지 않고 먹을 것을 물어뜯는 입이 터지는 어리석은 개구리와 다를바 없다. 캠벨 : 콜린 턴벌은 밀림에서만 살았을 뿐 산꼭대기 라는 것은 본 적이 없는 피그미 족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어요. 이들은 어찌어찌해서 갑자기 밀림에서 구릉지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이들 앞에 광대한 고원이 펼쳐졌어요. 그러니까 조그만 친구들은 그만 겁을 집어먹더랍니다. 이들에게는 원근이나 거리를 판단할 방법이 없었지요. 멀리 고원에 풀을 뜯고 있는 짐승들이 이들에게는 개미처럼 작게 보였답니다. 완전히 기가 질려버린 이들은 그래서 어쩔수 없이 다시 밀림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겁니다. 게임은, 피그미족은 이해할 수 없는 힘이다. 그 힘은 위력적이며, 이 세상을 파괴하는 힘이다. (누군가) 게임은 세상을 혁명하는 힘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혁명은 혁명적인 수단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다. 앙시앵 레짐을 불태우는 것이 혁명의 피지, 심의의 안이한 채찍이 아니다. 물론 혁명의 파괴성에 찬성하고, 그 방식에 찬성하지 않으면서 혁명이란 말을 함부로 써서도 안되겠지만. 영등위가 온라인 게임을 기존의 틀로 재려고 하면 할수록,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질 것이다.
본지는 이제 사태에 대한 대안을 이렇게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에게는 새 부대가 필요하다. 새 술은 이미 있다. 술의 맛을 바꾸려고 들지 말자. 술은 술대로 존재할 이유가 있다. 대신 술맛을 새로 정의하자. 우리는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모두가 새로 사용할 개념을 말하고자 한다. 기존의 관점과, 기존의 방식으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인류가 이미 수천, 수만년 동안 사용해 왔으며, 최근 몇 십년사이에 완전히 잊어버린 개념이기도 하다. 이 개념은 그 누구도 패배자로 만들지 않는다. 청소년을 보호해야한다는 책임감에서 자유롭지 못한 영등위의 체면도 지킬 수 있고, 게임회사의 창작정신도 보호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게임의 직접적인 주인인 유저가 가장 큰 이득을 볼수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게임에 통과의례의 힘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온라인 게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라인 게임, 그렇다. 산업의 성숙이나,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문명의 여러분야에 비하면 작디 작은 어린아이와 같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의 능력이나 가능성을 미리 한정짓지 마라. 이보다 더 큰 죄가 있는가? 지금 영등위가 지키고 있는 이른바 심의의 문을 통하면 온라인 게임은 그저 고만고만한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 천박한 자본주의! 게임을 이지경이 되도록 내팽겨치는 것은 범죄행위다! 게임속에 잠재되어 있는 우리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막대한 신화적 에너지를 무시하는 폭거다! 무엇보다도 영등위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이해의 폭이 도식적인 수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니 편견을 먼저 언인스톨해야 하는 것은 영등위다. 게임을 규제의 대상으로 심판의 대상으로, 감시의 대상으로 보는 한 영등위의 입장은 게임의 다양한 가능성을 완전히 묵살하고 지배하려는 지배자적인 우위의 관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심의제도의 틀 안에 절대 가둘수 없는 온라인 게임을 가두려고 애쓰는 무리수로는 도저히 창작과 심의의 갈등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통과의례 장치임을 인정한다면, 심의자는 온라인 게임에서 검토할 수 있는 폭력적 묘사나 시스템의 작용에 과도한 채점의 기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게임의 게임성이 우리 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준거를 우리에게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부터 그 게임은 얼마나 돈이 많이 버느냐와 같은 천박한 기준으로 편견에 휩싸이지 않는다. 또한,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열려있는 온라인 게임의 특성상, 대한민국 영등위의 판단이 대한민국의 특수성이 아닌 인류 보편의 "통과의례"라는 기준을 갖추게 됨으로써, 심의자의 결정에 전세계 인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권위가 성립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류 보편적 기준이 아닌 대한민국의 문화적 특수성으로 하나의 게임을 심의하는 것은 영등위가 스스로의 한계를 너무 처음부터 긋고 시작하는 패착이다. 