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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소견] <오아시스>를 보고 든 생각

2002.10.20.일요일

딴지 영진공 자유소견 접수처







언제나 그래 왔듯 본 공사 자유소견 접수처에서는 독자제위의 자유로운 의견과 씨바거림을 맘껏 접수하고 있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오아시스>에 대한 민원인덜의 씨바거림은 개봉이 두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타 영화를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지난 호 정성일의 말지 속 <오아시스> 반론에 대한 기사가 나간 후의 자유소견란은 기름을 댑따 쏟아 부은 격이었다.


이 중 본 딴진공 자유 소견 접수처에서는 <오아시스>에 등장하는 가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는 아로나민 골드 님의 자유소견을 채택, 니덜에게 소개하는 바이다.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 그리고 <오아시스>. 예쁘기까지 한 이 제목들과는 다르게 이창동은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비관적인 세계 인식을 보여주는 감독 중 한 명이다.


얼마만큼 비관적인가?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은 그곳이 사막이라는 말이다. 그가 이번 영화에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의 압도적인 사막화.


이 영화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사막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두 주인공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놀랍게도 단 한 명뿐이다. 홍종두에게 두부와 우유를 공짜로 준 가게 아저씨.


우연히 스친 그 사람을 빼놓는다면 그와 한공주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영화 속에는 없다. 타인들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예외가 아니다. 부족하나마 한공주를 보살피는 것처럼 보이던 그녀의 오빠와 올케도 사실은 아파트를 분양 받기 위해서 그녀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홍종두의 가족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가족들은 암묵적인 합의 하에 그를 감옥으로 보내고, 형은 매질을 한다. 그 형제들과 형수들은 물론이고 그의 어머니까지도 그를 외면한다. 형수가 그의 깨진 무릎에 약을 발라 주며, 나는 당신이 싫다, 당신이 없었으면 좋겠다, 고 노골적이고도 무덤덤하게 말할 때 그의 어머니는 TV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며 외면한다.


이 장면은 충격적이다. 세계를 적대적으로 파악하는 작가나 감독은 많았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들이라도 흔히 어머니만은 마지막 거처로서 남겨 두기 마련이다.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마지막 거처마저 가차없이 파괴한다. 가족이라는 것의 고전적인 모습을 파괴한다.


이 영화에서 가족은 타인의 틈입을 용납하지 않는 견고하고 이기적인 한 집단일 뿐이다. 홍종두가 한공주를 어머니의 회갑연에 데려갔을 때, 그의 형과 동생은 그녀를 다시 데리고 가라고 계속 말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자리에서 그의 형은 실제로 그녀의 휠체어를 가족의 무리에서 떼어내어 밀쳐 둔다. 그 가족은 타인의 틈입을 용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리의 안정을 뒤흔드는 구성원을 배제한다.


그래서 가족들은 사진 찍기를 거부하고 나가는 홍종두를 붙잡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마저도 붙잡지 않는다. 완고하게 사진 찍힌 가족은, 심지어 어머니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구성원의 마지막 안식처가 아니라 거부와 배제로 형성된 하나의 무리이고 그 무리 중의 하나일 뿐이다. 소수자들에게 세계는 사막이다(게다가 겨울이다! 세계는 황량하고 스산하다).




 


그렇다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오아시스는 어디에 있는가? 간단하다. 오프닝에 나오는 벽걸이 그림 속에 있다. 이 긴 첫 쇼트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잘 보여 준다.


오아시스는 그림 속에만 존재하고 그나마 그 위에는 항상 세계의 불안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여자는 이 그림자 때문에 두려워한다. 이 그림자는 어떻게 지워질 수 있는가? 홍종두의 말을 빌면, "마술"을 통해서다.


그렇다. 이것이 이창동의 영화에서는 생경하게 느껴지는 비현실적 장면들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그 검은 그림자는 비현실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지워질 수 있을 만큼, 다시 말해서 실제적으로는 지우기 힘들 정도로 짙다.


그 마술은 환상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 환상 속에서만 여자는 휠체어에서 일어서고 일그러진 얼굴을 펴고 노래를 부른다. 그 환상 속에서만 사랑은 이루어지고 오아시스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견고하고 안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게만 존재한다. 모든 환상이 그렇듯이.



영화 속에서 환상적인 장면들과 실제의 장면들은 구분되지 않는다. 관객들은 그들의 오아시스가 실재하는지 실재하지 않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그것은 여자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새가 되기도 하고 나비가 되기도 하는 거울 빛의 환상과도 같은 것이다. 무자비한 세계의 침입에 의한 순간의 흔들림으로도 간단히 흩어져 버릴 만큼 불안하게만 존재하는 것이다.


사막에는 나그네를 유혹하는 신기루라는 것이 있다. 이 영화 속의 오아시스도 그런 신기루에 가깝다. 세계의 사막화가 너무나도 압도적이기 때문에 도저히 실재로는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비관적인 인식은 감독의 필모그라피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고 점점 심화되고 있다. <초록물고기>에서 세계는 한 젊은이를 죽였지만 아직 가족은 그에게 기댈 만한 곳이었다. <박하사탕>에서 세계는 한 인간의 일생을 망쳤지만 그때 가족은 보이지 않는다. <오아시스>에서 세계는 소수자에게 적대적이고 이제는 가족마저도 그렇다. 이토록 철저하게 비관적인 세계 인식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한국영화에서는 홍상수의 그것뿐이다.


이창동의 그 세계 속에서 주인공들만이 순수하다. 그가 조직폭력배이든 고문 경찰이든 전과자이든 그는 순수하거나 적어도 순수를 바란다. 이것도 이 감독의 영화들에 일관된다. 모두 명사로만 이루어진 세 개의 영화제목이 이것을 보여준다.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영화들은 모두 지극히 비관적인 세계인식을 보여 주지만 제목들은 모두 소박하고 예쁘다. 그것들이 일관되게 하나의 상징, 순수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수함은 이미 소멸해 가는 것들이다. 그래서 <박하사탕>을 빼고는 영화 속에 없다. <초록 물고기>에는 초록 물고기가 없고 <오아시스>에는 오아시스가 없다. <박하사탕>도 사실은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의 매개,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일 뿐이다.


인물들은, 감독은 이 사라져 가는 상징들을 붙잡으려 한다. 이것이 이창동과 홍상수가 다른 점이다.



 







홍상수의 영화에 순수한 인물은 없다. 그는 영화에 나오지도 않는 초록 물고기나 오아시스를 붙잡으려 하지 않고 그냥 이 그렇고 그런 세상을, 그 타락이 일상의 "생활"이라는 것을 "발견"해 버린다. 그의 영화는 관객들에게 너도 타락했고 나도 타락했고 세상이 그런 것이다. 그냥 "괴물이나 되지 말자"라고 말한다. 관객은 좌절하거나 냉소하지만 도덕적인 자책이나 분노를 갖지는 않는다. 나만이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창동은 순수한 인물들, 그것도 타락한 세상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순수한 인물들을 보여 준다. 너는 타락했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너와 세계가 이들을 망쳤다, 라고 말한다.


이때 관객들이 느끼는 것은 자책이거나 원한이다. 자신도 세상과 마찬가지로 가해자라고 느낄 때 관객들은 자책한다. 배우 문성근은 <박하사탕>을 보고 이창동에게 개새끼라고 했다. 지금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처를 이제 와서 그렇게 헤집어 놓으면 어떡하라는 것이냐는 자책이었다.


반면에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겨질 때 관객들이 느끼는 것은 원한이다. 30대 초중반의 많은 사람들이 <박하사탕>을 보고 자신의 청춘도 주인공의 그것처럼 불행했다고 느꼈고, 주인공처럼 누군가가 또는 세상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느꼈다. 실제로 그들의 청춘이 그러했느냐와는 별개로 그렇게 느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구역질나는 일이다.


나는 홍상수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이창동보다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이창동이 비범할 만큼 순수한 인물들이나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인물들을 내세워 현재의 이 세계와 삶을 지나치게 비난하거나 부당하게 도덕적 우위를 점해 버린다고 느낀다.



 


영화 속 홍종두나 한공주의 가족들을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런 인물들과 실제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많은 경우에 순수함을 견뎌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모두 그들처럼 사회 부적응자나 장애인이 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또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기차에 뛰어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이창동의 이전의 두 영화들은 나에게는 혐오스러운,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영화였다.



그러나 어쨌든 이 영화의 결말은 전의 두 영화들과는 약간 다르다. 홍종두는 마술로만, 환상으로만 검은 그림자를 지우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사랑이 모욕당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들의 환상이 현실 속에서 가차없이 파괴되는 순간에 그는 실제로 톱을 들고 나뭇가지들을 잘라 버린다.


그 순간부터 환상은, 환상적인 장면들은 필요치 않다. 여자는 휠체어에서 일어설 필요도 없고 일그러진 얼굴을 펼 필요도 없다. 꿈틀꿈틀 청소를 하면서 봄을 준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도 이미 겨울은 지나갔고 그 여자의 모습은 당당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환상이 아닌 견고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속에 나오는 환상적인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이창동은 여전히 리얼리스트이다. 이 결말은 이전 영화들의 결말과는 분명히 다르다. 여기에는 현재의 관객들이 어찌해 볼 여지가 있다. 이전의 두 영화들에서는 자책하거나 원한을 품는 것말고는 사람들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것이 이미 지나가 버린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아시스>의 이야기들은 현재의 이야기이고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것은 긍정적인 변화로 보인다. 물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이전의 두 영화에서 이창동을 작가로서 평가받게 만들어 준 장점이었던 역사적인 감각, 현대사를 파악하는 그 비판적인 감각이 희석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이루려는 것은 욕심이다. 그리고 나는 이창동이 역사를 빌미로 관객들을 자책과 원한에 사로잡히도록 만들기보다는 어떻게든 분투하며 살아가도록 만들기를 바란다.


역사도 영화도 삶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자유소견란 공인 위촉우원
아로나민 골드
(detro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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