이것은 게임 회사도 마찬가지다. 신화의 범주에서 창작의 자유를 훼손되지 않을뿐 아니라, 게임을 만드는 자 모두 스스로의 일이 단순한 게임 제작이 아니라 신화를 재현하는 작업임을 깨닫게 된다. 게임의 제작자가 신화의 구연자로써의 사회적 책무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게임은 자본의 과도한 충성 요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래서 부당하게 그 의미가 손상당한 게임의 명예는 온당하게 회복되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본위원, 게임 개발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신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당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세요. 이번 논쟁에서 가장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은 유저고 그 다음은 게임 개발자이다. (이부분에서 본위원은 게임회사 경영진과 개발진은 분리한다. 돈을 벌려면 욕을 좀 먹어야 하는게 요즘 유행이기 때문이다. 본지도 야한 배너 몇 개 걸었다가 아주 맛있게 먹고 있다) 이번 논쟁 중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한 개발자가 게임이 무슨 예술이야! 돈벌이지, 라고 자학하는 말을 했을 때였다. 그러지 마라! 스스로의 자존심을 버린 자는 아무도 그 자존심을 세워주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은 자신이 담고 있는 말과 생각의 부산물이 결국 되고 만다. 패배적인 생각이나 여건에 짓눌려 나오는 게임이 인간의 삶에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캠밸 : 인간은 환경에 반응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환경에 반응하지 않는 문화가 생겼어요. 이건 기원전 약 천년에서 백년 사이에 다른 데서 온 겁니다. 이 문화 전통은 우리 현대 문화와 새 우주관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문화 요소를 동화시키지 않아요.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의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 하는 것이야 합니다. 모이어스 : 그러니 예술가가 바로 오늘날 신화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까? 캠밸 : 옛날에 신화를 쓰던 사람들은 오늘날의 예술가에 대응하는 사람들이었지요. 강호의 규칙은 강호에 있는 사람이 세우는 것이다. 리니지가 나쁜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개발자는 불평을 하는게 아니라 리니지를 능가하는 게임을 만들어서, 리니지 개발자들이 쪽팔리게 야코 죽여버리면 되는 거다. 그게 이기는 거다! 진짜 실력 있는 사람은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싸우는 거다. 세상에는 마케팅이나 다른 여건 따위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만든 게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만으로 야심에 찬 개발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본위원은 그런 긍지와 자부심이 가득찬 게임들이 등장하는 것을 매우 가슴 두근두근 거리며 지켜보고 있다. 이것이 개발자가 해야 하는 게임의 룰이다! 우리 모두는 불멸하지 않기에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화살처럼 빠른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현실을 느끼는 지금의 육체마저 모두 먼지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드는 게임은 시간의 틈입자이며, 희망이다. 체념과 낙심의 마음 따위는 하루속히 떨쳐버려라. 세상에 당당한 긍지를 가져라! 당신이 만든 게임으로 우리의 아이들이 훗날 어른이 되어서 느낄수 있는 모든 감정을 미리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신화를 경험한다. 당신은 신화의 주술사다! 당신은 손에 게임이라는 신화적인 보석을 쥐고 있다. 물론 당신은 그 보석의 주인공이 아니다. 하여 사심없이 그 보석을 사용한 사람을 위해 매일매일을 갈고 닦아야 하는 가공자이며, 탐색자다. 그리하여 어느날 그 영혼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당신이 힘들게 준비한 빛의 보석이 맻혀 순수함 그대로 빛을 발하는 순간, 당신의 의지와 그 영혼이 만나는 그 순간, 그 순간 당신은 영원한 불멸성을 획득한 신화가 될 것이다.
Thank you, My Guru Joseph Campbe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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